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부인
- 감독
- 이규웅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김진규, 김지미, 조미령, 한은진, 도금봉, 황정순, 전계현, 김칠성, 배삼룡, 박승문, 이우평, 석금성, 전영주, 박지현, 김효진, 김정옥, 조천금, 전숙, 추봉, 박순봉, 김신명, 윤신옥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 Archives Korea 1930-1940 >(이하, <AK>)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 영상을 남긴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 1871~1942)의 생애를 중심으로 지난 글 에서 충분히 소개했다. 조악한 화질의 시각자료와 모호한 문헌으로 흐릿하게 전해지던 당시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송두리째 담은 이 필름 릴들을 보면, 이것이 과연 개인적인 취미의 수준이었는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어쩌면 평생 남몰래 하나의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관한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던 헨리 다거 (Henry Darger, 1892~1973)와 같은 ‘이름 없는 예술적 수행자’의 범주로 그를 이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리스씨는 좋은 아키비스트는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 저녁 식사 후에 영사기에 걸고 함께 담소를 나누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커피를 마시며 홀로 감상하는 정도로 필름을 관리하면 됐을 것이다. 모리스 정도 되는 사람이 이따금 필름 앞뒷면이 뒤바뀐 채 스플라이싱(필름 이어붙이기)되는 줄을 설마 몰랐을까? 화면의 좌우가 뒤집혀 영사되는 것 정도가 무슨 큰 대수라고. 한 이벤트에 대한 푸티지들이 여기저기 나뉘어 붙어 있는 것도 다 알고 놔둔 것일 테다. 굳이 푸티지들을 다 자르고 정리하여 다시 이어 놓을 필요까지야 있겠나, 나중에 혹시 재편집할 일 있을 때 제대로 따다 붙이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설렁설렁 하는 것이 푸티지 재사용이 빈번했던 무성영화필름 시대의 흔한 관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컷들 사이에 적당한 메모가 적힌 리더필름이라도 삽입하든지 간략한 개요들을 따로 정리해서 적어놓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배부른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결국, 100년쯤 후에 조선인들의 후예가 이 엄청난 영상자료를 발견하고 기뻐서 흥분할지 답답해서 흥분할지 알 리 없는 이 위대한 은둔의 수행자는 필름 외에 다른 어떠한 단서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AK>에는 아직 식별되지 않은 인물, 장소, 건물, 사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를 알아내기 위한 추리와 발품 팔이 과정 자체는 괴롭지만 뜻밖에도 미묘하게 즐거운 중독성이 있다. 나는 이런 행위를 ‘식별놀이(Identification Game)’라 부르고 있다. 늘 대수롭지 않은 정보 하나를 밝혀내려 아등바등하는 것이 이상한 집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사소한 정보 때문에 장면 전체의 숨겨진 맥락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야기가 입체적인 버전으로 ‘리부트(reboot)’되는 경우가 있다. 식별놀이는 이 맛에 한다. 아는 지식이 많을수록, 아는 문헌이 많을수록 난이도가 쉬워지겠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느긋하게 과정을 즐기면 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영상 속에서 누가 모리스인가?’에 대한 추론들도 이런 과정의 결과이다. 이 글에서 한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겠다. 식별 미션 : 1930년대 탑골공원에 정말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나? 일제의 공원화 사업이 가지는 이중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일제는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을 기점으로 각 지역의 「시가지계획공원안」에 의해 근대식 공원녹지계획을 수립, 추진했고 경성부는 이보다 조금 이른 1930년, 「경성도시계획서」에 ‘아동공원’을 별도 분류 항목으로 처음 언급했다. 탑골공원의 경우 1932년 12월에 관리주체가 총독부로부터 경성부로 넘어가면서, 이듬해 하반기 즈음에는 ‘아동유희구’(놀이터 기구들) 설치 등의 개수공사를 통해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했으리라 추정한다. <AK>에는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장면들을 포함하여 공원 풍경이 심심찮게 포함돼 있다. 이 중, (당시 탑동공원으로 더 많이 불렸던) 탑골공원으로 추정되는 장면은 흑백 시퀀스 두 군데, 컬러 시퀀스 한 군데가 있는데, 모두 아이들이 미끄럼틀, 회전그네, 정글짐, 시소 등을 타고 노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장면 1] <AK> 01:01:25 부근 [장면 2] <AK> 01:01:40 부근 [장면 3] <AK> 01:02:01 부근 [장면 4] <AK> 01:02:57 부근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6] <AK> 05:10:30 부근 * [장면 3], [장면 4]는 과거 컬러 규격 중 하나인 코다컬러(Kodacolor lenticular) 방식으로 촬영했으므로 화면 전체에 미세한 세로줄이 보임. 따라서 기본적으로 흑백 프린트지만 이를 전용 영사 시스템으로 영사하여 컬러를 구현했었음. [장면 6]은 코다크롬(Kodachrome) 촬영본임. 대략 그럼직하더라도 기본적인 정보부터 맞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큰 억측의 발단이 된다. 영상의 장소가 1930년대 탑골공원인 것, 그리고 이때 탑골공원에 정말 놀이터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빙할 근거를 모을 필요가 있다. 제일 만만해 보이는 [장면 5]부터 추리를 시작해 보자.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존재와 위치 검증 [장면 5]에는 담장 너머 ‘公園屋(공원옥)’이라는 곳의 간판에서 ‘釀造場(양조장)’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업소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공원 담장 놀이터와의 연관성 등은 그 어떤 활자 기록이나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1925년에 태어나 인사동과 종로 3가 인근에서 살았던 아동문학가 어효선 작가(1925~2004)가 1990년 시점에서 1930년대 생활을 회고하여 남겨 놓은 책 한 권이 큰 도움이 됐다. (...) 그 옆이 공원 뒷문인데 동문과 같다. 지금까지 오른쪽 담을 끼고 돈 셈인데, 뒷문을 보고 서서 왼쪽은, 연못이던 것을 메우고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 미끄럼대, 시소, 뺑뺑이, 정글짐, 철봉틀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다. (...) - 어효선(글), 한영수(사진), “탑골 공원과 뒷문 밖(발췌)”, 『내가 자란 서울 : 1930년대 서울 살림 엿보기』(2판), 대원사, 2003. (...) 공원 담 밑 길에서 인사동 큰길로 나가다가, 오른쪽 끝에 '공원옥'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술을 먹게 된 간단한 술집이다. 저녁 때 이 집에서 고기, 생선 따위를 굽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서 아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드나드는 문에는 세 폭의 천을 위쪽 3분의 1쯤만 이어 박고, 아래쪽은 갈라진 짤막한 휘장을 걸었다. 이 휘장 한 폭에 한 자씩 '公園屋(공원옥)'이라고 써서, 간판으로도 썼는데,실상은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가린 것이다. 사람이 드나들 적에는 이 휘장을 젖히거나 쳐들게 된다. 이 휘장을 차면이라고 한다. (...) - 같은 책, “선술집과 장전(발췌)” 그러니까 이 분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 5]의 장소가 탑골공원인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100% 신뢰도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에만 의지하여 식별놀이를 종결지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이 장면의 오른쪽에 일부만 보이는 벽돌 건물에 주목해 보겠다. 전체 외양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건물이 혹시 북촌 한옥마을 등 조선인을 위한 개량 한옥 단지의 개발자이자 민족사업가였던 ‘건축왕’ 정세권 (1888~1966)이 자비로 건립한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종에 알고보매 그(주: 정세권)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히 깊어서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 장산사(獎産社) 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의 의복,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야 조선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이인 줄을 알았다. - 이광수, “成造記”, 《삼천리》 제8권 제1호, 1936. 1. 1, 242쪽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재점화를 주도했던 정세권의 활약과 그러한 헌신의 상징인 낙원동 회관 건립에 관한 자료는 2017년 발간된 김경민 서울대 환경계획학과 교수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위즈덤하우스, 2017)와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칼럼들에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그 회관은 “ 낙원정 300번지에 위치한 3층짜리(또는 옥탑 층까지 포함하여 4층이라고 말하기도 함) 붉은 벽돌 건물 ”이었고, 당시 신문 보도 내용과도 일치한다. 문제는 이 ‘지번’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의 지번 체계가 광복 이후 얼마간 유지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지만, 최소한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지적원도상의 지번과 현재 지번의 위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대략 영상의 건물 위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의 책에서 추정한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번이 표시된 그 어떤 지도에서도 낙원동 300번지를 찾을 수 없었다. 지면상 지번이 생략돼 있거나 디지털 사본 화질이 떨어져 식별이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자료 조회 비교 (좌)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地番入서울特別市街地圖)", 대한서림(1958)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300번지는 생략되어 있다. (중) “지적원도”, 조선총독부(1917)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제공 :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확인된 300번지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우) 현재(2024) 지적도 등본상의 300번지도 동일한 위치로 추정되며 도로 지목으로 할당돼 있다. 사진과 영상의 비교, 촬영 상황의 재구성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회관 건물의 외양이 포함된 자료일 텐데, ‘이것이 회관 모습이다’라고 밝히는 자료는 사진이 실린 신문기사 1건 과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장산(獎産)》(1931년 2월호) 표지 정도이다. 문제는 [장면 5]의 벽돌집이 일부만 나온 데다가 건물의 측면이라는 점이다. 외양의 특징적 유사성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교차 검증이 되고, 나아가 새로운 정보까지 낚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것을 ‘사실’이라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후의 사진 및 영상자료들도 교차 검증에 도움이 된다. 특히 공중 촬영 사진을 찾는다면 좋을 텐데 지형지물이 잘 구분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아마도 공중 촬영한 사진 중 이 글의 관심 사항인 공원 북서부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연합뉴스의 도광환 기자가 1953년 6월에 촬영한 사진 인 것 같다. ( 오마이뉴스 는 이 소스를 게재를 허가받아 고화질로 공개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장면 5]의 벽돌 건물이 회관이 맞다는 것과 화면에 보이는 부분이 건물의 측면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장면 5]는 공원 서문 쪽에 가까운 담장 근처의 미끄럼틀 장면이 분명해졌다. 또 다른 쓸 만한 자료는 김천길 기자(전 AP통신)가 1956년에 촬영했다는 공중사진 이다. 여기서는 북문 쪽에 더 가까운 공간에 그네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때는 회관 옥상에 1층을 더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북문 쪽 공간과 관련해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 중인 < 조선의 애국일 >(1940) 중 물산장려회관, 공원옥, 공원 내 놀이기구(정글짐)를 동시에 담은 장면이 있다. 팔각정 쪽에서 석탑 뒤의 공원 북서부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제작, <조선의 애국일>(1940) 4분 22초 부근. 가운데 ‘공원옥’이, 탑 오른쪽에 물산장려회관의 측면 일부가 보인다. ‘공원옥’ 간판은 비스듬히 왼쪽 프레임 밖을 바라보고 있다. 즉, 이 화면은 [장면 5]에서 담을 따라 북문에 더 다가간 곳이다. ‘공원옥’ 앞에 정글짐이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항들을 가지고 <AK>의 ‘탑골공원과 인근으로 추정되는 장면들’을 다시 보면 장면들 사이의 공간 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단, [장면 4]의 장소는 탑골공원 외부인 것 같다. 처음에는 이 부근에 3층 이상 벽돌 건물이 흔치 않을 것으로 보아 여태껏 어느 자료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물산장려회관의 뒷마당이 아닐까 추정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AK> 등 영상 속 촬영 장소와 시점의 추정 배경으로 활용한 자료는 “ 탑동공원 각소 수선지(之)도 ”의 일부이다. 공원 내 배치 상황으로 보아,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에 공원 관리사업을 이관하기 전인 1910. 8.~1932. 12. 사이에 제작된 지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식별 놀이는 원래 엔딩을 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와 식별된 정보를 바탕으로 촬영 시기도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다. 위 장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촬영됐다고 가정한다면,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준공된 1931년 9월 이후의 장면이다. 다시, 놀이기구가 보이므로 경성부 관리 이관 후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한 시기, 즉, 최소한 1933년 하반기는 지난 시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자료들를 찾는 중에 한가지 변수를 발견했다. ‘경성상공협회 회관이 낙원정 300번지 외 1호의 2층 양옥집으로 이전했다’라는 1936년 9월 23일자 기사 가 있다. 물산장려회관의 300번지를 지번분할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물산장려회관과 상공협회관은 거의 붙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에는 회관 건립 의연금을 기부한 사람 명단 중에 ‘정세권’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보다 앞선 6월의 기사에는 상공협회관의 외양을 스케치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납작한 2층짜리 상공협회관 건물 뒤로 보이는 실루엣은 물산장려회관의 탑층 있는 쪽 모습 과 유사하다. 다시, 아까 소개했던 김천길 기자의 탑골공원 공중사진(1956) 을 보자. 물산장려회관 뒤로 방금 본 상공협회관의 일부와 유사한 2층 건물이 그림자가 드리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물산장려회관이 맞고 [장면 6]에서 상공협회관 왼쪽으로 빼꼼하게 보이는 흰 건물이 물산장려회관의 공개되지 않은 뒷 측면 모습이라면? 이 장면의 촬영 시기는 1936년 9월 이후로 늦춰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지쳤으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 사실 <AK>에 사용된 필름의 엣지코드(edge code)로부터 필름 제조 연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실 촬영일과 1~2년 이내의 오차로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만, 아직 모든 장면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한 단계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다만, [장면 6]과 같은 코다크롬 규격은 1935년에 처음 출시됐고 <AK>에서 사용된 제조 연도가 가장 이른 코다크롬 필름은 1936년산이라는 점만 말씀드린다. 식별 정보로 봉인 해제된 영상 다시보기 이제 <AK>의 이 장면들은 더 이상 탑골공원 느낌의 어느 공원에 놀이터가 있고, 조선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 덤덤한 장면일 수만은 없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탄다. 해가 지면 북촌의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들이 담장 너머 선술집에 모여들어 막걸리로 시름을 달랠 것이다. 일제의 견제로 힘을 잃은 지 십 년이 넘은 물산장려운동을 되살려 보겠다고 ‘건축왕’ 정세권이 자비를 털어 만든 물산장려회관이 공원 옆에 우뚝 서 있지만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새로 생긴 놀이터는 내선일체 구호만큼이나 공허하다. 아마도 이 모든 맥락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정동에 거주한 지 40여 년 되어가는 한 이방인 사업가는 화려한 남촌의 풍경이 아닌 쇠락한 북촌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오, 주여. 이들을 보호하소서.’ 탑골공원과 인사동 인근은 어쩌다 보니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장소로서 변화무쌍한 이력을 지니게 됐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테지만 문헌에 남지 않았다면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영상은 그 최후의 보루이다. ‘식별놀이’는 나뉘어 묻혀 있는 기억들을 채굴하고 원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증명’의 대가로 받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가상화폐 같은 것이 아닐까. <덧붙임> 1. 직접 게재하기 어려운 사진 및 기사 자료는 부득이하게 링크로 대신했습니다. 2. 일제강점기 공원 정책과 관련한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 조세호, 김영민, "경성부 도시계획서 상의 공원녹지 개념과 현황의 변화 양상", 『한국조경학회지』 vol.47, no.2, 2019, 117~132쪽. 3. 각종 자료를 무료로 공공에 개방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 춘천, 춘천 >은 겹쳐진 표제어의 꼴이 말해주는 것처럼 두 개의 춘천에 관한 이중구조의 영화이다. 장우진이 묘사한 미시 우주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교차를 매개하여 우연과 시간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인간 상호작용의 저류(低流)를 지도 그린다. 플롯은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두 갈래 내러티브를 따라 평행하게 진행한다. 느릿한 페이드(fade)로 화면이 열리면 기차 안에서 한 청년(우지현)이 옆에 앉은 중년의 남녀(양흥주, 이세랑)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 동쪽에 있는 도시 춘천이다. 여행자의 행색이 완연한 중년 커플에 비해 청년의 차림새는 어딘지 헐거워 보인다. 비좁은 의자를 나눠 앉은 청년과 중년 커플 사이를 쇠기둥이 단호하게 가르고 서 있다. 프레임을 양분하는 쇠기둥이 접는 면을 이루듯 플롯의 전반부는 지현, 후반부는 흥주의 세랑을 따라 두 개의 여로를 제시한다. 나란한 서사 라인을 연결하는 이박삼일 동안의 두 조각 모음은 캐릭터의 병렬 경험을 따라서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엮이는가? <춘천, 춘천>의 시각 스타일은 미니멀리스트의 방식이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만 패닝하며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따라 트래킹하지 않는다. 단순한 구도의 1인 또는 2인 쇼트에 의존하는 이러한 스타일은 디테일에 집중하게 하고 캐릭터 행위의 미세한 변화를 새기게 하며 이런 진부한 스토리를 보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계속 사고하게 한다. 서사적으로는 두 개의 시간 층위를 겹치면서 이야기의 주름을 만든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지현이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방랑하는 행장기 다음에 흥주와 세랑의 여정이 포개진다. 두 경로는 모두 고요한 휴양 도시의 지형도 위에서 펼쳐지는데 단지 그것만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들의 우주는 근거리의 좌표 상에 그려진다. 일자리를 얻어 서울로 향하는 동향(同鄕) 친구와 춘천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교차한 지현은 그날 밤 구직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통보을 받고 크게 낙담한다. 다음 날 이 도시를 대표하는 마라톤 경기의 출발선에 서 비틀거리던 지현은 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너 청평사에서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기도를 올린다. 정처 없이 떠돌던 청년의 발걸음은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평상에서의 넋두리를 지나 다음 날 아침 페리호 위에서 종료된다. 흥주와 세랑의 이동 경로는 지현의 꼬리를 밟는다. 저렴한 모텔 방이 모두 소진되어 비싼 숙소에 든 두 사람은 한 방에 묵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마라톤 경기의 결승점에서 북적대는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어색하고 썰렁한 식사를 마친 세랑은 23년 전에도 이곳에 들러 산채비빔밤을 먹었는데 그때도 맛은 별로였다고 회고한다. 페리를 타고 청평사에 들어가 세랑은 절을 하고 흥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늦은 오후 절에서 나온 두 사람은 소박한 식당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다음 날 아침 안개 낀 호수 기슭의 잿빛 풍경을 보고 상념에 빠진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점진적으로 분리된다. 캐릭터의 묘사는 섬세하고 상황의 전개는 느슨한 <춘천, 춘천>은 진정한 삶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항상 사이에 끼인 과정임을 깨닫도록 한다. 이 일상의 휴먼 드라마는 모든 영화적 감각이 시간의 흐름과 사소한 제스처, 빛의 변화에 맞춰져 있다. 영화의 진가는 시각적 표현, 소리, 우연한 마주침에 있으므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훼손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두 개의 롱테이크 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취업에 실패하여 한껏 울적해진 지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친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르는 밤의 정경을 묘사한 신이다. 후회와 자책, 망연함이 뒤섞이는 10분의 지속 시간 동안 우리는 천천히 무너지는 청년을 지켜본다. 음악을 그만두고 서울에 취직자리를 얻은 친구가 불러주는 애절한 노래의 마지막 음이 밤공기를 가르고 떠오를 때까지 지현은 숨을 참는 것 같다. 두 번째 롱테이크 신은 아마도 지현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당에서 막걸리와 파전, 전골을 놓고 나누는 흥주와 세랑의 대화이다. 카메라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머뭇거리는 저들의 대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진부해 보이는 시간의 길고 유동적인 흐름은 얇은 비닐 가림막 뒤에서의 조용한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비닐 가림막 너머에 있는 태양이 구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카메라는 두 사람의 과거를 회고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서툴고 더듬거리는 말들을 수록한다. 주변에 떨어지는 빛의 명암은 그들의 변화하는 감정에 따라 황금빛에서 어두운 그늘로 수시로 바뀐다. 변화하는 빛과 서늘한 바람 소리,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기록된 이 신의 도입부에는 사마귀도 등장한다. 흥주는 사마귀와 방아깨비의 차이를 설명하고, 가을이 더 깊어지면 사마귀도 색깔이 낙엽 색깔처럼 변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세랑은 어린 시절 몸에 사마귀가 났을 때 사마귀가 그걸 먹어주면 없어진다고 했던 속설이 진짜인지를 흥주에게 묻는다. 흥주는 사마귀는 몰라도 잠자리를 사마귀에 갖다 대면 그걸 물어뜯기는 했었노라고 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한담과 그들 각자가 과거에 다른 연인과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나누는 동안 사마귀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흥주는 세랑이 앉은 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옷에 붙어있던 사마귀를 쫓고, 어색한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나란히 앉도록 한 사마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 기우뚱한 구도 안에 세랑-흥주-사마귀가 나란히 놓인 형상은 춘천행 기차 안에서 쇠기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던 세 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무려 12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물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무성한 풍경들을 천천히 축적하는 과정은 시간에 대한 감각과 미물(微物)에 투영된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전달한다. 평행 우주의 다른 좌표에서 지현은 청평사를 내려오는 길바닥 위에 죽어 있는 사마귀를 본 적이 있다. 사마귀는 어떻게 거기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가 장면의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 시간의 무게를 탑재한 이 장면들은 빛의 소멸, 미묘하게 반향하는 두 쌍, 투명함의 감각을 위해 시간의 드라마를 변환한다. 과거의 유령, 잃어버린 연결과 놓친 기회가 두 부분을 맴돌며 애잔한 사슬로 청년과 중년을 엮는다. <춘천, 춘천>은 일상적인 장소와 날씨, 빛의 기록이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인간과 자연에 관한 유려한 미니어처이다. 장우진은 풍부한 특성화와 미적 감성을 통해 세계의 복잡성을 추론하게 한다. 우리의 삶이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이며 때로는 이미 지나갔던 길의 되밟기라는 것을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반복된 말과 사물, 우연한 만남, 이상한 재조합, 전화 통화, 절, 마라톤, 사마귀는 내러티브의 체계 위에서 진동한다.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장우진의 기하학적 플롯은 이중구조와 심리적 묵시라는 수단을 흡수하여 스토리텔링을 해석하는 관객들에게 복합적인 층위를 상상하도록 한다.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으면서 한 번의 몸짓이나 이미지에 평생의 후회를 담는 이 캐릭터들은 과거를 몇 번이나 회상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완전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생생한 계절의 톤에서 안개 낀 회색으로 반복적으로 흔들리는 이야기는 화장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대는 카메라로 모호한 이중 결말을 이룬다. 표면적으로는 겸손하면서도 은근하게 야심에 찬 장우진의 연출은 세부 사항, 반복 및 후속 보기를 의미 있게 만드는 내적 운율을 통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덜어냄으로써 남아있는 것들 안에 뉘앙스를 드러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1987년에 도착한 < 영웅본색 >은 그 매혹의 강도에서 보자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의 그 어떤 한국영화도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저 고색창연한 대사는 소년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렇다.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가치인 바로 그 의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따거(大兄)’ 주윤발은 홀홀단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소년들은 일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롱코트에 사로잡혔으며,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했다. 실상 <영웅본색>의 시작은 그렇게 창대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화양, 명화, 대지극장에서 19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되었으며, 9만 4천 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관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둔 이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 프로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웃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1) 열광적인 팬덤을 낳았다. 팬덤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장르에 대한 탐닉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VCR 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 선반이 나눠놓은 분류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로 카테고리화되었다. 이 ‘장르’는 이제 가장 충실하고 열정적인 관객을 갖게 될 터이다. 비디오라는 새롭게 추가된 매체의 영향은 있었으나, 여기에는 분명 1970년대 이래로 동시상영관을 채워왔던 이런 영화들(이른바 1970년대의 홍콩 권격영화)의 관객의 세대적, 젠더적 상속이 있었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것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남성관객들이었다. 장사치들은 발빠르게 이에 조응하였다. <영웅본색> 이후 단 1년 만에 홍콩영화의 한국 판권은 2배에서 3배까지 치솟았으며, 1988년의 시점에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3위로 랭크된 한국은 1990년에 이르면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우삼과 서극과 임영동의 이름은 이제 막 등장한 ‘시네필’들의 경전에 올랐고,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유덕화, 적룡, 이수현, 여명 등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용되는 이름들은 그 발음만큼 ‘친숙한’ 스타가 되었다. 이 열광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근원은 무엇인가? 왜 이곳에서 <영웅본색>은, 나아가 이로부터 촉발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소위 ‘홍콩 느와르’ 2) 로 불려진 일련의 홍콩영화들은 그토록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그때 한국의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은 이 세계에 그토록 ‘진지하게’ 심취할 수 있었는가? <영웅본색>은 1987년과 88년 사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점적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에 대한 열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영웅본색>이 불러일으킨 열광의 강도는 놀라운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향유, 소비했는가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던 (그러나 그 하위문화적 성격상 거의 담론의 영역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홍콩산 액션영화(이거나 종종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일대의 영세 영화자본들이 합종연횡하면서 만들어낸 출처 불분명의 ‘무국적’ 액션영화)가 소비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회적·미디어적 조건과 결부되어 향유되었다. 즉, 여기에는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했던 독특한 위상이라는 종적 맥락과 <영웅본색>이 도착한 1987년부터 이 장르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이라는 횡적 맥락이 서로 연동되어 개입되어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관객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계층별, 세대별, 젠더별 분화를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무협영화의 형태로 처음 한국 영화시장에 도착한 이래 홍콩영화는 재개봉관, 도시 변두리 소극장과 같은 지극히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젊은 남성들의 주요한 하위문화적 자원으로서 기능하였다. 특정 공간과 특정 세대, 젠더가 결합되어 있는 이 향유의 방식이야말로 홍콩영화에 관한 한국 담론 특유의 세대적 노스탤지어의 감각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홍콩영화에 관한 서술이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놓여진 시간과 장소로 이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 10대, 20대의 남성 하위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홍콩영화에 관한 이해는 내셔널 시네마 히스토리에 기반한 영화사적 계보 이전에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어 수용되어왔다. 강력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홍콩영화가 전시하는 친밀한 인종의 얼굴, 스타의 몸이야말로 바로 이 개인적 열망들의 투사체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홍콩영화의 향유 방식에 내재된 독특한 세대론적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대적 응집성은 강렬한 체험의 강도를 동반한다. 홍콩영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기묘한 위치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면 금지된 이곳에서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였으며, 또한 한국영화와 가장 빈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내내 도시 변두리 극장에서 가장 긴 흥행 사이클을 보여주었던 액션영화의 절대 다수는 소위 한국-홍콩 혹은 한국-대만의 ‘위장합작’ 영화들이었다. 1986년의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이 오래된 관행 속에서 종종 한국어 더빙 버전의, ‘한국영화’로 알려지기도 한 홍콩영화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지닌 것으로 감각되었으며, 그 속에서 홍콩영화의 외래성은 습관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지워졌다.(홍콩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한국식 한자 독음 표기로 호명되었던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홍콩영화에 대한 이곳에서의 감각은 외화와 방화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이 친밀성이야말로 홍콩영화에 대한 한국에서의 ‘번역가능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4) 바로 이와 같은 친밀한 방식 속에서 이 영화들에 열광한 절대적인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들이 이 시기 이들의 열망과 분노, 상상적 극복과 같은 것, 즉 어떤 정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반쯤 토착화된 영 컬처로서 <영웅본색>은 이 영화가 도착한 바로 그 시간인 1987과 1990년대 초까지 들끓었던 혁명적 열망과 정념과 관련되어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이끈 직선제 개헌 관철의 결과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6월 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전대협 결성, 이듬해의 노동법 개정투쟁,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 1989년의 전교조 결성,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의 방북, 1990년의 전노협 결성 등 대규모의 노동자 투쟁과 통일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분출하고 있던 이 시기는 정확히 오우삼 영화에 대한 열광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 한국영화를 포함해서 그 어떤 영화도 이 순간 그의 영화만큼 젊은 남성들의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1987년의 정치와 정동과의 예기치 않은 충돌 혹은 밀착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역설해주는 것일 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느와르는 이 영화들의 과도한 폭력성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심지어 구체적인 숫자까지 동반하였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폭력영화와 청소년 문화환경’이라는 심포지움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관객 28만명을 동원한 <영웅본색 2> 전체의 21.9퍼센트가 폭력장면이고 89년 25만명을 동원한 <첩혈쌍웅> 24.3퍼센트가 폭력장면이다. 5) 라는 ‘구체적인’ 퍼센티지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들에 대한 히스테릭한 우려는 더 이상 저질이라는 모호한 어휘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도한 염려였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매혹 또한 액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기폭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대중이 애도의 공동체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또한 국가폭력이 저지른 이 무구한 죽음의 형상은 그 자체로 대항폭력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87년을 전후로‘ ‘정당한 약자의 무기로 자리잡았’다(김원). 그것은 가두에서 백골단과 구사대가 휘두르는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는 화염병과 쇠파이프의 저항이었으며,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최장집)로서의 분신이었다. 즉, 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간은 도저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대항폭력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의 정당성이야말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 정권으로서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자 하루빨리 탈취해야 할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폭력의 카테고리 안에 묶인 <영웅본색>의 힘은 그야말로 거리의 힘의 상상적 투사물일 수 있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각계 주요인사들을 사찰한 ‘청명계획’이 내부고발자에 의해 폭로된 직후 국면전환용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범죄와 폭력이 ‘와’로 병렬되고 있는 이 연설은 대항폭력을 범죄화함으로써 이 폭력의 정당성을 삭제하고자 하는 언설 전략의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 대 대항폭력. 한국에서의 홍콩 느와르 전성기와 함께 하는 이 두 폭력의 구도는 왜 이 영화들의 폭력이 어떤 이들에게 그토록 과잉 의식되는지 왜 이 영화들의 향유자들에게는 그토록 매혹적인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 영화적 폭력이 죽음과 애도와 긴밀히 연결된 대항폭력의 영화적 형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분명 폭력 형상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은 오로지, ‘형제’를 위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영웅본색>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정념의 활극은 오로지 형제애에 기초해 있다. 한때 조직에 발 담갔으나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남자, 그러나 그의 이전의 삶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웅본색>이 느슨하게 관련된 1967년의 동명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감독 용강(龍剛)의 광동어 사회파 드라마인 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우삼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크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오우삼은 이 인물을 구축하는 여타의 서사를 지우고, 이 캐릭터를 송자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마크는 오로지 이 관계의 도덕, 의리라는 하나의 정념으로 움직인다. 젊은 남성들을 열광케 했던 소위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마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위조화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 화분에 심어놓은 총을 꺼내어 춤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총을 쏘는 주윤발.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제스추어와 표정으로 특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크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송자걸이 서사의 캐릭터라면, 마크는 제스처의 캐릭터이다.(197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마크의 전사를 그리고 있는 < 영웅본색 3 >는 영화의 성취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의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던가. 3편에서 마크는 땅으로 내려왔고, 심지어 여자와 ‘연애’를 한다.) 오우삼은 마크를 통해서 신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 공간은 ‘협(俠)’의 세계이고, 이 ‘협’이라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그 자체로 현현해내고 있는 마크-주윤발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형성시켜내고 있는 자이다.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느와르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이 세계가 ‘아버지’ 없는 세계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적 존재’는 행위의 동기 혹은 주체로서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행위의 동기이자 주체가 되는 것은 동년배의 남성들이며 연대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형제를 위해!).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구성해내는 원리라고 할만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 사이의 ‘의리’와 세계에 대한 ‘인의’이며,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다. 오우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영화가 폭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와 형제애에 관한 영화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 첩혈속집 >에 출연했던 쿠니무라 준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우삼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 모티브가 인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의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 혹은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관계성의 극단과 같은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의 기본 모티브다.” 6) 오우삼이 인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그의 영화 스승인 장철(張徹)이 ‘피의 형제애 blood brothership’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다. 오우삼 스스로 경외를 바쳐 마지않는 영화사의 선배들 이름을 즐겨 거론하지만(이를테면 장철부터 샘 페킨파, 장 피에르 멜빌까지) 적어도 <영웅본색>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장철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우삼이 장철의 영화적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량의 피, 파열하는 신체, 죽음의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슬로우모션 등을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스타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장철 영화의 미학인 ‘비장’을 발현하는 데에 핵심요소들인 이 인장들의 반복이야말로 <영웅본색>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철은 홍콩의 주류 장르를 젊은 남성들의 영화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홍콩 내의 산업적, 인구적 변화와 맞물려 등장한 젊은 남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영화는 젊은 남성이 말 그대로 ‘죽도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장철의 관심은 시종 이 싸우는 신체가 어떻게 파열되고 부서지는가에 있었다(<영웅본색>의 적룡은 장철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부서지는 젊은 신체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의 영화가 얼마나 익스트림한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의 영화를 즐겨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했던 장철에게 강력한 남성성(陽剛)은 비장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비장미는 세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미학이다. 이 대결은 패배를 예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을 쏟아가며 선 채로, 끝까지 버티면서 죽음에 이를 때 비장미가 발현된다. 홍콩 영화 최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성들의 영시네마가 홍콩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인 1967년과 1968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우삼이 장철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마찬가지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주체의 정동을 반영한다. <영웅본색>이 홍콩영화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해 홍콩은 다가오는 1997년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6년 홍콩 센트럴에서 약 50미터 거리인 다야만에 설립될 중국의 핵발전소 건립계획은 홍콩 내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은 이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 노동자, 시민단체 등이 결집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가 중국정부에 제출한 반대서명에는 참여한 숫자는 당시 홍콩인구의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우삼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 첩혈쌍웅 >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본토’의 폭력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의 광범위한 불안을 반영하였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홍콩 느와르에 대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열광은, 홍콩의 정치적 맥락과 전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동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인의와 그 인의를 보장하는 투쟁중인 집단의 형제애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주윤발은 ‘따거(大兄)’가 되었는가? <영웅본색>이라는 저 정념의 활극의 핵심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내하는 헌신적인 형제애이다. 주윤발의 몸이 말 그대로 무수한 총알구멍들로 뚫려질 때, 그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이를 수행한다. <영웅본색> 2편에서 죽은 마크-주윤발의 총알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코트가 등장할 때 그것은 형제를 위한 이 죽음의 순간을 거의 물신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을 무릅쓰는 이 형제애의 감정경제는 1987의 저 광범위한 연대,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남성) 동지들의 연대와 그 속에 작동하고 있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젠더적 편향성까지를 모조리 담아낸다. 다시 말해 이 의리란 세계의 부정과 대치하고 있는 (남성) 형제들 간의 의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본색>의 ‘번역가능성’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1987의 <영웅본색>은 한국과 홍콩영화 사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주제작된 정념의 ‘번안물’로서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형제애의 로망, 1987의 정동—<영웅본색>과 홍콩-한국 커넥션」을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1)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한울, 1991, 205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홍준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로드쇼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시네필들의 관람 실천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최초의 ‘컬트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으로 시네필이라는 ‘세계’관객의 시민성을 향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웅본색> 이후의 홍콩 갱스터 영화를 일괄했던 이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저널리즘에서 즐겨 유통되었다. ‘필름 느와르’라는 매우 특화된 역사성과 내러티브-이미지를 지닌 영화 장르명을 원용해오고 있는 이 용어에 대해 우다가와 코우요는 <영웅본색>의 일본에서의 공개 당시, 일본 배급회사 선전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한다.(野崎歓・宇田川幸洋対談「香港犯罪映画の魅力」, 夏目深雪、石坂健治、野崎歓編, 『アジア映画で<世界>を見る』, 作品社、2013, p.110) 대개의 저널리즘적 표현이 그러하듯 엄밀한 의미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인 포착이 가능한 이 용어는 거의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홍콩에서는 <영웅본색> 이후 등장한 일련의 갱스터 영화들에 대해 ‘영웅편(英雄片)’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3) 홍콩영화 향유의 초기부터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결부된 ‘체험’으로서의 홍콩영화에 대한 매혹적인 서술의 사례들로는 다음을 참조. 오승욱, 「어느 장철교 신자의 신앙고백- 나는 왜 그렇게 장철 영화를 좋아하나?」, 『KINO』 2003.7/ 정성일,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4) 1971년 쇼브라더스에서 장철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오우삼 자신이 1970년대의 홍콩-한국 커넥션을 직접 경험한 자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공식적인 감독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 女子跆拳群英會>는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저 친밀함이 1970년대의 어떤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저변화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불어닥친 이소룡 영화의 붐 이후 국가적 전략으로까지 제시된 ‘태권도 영화’와 호응하여 만들어진 이 합작영화는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되었다. 김창숙과 남산식물원과 경복궁을 주된 시각적 재료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1974년 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감독 오우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한국영화’ <위험한 영웅>으로 개봉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오우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여자태권군영회>라는 원제목을 달고 한국에서 VHS로(세경) 출시된 바 있다. 5) 『동아일보』 1990.9.20 6) 「国村準インタビュー」, 宇田川幸洋編集, 『キネ旬ムック フィルムマーカーズ⑫ ジョン・ウー』, キネマ旬報社, 2000, p.74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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