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 감독
- 서세원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하연주, 박무영, 김현기, 이수근, 정지윤, 남희석, 정선희, 박해진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해당 칼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바트로스라는 바닷새가 있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는 조류 중 제일 큰 새로 꼽힌다. 알바트로스는 날개짓을 하기 보단 상승과 하강기류를 활용해 바람을 타며 이동하기 때문에 하루에 천 킬로미터도 거뜬히 난다고 한다. 그러나 유려한 비상과 활강을 가능하게 하는 큰 날개는 땅에서는 균형감을 잃고 걷기 힘들게 한다. 이 때문에 땅 위에서 날개를 꾸깃꾸깃 우겨넣고 뒤뚱뒤뚱 걷거나 엎어지며 슬랩스틱을 보여주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 딱따구리(The Woody Woodpecker Show) >(1957) 같은 고전 애니메이션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다. <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의 주인공들은 알바트로스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불사한 사랑은 가능하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상은 심각하게 거추장스럽거나 불가능한 것이 된다. 심지어 그들의 살아있음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욕과 혐오로 점철되고 죽음은 필연이 된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 증명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고 오프닝과 엔딩을 통해 수미상관을 이루는, 카메라가 활강하는 씬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과 불가능한 세속적인 삶을 은유한다. 오프닝 장면은 구불구불한 협곡을 따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을 보여준다. 특정 인물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등장하진 않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협곡을 따르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멋진 자연풍경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관찰자적 시점이 아닌 실제로 공중에서 활강하고 있는 누군가의 신체적 움직임이자 주관적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그들이) 누구인지의 궁금증은 엔딩에 가서야 해소된다. 영화는 촬영기법을 통해 주인공들의 운명을 오프닝에 예정하면서도 엔딩에서야 명확한 답을 주며 관객을 몰입시키는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를 구현한다. <번지 점프를 하다>(이하 <번지>)는 2001년 개봉한 영화로, 당시 한국영화는 < 접속 >(장윤현, 1997), < 미술관 옆 동물원 >(이정향, 1998), < 정사 >(이재용, 1998) 등 격정적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를 덜어내고 세련된 영상미와 독특한 관계성을 가진 로맨스 영화들이 부상하던 때였다. <번지> 역시 그러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번지>는 앞에서 기술한 오프닝과 엔딩의 유려한 헬기 씬,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적재적소의 음악사용, 해변의 저녁노을을 이용한 그림자 연출 뿐 아니라 운명적인 필멸의 사랑을 설득해 내기 위해 환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두 파트로 서사를 나눠 미스터리적 구조를 취하며 관객들이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했다. 영화는 1983년의 1부와 2000년의 2부로 나눠진다. 82학번 국문과인 인우( 이병헌 )는 같은 학번 조소학과인 태희( 이은주 )를 ‘우연히’ 마주치고 첫 눈에 반한다.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태희가 인우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어 버스 정류장까지 바라다 달라고 하고 인우는 태희를 사랑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이후 다른 정보들이 추가되며 재해석된다. 관객들은 태희와 같은 과 친구의 대화에서 비오는 날 태희가 먼저 인우에게 호감을 갖고 우산이 없는 척하며 다가갔다는 진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한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각본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한다. 1부가 인우의 입영일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태희가 죽으면서 급작스럽게 끝나고, 2부는 17년이 지난 2000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국어교사가 된 인우는 고2 담임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학생 중 하나인 현빈( 여현수 )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18세 남자 아이임에도 현빈은 태희를 연상시킨다. 무언가를 들 때 새끼손가락을 펼치는 버릇,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왜 숟가락은 디귿 받침이냐”는 질문,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좋아하는 것, 심지어 태희가 인우에게 선물로 줬던 라이터를 갖고 있는 것까지 태희와 같다. 영화는 1부의 태희와 2부의 현빈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들을 흩뿌려 놓으며 관객들이 인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도록 유도한다. 인우의 현빈을 향한 감정은 모두가 알아차릴 정도로 커져가고 결국 인우는 동성애자라 비난받으며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후 전생이라 할 수 있는 태희의 기억을 떠올린 현빈이 인우를 찾고 둘은 1983년 약속했던 번지점프를 하러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리고 줄 없이 뛰어내린다. 인우와 태희, 현빈과 인우 로맨스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이다. 사적 사랑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랑은 더 강해지고 진정성을 얻으며 영원한 운명이 된다. 그렇기에 방해하는 대상은 대부분 개인의 힘으로 바꾸거나 해결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것이 된다. 1부가 그러한 방해물을 죽음으로 두었다면, 2부는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를 배치한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인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로맨스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방해 대상이다. 매우 규범적인, 반대할 여지가 없는 대학생 간의 이성애 연애가 방해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죽음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편 2부의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선택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성소수자들이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가시화되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 운동은 시민권 운동의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배우 하리수 가 2001년 도도 화장품 CF 모델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트랜스젠더임을 밝혔고, 배우 홍석천 은 2000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했다. 성소수자의 가시화는 대중적 인지를 가져오고 그에 따른 혐오와 차별도 두드러졌다. 특히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 다큐멘터리 <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 >(이영, 2007) 같은 영화들은 학교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차별을 그려내며 당대의 변화를 포착했다. <번지>는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2부에서 동성애를 사랑의 방해물로 그린다. 학생과 교사, 미성년과 성년이라는 강력한 방해대상이 있지만 이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금기는 단연 동성애다. 로맨스에선 개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 그 자체만큼이나 개인들이 그 억압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번지>의 주인공들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가 아닌, 동성애 자체를 부정적 방해물이자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인우와 현빈 모두 자신이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려 애쓴다. 영화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반복한다. 인우는 정신병원에서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검사를 받고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의사의 (의문스러운) 진단을 받을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아내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려 한다. 현빈은 인우를 만나기 전만 해도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평범한 이성애자 십대 남자 아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현빈은 호감을 갖고 있던 혜주( 홍수현 )에게 의도적으로 속옷이나 누드화를 선물하며 성희롱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즉 인우와 현빈 모두 성적 정체성에 있어 ‘문제없는’ 이들이었음이 강조된다. 혜주와 현빈 이 에피소드들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적인데 하나는 이성애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 대부분 성적 폭력에 기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사랑보다 동성애 부인에 무게 중심이 간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계속 강조하는 건 인우가 현빈을 태희로 느끼고 운명적 사랑을 재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우와 태희는 어떤 성별로 태어나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며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서사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인우와 현빈이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어떤 성별로 전환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1부의 태도와 달리 2부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즉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넘어선 사랑보다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둘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즉 태희가 환생해서까지 재회하고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이것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죽음도 뛰어 넘은 둘은, 동성애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은 뉴질랜드로 가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장면 없이 주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이후 오프닝의 활강 씬이 반복된다. 인우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을 읊조린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내레이션에 따르면 그들은 사회가 용인하고 당사자들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는 규범적인 이성애 커플로 당첨될 때까지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계속 죽고 환생해야 한다. 확률 게임처럼 말이다. 엔딩 카메라의 “끝이 없는 활강(반복된 죽음과 환생)”은 착륙지로 내정된 이성애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하는 동성애자들의 운명이 된다. 이 카메라의 활강은 그 자체로 당대 퀴어 스크린의 일면이 된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얼어붙은 땅에 비가 내려 곤죽이 된 진흙탕을 밟고 걸어가는 사내가 있다. 사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깊게 파인 발자국이 남고, 그가 신은 구두는 진흙탕이 집어삼킨다. 사내는 진흙탕에 빠진 구두를 양손에 들고 진흙 범벅이 된 양말 차림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을 걷는다. 살을 에는 비바람에 사내는 손에 쥔 구두를 들어 귀마개를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짓을 하며 계속 걷는다. 그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을 추적하는 형사 오병호( 하명중 )다. 앞으로 그가 사건을 조사하며 듣는 말들은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오병호가 살인사건 용의자들의 자취를 찾아가면서 감추어졌던 진상이 드러나는데, 살해된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이었고, 살인 사건의 범죄 용의자들이 커다란 슬픔을 지닌 피해자들이란 것이다. 살해당한 자들이 저지른 끔찍한 죄악이 드러나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지리산 공비, 토벌대, 빨갱이, 학살이란 이름의 악령들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범인을 잡으려 하는 오병호 형사의 앞길을 막고 있다. 하드보일드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 가는 태도대로 오병호 형사는 수사를 하면서 수많은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 대부분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이방인을 경계의 눈초리로 꼬나보고 투박하고 무뚝뚝하게 처신하는 70년대의 대한민국 남성들이다. 젓가락 장단과 작부의 처량한 노랫소리가 가득한 술집 골목을 들어서는 오병호. 그는 추위도 피하고 목도 축일 겸 초라한 술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주전자를 시켜 놓고 난롯가에 앉아 늙은 술집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늙은 술집 여주인의 푸념과 넋두리가 시작되고, 오병호가 지역 사정을 청취하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좁은 술집의 골방 창호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있던 중년의 사내가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서슬이 시퍼렇게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여주인의 말을 막는다. 늙은 여주인의 아들인 사내는 처음 본 낯선 남자에게 신세타령하며 자신이 사는 지역의 사정을 말하려는 어머니가 못마땅하여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머니가 술을 팔아 번 쥐꼬리만 한 푼돈을 빼앗아 밤이 되면 도박을 하거나 여자를 찾아가는 자일 것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해질녘, 마당에서 펌프질을 하며 저녁 찬거리를 씻는 늙은 여자에게 다가가 탐문을 하는 오병호. 늙은 여자가 꽁꽁 언 손을 비비며 형사의 물음에 답하려 하자, 사랑방 문이 벌컥 열리며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던 사내가 험상궂은 얼굴을 내밀며 이방인과 대화를 하려는 늙은 여자의 입을 막는다. 우리 마을의 사정을 타지에서 온 사람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강원도의 깊은 산골 외딴집. 굽은 허리로 산에서 나무장작을 해 지게에 지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마당으로 들어선 할머니에게 오병호가 다가가 말을 걸자 이번에도 골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젊은 청년이 낯선 이방인과 이야기를 하려는 할머니의 입을 막는다. 청년은 무릎 아래가 잘려져 나간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이다. 형사가 찾아가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방인을 경계하고 자기 마을의 사정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하고, 늙은 어미와 늙은 아내를 겨울바람 속에서 일하게 하고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누워 하루를 까먹으며 무위도식하는 자들이다. 형사가 만난 남자 중에서 일을 하는 자들은 비바람이 부는 외딴곳의 창고에 숨어서 온몸에 돼지 피를 묻히고 밀도살을 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며 책임 전가를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공무원들이다. 영화 속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순리대로 살아 보려고 한 남자들은 힘이 세고 교활한 남자들에 의해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로 가거나 죽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루하고 포악하게 변해버린 한국 남성들의 폭력적인 어두운 모습이 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 영화에서 한국 남성들의 비루한 모습이 이토록 예리하게 담긴 영화는 < 최후의 증인 >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협잡과 권모술수, 배신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한 짓이고 남들도 다 그렇게 했다’는 더러운 변명을 방패로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남의 것을 강탈하여 치부한 양달수( 이대근 )가 그의 아내와 딸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서 살아남고 성공한 한국남자들이란 어떤 존재인가가 예리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양달수의 양조장 마당 신이다. 양달수는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의 완장을 차고 온갖 더러운 짓을 벌이고, 양조장을 강탈하여 치부해 남부러울 것이 없는 몸이다. 최고급 한산모시로 만든 옷을 입고 입에 곰방대를 문 양달수가 양조장 마당에 서 있다. 토벌대장 시절의 초라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지역 최고의 부자이자 유지가 되어 한눈에도 부자 티가 줄줄 흐른다. 학교 수업을 마친 양달수의 딸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하얀 여름 교복을 입은 그녀는 활기차고 싱그럽다. 부자 아버지와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예쁜 딸.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인사가 오가고, 딸은 부엌에서 나오는 어머니에게 반갑게 달려가는데, 양달수와 마주친 어머니( 정윤희 )는 그와 마주치자 딸의 인사에 제대로 대구를 안 하고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 황급히 방안으로 도망친다. 그 모습은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혐오가 가득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피해 사라져 버린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양달수는 “또 그런다. 쌀쌀맞게”라며 무안함을 얼버무리려는 듯 말한다. 어머니 손지혜(정윤희)는 양달수를 비롯한 악당들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강탈당한 여자다. 그녀는 악당 양달수에게 결혼이란 이름으로 납치되어 눈과 입을 닫고 포로로 살아왔던 것이다. 양달수는 그녀가 왜 자신을 벌레 보듯 피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양달수는 자신과 그의 일당들이 그녀에게 저지른 사악한 죄를 성공을 위해 일하다 생긴 당연한 사건이었다고 깊숙하게 묻어 두고는, 그녀가 남편인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벌레 보듯 하는 것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할 수 있다는 듯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여성에게 죄를 지은 남성이 그 죄를 애써 외면하는 장치로 허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납치된 어머니와 악당 아버지 밑에서 사는 딸은 발랄함과 쾌활함으로 끔찍한 가족사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역부족이었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손지혜와 황바우( 최불암 ) 사이에 난 아들 역시 부모들에게 죄를 저지른 악당들의 죄를 응징하려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악업은 대를 물리며 자식들까지 파멸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최후의 증인>은 추악한 죄를 애써 덮으려 했지만 덮어 놓은 흙 밖으로 비어져 나온 진상이 드러나면서 벌어지는 비극의 하드보일드이다. 라스트, 감당 못 할 진상의 무게에 못 견디고 총구를 입에 쑤셔 박는 주인공의 최후까지 이 영화는 한눈을 팔지 않고 죄의 근원을 따라 족적을 찍으며 간다. 1970년대 말, 살을 에는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왕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최후의 증인>은 1980년에 집권한 신군부의 검열관들이 훼손하고 조롱하며 흙더미로 덮어버렸지만 추악한 흙더미를 뚫고 20여 년 만에 부활한다. 어쩌면 이렇게 영화의 내용과 영화의 운명이 일치하는지.
흔한 TV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의 단체 스태프 사진. 이들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포부 또한 거대하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애니메이션 만듭니다” “네?” “아.. 만화영화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아~ 그래요? 우리 애들도 만화 좋아하는데”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건, 아니면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든, 대화에서 어쩌다 직업을 말하게 되면 백중팔구는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끝난다.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만화. 그렇다. 나는 (사실 원고 작성하면서 개인적으로 ‘나는’과 같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것도 TV 시리즈,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말하자면 현재까지 두 시즌 정도 방영을 하였고, 차기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한국의 대표하는 유명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소박한(?) 스튜디오에서 작은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실제로 몇몇 큰 스튜디오를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제작·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들의 제작사는 모두 작고 소박한 회사들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시장에서 만들어지고 있거나 기획되고 있는 작품들의 내부 과정을 조금씩 정도는 귀동냥으로 듣거나, 실제로 직접 보는 경우가 많다. 재밌는 상황도 있고, 즐거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많으면서도 제작 중에 생기는 우여곡절, 기획 마케팅 과정에서의 절망과 환희 등도 있다. 많은 작품들이 ‘애’들만 보는 ‘만화’영화 정도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또는 실제로 그렇게 기획되기도 하였지만, 원대한 꿈으로 시작했던 작품들도 많다. 이 글은 한국의 작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TV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연작의 첫 번째 시작 글이 될 것 같다. 워낙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이 있어서 이 모든 이야기를 담기엔 지면과 내 의지가 좁고 얕아 한계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뭐 ‘최선을 다하면 우주가 도와줄 것’이라 믿고, 시작해 보자. 작품의 기획은 가장 즐거운 과정이면서도, 험난한 여정이다. 작품의 얼개를 정하고, 각각의 아트팀에서 (반드시 이렇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임의로 작품을 직접 만드는 여러 팀을 아트팀으로 하고, 프로듀서, 행정, 마케팅 담당을 임의로 기획팀으로 부르겠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생각을 던지는 그 과정은 정말로 즐거운 과정이다. 하지만 점점 작품의 색이 정해지고 설정의 경계가 명확해질수록 여러 험난한 과정이 시작된다. 보통 기획과정에서는 작품의 콘셉트, 메인 스토리, 캐릭터, 배경 등을 설정하는데, 보통 프로듀서와 총감독, 시나리오 작가, 디자이너가 참여하여 회의를 통해서 진행된다고 알려져 있다. 뭐 사실 기획의 시작에 대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본격적인 기획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예의 언급한 거의 모든 아트팀들이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TV용 애니메이션의 최초 아이디어는 회사의 대표 또는 사장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지점이 많다. 투자 때문이다. 회사의 규모가 크고 돈이 많은 회사라면 제작비에 대한 걱정 없이 어떻게 해보겠지만, 뭐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투자가 되지 않으면 인건비가 생기지 않으니 작품 제작이 되겠는가? 험난한 기획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국내에서 TV용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는 기관은 일반적으로 국내 방송사, 투자사, 각종 펀드와 관의 지원 사업 등등이 있는데, 거의 모든 제작비가 이러한 투자금들이 모여서 구성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투자사는 결국 투자한 만큼 돌려받든지, 아니면 그 이상의 수익을 발생시켜야 한다는 점인데, 국내에서의 방영만을 통해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영료 산정방식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다시 말해 애니메이션 자체로만 가지고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회사가 별의별 사업 기획을 해서 외주를 주든지, 아니면 직접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캐릭터를 이용한 머천다이징이나(젓가락부터 핸드폰 껍데기까지), 교육용 출판 사업, 봉제 인형, 완구, 심지어는 어린이 뮤지컬 제작, 키즈카페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사업을 무지막지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보통 TV 시리즈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한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15분 포맷에 26부작 정도로 볼 수 있다. 총 제작비는 보통 적게는 10억부터 많게는 25억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냥 한 15억 정도로만 보고,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3억, 투자사가 7억, 방송사가 5억 정도를 투자했다고 치자. 이때 제작사는 돈이 없으니 국가 지원사업에서 지원을 받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대출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제작사의 경우는 전체 제작비 15억 에서 투자 비율이 20%밖에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품 관련된 전체 수익의 20%만 수익으로 돌려받는다. 그마저도 계약에 따라서는 투자사 선리쿱 이후 제작사 지분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수익을 더욱 내야 하는 상황이고, 투자사도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는 성공모델을 갖춘 작품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내 TV용 애니메이션 시장이 ‘키즈’+‘변신완구’+‘교육’이라는 공식이 구성된 것에는 이러한 수익구조와 투자 방식에서부터 기인한다. 작품의 기획 초기 아트팀의 즐거운 기획이 점점 시간이 갈수록 먹구름이 끼게 되는 것은 “그러면 투자받기 힘들다”라는 애니메이션 제작 내부의 자기 검열부터인 것이다. 그마저도 없으면 투자는 없고, 제작사는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길고 긴 보릿고개가 시작된다. 그래서 보통 국내 TV용 애니메이션의 주된 타깃은 3~5세, 5~7세에 치중된다. 물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내 완구시장의 메인 고객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완구 판매는 매년 5월과 12월이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완구 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어느 정도 홍보 효과와 노출 시기, 방송 시기를 예를 기준으로 기획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황과 연결해서, 디자인이 정해질 경우에도 남아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변신 장난감, 경찰차, 공룡이라는 일반적인 완구 공식에 컬러는 블루와 레드가 안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일반적인 큰 틀을 형성하고 있고 이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여아의 경우는 그렇게 다양하진 않지만, 동물을 기본으로 디자인된 봉제인형과 전통적인 바비 스타일의 인형을 기반으로, 컬러는 핑크와 옐로우 등으로 구성된다. 한때 < 겨울왕국 > 때문에 여아 시장에서의 핑크파워가 블루에 다소 밀리는 듯했으나, 최근 다시 전통의 핑크가 유지되는 형세다. 최근에는 유아용 애니메이션과 완구라는 조합에 의해 기획 초기부터 완구회사가 함께 참여하여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보통 완구 시장의 경향과 디자인에 대한 조언들을 함께 주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사와는 접근 방식이 조금씩 달라서 아트팀과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무래도 완구시장에서는 복잡하고 잘 넘어지는 캐릭터를 지양하며 상품이라는 입장으로 접근하지만, 제작사의 아트팀의 경우는 캐릭터의 성격과 레이아웃 등 디자인과 캐릭터라이징에 더욱 집중하기 때문이다. 흔한 TV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의 기획실 모습. 기획 단계는 작품 전반의 설정과 함께 투자에 대한 준비를 동시에 병행하는 괴로운 작업이다. 스텝들 책상 곳곳에 자양강장제와 영양제 등이 숨어 있다. 이처럼 작품의 기획과정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과정뿐만 아니라, 작품의 마케팅과 투자 등의 과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국내 작품의 경우 제작과정을 보통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로 생각하고 기획에 들어가는데, 작품 기획에 대한 대충의 얼개와 제작에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 과정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기획팀은 투자 미팅을 준비하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간다. 투자미팅은 주로 기획서를 가지고 진행되는데, 주로 스튜디오의 대표가 직접 진행한다. 국내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대표들은 주로 아트디렉터 출신이 많아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는데,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아트디렉터에서 비즈니스맨으로 진화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많은 제작사들이 프로듀서를 못 구해서 힘들다는 의견이 많은데, 이는 정말 사실이다. 국내 애니메이션 전공과정에서는 프로듀서 과정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보통 애니메이션 제작 전공자가 프로듀서를 맡게 되면 보통 심적 고민에 휩싸이게 되고 금방 스튜디오를 떠나게 되는데 (프로듀서 일은 아티스트 전공자들이 하기엔 너무나 경직되고 규율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이 때문에 오랜 시간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경력자들이 적다. 그러다 보니 보통 투자 상담은 스튜디오의 대표가 직접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게 된다. 투자사는 작품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투자심사를 하게 되고 이후 투자결정을 하게 된다. 이때 제작사는 콘텐츠 진흥원,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각 지역 정보문화산업진흥원 등에서 진행하는 지원사업, 또는 다양한 R&D 사업 등에 참여하여 제작사가 투자해야할 자금을 모은다. 국내의 경우는 또한 다양한 마켓과 영상 견본시 등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참여하여 파트너 사를 모으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제작사는 자신들의 제작비를 모았고, 약간의 투자가 되어서 제작비가 어느 정도 모였다고 생각되면 본격적인 제작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투자비가 다 안 모였는데 어떻게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제작비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다 가는 일정을 맞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제작에 들어간다. 전체 투자비가 다 모이는 것은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일단 제작이다. 방송일정도, 방송사도 잡히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자 이제 ②프리프로덕션이다. 시나리오 작가도 필요하고, 캐릭터 디자인도 수정해야 되고, 콘티도 그릴 준비를 하자. 아 그런데 뭐지? 이 불안함은. (다음 편은 ‘한국에서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만들기 ②프리프로덕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