점보
- 감독
- 조 비트톡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엠마누엘 베르코, 노에미 메를랑, 샘 로우빅, 바스티앵 부용, 트레이시 도수
코엔 형제의 옴니버스 서부극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018)를 구성하는 6개의 단편은 모든 죽음으로 끝맺는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시신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폭력의 장르의 원조인 서부극에서 죽음과 시신이 등장하는 건 물론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라는 희대의 영화광-유희자이가, 진지함과 심각함도 종종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로 바꿔놓은 당대 최고의 패러디 작가가,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선 갖가지 시각적 언어적 유머를 전시하거나 애틋한 혹은 달콤한 약속을 예비하고도, 끝내 음울한 시신 이미지로 모든 이야기를 닫은 결정이 범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여느 영화를 말할 때처럼, 감독의 세상에 대한 비전이나 서사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카우보이의 노래>의 죽음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코엔 형제처럼 서사적 필연성에 무관심한 감독도 드물다. 그들의 영화에서 하나의 영화적 기호는 대개 다른 영화적 기호를 불러내는 전조로 등장하며, 기호들의 연쇄는 서사적 연쇄라기보다 기표적 연쇄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예측할 수 없이 연쇄하는 기표들의 자유분방한 운동에서, 영화적 기호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겠지만,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서사적 연쇄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에게라면 종잡을 수 없거나 경박하거나 때로 불쾌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재능은 영화적 요소들의 기표적 연쇄로부터 유희적 활력을 이끌어내는 점 자체에 있다기보다, 기표들의 소란스러운 연쇄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편의 영화를 매우 치밀하고 단단한 육체로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코엔 영화를 관람한 뒤, 우리는 대개 한바탕의 놀이 시간을 통과한 것처럼 느끼지만, 돌아보면 그곳엔 무언가 놀이의 퍼포먼스로 환원되지 않는 모종의 견고하고 아득한 실체가 버티고 있다고 간혹 느끼게 된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제목은 물론이고 존 포드 서부극의 아이콘인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첫 에피소드의 첫 장면, 그리고 이어서 말을 타고 등장하는 총잡이 카우보이라는 캐릭터에서 자신이 서부극임을 호들갑스럽게 강조한다. 물론 이 서부는 더 이상 고전기 서부극의 서부가 아니다. 서부극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기괴한 암석봉들이 산재한 이 장소의 형상이 익숙한데도 어딘지 낯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코엔 형제가 우리를 이끌고 온, 이 서부는 어떤 서부인가. 고전기 서부극의 서부를 ‘그 서부’라 칭한다면, 이 서부는 그 서부의 모조이다. 이것은 이 서부가 촬영된 장소가 실제 모뉴먼트 밸리와 비슷하게 꾸며놓은 야외세트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 모뉴먼트 밸리에서 촬영되었다 해도, 이곳은 여전히 야외세트일 뿐이다. < 역마차Stagecoach >(존포드, 1939)에서 처음 등장한 모뉴먼트 밸리의 그 서부는 포드의 서부극에서뿐만 아니라 그때까지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처음 등장한 장소이며, 다른 나라의 관객은 물론 미국 관객들에게조차 완전히 낯선 장소였다. 그 서부에서 촬영된 영화의 서사가 비록 제작 시점보다 수십 년 전 과거의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따라서 당대의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도 현행적 장소로 설정된 건 아니긴 했지만, 그 독특하고 기괴한 장소의 형상이 영화에 최초로 새겨졌다는 점에서 그 장소는 1939년의 장소로서의 물질적 시원성이 있다. 그 서부와 이 서부 사이엔 최초와 그 이후의 시간적 서열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20세기 중후반, 원거리 통신과 교통수단에서 일어난 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곳을 가시화하고 접근 가능한 장소로 만들었다. 낭만적 상상력을 자극했던 저 너머의 장소가 사라진 뒤로, 그 서부도 사라졌다. 이제 모뉴먼트 밸리는 초월적 잠재성을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의 시각장에 갇힌 폐쇄공간이 되었다. 오늘의 서부극의 서부는 켈리 레이차트의 < 믹의 지름길 Meek's cutoff >(켈리 레이차트, 2010)에서처럼 알레고리화된 정신적 공간으로 드러나거나, 코엔의 또 다른 서부극 < 더 브레이브True grit >(2010)에서처럼 확대되고 개방된 무대로 드러나거나 혹은 SF영화의 우주처럼 서부의 가상적 변주공간으로 드러난다. 코엔은 첫 장면에 모뉴먼트 밸리를 등장시키면서 이 서부의 모조성을 위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짓궂은 방식으로 강조한다. 기타 치며 노래하는 카우보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갑자기 기타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점(視點) 숏으로 바뀐다. 또한 카우보이의 노래가 듣는 위치에 따라 소리의 크기와 질감이 바뀌는 청점(聽點) 숏들을 몽타주한다. 이 시점과 청점 숏들은 당연히 특정 인물의 감각에 속할 수 없고(기타 안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객관적 숏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카메라의 존재와 이 장면의 인공성을 장난스럽게 노정하는 장치로밖에 볼 수 없다. 이곳은 지금 갖가지 촬영 장비가 들어서 있는 꾸며진 공간이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일종의 유희적 퍼포먼스가 될 것임을 이 숏들은 암시한다. 서사적 필연성에 무관심한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다. 사건과 사고는 벌어지는 일 자체가 아니라 서사에 맥락화되는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사건은 내적 필연성을 지닌 것으로 새겨져 사건이 벌어지면 결코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사고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이전과 이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건의 서사는 대개 불연속적 선형성으로 나타나며, 사고의 서사는 대개 대체에 의한 연속적인 순환구조 혹은 나선구조로 나타난다. 코엔식 기호놀이의 서사가 요청하는 건 당연하게도 기표들이 필연성에 흡수되지 않고 뛰어놀 수 있는 사고의 서사다. 사고의 우연성과 돌발성은 기표들의 활력의 동력원이 될 것이다. 관객을 노골적 모조의 서부에 초대한 코엔 형제는 고전기 서부극의 소재가 된 진중한 사건들을 돌발적이고 황당한 사고로 전환해 패러디의 난장을 상연한다. 이 난장의 활력과 민첩함 그리고 발작적 반전이 다음 장면을 전혀 예상할 수 없게 만들어,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카우보이의 노래>의 여섯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잠재적 순환구조를 갖고 있다. 1편의 깝죽대던 카우보이 버스터는 또 다른 총잡이와의 결투로 갑작스레 죽는다. 새로운 총잡이 역시 언젠가 그렇게 죽을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피살자의 영혼이 살해자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그들의 동일한 운명을 유머러스하게 암시한다. 2편의 실패한 은행 강도는 교수형 당할뻔하다 살아나지만 황당한 계기로 다시 목을 매달린다. 3편의 팔다리 없는 음유시인은 버림받은 뒤 ‘수학하는 닭’으로 대체되지만 명민한 닭 역시 언젠가 음유시인의 운명이 될 것이다. 음유시인과 닭을 끌고 겨울 들판을 통과하던 늙고 초라한 쇼맨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5편의 젊은 웨건마스터는 한 여인과 맺어져 정착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뻔했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한다. 지나치게 과묵한 늙은 웨건마스터의 젊은 시절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이들의 나선적 순환의 삶의 끝은 모두 죽음이다. 그러니 마지막 에피소드의 좁은 포장마차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고 뽐내던 다섯 인물이 결국 공동묘지와도 같은 호텔 안으로 사라져가는 음울한 결말은 적절한 마침표다. 이 에피소드들에서 죽음은 장대하고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연적 사고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거나, 인물과 서사의 개별성과 관계없이 예정된 죽음이다. 바깥이 사라진 모조 서부는 박제된 유해와 고대의 형상이 보존된 유사박물관과도 같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이 폐쇄된 유사박물관에서 자기 죽음을 소극(笑劇)으로 재상연하는 유령들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이 부르는 묘지의 발라드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톰 웨이츠가 늙은 금 채굴꾼으로 등장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를 잊기 힘들다. 이 에피소드는 예외적이다. 무대는 야트막한 언덕의 나무들과 산에 둘러싸여 있고, 한가운데 냇물이 흐르며 수리부엉이와 사슴과 물고기가 한가롭게 거니는 아름다운 분지다. 노인은 곳곳에 구멍을 파다 마침내 금을 발견한다. 그 순간 비열한 젊은 도둑이 뒤에서 그를 쏘지만, 총알이 급소를 피하는 바람에 반격에 성공해 도둑을 죽인다. 노인은 황금이 나온 구덩이에 젊은 도둑의 시신을 밀어 넣고 유유히 떠난다. 부엉이와 사슴과 물고기도 돌아온다. 여섯 에피소드 중 유일한 승리의 이야기, 축복의 퍼포먼스다. 남다은의 표현대로 “죽음의 기운이 넘실대는 다른 에피소드와 달리... 모든 것들의 생명력을 경애”한다. (『필로』 5호) 이 예외성에는 다른 얼굴도 있는 것 같다. 다른 에피소드의 모조 서부들은 물리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공간만 유일하게 바깥으로부터 구획된 물리적 한정 공간이다. 전자의 서부는 풀 한포기도 드문 황야이지만 이곳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체가 광채를 발하는 풍요의 초원이다. 이곳은 어쩌면 폐쇄된 모조 서부가 잃어버린 바깥의 상상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분지마저 서부의 인간이 침투해 상처 입힌다. 스스로도 상처 입었지만, 노인은 살아서 이 공간을 떠난다. 그가 떠나자 곧바로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돌아왔으므로 노인의 채굴과 획득과 살인은 이 아름다운 공간의 균형을 훼손하지 않는, 사건 아닌 사고일 뿐인가. 하지만, 노인과 함께 금을 향한 욕망도 살아나갔다. 그 탐욕은 앞으로도 또 다른 자연의 성지를 파헤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사한 에피소드는 어쩌면 가장 불길한 예기인가. 물론 코엔은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묘지 가운데 핀 꽃의 위안 혹은 위안을 가장한 묵시록. 코엔의 유희는 즐겁지만 은밀하게 우리를 흔든다.
< 두고 온 산하 >의 영화적 성격은 그 시작과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무명 용사를 위한 영화”임을 밝히는 자막에서부터 분명히 제시된다. 물론 이 작품을 연출한 이강천 이 빨치산에게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 피아골 >(1955)의 감독이었다는 점에서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두고 온 산하>의 제작자가 ‘국방부 정훈국’이라는 점은 그 기대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피아골>은 반공영화의 극단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다 해도, 그렇다고 반공영화의 전형성에서 온전히 탈피한 작품은 아니었다. <두고 온 산하> 역시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적 한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화에 가깝다. <두고 온 산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된 석빈( 김진규 )이 소련이 지배하는 북한 사회와 갈등을 겪다 남한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석빈과 소련군 장교 시렌코프( 김승호 )의 딸 쏘냐( 모니카 유 )의 러브스토리와 석빈을 사모하지만 러시아 통역관으로 일하며 소련군에 몸을 바쳐야 하는 정숙( 김지미 )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멜로드라마적인 감정을 영화에 불어넣는다. <두고 온 산하>가 <피아골>에 비해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 고발적인 태도를 심도 깊은 영상 속에 구현한 리얼리즘적인 양식 속에 멜로드라마, 모험 및 전쟁 영화 등의 다양한 장르적 테크닉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이강천의 연출 스타일이다. 석빈과 쏘냐가 데이트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또한 석빈이 감옥에서 탈출한 영화 중반부 이후 벌이는 도망과 추적의 시퀀스는 이강천이 할리우드식의 액션 장르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즉, <두고 온 산하>는 전체적으로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할리우드의 다양한 장르의 관습을 연출 스타일로 끌어들이며 극적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도 <두고 온 산하>가 리얼리즘 영화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시 북한의 실상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보다는 당대의 열악한 제작 여건을 (어쩔 수 없이) 리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물론 거함과 꽤 많은 단역을 동원한 흥남부두 철수 장면만 놓고 본다면 ‘국방부 정훈국’이 제작한 영화다운 스케일을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김승호와 일련의 한국 연기자들이 모형으로 만든 큰 코를 얼굴에 붙여 러시아인인 척 연기하는 모습이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등 여러 영화적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고 온 산하>는 당대의 영화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제작 여건의 한계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자리한다. 이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연출은 한국 전쟁 당시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극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 종반부의 장면들이다. 사운드 없이 특히 화면만 남은 다큐멘터리 영상에 후시로 녹음된 사운드를 입혀 영화적 허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연출은, ‘규모의 스펙터클’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당시 영화인들의 악전고투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두고 온 산하>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서구(또는 근대)에 대한 당대의 분열적 태도가 러시아의 묘사 속에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방식이다. <두고 온 산하>는 남한 사회의 체제적 우월성을 굳이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억압적 사회 체계의 부정적 면모를 부각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로서의 남한 사회를 자연스럽게 이상화, 합리화하는 쪽에 가깝다. 북한과 남한의 극단적 비교는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정적 화법’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다. <두고 온 산하>는 석빈과 쏘냐의 로맨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정숙의 비정숙한 삶의 태도를 반복적으로 대조한다. 러시아군에게 강간을 당했던 정숙은 오히려 러시아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어 그들을 몸으로 유혹하며 살아가는 여성이다. 즉, 정숙은 러시아적 삶의 태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타락한 여성인 셈이다(영화 후반부에 정숙의 이러한 태도가 위장이었고, 그녀의 진심은 전혀 달랐음이 드러난다). 그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 장교의 딸 쏘냐는 자유와 순수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석빈과 쏘냐의 연애 장면이 할리우드 청춘영화에 영향을 받은 동경의 대상으로서 자유로운 이상적 사회의 구현처럼 보인다면, 러시아적 삶에 익숙해진 정숙이 북한군 장교를 유혹하는 등의 장면 등은 전형적인 타락한 여성/서구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는 서구에 대한 우리의 양가적이고 분열적 태도, 그러니까 서구에 대한 동경과 불안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고 온 산하>가 그려낸 북한의 이미지는 서구에 대한 남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 즉 ‘우리 안의 타자’를 투영한 결과다. 이러한 면에서 <두고 온 산하>는 우리가 북한의 이미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대상은 결국 우리 안의 타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두고온 산하> VOD 보러가기 →
영화와 자동차에 관해 글을 써보겠다고 달려들긴 했는데 우습게도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다소 황당한 무면허(?) 칼럼 연재를 감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방에 뒹굴고 있는 수백 대의 자동차 모형 장난감 때문이다. < 고스트버스터즈 > < 배트맨 > < 빽 투 더 퓨처 > 등의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을 나이 들어 다시 보면서 그 영화의 감동을 소유(?)할 수 있는 캐릭터 피규어나 장난감 구매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모형 자동차 역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영화 굿즈의 품목 중 하나였다. ‘배트모빌’이나 ‘엑토-1’, ‘범블비’ 같은 가상의 자동차들을 보며 모형을 구매할 생각만 했지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아무튼 < 007 >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몰던 ‘애스턴 마틴 DB-5’나 < 분노의 질주 > 시리즈에 등장하는 브라이언(폴 워커)의 분신 같은 ‘토요타 수프라’ 등의 실제 자동차 모형을 구매하려면 적어도 제조사와 모델명은 알고 있어야 했다. 나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상의 캐릭터 자동차를 제외하고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실제 자동차 가운데 가장 먼저 장난감 모형을 찾아보기 시작한 모델은 1968년 작 < 블리트 >의 포드 머스탱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이 연출하고 스티브 맥퀸이 출연한 이 영화를 보자마자 배우뿐만 아니라 그가 몰았던 자동차에도 푹 빠져들었다. 해외 쇼핑몰을 뒤져 장난감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차가 영화 제작연도 즈음에 포드사에서 만든 머스탱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967~8년형 머스탱은 뒷좌석 천장이 짧고 경사져 있는 ‘쿠페’식인데 전체적으로는 날렵한 디자인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묵직하고 위협적으로 생겼다. 차체의 전면은 보닛과 범퍼에 잘못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신체 일부분이 뜯겨져 나갈 것 같은 위압감이 흐른다. ‘패스트백’ 형태의 뒤꽁무니에서 부다다다 울리는 시끄러운 배기음은 마치 제멋대로 사건을 추적하는 영화 속 주인공 형사 프랭크 블리트(스티브 맥퀸)의 성격이나 태도와 닮아 보였다. 혹시 류승완 감독의 영화 < 베테랑 >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이 조태오( 유아인 )가 ‘포드 머스탱 GT’라는 차를 모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던 걸 기억하시는가? 영화의 설정상 조태오 정도의 재력가라면 초고가의 스포츠카 ‘맥라렌’이나 ‘부가티’ 정도의 차는 타고 다닐 것 같은데 왜 상대적으로 저렴한 머스탱을 썼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에 두 가지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예산 문제 때문에 비싼 차를 섭외할 수 없었던 탓이 크고, 두 번째는 피터 예이츠 감독의 <블리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극 중 스티브 맥퀸이 몰았던 자동차와 같은 차로 선택하고 싶었다고. 류승완 감독다운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또 이야기하도록 하자. < 블리트 >의 1968년형 포드 머스탱, 스티브 맥퀸 피터 예이츠 감독의 < 블리트 >는 카체이스 영화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영화다. 카체이스가 이 영화의 주요 소재는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카체이스 촬영과 편집, 거기에 스피드광이었던 스티브 맥퀸이 만나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요즘 관객들은 < 분노의 질주 > 시리즈 같은 영화에 나올법한 멋진 할리우드식 카체이스 장면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영화들의 카체이스 장면은 화려하긴 하지만 <블리트>처럼 거칠고 과감한 박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 제이슨 본 >(2016)에서 본(맷 데이먼)을 뒤쫓던 킬러(뱅상 카셀)가 탱크에 가까운 거대한 차량을 이끌고 라스베이거스 도로를 질주하며 엄청난 양의 차량을 산산 조각내는 장면이 있다. 엄청난 물량 공세에 감탄이 나올 법도 한데 별 맥락도 없이 액션에 힘을 주니 아무런 박력이 느껴지지 않은 실패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단지 많은 수의 차가 부서지는 것만이 카체이스 액션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카체이스 장면의 생명은 화려함보다는 박력이고 그 박력의 대부분은 어떤 차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블리트>는 카체이스 영화, 더 깊게는 머슬카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머슬카는 8기통(VB) 엔진과 같은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고성능 자동차를 일컫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하던 경주에 적합한 고성능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 모델로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의 유럽형 슈퍼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머슬카는 가격 면에서 대중적인 차는 아니었다. 당시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사의 부사장이었던 아이아코카는 1960년대 초에 미국 자동차 시장 경제를 주도하던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해서 ‘포드 팔콘’이란 차를 새로운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당시 급변했던 소비자 구미에 맞는 차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는데 그 차가 바로 포드 머스탱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전투기 ‘P-51 머스탱’의 이름과 야생마라는 의미가 담긴 로고를 박고 등장한 포드 머스탱은 1964년 첫 모델을 본격적으로 출시한다. 웬만한 자동차 애호가는 다 알만한 개념이겠지만, 포니카라는 용어가 있다.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머슬카 즉 작은 차체에도 고성능 배기량을 가진 차를 뜻하는데 포드 머스탱은 시장 변화를 제대로 내다본 아이아코카가 만들어낸 작은 머슬카, 포니카였다. 이른바 ‘포니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블리트 >에 등장하는 1968년형 포드 머스탱은 여러 머스탱 시리즈 중에서 성능보다는 디자인을 중요시했던 머스탱 라인의 초창기 1세대 모델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은 머스탱의 매력을 영화에 담기 위해서 10분이 넘는 카체이스 장면에 엔진과 타이어 소리 외에는 어떤 음악도 삽입하지 않았다. 당시로써는 무모한 카체이싱 장면에 도전한 것인데 일단 이 장면 자체가 대본에도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대본의 도시 배경은 로스앤젤레스였으나 갑자기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로 바뀌면서 주택가 언덕 추격 장면을 찍을 여건이 마련된 것. 예이츠 감독은 또 스티브 맥퀸이 평소 ‘과속 촬영(운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촬영을 밀어붙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티브 맥퀸의 모든 운전 장면은 배우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그는 예전부터 운전할 때는 대역을 쓰지 않는다는 연기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고로 극 중 블리트 형사(스티브 맥퀸)의 머스탱과 경쟁하듯 질주하다 전소되고 마는 ‘닷지 차저’를 운전한 배우는 빌 힉맨이란 사람인데 그는 당시 카체이스 전문 스턴트맨이기도 했다. 스티브 맥퀸과 함께 빌 힉맨의 멋진 스턴트 주행이 없었다면 <블리트>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 블리트 >의 카체이싱 당시에는 또 이런 카체이싱 촬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소 대여 관계로 2주라는 짧은 촬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이츠 감독은 이 기간 안에 10여 분 넘는 장면을 모두 찍어야 했기 때문에 두 대의 카메라를 뻗쳐놓고 찍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때 현장에서 맥퀸이 탄 머스탱이 언덕 위에서 질주하며 내려오다가 사거리 코너에 설치해놓은 카메라와 부딪쳐 카메라가 박살이 나기도 했는데 해당 장면은 영화에 그대로 삽입됐다. 카메라와 부딪친 이후에 이어서 멈춘 차를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맥퀸이 후진을 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후방을 살핀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맥퀸이 현장에서 촬영을 구경하는 일반인들에게 차를 운전하는 배우가 자신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라는 거다. 스티브 맥퀸의 여유롭고 허세 섞인 열연에 힘입어 포드 머스탱은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서 카체이싱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데 일조했다. 영화 매체를 통해 미디어 마케팅의 재미를 톡톡히 보게 된 포드사는 바로 이어서 애스턴 마틴 DB5를 상징적으로 몰던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에게도 포드 머스탱을 안겨준다. 1971년 작 <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는 악당 블로펠드(찰스 그레이)가 다이아몬드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잠입해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이야기다. 제임스 본드는 영화의 주요 배경인 라스베이거스에서 본드걸 티파니(질 세인트 존)가 몰던 차를 대신 몰고 다니는데 이 차가 바로 새빨간 색상의 ‘머스탱 마하1’이다. 이 모델은 기존 68년형 머스탱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모델이다. 극 중 본드가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옆으로 세워서는 두 바퀴로 달리는 곡예를 선사하는 명장면도 탄생시켰다.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배우 신성일은 국내 수입차 1세대인데 그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리무진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릴 때 탔던 수입차가 인디언 레드 컬러의 ‘머스탱 마하1’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식스티 세컨드>의 쉘비 GT 500 1960년대 후반 머스탱을 만들어 1년 사이에 60만대가 넘는 차를 팔아 치웠던 포드사는 당시 1세대 모델보다 성능이 더 좋은 스포츠카 형태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유명 레이서였던 캐럴 쉘비와 협업해서 제품 개발을 진행했다. 이때 1세대 모델에는 없던 8기통(V8) 엔진을 튜닝해서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쉘비 GT350’, ‘코브라 G.T.500’ 등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스포츠카 절도단 이야기를 다룬 액션 영화 < 식스티 세컨드 >는 전설적인 머슬카 ‘쉘비 GT 500’을 스포츠카의 끝판왕처럼 묘사한다. 영화 내내 유럽산 슈퍼카들이 쏟아지듯 등장하지만 주인공인 절도단들은 ‘쉘비 GT 500’을 훔치는 것을 자신들의 최종 목표라고 말한다. 미국산 머슬카의 아름다움 혹은 위대함을 널리 알릴 목적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고 해야 할까. 조지 밀러 감독의 1973년 작 < 매드맥스 >는 또 어떤가. 주인공 맥스(멜 깁슨)의 차는 머슬카의 상징과도 같은 고성능을 탑재한 ‘8기통(V8) 인터셉터’로, 1970년대 초반에 개발된 ‘팔콘 XB GT 쿠페 1973‘가 실제 모델이다. 황량한 허허벌판 대륙을 질주하며 횡단하기에 더할 나의 없이 좋은 성능을 지닌 차들이다. 또 1969년에는 포드사가 머스탱을 업그레이드한 ‘보스’라는 제품을 출시해 모터스포츠 계에서 활약하는데 이 모델은 ‘보스 302’, ‘보스 429’ 등의 모델로 나뉘어 제작된다. 특히 보스 429 엔진은 표기된 출력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유명해졌다. 왠지 이름이 낯익은 모델이라고?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 존윅 >에서 동네 건달들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해준 차가 바로 존 윅이 애지중지하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다. < 존윅 >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 포드 머스탱으로 대표되는 미국산 포니카는 천둥소리 같은 배기음을 쏟아내는 8기통의 박력이 다른 모든 자질구레한 성능의 장단점을 잊게 만든다. 사실 이 머스탱은 한국 실정에 비추어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차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연비를 자랑하는 통에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베테랑 >의 조태오는 왜 포드 머스탱을 몰았을까? 머슬카 특유의 가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동 한복판 8차선 도로를 꽉 막은 차들 사이로 육중한 차체를 들이밀며 홍해 가르듯 부수고 지나갈 수 있는 힘 좋은 자동차로 포드 머스탱만 한 차가 또 있을까? 설정상 조태오가 벤츠나 아우디를 몰았다면 재벌의 리얼리티 정도는 살려줬을지라도 후반부 명동 카체이스 장면에서의 머스탱 전용 박력은 사라져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 베테랑 >의 포드 머스탱 GT, 조태오 최근에 포드 머스탱과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공개됐다. 얼마 전 포드사가 전 세계 기자들을 말리부 해안가로 불러모아 2018년형 신모델의 시승식을 가졌는데 이때 많은 기자들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8기통 5.0L의 가솔린 엔진에 회전 한계를 7500rpm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엔진 성능 때문이 아니라 머스탱 역사상 최초로 반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고. 포드사는 긴급제동 보조 시스템(ASBS), 차선이탈 경고시스템(LDWS),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LKAS) 등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을 중시한 모델임을 강조했다. 물론 세계적인 흐름을 따른 당연한 결과이자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머스탱 정신’과는 조금 다른 행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소식은 지구에서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던 < 블리트 >의 실제 촬영모델 머스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다. <블리트>에서 스티브 맥퀸이 직접 몰았던 차량 소품 머스탱은 총 2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대는 개인 소유 차량이고, 나머지 한 대는 자취를 감춘 채 사라져버려 찾을 수 없었다. 스티브 맥퀸이 죽기 직전까지 평생 동안 이 차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연은 자동차 애호가 사이에서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발견된 < 블리트 >의 머스탱(기사 보기) 그런데 최근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주의 어느 폐차장에서 자동차 커스텀이나 복구를 취미로 즐기던 두 남자가 녹슬어 폐차된 머스탱 잔해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 잔해를 가지고 < 식스티 세컨드 >의 쉘비 GT 500으로 커스텀 제작을 하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들이 남아있던 원본 부품을 포드사에 문의한 결과, 이 망가진 차의 잔해가 실제 < 블리트 > 촬영에 썼던 머스탱임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식스티 세컨드> 대신 <블리트>에 등장했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차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최신식 머스탱 모델의 변화 소식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 유물 머스탱의 발굴 소식이 기가 막히게 대비된다. 이제 포드 머스탱은 8기통 엔진을 마음껏 돌려도 석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던 호황기의 유물로서 DVD와 장난감 모형 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지만 그 끝내주는 ‘가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장난감을 사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어 못 사지, 가오가 없어 못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