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시간
- 감독
- 정다희
- 제작년도
- 2012
각자의 속도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정다희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시를 닮았다. 일상에서 흔히 쓰고 아는 단어를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해주는 시처럼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즉각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언제나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2012년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 졸업작품이었던 <나무의 시간>부터 2014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단편 대상 수상작 <의자 위의 남자>, 2018년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단편 대상 수상작 < 빈 방 >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세계 속에 겹쳐있는 수많은 세계의 이미지들이 언제나 그의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칸 감독 주간에 초청됐던 <의자 위의 남자>에 이어서 올해 두 번째로 칸 감독 주간에 초청된 < 움직임의 사전 >(2019) 역시 그렇다. 2019 인디애니페스트 국내 경쟁 부문 대상인 ‘인디의 별’ 수상, 13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최우수상(KT&G상) 수상 등 국내에서도 꾸준히 수상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은 기준, 반응, 역할, 가속, 인식이라는 다섯 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 개의 주체를 통해 서로 다른 움직임의 속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인간, 동물, 식물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반응하고 살아간다. 걷는다고 하기엔 초미세한 걸음을 떼어놓는 젊고 풍성한 나무, 후들거리는 다리처럼 아슬아슬한 보폭으로 그보다는 조금 더 속도를 내어 걸어가는 노쇄하고 메마른 나무, 보통 속도로 걷은 사람과 그를 빠르게 스치며 뒷걸음쳐서 뛰어가는 그림자, 그리고 순식간에 달려오고 달려가는 강아지. 재밌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는 순식간에 세상을 스쳐가고, 어떤 존재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마냥 느리게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끝내 어딘가에 도달하고야 만다. 종이에 목탄과 연필로 그려서 컴퓨터로 채색한 캐릭터와 화면엔 유쾌하고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중 ‘거리가 달라지면 시간도 달라진다’는 내용에 영감을 받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걷고 보고 일하고 달리다가 멈추는 캐릭터들의 동작과 속도는 각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서 변하거나 유지된다. 그들이 몸담은 배경 화면은 같은 화면을 위와 아래로 붙여놓기도 하고, 뒤집어서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건 상대적이고, 생각을 바꿔서 상대를 보면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는 열심히 달리며 그동안 달려온 자신을 뛰어넘으려 하지만, 더 힘껏 달려서 가속이 붙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앞서 달리고 있던 나는 쫓아오는 나 자신에게서 달아나려고 더 속도를 내기 때문이다. 재밌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 등장하는 캐릭터들마다 웃음이 터지는 타이밍과 그 웃음의 정도도 다르다. 강아지는 즉석에서 깔깔 웃으며 꼬리를 흔들지만, 나무는 한밤중 집에 가는 길에 서서야 온 몸을 흔들며 큰 웃음을 뱉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이 서로 다른 차이일 뿐 틀림이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세계 안에서 지구와 태양계, 우주도 우리의 인식을 넘나들며 각자의 속도대로 조화롭게, 다르게, 움직인다. <움직임의 사전>은 이렇듯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가 하나이면서도 여러 개이고, 서로 겹치면서도 각자의 영역으로 나워져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 대사 없이, 움직임의 동작과 사운드로, 설교하고 나무라지 않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할까. 곱씹을 수록 유머러스해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가 하면, 헤아리기 쉽지 않은 깊이에 한번 더 곱씹게 되기도 한다. “러닝타임 10분인 이 작품을 하루에 2초씩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안에 각자의 속도로 살 수 있는 세계가 오롯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나로 살아가되, 함께 살아가는 방법. 그것이 이 안에 있다.
2014년은 그 어느 때 보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승승장구했던 정말 신나는 한 해였다.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라 손꼽히는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가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날아들기가 무섭게 바로 뒤이어 프랑스에서 열린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단편 부문 대상을 거머쥐었다는 잇따른 낭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안시를 사로잡은 주인공은 바로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정다희 감독이었다. 애니메이션이 시간을 다루는 매체인 동시에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점에 매료된 그녀는 한국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2012년 파리 아르데코 애니메이션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졸업작품 < 나무의 시간 >(2012)으로 2013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다. < 의자 위의 남자 >는 어느 한 남자의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거울 속 한 남자가 의자 위에 앉아있다. 그곳에 얼마나 오래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 버거워 보인다. 남자의 머릿속 의식의 흐름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남자가 있는 방안의 공간을 타고 넘어 어느 새 우주 공간까지 확장되어 뻗어 나간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내 관념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면, 과연 나는 실존하는 것일까?’ 남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회의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시작과 끝이 모호한 순환의 고리 위에서 계속 돌아간다. 그림 속 남자는 분명 작가에 의해 창조된 형상이지만, 작가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아닐까 하는 성찰로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설정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경계가 모호한 관념의 세계까지 다다랐다고 생각할 즈음, 남자의 시간과 공간은 되돌아 감기를 시도하며 파편화된 생각의 흐름을 재배열하여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공식 데뷔작 < 나무의 시간 >(2012)이 나무들의 다양한 삶에서 영감을 받아 노인과 나무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삶을 관조한 작품이라면, < 의자 위의 남자 >(2014)는 남자와 화자(작가)간 관계를 통해 존재에 대한 내적 성찰의 흐름을 무한대로 제시하고 있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그녀의 신작 < 빈방 >(2016) 역시 주된 테마는 전작들과 연결성상에 있는 작품이지만 이번에는 방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벽, 문, 창문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들을 사람의 기억과 흔적의 알레고리로 치환시켜 이를 통해 존재에 대한 내면의 이미지를 변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여러 해를 묵혀 오랫동안 숙성시킨 장맛처럼 담담하지만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풍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와 함께 유려하고 정제된 드로잉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녀가 펼치고 싶은 상상력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며 보는 관객의 마음 한 구석을 교묘하게 자극하면서 작품 속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장난감(Toy), 변신(Transform), 교육(Teaching). 최근 한 메이저급 제작-배급사가 보도자료를 통해 내 놓은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의 주요 키워드이다. 변신하는 로봇이나 캐릭터가 등장하여 교육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캐릭터 시장에서도 괄목할 만한 수익을 창출해 낸다는, 말하자면 최근 애니메이션 산업의 제작과 수익구조의 수요관계를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다. 투자, 제작, 방영 및 노출, 그리고 수익으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과정 내부가 워낙 하이리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적어도 예의 키워드는 흔한 말로 안전빵(?)과 같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성공한 애니메이션들은 “교육적인 변신 장난감이 주인공”이었다는 것. 부분적으로는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이 어색한 문장의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면 동의하는 지점 너머에 불쾌한 무언가가 있다. 먼저, 변신(Transform). 변신이라는 말은 애니메이션의 오래된 특성이자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하나의 점, 선, 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플라즈마 같은 속성으로 “이것으로부터 저것으로 옮겨가는” 이미지의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타인과 발터 밴야민과 같은 이들이 애니메이션에 호감을 가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속성은 신체와 신체, 신체와 사물 등으로의 이행, 즉 ‘~이 되기’가 익숙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면을 사용하여 신체를 변화시키거나, 신체와 결합하거나, 아니면 성장의 시간을 압축시켜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 - < 요술공주 밍키 >와 같은 변신물 - 의 경우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수많은 설화들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변신은 다양한 이야기소로 변형/재가공 되면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며,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예상했다시피, 여기 (3T)에서의 변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변신하는 기계 또는 로봇이다. 여기에는 이후에 도달하는 다른 키워드 ‘장난감(Toy)과 결부’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형상의 변화와 다양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변신로봇이라는 고정된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이다. 그냥 냉정하게 변신 로봇이라 말하자. 두 번째, 장난감(Toy). 엄밀하게 말하자면 5세 이하 (남자)아이들을 위한 완구 시장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다. 가장 폭발적인 소비시장으로 자리 잡은 이들의 구매력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적절한 상품미학이 결합된 로봇 완구는 높은 구매 충성도까지 형성하며 재구매의 효과까지 가지고 있다. 문제는 완구의 타겟 특성상 노출과 소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완구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와 결합한다. 애니메이션은 홍보와 노출이라는 마케팅의 요소가 되고, 제품은 완구로 대체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이야기나 캐릭터들의 디자인은 완구를 위한 디자인으로 고착된다. 예컨대, 캐릭터의 팔과 다리는 가늘어서는 안 되고, 완구로 만들어졌을 때 안정적으로 바닥에 고정될 수 있어야 하며, 변형이나 가동의 방식이 복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캐릭터라는 것이 작품의 이야기라는 내부에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외연에서 구성되는 이미지는 배제되고 만다. 이러한 설정 내부에서 인간이라는 캐릭터가 남아있기/끼어들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 덕에 작품에는 이야기가 구축되기보다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형국이 되기 쉽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Teaching). 예의 두 키워드가 장난감(Toy)으로 귀결되고 마는 상황에서 교육은 서사에 대한 일반적인 키워드가 될 수가 있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은 미취학 아동들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 등이 될 터인데, 우정, 협동, 배려심 등의 것들일 것이다. 분명 캐릭터들의 구축 방식을 따르자면 작품의 성격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강함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끼어든 것에는 서브 타겟으로 볼 수 있는 부모세대에 대한 어필이라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모순적 양식이 발생한다. 변신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에 교육적 요소를 심어야 하는 부담감이다. 그러니 모두 협동이 필요한 ‘구조대’다. 선악의 관계망에서 번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으면서도 변신하는 로봇의 액션이 필요하니 당연히 구조대 만큼 좋은 요소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최근의 화두들이 ‘힐링’과 ‘안전’이라는 표제 아래에 줄 서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같은 바람도 이해가 가능하다. 어쩌면 3T는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현황과 지속가능성, 그리고 발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키워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키워드가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장담해 줄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함정에 가깝다. 상업적 성공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의 기획이 여전히 이러한 안전빵 내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키워드라는 것이 그냥 문득 툭툭 뱉어진 듯 구성된 허술하거나, 모순적인 형국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키워드를 언급하였던 예의 보도자료를 뿌렸던 국내 굴지의 대기업도 스스로 안전하다는 주문을 거는 듯한 모습이라 간혹 실소를 짓게 한다.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5세 이하 미취학 아동들의 완구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 주겠다. 그러면서도 그곳이 아주 통 크게 다양한 우리 애니메이션도 배급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에겐 정다희 감독의 < 의자 위의 남자 >,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도 있고, 장형윤 감독의 <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 안재훈 , 한혜진 감독의 작품들도 있으며,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도 있다. 여전히 건재한 이성강 감독의 작품들도 있으며, 홍덕표 감독의 < 발광하는 현대사 >나, 단편 문학을 그려낸 <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도 있었고, 그리고 한지원 감독의 < 생각보다 맑은 >(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