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종소리
- 감독
- 김원영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Vadim Utenkov, 블라지미르 이고로프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뻥튀기 제조기가 돌아가는 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한다. “과자 만드는” 자동기계는 계속해서 뻥튀기를 내뿜고, 인물들은 날아오는 뻥튀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심지어 수북이 쌓인 뻥튀기 위에 누워 관계에 몰두한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이 기괴한 장면은 김기영 감독의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전반부에 나온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일명 ‘뻥튀기 섹스신’은 작품 내적으로 그리 중요한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했다.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며 영화사의 이런저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를테면 훗날 누벨바그로 통칭된 무리 중에서도 자크 리베트의 비평적 안목이 특히 탁월해서 다 함께 신작을 보고 나면 다들 리베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든가 하는 별거 아닌 일화들.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아니면 클로드 샤브롤이었던가?)을 줍기 좋아했던 시절에, 어디선가 ‘뻥튀기 섹스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미친 영화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본 건 KMDb VOD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래 이 작품은 4K로 복원되어 블루레이가 출시되었고, 지금은 국내 OTT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글을 시작한 건, 이 지면의 제목인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이 내 오랜 고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미친 영화를 찾고 싶다는 게 그것이다. 영화글을 쓰다 보니 원고 작성, 관객과의 대화 진행, 심사 참여, 영화제 프로그래머 재직 등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필요에 따라 예전 영화도 종종 찾아보지만, 일의 특성상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장, 단편영화를 보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출품 공모를 열고 예심을 진행하는 영화제나 기획 프로그램 등의 선정의 변을 살펴보면 출품작이 매년 최다를 갱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심사를 진행하는데도 다양한 선정의 변에서 비슷한 뉘앙스가 읽힐 때가 있다. 영화가 점점 더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모난 구석이 없고 만듦새도 안정적이다. 혹은 적어도 그런 결과물을 지향한다. 비단 심사 과정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거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 극장 개봉의 문턱을 넘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균형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극장에 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내외부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는 물론 쉽게 간과해도 좋을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틈에서 때로는 작게 읊조리게 된다.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 근래 제작되는 영화들의 경향을 짚으며 비판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다. 단편영화를 장편영화의 축소판처럼 생각한다든지, 개인의 내면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서사에 안전하게 겹쳐두며 미궁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든지, 상상된 소시민적 이미지에 기대며 다양한 갈등과 여러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다든지. 단편영화에서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안타까움은 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지는 않으려고 한다. “너는 왜 미치지 않았니?”라고 묻는 대신,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음에 대해 좀 더 말하면 좋을 것 같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사실 미친 영화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미쳤다!”라는 감탄사는 소위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서도 쓸 수 있다. 변태적일 정도로 탐미적이거나 철학적 질문을 깊이 탐구했거나 대사를 잘 썼을 때도 이 감탄사를 마구 남발할 수 있다. 어쩌면 본인의 취향을 건드리는 모든 요소에 우리는 미쳤다며 나름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치다”라는 말은 보통의 것과 다른, 상식에서 벗어난, 일상을 뒤집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단어로, 동사이면서 상태를 설명하는데 주로 쓰인다. 그렇다면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미 일반적인 수준에서 굳어진 영화의 관습을 탈피하는 (비)자발적인 선택에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될까? 글쎄, 아직 충분하지도, 재밌지도 않다. ‘미친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은 꽤 모순적이다. 구체적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 개인적인 욕망은 나름대로 그 용례를 정교화하고 싶은 충동과 닿아있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주요한 길을 제시한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저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2022)나, 최근 타계한 국내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처럼 사회, 문화적 함의 속에서 ‘광기’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광기 역시 우리 시대의 굳어진 수식어나 레토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다 세밀한 탐색 없이 광기라는 단어만 쥐고 모험하는 건 이제 무척이나 (안전하기 때문에 더)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다른 한편, ‘미친 영화’를 찾고 싶은 마음은 내게 지극히 개인사적인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 대한 감상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름의 해답은 미친 영화를 찾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다시 찾는 데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너무 감상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때 내게 중요하게 와닿았던 비평적 시선 중 하나는 ‘정치적인 영화’를 정치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정치적인 것과 함께 생각하자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정치라는 것을 (정치인, 정당, 선거 등으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에 가두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역학이자 태도로 사고하면서, ‘영화’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싼 각종 갈등과 조건을 응시하는, 작품의 선택을 봐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했다. “존 포드야말로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이라고 말했다던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일화와 더불어, 내게 이러한 말과 시선들은 ‘분명히 있지만 딱딱한 것은 아닌’ 어떤 기준, 항상 개별 작품들과의 밀접한 교통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중요했다. 정치적인 것이나 브레히트적인 것, 그리고 ‘미친 것’과 그 효과는 언제나 같은 형식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광인의 출현이나 해괴한 장면의 등장만으로 그것이 (내가 찾는) 미친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일단은 이 질문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던 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괴인처럼 불리는 김기영의 작품 중에서도 파격적인 편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영걸( 김정철 )은 웬 여자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먹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계속해서 죽음과 삶의 충동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의 앞에, 의지만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책장수가 나타나 해골이 되어서까지 입을 나불거리는 한편, 2000년 전 신라 공명왕 시대에 동굴에 들어가 백골이 된 여성이 환생해 간을 먹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여성이 ‘뻥튀기 섹스신’의 주인공이다.) 뼈를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는 이 박사( 남궁원 )의 조수가 된 영걸은 이 박사의 딸 경미( 김자옥 )와 기묘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이 박사에게 배달되는 의문의 해골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도 연루된다. 사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이상하다기보다는 황당한 쪽이다. 신라 시대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여성은 갑자기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목이 잘린 영걸이 책장수의 전언처럼 눈을 떠 “의지!”를 외치며, 사람은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나비가 된다. 황당무계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 중심에 죽음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본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분명 독특했지만 동시에 처연한 영화이기도 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남자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일련의 일들을 겪다가 결국에는 죽지 않았으니 “귀찮지만 더 살아줘야겠다”라고 읊조리는 영화라니. 사실 주인공의 죽음이란 한 편의 영화에 드리운 종결의 감각을 형상화하는 가장 직설적인 사건일 것이다. 주인공이 죽으면 대개 영화 역시 끝나야 한다. 혹은 한 편의 영화는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 어쩌면 영화란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미루고 지연하다가 결국 끝을 마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악이나 연극처럼 시간을 조건으로 삼는 예술이 대개 그러하겠지만.) 그 지연의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꽉 짜인 서사를 통해서, 인물의 사소한 행동을 통해서, 끊임없는 사건들의 도입을 통해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저 뒤로 밀려난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별안간 그 모든 것이 영걸의 망상이었던 것처럼 묘사하며 영화를 닫는다. 이 석연치 않은 순환 구조야말로 내게는 모종의 ‘미친 것’이 작동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미치고 싶지만 미칠 수 없고, 미치지 못해서 미쳐버리는 어떤 무기력의 영화 만들기. 혹시 영화의 ‘미친 것’을 찾는다는 건 일종의 상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미친 영화’의 특정한 외양이나 형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앓고 있습니까? 아마도 비평이란 그러한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손시내(영화평론가) l 영화웹진 《 REVERSE 》에 글을 쓰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한다.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에서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 Back to the future ”, IMDb 영화제작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게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영화계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세간의 우려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구석으로 밀어둔 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직 영화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나 장편 영화의 일부 장면과 후반 작업에서의 역할을 보면 앞으로의 쟁점은 결국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디에이징과 특정 장면 생성만 보아도,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영화 안으로 들어와 있다. 우려와 기대, 그 양가적 감정.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이 다소 흩어져 보일 수 있겠다. 쟁점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아서다. 지금 영화가 맞닥뜨린 인공지능의 문제는 그만큼 단선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몇 갈래로 나누어 보았다. 1. 우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1985년 < 빽 투 더 퓨처 >에서 기술적 상상력과 대중적 서사 감각을 겸비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타임머신 자동차의 불타는 타이어 자국과 번쩍이는 빛으로 시간 여행을 표현한 그였다. 당시 SF영화에서는 시각효과가 강조됐고, 저메키스는 서사 안에 시각효과를 정교하게 배치하며 그 일선에 섰다. <빽 투 더 퓨처> 중 9년 뒤인 1994년, 이번에 그는 < 포레스트 검프 >에서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다루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구름 낀 하늘. 깃털 하나가 떠다닌다. 작고 하얀 깃털은 손가락 한 마디쯤 될 만큼 가늘고 여리다. 가장자리의 결은 반듯하지 않고 조금씩 흐트러져 있어, 바람을 만날 때마다 제 몸을 접는다. 공중에 떠 있을 때 그 깃털은 결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기울고, 다시 맴돌고, 또 한 번은 제자리에 머무는 듯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진다. 깃털이 누군가의 신발에 닿는다. 깃털을 집어 든 남자, 포레스트다. 가방에 넣은 뒤, 그는 옆자리 여성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한다. “초콜릿 드실래요?” <포레스트 검프> 중 (사진: “ Forrest Gump ”, IMDb / © 1994 Paramount Pictures) 약 2분가량 이어지는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됐다. 디지털 합성과 페인트 작업은 깃털의 움직임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처럼 보이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메키스는 포레스트의 삶을 감싸는 운명과 부유하는 시간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의 일부로 이 깃털을 배치했다. <빽 투 더 퓨처>에서 시각효과를 서사의 속도감 속에 밀어 넣었던 그가,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디지털 기술을 상징과 정서의 층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이제 최근의 이야기다. “3년 전만 해도 못 만들었죠” You couldn’t have made this movie three years ago. - The New York Times (2024), WIRED (2024) 재인용 2024년 저메키스가 < 히어 >를 선보이며 한 말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디지털 기술을 인물과 시간의 문제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가 한 인물의 생애를 가로질러 직접 연기할 수 있도록 AI 디에이징이 활용된 것이다. <히어> 배우를 대상으로 한 AI 기반 디에이징 사용 전후 (사진: Brahma AI , © BRAHMA AI 2026) 영화에 사용된 기술은 Metaphysic Live라는 AI 기반 디에이징 시스템이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의 기존 출연작 이미지를 바탕으로 머신러닝 모델을 학습시키고, 얼굴의 움직임과 피부 질감, 조명 조건을 분석해 필요한 연령대의 모습으로 실시간으로 변환했다. 배우들은 촬영 직후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달라진 얼굴을 확인하며 연기 방향을 조정했다. 저메키스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 인터뷰에서 이를 “결국 디지털 분장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바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의 시간을 타임머신처럼 통과하도록 돕는 기술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이다. 저메키스의 표현대로라면 이 영화는 3년 전만 해도 만들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이 작품에서 인공지능이 선택지가 아니라 완성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공지능이 배우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의 연기를 더 먼 시간까지 확장했다는 데 있다. 배우의 몸짓과 말투, 시선의 결을 더 긴 생애 위로 펼쳐 보이게 했다. 이때 인공지능은 대체의 기술이라기보다 표현의 반경을 넓히는 기술에 가깝다. 어디까지가 보조이고 어디부터가 대체인지는 여전히 더 따져야 할 문제지만 말이다. 2. 학생 A가 영화제작 수업 과제를 두고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구가 인공지능으로 과제를 했는데 결과가 꽤 좋았대요”라며 효용성을 앞세웠다가, “주제와 장르만 프롬프트에 넣으면 인공지능이 영화를 뚝딱 만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인공지능이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진 않는 거 같아요”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던 때였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변화는 교육 현장에서 빠르게 감지된다. 거대 자본의 스튜디오보다, 오히려 영화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의 작업실에서 더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학교의 실습 현장에서는 그것이 훨씬 직접적인 질문으로 나타난다. 어디부터가 도움이고, 어디까지가 의존인지. 인공지능 기술로 영상 생성은 쉬워졌는데, 왜 영화는 아직도 쉽게 완성되지 않는가. A의 말이 흥미로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더 빠르게, 더 쉽게, 더 그럴듯하게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은 분명 매력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그 학생이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효용보다 한계였다. 영화는 장면 하나를 생성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톤과 질감, 호흡과 리듬,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연결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영화가 된다. 인공지능은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 줄 순 있어도, 아직 영화 전체의 문법까지 대신 책임져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더 선명해진다. 학생들은 누구보다 먼저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빨리 그 기술의 빈틈과 마주한다. 그 기대와 난점을 다음 대화에서 풀어본다. 필자 : 과제는 어떻게 되어가니? 학생 A: 찍은 장면들은 거의 정리됐어요. 그런데 중간에 달 장면을 넣고 싶어서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봤거든요. 달 표면에 혼자 서 있는 인물 컷이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학생 A : 그런데 편집하면서 붙여보니까 좀 이상했어요. 필자 : 뭐가 이상했어? 학생 A : 제가 직접 찍은 장면이랑 인공지능이 만든 장면이 질감부터 달라요. 인공지능 영상은 너무 매끈하고 깨끗한 느낌이에요. 카메라 움직임도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움직임이 너무 미끄러지듯 가요. 영상 이미지도 너무 사실적이라 제 영화 안에서는 좀 튀는 느낌이에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필자 :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영화 안에 들어오면 어색하다는 거구나. 학생 A : 맞아요. 그 장면만 따로 보면 멋있어요. 그런데 제 영화 안에 넣으면 혼자 다른 질감으로 떠 보여요. 색도 다르고, 어쨌든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요. 차라리 전부를 인공지능 영상으로 만들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필자 : 그럴 수 있지. 학생 A : 사실은 프롬프트만 잘 쓰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달나라 장면이 필요했으니까, 그 분위기만 비슷하게 뽑아주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제가 상상한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결과도 한 번에 안 나와서 여러 번 다시 생성해야 했어요. 필자 : 이 기술의 역설이지. 쉬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용자의 판단을 요구해. 예전에는 찍을 수 없는 장면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만들어 놓고도 붙여보면 이상해지는 게 문제야. 더 섬세하게 써야 하는 거지. 학생 A : 그럼 아직은 인공지능을 쓰기 이른 걸까요? 필자 : 그렇게 볼 일은 아니고, 오히려 반대지. 이제는 쓸 수밖에 없어. 다만 질문을 달리 해야 해. 인공지능으로 만들 것이냐가 아니라, 네 영화의 문법 안으로 길들일 수 있느냐 로. 학생 A : 결국 인공지능이 다 해주는 게 아니라, 제가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필자 : 그렇지. 인공지능이 너의 상상력을 대신해 주는 건 아니야. 오히려 네 상상력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시험하는 쪽에 가까워. 영화는 선택의 예술이야.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감출지, 어디서 컷을 나눌지, 어떤 리듬으로 밀고 갈지, 그런 판단은 아직도 우리의 몫이지. 학생 A : 보조 도구군요. 필자: 적어도 지금은 그래. 인공지능이 재료를 줄 수는 있어도, 그 재료를 어떤 의미로 묶을지는 네가 결정해야 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건 여전히 연출자의 판단이고, 인공지능은 그 판단을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보조하는 도구에 가까우니까. 3. 여기서, 질문이다. ‘인공지능의 파고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나?’ 영화의 표현 범위를 넓혀주는 도구가 인공지능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모든 도구가 그렇듯,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일부 영화인이 인공지능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술은 빠른 속도로 노동의 자리를 흔들고, 창작의 책임을 흐리며,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손쉽게 재가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23년 미국 작가조합(WGA)과 배우노조(SAG-AFTRA)가 인공지능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가들은 인공지능이 대본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잠식할 것을 우려했고,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 움직임이 동의와 보상 없이 복제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편리한 기술은 늘 반갑게 도착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의 비용은 대개 가장 약한 자리부터 흔든다. 이 불안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인공지능은 영화 안으로 거창한 방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장면 하나, 목소리 하나, 배경 하나, 후반 작업 하나. 그렇게 작고 세세한 대체의 형태로 스며든다. 처음에는 보조 도구처럼 쓰인다. 그러나 반복되면 표준이 되고, 표준이 된 뒤에는 비용 절감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자리가 줄어든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대개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인이다. 그래서 이는 노동의 문제이고, 윤리의 문제이며, 결국 영화가 누구의 예술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문제다. 영화가 본래 집단 창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도입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끝내 붙들고 싶은 것은 ‘완성할 권리’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역할이 더 커질 수는 있겠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일만큼은 끝내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영화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선택하는 예술이다. 장면을 생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영화로 승인하고, 서사 안에 배치하고, 의미와 감정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의 판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디까지를 기술에 맡기고 어디서부터 인간의 감각으로 되돌릴지 결정하는 권한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인공지능 활용의 핵심은 효용성이 아니라 통제다. 동의 없는 얼굴의 사용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의 축소에는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 하며, 작품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권한은 끝내 인간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를 완성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존재 역시 결국 영화인이어야 한다.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이석창(강원대학교 교수, 영상제작자) l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교수이자 영상제작자.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한다.
사진: “ Safety Last!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때로는 영화보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 그 장면의 스틸 사진이 더 유명한 순간이 있다. 안경을 쓴 순진무구한 젊은 청년이 도시 한복판 높은 빌딩 시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아마 (스필버그가 제작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 빽 투 더 퓨쳐 >(1985)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신이 방금 떠 올린 그 영화, 마이클 J. 폭스가 매달려 있는 그 장면은 오마주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도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3D 영화 < 휴고 >(2011)를 연출하면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성룡도 < 프로젝트 A >(1984)에서 시계에 매달렸다. 더 많은 예를 열거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에서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아카데미의 영화 이론서 표지에도 등장한다. 나도 스틸 사진을 먼저 보았다. 영화사에서 빌딩 시계에 처음 매달린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이다. 위대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제는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름. ‘방랑자’ 채플린, ‘스톤 페이스(Stone face)’ 버스터 키튼과 함께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 코미디를 이끈 세 명 중의 한 명. 둥근 프레임의 뿔테 안경을 쓰고 (이 스타일의 안경은 이제 로이드 안경테라고도 불린다) 둥글고 납작한 보터 모자를 쓴 해롤드 로이드는 가난한 ‘모던 보이’. 그 소년이 시계에 매달린 영화는 Safety Last (1923)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금방 이해되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Safety Last”는 공사장에 붙어있는 “Safety First(안전 우선)”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안전 마무리>라고 하겠다. 하지만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면 수정하겠다. 역시 세 명의 위대한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채플린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험한 상황에 휘말려 들지만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신의 도움을 받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빠져나온다. 버스터 키튼은 자기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으로 전력 질주하면서 벗어난다. 해롤드 로이드는 반대이다. 버스터 키튼이 스피드의 대가라면 해롤드 로이드는 위험한 상황에 온갖 장애물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늘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실수를 연발하면서 가까스로 거기서 벗어난다. 그 실수의 시간을 최대로 연장한 영화가 <안전 마무리>이다. <안전 마무리> 중 / 사진: “ Safety Last! ”, IMDb 이번에는 LA가 무대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지참금을 구해야 하는 (영화 속의 이름도 마찬가지인) 해롤드는 백화점에 취직한다. 그런데 함께 지내는 빌에게는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같은 재능이 있다. 백화점 지배인은 손님을 건물에 끌어모으기 위해 1,000달러를 내걸고 빌은 12층 빌딩에 1층부터 등반하겠다고 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해롤드가 1층을 올라가게 된다. 일이 생긴 빌은 다음 층에 옷을 갈아입고 자기가 오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층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겨 바꿔치기는 그다음 층으로 미뤄지고 그러면서 가여운 해롤드는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게다가 그 자리에 여자친구도 도착한다. 층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고 너무 높이 올라가 이제 내려갈 수도 없는 해롤드는 위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클라이맥스는 빌딩에 달린 시계에 매달릴 때 벌어진다. <안전 마무리>는 해롤드가 12층 빌딩을 19분 50초 동안 등반하는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서 보는 영화이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진행되는 이 등반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좀 이상한 비교이기는 하지만 이 씬은 < 전함 포템킨 >(1925)의 오뎃사 계단 장면의 거의 두 배이다. 물론 마지막은 여자친구와 키스로 마무리하는 해피엔딩이다. 사진: “Safety Last!( 1 , 2 )”, IMDb 해롤드 로이드가 이 장면의 영감을 받은 것은 1922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다음 영화 회의를 위해서 영화사로 향하던 길에 LA 7번가 브록맨 빌딩 아래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두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자기도 올려다보니 한 남자가 건물을 타고 매달려 한 층씩 등산하듯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옥상까지 올라갔고, 마치 등반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옥상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환호에 응답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회의 시간을 놓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잠깐 본다고 생각했는데 등반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롤드 로이드는 보는 내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이 등반에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만일 이 건물 등반을 영화로 찍으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수촬영이 초보 단계였던 1923년에 이 장면은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안전 마무리>가 첫 상영을 마쳤을 때 극장 안은 비명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관객들은 이 시퀀스를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해롤드 로이드가 ‘진짜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걸 찍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할리우드의 특수촬영은 이미 전문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퀀스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처음 1층에서 올라가는 장면은 해롤드 로이드가 건물을 타고 오른다. 그런 다음 3층 높이의 세트를 지었다. 이 장면이 세트 촬영이고 거리의 풍경을 이중노출로 합성했다는 것은 매달린 해롤드 로이드를 보지 말고 카메라의 위치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 장면을 그 위치에 찍었다면 정말 위험한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보다 촬영감독이었을 것이다. 시계에 매달린 장면을 위해서는 또 다른 세트를 건물 옥상에 지었다. 그래서 옥상에 세워진 세트에 달아놓은 시계에 해롤드 로이드가 매달렸다. 건물을 타고 오른 후, 시계에 매달리는 해롤드 로이드 / 사진: “Safety Last!( 1 , 2 , 3 , 4 )”, IMDb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에 관한 콘티이다. 게다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해롤드 로이드에게는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하여튼 매달리고 올라가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1919년 촬영 도중 소품 사고로 해롤드 로이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다. 그러니까 오른손은 세 손가락으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안전 마무리>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촬영과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다시 볼 때마다 이 시퀀스가 위치와 각도, 편집 타이밍, 구도, 동작, 진행 사이로 끼어드는 장애물들의 리듬, 이 모든 것이 마치 정교한 마법 기계장치처럼 작동하고 있음에 감탄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해롤드 로이드의 손가락 이야기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매달려 있는 장면을 마음이 아파서 다시 보기 힘들어졌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다. 해비 페리를 잊으면 안 된다. 해비 페리는 1919년부터 해롤드 로이드의 위험한 장면 대역을 연기했다. 더 정확하게는 위험한 장면에서 해비 페리는 해롤드 로이드의 상대 쇼트(reverse shot)를 연기했으며. 높은 곳에 매달리거나 혹은 위험한 순간에 멀리서 해롤드 로이드 대신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해롤드 로이드의 모험을 믿었다. 해비 페리는 자신이 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해롤드 로이드가 세상을 떠나는 1971년까지 입을 다물었다. 스턴트맨으로 경력이 60년에 달하는 해비 페리는 험프리 보가트, 피터 로레의 할리우드 영화들, 심지어 키가 1미터 52센티였기 때문에 매리 픽포드의 대역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매리 픽포드가 달리는 말에 능숙하게 올라탈 수 있는지 비밀이 풀렸을 것이다. 물론 비밀이 풀릴 때도 있지만 할리우드는 스턴트맨들의 피의 역사이기도 했다. 해비 페리 (사진: “ Harvey Parry ”, IMDb / © 1980 Steve Banks_ mptvimages )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