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무비
- 감독
- 정남
- 제작년도
- 2012
KMDb 연재를 시작한 지 2년이나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되는 동안 연재와 함께 했다. 처음 기획단계에서 한국영화의 여성주의적 ‘정동’을 주제로 삼았고, 당시 양분된 반응을 얻었던 < 아워 바디 >로 연재를 시작했다. ‘정동’이란 주제로 연재한 마지막 글은 시작 같은 끝이 될 수 있는 영화로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영화사의 첫 여성감독인 박남옥이 연출한 < 미망인 >(1955)을 선택했다. 복잡하게 얽힌 오각관계를 재현하는 대화씬의 연출력이 빛나는 <미망인>은 거리를 방황하며 혼란스러움을 드러내는 발의 몽타주로 끝난다. 이 엔딩씬은 10분가량의 사운드와 마지막 장면의 프린트가 소실되어 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황을 영원히 끝낼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망인>은 박남옥 감독의 첫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차기작에 대한 열망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룰 기회는 없었다. 1955년에 개봉한 <미망인>은 전후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군통치 시기를 지나며 조선의 전통적 이데올로기는 균열이 나고 어느 정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통적인 성역할은 현실적으로 급격하게 해체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이나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전통적인 성역할이 유지되기 위해선 경제권을 갖고 있는 남성 가부장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많은 남자들이 참전 중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와, 가장이 된 여자들이 오롯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또한 전후 미처 특정 체제가 구축되기 전 미군을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물의 파장도 있었다. 문학과 영화는 당시 전후를 묘사하기 위해 전통적 성역할에 도전하는 신여성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프레걸(après-girl)이 그것이다. <미망인>뿐 아니라 동시대에 나온 < 자유부인 >(한형모)과 < 지옥화 >(신상옥) 등도 그러한 여성들을 그리고 있다. <미망인>의 주인공 이신자(이민자)는 전쟁 중 남편이 죽은 후 어린 딸을 홀로 키우고 있다. 신자는 딸과 함께 잘 살아 보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남편이 없다고 그녀를 우습게 본다. 옆집 여자 숙은 술 먹으며 빈둥대는 나이 든 옆집 남자와 신자를 엮어보려 하고, 남편 친구의 아내는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자기 남편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협박한다. 그녀는 생활비가 모자라 돈을 빌리려던 신자를 극도로 경계한다. 신자는 남편 없는 설움을 겪는다. 이때부터 신자는 태도를 바꾼다. 어차피 자기의 감정과 욕망이 저자거리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 쉽게 취급받을 바에야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와 사랑에도 빠져보면서 자기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신자는 무작정 순진한 여성도, 그렇다고 다른 영화들에서 묘사된 아프레걸처럼 치명적 매혹으로 남자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팜므 파탈도 아니다. 눈치 빠르고 생존력 강한 신자는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유부남의 호감을 적절한 선에서 이용하고, 양장점을 운영할 만한 능력과 성실함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전후 여성의 관점에서 경제적 문제들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현물이든 인맥이든 자원이 없는 신자가 왜 남편친구인 이사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랑하는 딸을 자신이 키울 수 없고 모성과 사랑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도록 강요되는지, 그리고 여성들 간의 불화와 연대는 왜 발생하게 되는지 등을 보여준다. 서사적으로는 신여성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면서 시청각적으로는 그 여성들에 매혹되며 성적으로 착취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이 영화에는 없다. 오히려 남편 있는 중상층 여자,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우는 여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각기 자기의 위치와 계급에서 어떠한 삶을 살고 욕망을 추구하며 꿈을 잃지 않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모두가 ‘해바라기’인 이들은 각자가 위치한 계급과 가족구성에 따라 남성들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는다. 세 여자가 택이라는 한 남자와 모두 성적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자는 애인과 딸, 그리고 사업적 성공 모두 갖고 싶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미망인’인 그녀에게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이 영화는 신자가 그러한 선택의 강요 속에서 오래 갈등하는 것을 보여 준다. 영화는 “이웃에 이러한 미망인이 있었다. 수렁에 빠졌을 때라도 그는 해바라기였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신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관객도 섣부른 단죄 이전에 그가 무엇을 원하고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지 지켜봐줄 것을 요청한다. 신자는 전후 팍팍한 삶에서도 포기하는 삶보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고 선택하는 생명력 있는 인간이다. 박남옥 감독은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여성들뿐 아니라, 계급이 다른 남자들을 배치해 그들도 비교한다. 이사장은 유부남이면서도 은근슬쩍 돈을 이용해 신자에게 호감을 표명한다. 신자는 그 노림수를 알면서도 생활비와 사업비를 위해 그의 접근을 안전한 거리까지만 허용한다. 신자가 이사장과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장면은 상투적인 대화 장면인데도 이면에 서로 다른 의도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기에 긴장감을 이끌어 낸다. 관객들은 오프닝에서 그의 아내가 신자를 찾아가 한바탕 대거리를 하고 돌아간 것을 이미 보았다. 그의 호감을 적절한 수준에서 받아내면서 신자는 그의 아내가 찾아온 사실을 전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켜 유감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그의 호감에 기반 해 도움을 받으면서도 더 이상의 성적 접근은 분명하게 거절하는 신자의 대화기술 속에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낀다. 극장 간판을 그리며 혼자 사는 젊은 남성인 택(이택균)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다양한 계급과 조건의 세 여성 모두와 관계를 맺는다. 신자를 포함해 세 여자는 옴므 파탈인 이 남자에게 매혹 당한다. 택은 돈이 많은 이사장 아내의 불륜남으로, ‘미망인’인 신자의 애인으로, 전쟁 중 헤어졌던 옛 애인 진의 순정남으로 오고간다. 오히려 전후에 여자들을 이용해 살았던 것은 가진 것 없는 젊은 남성일 수 있다. 박남옥 감독은 ‘아프레보이’(après-boy)라고 불릴 만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전후는 압도하는 폭력과 파괴가 휩쓸고 지나간 시간이지만, 또한 개인이 자기만의 윤리 속에서 선택의 기준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미망인>의 인물들은 전쟁 중 죽은 줄 알았던 애인(택과 진)과의 재회처럼 극적인 사건과 선택을 맞닥뜨린다. 이사장과 신자, 택과 이사장 부인이 술집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복잡하게 얽힌 선택의 길에 놓인 인물들을 동선과 공간화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넷이 따로 차에서 내려 대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정원길을 걸어들어가고 나오는 장면을 정성들여 보여준다. 그 길은 선택의 길이다. 먼저 들어온 택과 이사장 부인이 있는 방의 옆방에 이사장과 신자가 들어온다. 두 방의 교차편집이 진행된다. 이사장 부인은 택이 신자를 만난 것을 추궁하고, 이사장은 신자를 만나 자신의 아내의 외도를 알리며 신으로부터의 위로를 바란다. 그리고 먼저 방을 나온 신은 따로 나온 택과 그 길에서 만나 같이 나가버리고, 이사장 부인은 급작스럽게 만난 남편에게 냉대를 당한다. 신자는 택과의 사랑도 이루고, 이사장에게 투자도 받는다. 신자는 택과의 연애를 이어가기 위해 딸인 주를 동네 나이든 부부에게 맡기지만, 택은 옛 애인인 진을 만난 후 사라진다. 신자는 이후 양장점을 열고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 신자가 낮에 소설책을 읽다 방에 누워 애인 택과 딸 주의 환상을 보는 장면은 신자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신자가 독백으로 읽어 내려가는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인은 그 사나이와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 사나이는 하루의 향락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인은 큰 유리컵에다 진한 술을 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방바닥에 누운 신자 위로 디졸브된 택과 주가 교차로 편집된다. 신은 경제적 독립, 사랑, 가족 어느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신자는 신여성으로 방안 탁자에 놓여있는 액자 속 마를린 디트리히와 근대소설의 욕망하는 여성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미망인>의 마지막 10분은 안타깝게도 사운드가 손상되어 대사를 들을 수 없으며, 마지막 장면은 프린트가 완전히 소실되어 엔딩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신자, 택, 진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 수 없다. 사운드가 없는 무성영화의 상태는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속상한 신자가 옆집 친구 숙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진과 택이 함께 있는 장면과 교차된다. 그 술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가는지는 사운드가 소실되어 알 수 없다. 신자와 숙의 대화 장면은 깊은 고뇌에 빠진 척하며 홀로 방황하는 택 그리고 휘청대며 걷는 몽따주된 그의 발들과 교차편집 된다. 욕망의 대상을 뚜렷하게 알고 그것을 다 갖기 위해 달려가는 생존력 강한 신자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무력한 택 모두 혼란에 빠진다. 미망인은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자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제적 단어이다. 하지만 <미망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아가고 복잡한 현실과 욕망의 간극 속에서 갈등하는 신자를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그녀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크린 위 여성들의 복잡한 마음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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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극장은 대정관의 운영자 오카모토 세이지로(岡本淸次郞)가 대정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1935년 12월 경성부 약초정 41번지에 설립한 영화관이다. 약초극장의 설립은 대정관과 관련이 있다. 1934년 7월 쇼치쿠가 오랜 파트너인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쇼치쿠의 경성 개봉관으로 바꾸자, 쇼치쿠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1934년 10월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에 이어 대정관을 운영하게 된 오카모도 세이지로는 대정관이 쇼치쿠 2번관으로 남느니 후발주자인 PCL의 경성 봉절관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년 11월 15일 PCL과 경성 봉절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랜 영화관이자 낙후한 극장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에 PCL의 경성 봉절관의 지위도 동아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대정관에서는 다이토(大都)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향후 쇼치쿠영화의 경성봉절관이 되기 위해 약초정 큰길가에 약초영화극장을 신축하기로 한다. 1935년 7월 건축허가를 얻은 오카모도는 9월 말 상량식을 거행하고 극장 설립 공사를 시작한다. 극장의 설계는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가와자와 미치마사(川澤道正)가 담당했으며, 건축은 이쿠타구미(生田組)에서 맡았다. 총 공사비 218,000원을 들인 이 극장은 대지 면적 약 300평, 건축연면적은 658평에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지상 4층 건물이었으며 총 좌석수 1,172석(1943년 현재 1,000석)의 대형극장으로 2개층의 관람석을 가진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1935년 12월 16일 대정관이 문을 닫았고 경성 최초의 신양식 대영화극장(“京城 最初의 新樣式 大映畵劇場)”으로 광고된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개관 기념 작품으로 유니버설 초특작 괴기영화 <화석인간>(Night Life of the Gods, 1935)과 다이토(大都)영화사의 <검운용호당>(劍雲龍虎黨)과 <말괄량이와 소년>(ジャジャ馬と坊や)이 상영되었다. 쇼치쿠의 경성 봉절관이 되려는 시도는 쇼치쿠가 명치좌(明治座)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와 손을 잡으면서 실패했다. 약초극장은 1930년대 들어선 1,000석 이상의 거대한 토키극장의 효시였다. 황금좌, 명치좌, 경성극장과 더불어 4대 상설관으로 조선의 극장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는 이들 1류급 극장들을 각종 선전활동에 이용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12월 본정경찰서에서는 약초극장과 더불어 명치좌, 황금좌, 낭화관에 아래와 같은 방첩표어를 게시하도록 했다. 1. 우리들 총후국민은 힘을 다하여 스파이의 암약을 방지하자. 2. 우리들 총후국민은 군기를 잘 지킴으로써 군기보호를 다하자. 3. 우리들 총후국민은 정치경제 각반의 국정의 비밀을 잘 지킴으로써 국방력을 한층 더 굳세게 하자 4. 우리들 총후국민은 황도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눈과 귀를 잘 활용함으로써 스파이를 없이하자. 오카모토흥행부가 맡아 운영하던 약초극장은 개관 초기 서양영화를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일본영화를 늘려나갔다. 서양영화의 경우 계통과 상관없이 자율 배급이던 상황에서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된 이후에는 독일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일본영화의 경우 개관 초기 다이토영화가 토키영화관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1936년 4월 이후에는 PCL 영화로 계통을 바꿔 상영하였다. 경성의 PCL 봉절관으로 인식되던 약초극장은 1940년에 일어난 9개월에 걸친 흥행권 분규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0년 2월 약초영화극장이 PCL의 후신인 도호(東寶) 영화의 경성개봉관 지위를 포기하고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와 계약을 체결하여 신코의 개봉관이 되자 도호가 위약금 5만원을 청구하였다. 도호의 소송에 약초극장이 신코키네마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도호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신코키네마에서 약초극장에 대해 7만원의 소송을 시작했다. 도호와 신코를 대상으로 한 흥행권 계약 문제는 결국 약초극장 운영자 오카모도 세이지로가 신코에 위약금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도호영화를 계속 상영하기로 확정하면서 9개월에 걸친 분규는 일단락된다. [자료] 1941년 6월 설립된 약초악극단(《매일신보》, 1941.06.08)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어 필름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약초극장에서는 어트랙션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악극을 영화와 함께 상연하기로 하고 전속의 악극단을 두기로 하고, 1941년 6월 조선연예기업사 사장 안익조가 주재하는 신흥악극단을 전속으로 삼았다. 신흥악극단이 이름을 바꾼 약초악극단 내에는 정대택, 김영택, 백란, 김연실 등 연극,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과 밴드까지 60여명의 단원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개막 공연작은 박운학 연출의 <그리운 멜로디>, <반도의 선율> 등이었다. 약초극장의 어트랙션의 큰 인기를 끌면서 1941년 7월 말부터는 <바다의 카니발>(전13곡)로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연장공연을 계속했다. 전속의 악극단을 둔 약초극장은 1941년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무대공연에 걸맞게 개축하게 된다. 1943년에는 무대 공연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극장 전속의 가극단을 조직했다. 이번에는 기성의 극단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약초극장 주인 오카모토 세이지로가 대표가 되어 가극단을 조직한 것이다. 총무는 약초극장의 지배인 우라노 하지메(浦野元), 연출은 김승구, 작곡은 이면상, 단원으로는 김옥춘, 현정남 등이 포진되었다. 1943년 7월 27일 당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약초가극단은 8월 8일 약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자료] 연극전용관으로 전환한 약초극장 전속 약초가극단의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4.11.23) [자료] 약초흥행주식회사 직속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5.05.15) 영화관으로 운영되던 약초극장은 1944년 11월 23일 연극전문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약초극장에서는 예원좌(<별의 합창>, <봄바람>, <어머니와 아들>, <눈 나리는 밤>), 고협(<흰독수리>, <삼남매>, <만리장성>, <상아탑에서>, <양자강>), 현대극장(<백야>, <청춘의 윤리>, <대추나무>, <에밀레종>, <애정무한>), 극단 태양(<야화>)의 연극공연과 후생악단, 경성교향악단의 음악회, 후지하라 요시에의 독창회, 약초가극단(탐정활극 <여간첩>), 경성악극단, 조택원무용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1945년 5월에는 약초가극단 이외에 유치진이 주재하던 현대극장을 약초흥행주식회사의 직속극단으로 두었으며 약초극장에 뿌리를 둔 약초흥행주식회사는 해방 전까지 약초가극단과 현대극장을 거느린 흥행전문회사로 진화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약초흥행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홍찬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으며 약초극장을 인수하였으며 이름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수도극장의 프로그램은 연극과 악극이 주였으나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서울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다. 수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던 홍찬은 무리하게 안양촬영소를 건설하면서 생긴 자금난으로 1959년 부도가 났고 수도극장은 매각되었다. 1962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수도극장은 이름을 스카라극장으로 바꾸었다. 2005년까지 존속하던 이 극장은 정부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려 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헐어버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약초영화극장의 기공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신문》, 1935.07.17.) [자료] 《 조선중앙일보 》 , 1936.03.29. 조택원 ( 趙澤元 ) 무용회 , 4 月 6 日 , 10 日 까지 , 약초극장 에서 무용가 조택원 ( 舞踊家 趙澤元 ) 씨는 오는 사월 육일부터 십일까지 약초극장 ( 若草劇場 ) 에서 무용회를 연다는 바 무용 종목은 『 일허진 혼 ( 魂 ) 』 외 아홉까지나 된다는 바 조택원 씨 외 연구소원 일동이 총출연하는데 이번에는 주야 공연이라고. [자료] 《 매일신보 》 , 1937.07.15. 북촌 유일의 영화극장 단성사 , 연극으로 전향 , 중앙무대와 계약 성립 북촌 유일의 양화전문 영화극장으로서 남북촌의 영화 『 팬 』 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잇든 단성사는 강력한 경쟁 상대의 진출에 의하야 순 ( 純 ) 영화극장으로서 경영해 나가기 곤란을 느끼게 되어 벌서부터 연극상설관으로 전향한다는 풍문이 돌드니 드듸어 칠월 삼십일일부터 연극을 상연하기로 극단 중앙무대와 간에 계약이 성립되였다고 한다 . 수년전ᄭᅡ지는 경성 유일의 양화봉절관으로 독보 ( 獨步 ) 해오든 단성사도 경성의 흥행시장을 노리는 외래의 대자본의 진출에 의해서 명치좌 약초극장 갓흔 대 ( 大 ) 영화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이 영화 『 팬 』 유치에 비책을 다하게 되엿스나 단성사는 극장의 협착 ( 狹窄 ) 이라는 『 핸듸 - 캡 』 이 잇슬 뿐 아니라 경쟁이 초래한 양화가격의 등귀 ( 騰貴 ) 로 인하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잇드니 최근에는 해마다 잇는 일이나 하절이 되자 관람객이 붓적 줄어버리고 말았음으로 그 타개책을 연극으로 전향하는데서 구해보게 된 것이다 . 금후로는 흥행기업에 이해를 가진 대자본의 적극적 진출에 의하야 냉방 , 온방 , 장치 등 새로운 설비를 구비한 대극장을 신축하기 전에는 일류 양화극장으로서의 존속은 허락지 않는 정세에 잇슴으로 만일 단성사가 영영 연극극장으로 전향하야 버린다면 이로써 조선인 경영의 영화극장은 그 자최를 감춰버리게 되는 세음인데 중앙무대와 단성사 간의 계약 성립에 관하야 양측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선 ( 爲先 ) 삼주간의 계약 , 중앙무대 홍찬 ( 洪燦 ) 씨 담 ( 談 ) 중앙무대는 제 2 회 공연ᄭᅡ지를 부민관에서 햇고 삼회 공연 역시 이십일일부터 부민관에서 할 예정이나 부민관은 연극을 상연하기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만흘 ᄲᅮᆫ 아니라 집대 ( 貸 ) 가 워낙 비싸기 ᄯᅢ문에 경비가 만히 들고 해서 단성사와 위선 칠월 삼십일일부터 삼주간의 계약을 매젓습니다 . 앞으로 장기계약을 맺을지 어ᄯᅥᆯ지는 두고 보아야 알겟습니다 . 시험적으로 연극을 해볼터 , 단성사 박응면 ( 朴應冕 ) 씨 담 아시는 바와 가티 최근의 양화가격이 무척 비싸진 데다가 협착한 단성사로서는 수용인원이 수배되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힘이 들고 기외에 말못할 불리한 사정이 잇는데다가 금년에는 웬일인지 소위 『 하고 ( 夏枯 ) 』 가 우심 ( 尤甚 ) 함으로 이 타개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ᄭᅳᆺ해 연극을 해보기로 햇습니다 . 중앙무대와 결정적으로 계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금명간 확정을 볼 것입니다 . 여름 『 씨 - 슨 』 이 지나고 가을에도 역시 연극을 계속 할지 ᄯᅩ는 다시 영화를 상영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 좌우간 연극을 공연시켜보아 그 성적 여하에 따라 결정할 작정입니다 . 최근 더욱이 악해진 흥행계에서 적은 자본으로 다수한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 나가기에는 남이 모르는 여러 가지 고심이 숨어잇습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5.05.16. 현대극장과 약초의 제휴 국민극 수립을 표방하고 성립된 현대극장은 그동안 고정한 극장이 없어 상연할 적마다 장소가 갈니여서 그 활동이 얼마간 ○○ 되어 왓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약초흥행주식회사와 특수계약 ( 特殊契約 ) 이 결성되여 매월 정기 공연을 하게 되엇다 . 압흐로 동 극단은 약초극장을 중심으로 하야 연극활동을 하게 될 것으로서 이와 갓흔 극단과 극장의 합리적 제휴는 크게 그 장래가 주목된다 .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