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어보세요
- 감독
- 김태환, 정도빈
- 제작년도
- 1964
572돌 한글날이 며칠 지나긴 했지만 이번 호에서는 한글 관련 영상을 소개하려 한다. 한국인 감독 김인태 (1931~)가 1967년 캐나다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NFB)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Korean Alphabet(한글) >이다. 파스텔 보드를 이용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NFB를 대표하는 작가 노먼 맥라렌(Norman McLaren, 1914~1987)이 음향을 맡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인공 사운드(synthetic sound)를 삽입해 완성도를 높였다. 노먼 맥라렌은 1952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을 수상한 < Neighbours >를 비롯해 다수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실험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인물로, NFB가 애니메이션과 실험영화의 뛰어난 작품과 작가들을 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작가 노먼 맥라렌의 참여로 더욱 주목을 받은 <한글>은 1968년 제3회 테헤란 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았다. <한글>의 오프닝 크레디트 <한글>은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다가 2002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주관한 ‘캐나다 애니메이션 특별전’에서 상영되며 발굴된 작품이다. 김인태 감독은 NFB 최초의 한국인 소속작가로 활약한 것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고, 이듬해인 2004년 제8회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은 어떤 배경으로 NFB에서 <한글>을 만들게 된 것일까? 이 글에서는 <한글>이 탄생하기까지 여정을 대한(對韓) 원조 사업과 연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글>의 장면들 <한글> 제작 당시 김인태는 한국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소속 감독으로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 연수 중에 있었다. 김인태 감독이 소속되어 있던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법령에 의해 독립되기 전까지 통칭 ‘영화제작소’라 불렸는데, 이는 1958년 UN과 미국에 대한 원조로 설치된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와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제작 스튜디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950~60년대 한국의 공보 선전은 미국에 대한 원조 정책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진행되었는데 이 영화제작소 역시 카메라, 인화기, 애니메이션 촬영기인 옥스베리(Oxberry) 등의 기계 설비를 구축하는 것부터 인력의 양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원조를 받았다. 그리고 NFB를 역할모델로 하여 한국의 교육영화 제작 시스템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 원조 사업에 따라 미국의 전문 인력들이 ‘시러큐스 계약(Syracuse Contract)’이라는 ‘팀’을 이뤄 영화제작소에서 연출, 촬영, 녹음, 미술 등 분야별로 3~5년에 걸쳐 영화 인력을 양성했다. 김인태 감독은 바로 이 교육 인력 양성 사업을 위해 1958년 선발된 영화제작소의 제1기 공채 인력이었다.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에 등장하는 영화제작소의 전경과 스튜디오 촬영 모습 (좌) 시러큐스 계약 인력과 영화제작소 행정관들의 회의 모습 (우)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이성철 소장자료) 영화제작소는 1958년, 최신식 기재 설치와 시러큐스 계약 인력이 파견되는 것에 맞춰 연출, 촬영, 편집, 미술 등 각 분야의 공채 직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중 미술부의 인력들은 실사영화에 필요한 제목, 자막 등의 기본적인 미술 작업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법을 교육받았고, 이에 따라 1958년부터 문화영화에 부분적으로 애니메이션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이러한 대한 원조로 진행된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 사업에 맞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애니메이션 광고를 제외한 소위 ‘최초의 순수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국립영화제작소가 1962년에 제작한 흑백 단편 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 박영일 연출, 정도빈 작화) 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후에도 국립영화제작소는 미술부의 박영일과 정도빈 그리고 한성학 등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개미와 베짱이> 홍익대학교 미대 출신의 김인태 감독은 아쉽게도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교육영화 전문 인력 수련 후 <전화가설>(1959), <전화도수제>(1961), <자동전화는 이렇게>(1962), <전화를 쓸 때는>(1962) 등의 체신 교육영화와 <치아와 건강>(1961), <기생충을 없애자>(1963) 등의 보건위생 교육영화를 비롯해 다수의 문화영화를 감독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NFB에서 <한글>의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미 작품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은 노먼 맥라렌과의 만남은 이 작품의 완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인태 감독의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영화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의 노먼 맥라렌 작품 관람과 NFB 연수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 배경에는 1961년 12월 NFB와 국립영화제작소 간에 맺어진 문화영화 교환협정이 있었다. 양측은 이 협정에 따라 서로의 영화를 교류했는데 일례로 국립영화제작소는 NFB에 <새로운 고향>(양종해, 1961)을 배급하고, NFB의 <협동조합>과 <의자공과 소년들>을 들여와 우리말로 내레이션을 녹음해 상영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교류 배경에는 원조 사업 초기 영화제작소가 모델로 상정한 NFB의 제작 시스템이 큰 영향을 끼쳤다. NFB는 분야별 소재에 따른 분업화와 1인 제작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역할모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감독들은 NFB의 영화들을 시사하고 제작에 참조했으며, 최봉암, 김인태 등의 감독들이 1960년대 중후반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에서 연수를 받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자공과 소년들>의 오프닝 크레디트: 문화영화 교환협정을 사전 공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로서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Welcome to Motion Picture>) 목적하에 설립된 영화제작소는 교육영화 분야에서 애니메이션 인력을 비롯한 다재다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지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립영화제작소로 확대 개편되며 원조사업 진행 당시 집중되었던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이라는 목표를 넘어 정부 선전을 위한 영화제작에 치중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 이 글은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 관계」,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와 공영민, 「<의자공과 소년들> 해제」, 허은 엮음, 『영상, 역사를 비추다: 한국현대사 영상자료해제집 7-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해제집 1』, 선인, 2017에서 일부 발췌하여 엮었음을 밝힌다. 출처 <Korean Alphabet> - NFB 누리집 https://www.nfb.ca/film/korean_alphabet /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 개미와 베짱이 > < 전화를 쓸 때는 > < 치아와 건강 > < 의자공과 소년들 > -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Welcome to Motion Picture >(1959) - 한국영상자료원 테드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 콜렉션 소장자료 이순진, 「김인태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2년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문화영화 1: 김인태‧이지완‧이정섭』, 한국영상자료원, 2012.
2018년 6월 13일 민심의 향방을 가늠하는 무대인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계 개편이 시작되었고, 결과를 분석하는 정치‧사회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선거의 힘과 영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방선거는 대선이나 총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편인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투표율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투표율인 60.2퍼센트를 기록한 이번 선거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관심은 20.14퍼센트라는 사전투표율과 선거 당일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지방선거에 쏟아진 열렬한 관심은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확인한 참여하는 시민의 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와 투표의 중요성은 다양한 홍보를 통해 강조된다. 근래에는 사회 각 분야 주요 인물들의 캠페인 광고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따라 SNS를 통한 개개인의 홍보도 큰 영향력을 끼친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미디어 캠페인이 이루어졌을까? 대표적인 예로는 정부 산하의 국립영화제작소나 미공보원(USIS)이 제작한 선전영화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애니메이션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대중에게 주제를 설파할 수 있는 최적의 매체였다.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를 위한 오락보다는 그 어떤 매체보다도 좀 더 용이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관객을 설득하는 교육계몽 교재로 활용되었다. 1960년 공보국 영화과가 제작한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1) 와 1963년 미공보원이 제작한 <나에게 물어봐!(Ask Me!)>(김태환) 2) 는 애니메이션이 대중의 교육계몽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나에게 물어봐!(Ask Me!)>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는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총선인 민의원‧참의원 동시 선거에 맞춰 제작한 3분 8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이다. 7.29 총선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붕괴를 가져온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후 출범한 제2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선거니만큼 무엇보다도 공명정대한 선거가 될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또한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부정선거들과의 손쉬운 비교를 통해 공명선거를 홍보했다.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바야흐로 우리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공명한 선거를 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라든지 “여러분의 귀중한 한 표가 금력에 좌우 당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난날 여러분의 자유의사를 위협해오던 폭력배는 법의 심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젠 두려워할 것 없이 마음 놓고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와 같은 내레이션은 <코주부>로 유명한 만화가 김용환의 코믹한 그림에 더해져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영화과는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선전‧선동에 가장 폭넓게 이용된 기관이었다. 애니메이션의 홍보구호인 ‘공명선거’ 돈으로 매수하려는 후보의 모습 이승만 정권의 정치 건달들을 묘사한 모습 투표소의 모습 투표를 마친 후 만세를 부르는 모습 결과적으로 의원내각제로 변경한 제2공화국의 양원제 국회 구성을 위한 제5대 총선은 전 정권에 대한 심판, 달라진 선거 문화 등을 강조하며 많은 관심 속에 치러졌으며, 자유당은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을 얻는 데 그치며 몰락했다. 하지만 국민의 투표로 구성된 제5대 국회는 5.16 군사정변으로 불과 9개월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나에게 물어봐!>는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주의와 선거를 교육하기 위해 제작한 6분 26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이다. 감독은 앞서 살펴본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의 작화를 담당한 김용환의 동생 김태환이 맡았으며, 미공보원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양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정도빈이 작화를 담당했다. 각본은 미국 영화평론가이자 교육가인 리처드 다이어 매칸(Richard Dyer MacCann)이 담당했는데, 애니메이션 제작 당시 그는 미국 국무성 지원으로 한국에 머물며 국립영화제작소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에게 물어봐!>는 대통령 선거 한 달 전에 제작이 완료되어 불과 선거 보름 전 상영에 들어갔다. 4) 하지만 선거를 홍보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애니메이션은 원시인과 현대인을 내세워 쉽고 단순한 그림 연출을 통해 이들의 차이가 참여하는 민주주의에서 발생하며, 투표를 통해 좋은 지도자를 선출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주제를 전달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동물처럼 행동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든지 “아무리 지도자가 좋아도 우리는 한 번씩 선거를 해야 합니다. 현존하는 두 명의 진짜 상대가 있는 선거지요. 우리는 사람입니다. 심사숙고하고 발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투표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기명 비밀 투표 같은 것 말이죠” 5) 와 같은 내레이션은 <나에게 물어봐!>의 제작 방향을 잘 보여준다. 원시인이 현대인으로 변한 모습 독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는 사람들 투표를 하는 사람과 당선자의 행진 의회의 모습 제작 배경을 둘러싼 당시의 한국 상황을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나에게 물어봐!>는 공정한 선거, 균형 잡힌 정당 정치, 건강한 민주주의 등을 설파하는 교육계몽영화로 간주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7.29 총선을 홍보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와는 달리 <나에게 물어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와 투표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원론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당시의 한국 상황은 그 어떤 때보다도 혼란하고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제작 주체인 미공보원이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한국의 자세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대신 독재를 방지하고 좋은 리더를 선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오직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국민이 주권자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1)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소장자료. 2) <나에게 물어봐!(Ask Me!)>, 한국영상자료원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 콜렉션 소장자료. 3)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4) 『동아일보』, 1963년 9월 20일자 6면. 5)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최근에 《애니메이툰》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50년사를 돌아보는 취지로 인물 열전을 기획했다.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가 쌓여 한국 애니메이션사를 돌아볼 수 있는 한 권의 오롯한 책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인터뷰의 첫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 홍길동(1967) >을 연출한 신동헌 감독님이었다. 그 뒤로 네댓 분을 더 만나 뵙고 이제 막 80년대를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그 세월을 짚고 오르기가 숨이 차다. 이제는 백발노인이 된 그들이 작품의 연도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이구동성으로 “말도 못한 고생”을 외치는 걸 연거푸 듣다보면 내가 전쟁사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감독님은 애니메이션의 ‘애’자도 듣기 싫어했다. 원로 감독님들이 가난과 고생, 눈물을 섞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 없었던 근거는 ‘창작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 고혈을 짜내 애니메이션 만드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것도 문제지만, 일본에서 ‘아톰’이 히트를 치면 ‘아텀’이라도 만들게 했던 힘센 자본의 논리도 큰 산이었다. 게다가 70년대 들어서는 아류작보다 더 돈이 되는 하청제작의 붐이 일었고, 여기에 부응하지 않고 창작을 하기란 더 어려웠다. 애니메이션이 가난과 직결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과 달리 하청제작이 쏠쏠한 사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몇은 창작을 그만뒀고, 몇은 아예 애니메이션을 그만뒀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건만 다루는 손길은 엉성하고 거칠었다. 신동헌 감독님의 < 홍길동 >은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2007년 일본에서 발굴될 때까지 필름 없이 기록으로만 존재했다. 장편보다 앞서 1961년 제작된 최초의 단편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은 완성 당시, 정작 고생해서 만든 정도빈 감독님은 필름프린트를 받을 수 없었다. 자료는 보관하던 사람의 분실로 몇 장의 콘티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제는 중풍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손으로 정 감독님이 인터뷰 때 그려준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 캐릭터는 그냥 유치원생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소중한 가치들이 증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가와모토 기하치로 감독이 얼마 전 작고한 일은 알아도 50년 전 한국의 여관방에서 셀 200여 장을 물로 씻어가며 첫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이 백발이 성성한 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만들 때나, 만들고 나서나 빛을 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진데 누군들 애니메이션 하고 싶을까. 그렇게 많은 작가가 재능을 등지고 애니메이션계를 떠났다. 놀랍게도 창작애니메이션하기 어려운 환경은 먹고살기 어려웠던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주 오래 전에 애니메이션을 그만 둔 한 원로 감독님이 “지금은 컴퓨터가 있어서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딱히 꾸며낼 말을 찾지 못했다. 셀을 씻어서 찍을 필요도 없고, 여러 지원기관도 생겨 좋은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창작애니메이션을 고난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익숙한 것은 왜일까.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자기 돈으로 만들라”는 어느 지원기관 전문가의 조언처럼 아직도 한국애니메이션에서 창작은 곧 외로운 싸움이다. “한국의 ???를 만들자”는 힘찬 구호는 “아텀을 만들라”는 예전의 강요와 약간의 온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대세를 따르지 않은 창작물은 원로 작가들의 작품이 사라졌던 것처럼 선보일 새도 없이 증발하고 있다. 그런 2010년을 지나고 있는 애니메이션사에서 또 몇 명의 작가가 창작을 그만두고 떠나게 될지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고난과 역경을 섞지 않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가 끝나면 책의 제목을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한국 애니메이션사》 혹은 《한국 애니메이션 전쟁사》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다. 더 이상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가 역설적으로는 가장 고됐던 시기가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