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2km (時失里 2km)
- 감독
- 신정원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임창정, 권오중, 변희봉, 임은경, 안내상, 우현, 박혁권, 김윤석, 박명신, 이상훈, 최성욱, 김유희, 신이, 주효만, 최원석, 주진모, 정은숙, 정소연, 김병서, 이재민, 강성하, 김지혜, 나혜령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목소리의 시대가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는 물론 영화 속 여배우들의 후시녹음, 문화영화의 내레이션 때로는 방송 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고은정 선생일 것이다. 2009년 진행한 고은정 선생의 채록문을 보면 1950년대 인기 있는 라디오 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 피아골 >( 이강천 , 1955)의 후시녹음 때, 당시 인기가 높았던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청실홍실>(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 1956)의 전후파 여성 동숙(정은숙 연기)을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고 하니 라디오 드라마와 성우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던 셈이다. 고은정 은 1954년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극회원 1기로 이력을 시작했다. 참고로 1947년과 48년에 1, 2기로 장민호 , 민구, 최무룡 , 윤일봉 , 이혜경 등이 선발되었으나 후에 모두 특기로 구분하고 있다. 연기자 정체성이 전면에 드러났던 당대 성우들은 연극적 소양 또한 비중 있게 다뤄졌다. 학창 시절 인기였던 대학연극경연대회에서의 열띤 경합이나 성우들이 정기적으로 올렸던 연극 공연에 대한 회고, 그리고 아나운서로 잠시 활동했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이내 성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연기력이 성우 활동의 바탕이 됨을 잘 말해준다. 고은정 선생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7년 < 산 넘어 바다 건너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에서 상해에서 돌아온 30대 마담, 상하이 가에리 미라 역을 맡으면서다. 매일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한 끝에 득음한 듯 귀가 트여 본인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즈음이다. 이어서 < 동심초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의 경희, < 장희빈 >(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8)을 맡으며 대표적인 성우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인기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기 고은정 선생은 영화 < 동심초 >( 신상옥 , 1959)에서 엄앵란 의 목소리를 더빙하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20대 여대생 경희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이후 엄앵란의 목소리는 고은정 선생이 도맡아 하는데 이밖에도 김지미 , 문희 , 윤정희 , 남정임 , 정윤희 , 안인숙 까지 당대 내로라할 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모두 고은정 선생 차지였다. 성우들의 후시녹음 관행은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과거 한국영화계는 판권을 미리 파는 입도선매로 제작되었는데 입도선매의 전제가 특정 배우들의 출연이었고 이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유발했다. 겹치기 출연을 위해선 빠른 제작 속도가 관건이었다. 다른 작품의 세트에 앉아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불려 다니다보니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거나 연기에 몰입할 시간은 당연히 부족했다. 이 때문에 후시녹음은 성우가 배우의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이기보다는 촬영 현장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배우들이 못다 한 연기를 마무리해주는 작업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여배우의 표정에 속칭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쏟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줘야 했고 대사가 틀린 채 어영부영 넘어가는 입 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후시녹음된 영화에서 인물이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배우의 입 모양이 대사와 맞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때로 촬영분의 부족으로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을 때면 컷이 바뀐 뒤에도 웃음소리를 유지해 연결을 맞춰주기도 했다. 후시녹음은 실로 성우들의 인공호흡으로 마지막 순간에 영화를 살려내는 과정이었다. 한국영화 제작 관행에 가려진 성우들의 ‘목소리’ 후시녹음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기술적인 제약과 더불어,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으로 단련된 성우들의 더빙 능력이 보여준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결과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다는 비난은 성우들이 더빙을 탁월하게 잘해주었다는 말의 역설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더빙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 과 엄앵란 , 이창환 과 신성일 등 성우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디트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 한국영화 제작 관행의 특수성을, 영화의 완성을 인증하는 크레디트라는 공적 영역에서 부정해온 이 같은 ‘없음’의 증거를 다층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구술 채록의 후반작업일 것이다. 고은정 선생은1977년 MBC라디오 각본 공모에 당선되며 이후 방송작가로도 활동했고 < 위기의 여자 >( 정지영 , 1987)의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현재까지 서울예술대학 방송영상과 초빙교수로 후학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은정 선생의 구술 채록문에는 1950년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방송과 영화계의 생생한 경험뿐 아니라 학도의용군 예술대원 생활과 부산, 대구, 제주도를 거친 고단한 피난생활을 문학소녀의 모험기로 도치시킨 6?25전쟁기의 이야기 또한 볼 수 있다.
임원식 (林元植)은 1960년대 김기영 , 유현목 과 함께 한국영화 전성기를 주도한 트로이카 디렉터 가운데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신상옥 사단이 배출한 감독이다. 신상옥은 일제시대에 등장하여 광복기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다가 납북된 < 자유만세 >이 감독 최인규 (崔寅奎)의 조감독 출신으로 그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고 데뷔한 인재만도 강대진 (1959년 데뷔), 이형표 (1961), 장일호 (1961), 최인현 (1962), 임원식(1965), 나봉한 (1965), 변장호 (1967), 이경래(1971), 이장호 (1974) 등 1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강대진, 최인현의 경우처럼 고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영화의 대들보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임원식 감독은 그 중 한 사람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그는 단체장은 처음이지만 영화사의 임원과 사장으로서 현장을 지키며 역할을 수행해 왔다. 남들이 스스로 좌절하여 영화계를 떠나가너 세를 형성하여 조직에 뛰어들 때 그는 이에 관계없이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해방 이후 어느 때보다 신구의 갈등이 심한 영화계의 현상을 감안할 때 그가 뒤늦게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로 영화감독협회 회장의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급격한 세대 교체의 격랑 속에서 몰락해 가는 원로층을 감싸고 젊은 감독을 포용하는 일은 작품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30명의 회원을 이끄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의지는 일부의 우려를 씻고 안정적으로 협회를 운영해 나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원식 은 1935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에서 유고적 가풍이 강한 천도교 집안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임수동(林壽東)은 한말 의병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귀가한 후엔 집안을 일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소작농을 부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얼마못가 찾아온 조국의 해방은 그들에게 오히려 시련을 안겨 주었다. 북한 공산주의 정부는 부친을 지주로 몰아 더 이상 농토를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고향에서 누천(漏川)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12월 성탄절에 월남하여 4년제 휘문중학을 나온지 몇달 만에 이번에는 예기치 못한 6.25전쟁이 일어났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기면서 그는 학도병으로, 가족들은 대전에서 제주도로 피란했다. 얼마 후 그는 제주에서 부모들과 합류했다. 황해도 태생인 그가 졸지에 제주도에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여기에서 일생의 반려가 된 고경희 여사를 만나 뒷날 영화감독이 된 종호 (우뢰매), 종재 ( 우리들만의 세상 ) 두 아들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친의 죽음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에서 오현고등학교를 다녔다. 동기생 가운데는 뒤에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강보성과 서강대 명예교수인 문학평론가 박철희가 있었고 2년 후배로 시인이며 영화평론가인 김종원 이 있었다. 그때 임감독은 이 학교의 총학생회 회장이었다. 후배들이 떨만큼 확실하게 ''군기''를 잡아 나갔다. 도내의 어떤 ''어깨''도 그에게는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야말로 배포와 카리스마가 있는 학생회장이었다. 이 무렵 그는 제주여고 학생과 연애중이었다. 꽤 알려진 미인이었다. ' 임원식 이 삼성여관 딸과 연애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교정을 넘어 타교 학생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학생의 연애가 금기시되던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 더욱이 공공연한 소문이 나돌 만큼 둘의 관계가 발전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자 대학생인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의 중앙예식장(지금의 종로예식장)에서였다. 가마타고 올리는 색다른 것이었다. 그다운 결행이었다. 대학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서라벌예술학교였다. 이에 앞서 동국대학 국문과에 들어갔으나 연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보다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어 선택한 결과였다. 서라벌예술학교 연극영화과로 옮기면서 그는 1년을 월반했다. 동기생 가운데는 졸업 후 영화계로 진출한 전조명 (田朝明), 장석준 (張錫俊)이 있었다. 유명 촬영감독이 된 실력파들이었다. 그리고 연기 쪽에는 성우로 이름을 떨친 남성우 등이 있었고, 1년 후배로 강대진 (姜大振), 김기덕 (金基悳) 등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장식한 연출 인재들이었다. 스승으로는 극작가 이광래 (李光來), 연출가 김규대(金圭大) 선생을 모셨는데 예술정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이때 서라벌예술학교에는 초대 학장으로 윤백남 (尹白南)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를 개척한 최초의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이따금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였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특유의 억양으로 들려주는 영화, 연극의 역사는 재미가 있었다. 임 감독은 이무렵 학교 연극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를테면 <나상(裸像)>(이광래 작), <꿈>(유치진 작), <유령>(헨릭입센 작), <순동>(유치진 작)과 같은 연출상을 받아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신협에 맞선다는 의욕과 패기로 창립하여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린 청협(靑協)의 <통곡>(1954. 김규대 연출)의 공연 때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1954년부터 55년 사이의 일이다. 임원식 은 학업을 마치자 기독교 방송의 공개 모집을 통해 입사하였다. 연출 겸 성우 일이 맡겨진 임무였다. 그때 성우로는 정상급인 정은숙, 천선녀, 남성우, 주상현 등이 있었다. 1957년께였다. 그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선민(宣珉)영화사의 사원 모집이 계기가 되었다. 재일교포 영화감독 유진식 (劉振植)의 < 불멸의 성좌 >(1959. 최현 , 이빈화 주연) 촬영 때 제3 조감독으로 채용된 것이다. 어안렌즈까지 갖추고 촬영한 시네마스코프 규격이었다. 잇달아 그의 감독 작품 < 대원군과 민비 >(1959. 김승호 , 김지미 주연) 제작 때는 제1 조감독을 맡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그의 여섯번째 작품 < 연애전선 >(1960. 김진규 , 김아미 주연)의 제1 조감독으로 기용되면서부터였다. 김 감독 밑에서 또 한편의 영화 < 돌아온 사나이 >(1960. 김진규, 최은희 주연)의 제작을 돕고 자연스럽게 신필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영화가 신필름 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임원식은 이곳 연출부에 소속되면서 제작 시스템이 변화를 건의했다. 일본의 경우처럼 감독의 권한을 위임받아 조감독이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파견 감독제 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기구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는 신상옥 사단에 합류하면서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를 비롯한 < 열녀문 >(1962), < 강화도령 >(1963) 등 제작에 참여, 제1 조감독으로서 현장의 일을 완전히 익혔다. 철저한 연출 수업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책임 아래 메가폰을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오는 듯 싶던 연출의 기회는 몇차례의 실기끝에 어렵게 찾아왔다. 신필름의 조감독 생활 4년만에 이루어진 ''입봉''이었다. 사극 < 대원군과 민비 >(1965. 김승호 , 최은 희 주연)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데뷔작으로서 화려한 만큼 곡절도 있었다. 당초 이 영화의 개봉은 1년 전 구정 대목 프로로 예고돼 있었다. 극장 간판까지 올라가 있었으나 상영 당일 개봉이 무산되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행되던 한일회담에 자극을 주어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해 3월 대다수 국민과 야당은 물론 서울 시내 대학생 5천 여 명이 매일 굴욕 반대 데모에 참여하여 정국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 일은 결국 서울 일원에 걸쳐 계엄령이 선포되는 6.3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임원식 의 영화 인생은 출발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후의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77. 신영균 , 고은아 주연)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 도시로 간 처녀 >(1981. 유지인 . 금보라 주연)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20여년의 영화의 길은 수난의 역정이었다. 이런 일들은 외부에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설령 알려졌다해도 ''임원식의 수난''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가 애써 고난으로 포장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활달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를 부풀리는 데에 서툰 내성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합동영화사 제작) 역시 개봉 첫날부터 상영이 중단되는 돌발적인 사고에 직면했다. 일제 지배 아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가 겪는 수난을 그린 이 영화가 박정희 정권의 눈총을 받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강행되는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된 문익환, 박형규 목사의 일을 상기시켜 일반인들에게 종교 탄압의 인상을 심어줄까 우려해서였다. 기대에 부풀어 극장 앞에 왔다가 휴관 안내문을 보고 분노한 임 감독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서울극장 옆 조흥은행 지점 빌딩에 있던 중앙정보부 선무공작과를 찾아가 이유를 묻고 항의 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욕설과 폭력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산의 감찬관실로 끌려가 4일 동안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임 감독은 이 영화에 앞서 16밀리로 < 순교보(殉敎譜) >(1974)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항일 의지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 반려되었다. 앞과 비슷한 이유였다. 결국 공산치하에서 싸우다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플릇을 바꿔 반공적 요소를 가미한 뒤에야 통과되었다.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를 만들게 된 것은 <순교보> 때 겪은 좌절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심각한 좌절감을 안겨 준 것은 전례없는 애착을 갖고 김수용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직접 제작한 < 도시로 간 처녀 >(태창흥업 제작)가 상영된 지 9일 만에 각서를 쓰고 도중하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삥땅''협의를 받은 버스 안내양이 알몸 수색을 당한데 분노하여 회사 측에 항의하다가 옥상에서 투신한다는 내용으로 현실고발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었다. 버스 노조가 ''삥땅''과 ''알몸수색''의 묘사를 들어 전체 버스 노동자이 명예를 훼손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로 보아 정작 불만을 표시해야 할 쪽은 노조가 아니라 버스회사 측이어야 했다. 문제의 확산이 당국이 방관한 데 있었다. 민간조직이 내용에 불만을 갖고 압력을 가한 이 사태는 영화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도시로 간 처녀>는 상영 중단이라는 영업상의 손실뿐 아니라 대종상에 출품하는 기회조차 원천 봉쇄 당하였다. 주무당국이 접수를 미루다가 마감이 지났다고 기피함으로써 작품을 통해 평가받을 자리마저 얻지 못하였다.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 중단 사태에 대해 성명서를 내 ''창작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유감스런 행위''라고 항의하였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제작자인 임원식 감독에게서는 집 한 채를 뺏어갔다. 임 감독은 대종상 여우주연상( 최은희 )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박노식 )을 안겨준 데뷔작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이후 촬영에서 현상까지 10일 만에 완성한 통속시대극 < 숙부인 >(1966. 최은희 주연)을 비롯하여 홍콩과의 합작영화 < 대폭군 >(1966. 최은희 주연), 방랑검객의 신명난 복수극 < 석양에 떠나가다 >(1969. 오지명 주연), 원수인 양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는 청년의 이야기 < 벌거벗은 태양 >(1970. 윤양하 주연), 나운규 의 원작을 뼈대로 한 < 아리랑 >(1974. 신성일 주연), 전처 소생의 오남매까지 도맡아 헌신과 사랑으로 가정을 일으키는 장한 모상을 부각시킨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 < 어머니 >(1976. 윤연경 주연) 등 모두 36편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현대물보다 사극, 통속 시대극이 많은 편이다. 정적인 작품보다는 < 영( 影)>(1968)이나 < 항구 8번가 >(1969)의 경우처럼 액션이 강한 역동적인 화면을 선호한다. < 벌거벗은 태양 > 등을 제외하고는 멜로드라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번거로운 것보다는 명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기질이나 성격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임원식 의 영화미학은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 대폭군 >,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등ㅇ 나타나고 있듯이, 활력을 추구하면서도 모두 분출시켜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끌어들여 반추하는 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겪었던 시련의 자취로 볼때 마음속에서 익혀 왔으나 이루지 못한 어떤 한(恨) 같은 구상이 남아 의식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색적이기보다 행동적인 그의 작품세계에 저항적인 일면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필 1935. 1. 22 서울 출생 1956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1962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데뷔 1976 합동영화(주) 전무이사겸 기획실장 역임 1980 태창영화(주) 대표이사 사장 역임 1990 (주)한국기독교영화제작소 대표이사 역임 1995 (주)기독교TV방송 전무이사겸 방송본부장 역임 1999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대 회장 역임 2002년 월드컵기독시민운동 협의회 부회장 취임(현) 2000- (사)한국영화감독협회 초대 원장 피선, 춘사 나운규 영화예술제 집행위원장 대종상 집행위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 2001- 춘사 나운규 기념사업회 회장 작품명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3 대폭군 , 숙부인 1968 영 / 풍랑객 1969 석양에 떠나가다 / 의적 홍길동 1970 민비와 마검 / 벌거벗은 태양 1971 대감신랑 1974 박수무당 / 아리랑 1976 어머니 / 내마음 나도 몰라 1977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80 통천노호 1982 소림사 물장수 1992 불행한 아이의 행복 등 40여 편 감독 및 제작 수상 경력 1926 대학 연극 경연대회 연출상 수상 1962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대통령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76 < 어머니 >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수상 2001 문화관광부 보관훈장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