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권장 버스정류장? 흡연권장 버스정류장!
- 제작년도
- 2010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국어 시간에서 접했을 소설 『오발탄』(이범선, 1959). 1959년 발표된 이 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듬해인 1960년에 영화로 제작되어 1961년 봄 개봉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레이션의 껍데기로 지붕을 이었다”라는 원작의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묘사가 보여주는 해방촌의 모습처럼, 전후 서울의 실상을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사실적 재현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며,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는 원작의 뛰어난 영화화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오발탄>은 당대 서울의 도시 공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함으로써, 도시사와 도시계획사 연구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서울은 국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서의 도시계획과 고도경제성장의 동력 속에서 매해, 아니 매달 철거와 신축이 반복되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했을 때, 1960년 하반기에 촬영된 <오발탄>은 6.25 전쟁과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생생히 남아있던 서울의 민낯을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카메라에 담아낸 셈이다. 덕분에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 직후 서울의 모습을 마치 타임캡슐을 열어보듯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 이제 영화가 포착한 서울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철호의 판잣집과 계리사 사무실 영화 초반, 카메라는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산비탈의 판자촌 사이를 걸어 나오는 모습을 비춘 뒤, 곧장 서울 도심의 계리사 사무실을 비추는 시퀀스를 보여준다. 사는 곳은 무너져가는 판잣집이지만, 일터는 시내 한복판의 말끔한 오피스 빌딩이라는 점에서, 당시 서울의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투영된 도시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철호의 계리사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입구에는 ‘대한상공회의소’라는 명판이 걸려 있는데, 2025년 현재까지도 상공회의소는 남대문 바로 옆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비탈의 판잣집을 내려온 철호가 서울의 중심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그가 아침저녁으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치라 해석할 수 있다. 판잣집 사이로 내려와(상) 계리사 사무실(대한상공회의소 건물)로 들어서는 철호(하)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 1957년에 준공되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現 흥국생명빌딩)은 영화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하는 건물이다. 카메라가 남대문을 잡으면 반드시 화각에 들어오는 탁월한 입지 덕분에, 1966년작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에서도 남대문 주변 전경을 비출 때면 이 빌딩이 당당히 중앙을 차지한다.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정성 들여 설계한 오피스 빌딩으로, 지금 보아도 유선형 외관이 인상적이며, <오발탄> 촬영 당시에는 더욱이 초현대적이고 세련된 자본의 상징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극중에서 철호의 동생 영호( 최무룡 )는 이 빌딩을 올려다보았다가, 후반부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마침내 은행강도를 감행하는데, 이 두 시선의 대비를 통해 감독은 전후 제대군인들의 비극적 처지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현대식 빌딩을 의도적으로 대조한 것으로 보인다. <오발탄> 중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 한국산업은행 남대문지점 터에 현재 자리한 흥국생명빌딩 (사진: 필자 제공) 철호가 내려다본 서울 러닝타임 63분경, 철호는 집에 들어가려다 노모( 노재신 )의 “가자, 가자”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려 남산 중턱에서 서울 전경을 내려다본다. 남산 중턱에는 판잣집이 들어서기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부유층을 위한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택지의 거주자들은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철호와 같은 판잣집 주민들은 언덕 한참 아래 한강로의 전차 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렇기에 철호가 내려다보는 서울의 전경은 부의 상징이 아닌 가난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부유한 이들이나 관광객이 전망대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것과, 산비탈 빈민이 도심을 ‘마지못해’ 내려다봐야 하는 현실의 차이를 이 시퀀스는 절묘하게 포착해낸 것이다. 철호가 내려다본 서울 전경 영호의 도주 영화 후반, 은행강도를 감행한 영호의 도주 장면은 경찰 무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종로2가와 청계천4가, 5가, 달리는 노면전차의 궤도, 그리고 종암동으로 이어지는 추격전은 당시 구간별로 진행 중이던 청계천 복개 공사 현장에서의 총격전까지 더해져 강렬한 긴박감을 자아낸다. 1930년대 후반 시작되어 전쟁 이후 1958년에 재개된 청계천 복개 공사는 자재와 예산 부족으로 부분적으로만 진행되었는데, 이는 영호와 같은 도망자가 복개된 지하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개연성을 자연스럽게 제공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전차를 타고 도망가는 영호의 모습 대신, 카메라가 어지럽게 뻗어나가는 전차 선로를 속도감 있게 포착해 낸 장면이다. 특히 쭉 뻗어나가던 선로에서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을 담아냄으로써, 감독은 영호의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을 은유적으로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복개된 청계천의 지하 공간 전차가 빠르게 달리는 와중 포착된 선로의 분기점 철호의 배회 영호는 결국 체포되고 부인은 출산 중 사망한 상황에서, 넋이 나간 철호는 서울 도심을 정처 없이 배회한다. 러닝타임 95분경, 딸에게 사주고 싶었던 신발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철호의 뒤로 반도호텔(1938년 준공, 1976년 철거)과 미도파백화점(現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의 세련된 외관이 드러난다. 당시 이 거리의 랜드마크였던 미도파백화점과 반도호텔 중 반도호텔은 롯데호텔로 재건축되며 그 흔적을 감췄지만, 미도파백화점은 리모델링을 거쳐 롯데백화점 영플라자로 남아있다. 덕분에 지금도 을지로입구역에서는 영화 속 장면과 동일한 구도로 <오발탄>의 의도를 마주할 수 있다. 극중 반도호텔이 등장한 자리의 현재 모습 (사진: 필자 제공) 극중 미도파백화점과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명동본점 (사진: 필자 제공) 유현목 (1925-2009) 감독은 생전 인터뷰에서 영화 속 판잣집을 촬영하기 위해 직접 해방촌을 방문하여 영호네 집과 같은 실제 거처를 물색했다고 밝혔다. 감독은 원작에서 상대적으로 생략된 서울의 도시공간을 섬세하게 담아내면서, <오발탄>은 시간이 흘러도 당시 서울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빈민들의 삶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울의 도시 공간’이라는 이름 없는 배역이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것과 같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무언의 명배우의 연기를 다시금 주목하고 있다. 김영준 연구원이 들려주는, <오발탄> 속 서울에 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영화X공간] 영화 "오발탄". '욕망과 좌절의 거리 서울' 클릭!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사진: <0시(영시)>(이만희, 1972) 중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를 볼 때, 첫 3분에서 5분 가량의 도입부는 그 영화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현대의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면, 그 공간을 이미 경험해 본 관객에겐 “아 바로 저기!”라는 친근감과 그에 따르는 몰입감을 단박에 이끌어내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앞선 칼럼들 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화 속 배경이 배우에 버금가는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지금과 같이 영상 기록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 특히 1960~70년대의 우리나라의 도시 공간이라면 구도나 촬영 기법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하기에 앞서서 당대의 도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더욱 크나큰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에서, 도입부 에 담긴 도시 공간의 시퀀스가 특히 인상적인 영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격변의 현장, 서울을 담다 먼저 살펴볼 영화는 1961년 작, < 서울의 지붕밑 >(이형표 감독)이다. 6.25 전쟁이 끝난 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기, 그것도 5.16 쿠데타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절의 서울의 전경을, 초반 2분 동안의 도입부에 멋지게 담아낸 영화다. 50초 경부터 1분까지, 카메라는 8층 높이로 당대의 ‘고층 멋쟁이 빌딩’이라 불렸던 개풍빌딩, 광화문우체국, 종로소방서, 덕수궁 북쪽의 옛 화신백화점 연쇄점 창고를 훑는다. 개풍빌딩, 광화문우체국, 종로소방서가 한 컷에 담긴 타이틀 씬 1961년의 시선에서는 하나같이 ‘도회지스러움’을 발산하는 으리으리한 건축물들이었지만, 채 30년도 지나기 전에 이 건축물들은 모두 헐려 없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서울이 얼마나 급격한 변화를 거쳤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이윽고 카메라는 1분 42초 경에, 제법 정성들여 꾸며진 서울시 1기 휘장(1947년 제정, 1996년 교체)의 팔각 모양 화단을 비춘다. (좌) 1947년~1996년까지 사용된 서울시 휘장 (우) 시민회관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 휘장 모양의 화단 구도 상 아마도 시민회관의 옥상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서울의 지붕밑”이라는 영화의 타이틀 답게, “서울”의 상징을 일부러 담고자, 분명히 감각적으로 의도된 씬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마침 1분 58초 당시 5.16 쿠데타 세력으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청사(옛 문공부 청사, 現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파사드 또한 잠시 모습을 비추는데, 당대의 시대상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컷이기도 하다. 영화가 촬영되던 바로 그 시점에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이 입주해 있던 옛 문공부 청사(現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입부의 서울 전경 시퀀스는 2분 20초 경, 지금의 통인동 일대를 비추며 끝이 나는데, 도시형 한옥이 빼곡히 늘어선 모습은 1978년 자하문로가 개통되면서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이다. 통인동의 도시형 한옥 밀집 지역. 자하문로가 개통되면서 오른편 상단의 자교교회 종탑 이외에는 이 시기의 흔적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단 2분 만에, <서울의 지붕밑>은 ‘서울 도시경관 아카이브’로서 훌륭히 기능을 해 낸 셈이다. 서울의 하늘이 높아졌다 <서울의 지붕밑>으로부터 약 10년이 흐른 1972년에 제작된 < 0시(영시) >(이만희 감독) 또한 도입부에서 인상적인 시퀀스를 보여준다. 서울역 앞, 남대문 경찰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만큼, 초반 3분 동안 서울역과 고가도로,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도큐호텔(現 단암빌딩), 남대문 너머 서소문 일대의(당대 기준으로는) 고층 오피스 빌딩군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1970년에 개통된 서울역 고가도로 사이로 담아낸 서울역의 모습 남대문 주변의 일제강점기 당시의 근대건축물과 서소문로의 고층 오피스 빌딩이 대비를 이루는 모습 1970년대 영화답게 총천연색으로 담긴 남대문 주변의 풍경은 의외로 50년이 흐른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10층 내외의 ‘고층 오피스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로 높아져가는 서울의 하늘은 1971년, 바로 이 영화가 촬영되던 시점에 절정기를 맞는다. 1971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두 채의 꺽다리 빌딩(31층의 삼일빌딩,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한 25층의 단암빌딩)이 등장하면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남대문 바로 옆의 25층짜리 빌딩을 역시 필름에 담지 않고는 못 배겼던 것일까, 카메라는 단암빌딩을 틸트 쇼트로 멋드러지게 잡아낸다. 한국 건축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김중업의 작품이, 영화 속에 최초로, 그것도 우아하게 등장한 순간이 아닐까. 낯익은 그곳, 회현사거리 마지막으로 서울의 인구가 500만을 넘어서 700만 명을 바라보던 1975년에 제작된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감독)의 시퀀스를 들여다보자. 영화가 시작되고 9분 경부터 약 1분 동안 진행되는 장발 대학생 두 사람과 장발 단속 경찰의 추격씬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두 명의 장발 대학생들은 명동 신세계 백화점과 제일은행 앞, 회현사거리를 누비다가 신촌로터리 앞 육교에서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만다.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제일은행을 배경으로 호쾌하게 연출된 도보 추격씬 신촌로터리의 육교에서 담아낸 신촌로의 모습. 거꾸로 매달린 등장인물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 씬이다. 시가지 한복판에서 촬영된 시퀀스이니만큼, 버스 정류장에서, 인도에서, 육교 주변에서 촬영 현장을 구경하는 인파가 오롯이 담겨있으나, 마치 실제로 일어난 해프닝인 것 마냥, 인파들은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오히려 의도된 엑스트라로 보일 정도이다. 두 사람이 힘껏 질주하는 회현사거리-남대문로의 풍경은, 실은 1960~70년대 한국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1961년 작 < 오발탄 >(유현목 감독)에서 주인공 철호가 미도파 백화점(現 롯데 영플라자) 앞을 거니는 씬, 1966년 작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감독)에서는 시골뜨기인 두 주인공이 대도회지 서울에 적응을 못하는 해학적인 시퀀스에서 회현사거리 일대는 약방의 감초처럼 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이상으로 세 편의 영화에 드러난 1960~70년대 서울의 도시경관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보았다. 불과 5~10년 간격을 두고서, 서울의 하늘이 급격히 높아지고, 기록 매체 또한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가 서울에 있어서 얼마나 격변의 시기였는지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칼럼에서는 보다 최근, 1980~90년대의 서울의 도시경관을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 속 공간적 배경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리 없는 배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곤 한다. 그 어떤 대사가 주어지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뒤에서 극의 전개를 뒷받침해주면서,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다. 따라서 영화를 감상할 때, 배경이 되는 공간(도시일 수도 있고, 농촌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다)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행위 또한 신선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특히 1960-70년대에 걸쳐 총천연색 컬러로 제작된 한국의 영화들은 공간적 배경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자료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1980년 12월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기 이전까지, 대한뉴스를 비롯한 국가 주도의 기록 영화를 제외한다면 당대 한국의 ‘공간’을 총천연색으로 담아낸 매체는 오직 영화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당시에도 컬러 ‘사진’은 존재하였지만, 아무리 사진의 해상도가 뛰어나다 한들, 24프레임으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이 주는 생동감에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 필름이라는 프레임 속에 담긴 공간은, 그 화각이 사람의 시선에 비해 제한적이라는 특성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경관(landscape)과는 또 다른 ‘의도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의 시선, 혹은 그 시선의 기저에 깔려있는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이러한 ‘경관’에 의도적으로 녹아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므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의도된 경관’으로 재해석할 때,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영화 해석의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 야행 >(김수용, 1977)을 살펴보는 것은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 1973년에 촬영이 이뤄졌으나 당국의 검열로 인해 1977년에 개봉된 <야행>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당대 일간지에서의 영화평은 물론이요, 201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비평이 이어져 오고 있는 ‘꼭 봐두어야 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야행>에 담긴 공간적 배경(당대의 ‘의도된 경관’)을 살펴보는 것 또한, 영화 제작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 서울 도심 전경, 삼일고가도로, 광화문 지하보도를 넘나드는 도입부의 시퀀스 <야행>의 약 2분여에 걸친 도입부는 많은 비평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한적한 농촌을 가로지르는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도심의 삼일고가도로, 삼일빌딩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감상하는 시점과 무관하게 상경의 과정을 나타내는 시퀀스임을 누구나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멋진 구성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퀀스에서 주로 비치는 공간은 고속도로,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고가교, 서울 도심의 삼일고가도로, 그리고 광화문 지하보도라는 ‘입체 공간’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감독이 어디까지 의도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서울이라는 장소의 근대성, 도시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2024년 현재의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의 외관 (필자 촬영 및 제공) 주인공 현주( 윤정희 )가 근무하는 은행은, 안국동 로터리에 위치한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 김중업 설계)으로, 서울 도심 중에서도 ‘한복판’인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15층의 갱생보호회관은 대폭 리뉴얼을 거친 지금에도 여전히 위용을 뽐내는 건물이니, 반세기 전 서울에서는 더더욱 그 존재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현충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반포주공아파트로 걸어들어가는 현주의 모습 현주가 거주하는 반포주공아파트는, 영화가 촬영되던 시점에 갓 입주가 이루어진 말 그대로 최첨단의 아파트 단지였다. <야행>에 대한 비평 이외에도, 반포주공아파트의 의의에 대한 논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에서 한강 이남에 지어진 최초의 중산층을 겨냥한 아파트 단지로서, 현재의 강남 아파트 신화의 방아쇠를 당긴 단지에서, 주인공은 겉으로 보기엔 유유자적하나 심리적으로는 항상 결핍된 ‘모던한 삶’을 살아간다. 소월길에서부터 덕수궁까지 배회하는 현주의 시퀀스 영화의 20분-23분경에서, 현주는 정처 없이 서울 도심을 배회한다. 남산 소월길을 걷다가 구매한 마스크를 두르고, 시청 앞 덕수궁에 들러서 동물을 감상하거나, 정관헌에서 차를 마시는 현주의 행동은 50년이 지난 지금, 퇴근 후 직장인들의 모습을 종종 관찰할 수 있는 덕수궁의 풍경과 금세 오버랩된다.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카메라는 그저 현주와 풍경을 비출 뿐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 심적으로 허전해 보이는 현주의 심리 상태를 체감할 수 있는 훌륭한 시퀀스이다. 꺽다리 빌딩 사이에서 조용히, 혹은 외로이 문화유산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는 덕수궁, 그리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익명의 도시인들의 모습이 현주라는 등장인물의 행동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주의 고향, 홍성군 홍주읍성의 조양문 영화의 40분 이후, 현주가 잠시 생각의 전환을 위해 귀성한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카메라는 장항선의 옛 역사, 홍주읍성의 조양문, 읍내의 도로를 컬러로 비추며, 최첨단을 달리던 대도회지 서울과는 대조적인 경관을 훑는다. 강변1로와 5로(현재의 노들길 동작역 부근), 그리고 갓 준공된 반포주공아파트의 부감 시퀀스 51분경에 등장하는 현주의 주거지, 반포주공아파트를 부감하는 씬은 만약 이 씬만 떼어놓고 본다면 마치 대한주택공사의 홍보 영화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대적이며, 도시적이다. 특히 씬의 도입부를 1971년에 갓 개통된 동작동 강변1로와 강변5로(현 노들길)의 경계점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감독은 초고밀도의 서울 도심, 비포장도로 천지인 현주의 고향과는 대비되는 인공적이고 균질하며, 인간성이 결여된(실제로 영화 촬영 시점에서는 입주가 100% 완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시가지 강남’을 이 씬에 담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의 육교 영화의 후반부, 60분과 68분경에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은행 앞 육교가 동일한 구도에서 시간대만 낮과 밤으로 달리한 채 등장한다. 재밌게도, 이러한 구도는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 등의 타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단골’ 구도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도회지 서울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구도로서 너나 할 것 없이 이 육교를 꼽았던 것이다. 걸음을 서두르는 박대리와 그 뒤에 우뚝 솟은 갱생보호회관의 전경 영화의 막바지, 74분경에 예상외의 행동을 하는 현주에 당황한 박대리( 신성일 )는 안국동 사거리의 육교를 황급히 걸어 내려오며 은행으로 들어가는데, 이 씬에서 당당한 풍채의 갱생보호회관 외관이 잠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78분 즈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현주가 거주하는 반포주공아파트가 다시 비친다. 비록 영화 전체에 걸쳐서 공간적 배경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으나, 현주와 박대리의 상반된 물리적 관계가 유지되는 두 곳의 장소 모두, 결국에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보면 반포주공아파트와 갱생보호회관은 ‘의도된 경관’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2024년 현재 아쉽게도 반포주공아파트와 갱생보호회관 모두 촬영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전자는 바로 지난해 재건축을 위해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후자는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영화 촬영 당시와는 외관이 상당히 바뀌었다. 예정된 파국을 맞이했던 현주와 박대리 두 사람의 관계처럼, 두 곳의 ‘의도된 경관’ 또한 현실 세계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사실상 자취를 감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영화 <야행>을 온전히 역사의 영역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