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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정주리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최희진, 추귀정, 손종학, 장원영, 장정인, 황인보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다음 소희 >(2023)의 서사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정의감 넘치며 할 말 똑 부러지게 하던 소희(김시은)가 점진적으로 빛을 잃어가다 결국은 자살로 사라지는 전반부와, 이미 소진된 상태에서 직장에 복귀한 형사 유진(배두나)이 소희가 죽게 된 진실을 쫓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소희는 열아홉 살 특성화고 애완동물관리과 졸업반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이고, 유진은 어머니의 오랜 병간호 이후 복직한 경찰이다.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은 둘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생존을 넘어 살아가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자기 삶에 남겨두는 현명한 이들이다. 춤이 그렇다. 둘이 직접 만나는 순간은 실습 나간 콜센터 회사에서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후 힘들어하던 소희가 퇴근 후 댄스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가 유일하다. 소희는 말없이 함께 춤추던 옛 동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신입이어서 전혀 교류가 없었던 유진은 소희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반부에서 둘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유진이 콜센터와 학교에서의 극심한 압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유진이 소희의 사건을 담당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희와 유진의 서사는 일종의 반복형식을 갖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전반부는 피해 당사자의 시점으로 끌어나가고, 후반부는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폭력과 착취의 교육/노동 구조를 파악하려는 유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개로 나눠진 서사구조는 윤리적 형식을 갖는다. 윤리적인 것이란 서로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나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하며 그 사건이 어째서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고 함께 ‘책임’지려는 태도다. 여기서 책임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과 설명-가능성(accountability)이다. 응답-가능성은 어떤 피해가 일어났을 때 응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응답하기 위해선 먼저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소희는 콜센터에 취직한 후 학생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성실하게 직장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콜센터는 소희를 비롯한 직원들을 사람이 아닌 숫자로 환원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콜 수, 방어율, 성과 그래프 등으로 기입된다. 그들의 감정은 회사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따라서만 표현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 된다. 사실 ‘해지방어팀’이라는 조직은 폭언을 구조화한다. 인터넷 해지를 하고자 하는 고객들이 해지를 하지 못하도록 수십 번씩 전화를 돌리고 고객들이 화가 치밀게 만든다. 콜센터 직원들은 그 폭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정노동으로 인해 노동환경은 열악해진다. 이 열악한 일은 본청의 관리를 받으면서도 본청이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하청회사에 맡겨진다. 회사는 노동자를 쉽게 대체가능한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심지어 이들은 학생과 노동자라는 이중적 구속에 놓인 실습생들로 그 자리를 채운다. 소희가 속해 있는 두 개의 조직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위계적이고 착취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본청, 하청, 본부장, 팀장, 직원/실습생 그리고 교육부, 지역 교육청, 교감, 교사, 학생’이라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모두가 단일한 기준의 숫자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의 능력도 키워주지 못하며,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다. 실습생뿐 아니라 팀장, 교사들도 피해자를 자처한다. 소희가 담임 선생님에게 여러 번에 걸쳐 콜센터의 부당함과 맡겨진 일의 부적절함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만 담임은 자신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핑계 삼아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의 입을 막는다. 심지어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면 취업률에 문제가 생겨 반과 학교가 지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소희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소희는 부모님에게도 말해보지만 그들 역시 들을 수 없는 조건에 있다.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하는 부모님은 삶에 지쳐있고 많이 피곤해 보인다. 피곤하고, 더 나아가 소진된 이들은 가능성이 다한 상황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전 팀장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통해 바꿔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무산된다. 소희가 논리적으로 따지며 항의하고, 회사가 원하는 서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며 행동으로 저항하고, 진심을 토로해보고, 눈물도 흘리고, 소동을 부리고, 심지어 자해를 해도 어른들 누구도 듣지 않으며, 파국의 상황을 멈추지 않는다. 학교와 직장이 피해자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응답할 수도 없다. 실제 책임을 나눠가져야 하는 어른들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할 여지가 없다고, 그러기엔 세상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고 주장한다. 버티던 소희가 끝내 무너진 것은 전 팀장이 내부고발을 하며 자살을 했을 때보다, 그 자신이 회사가 원하는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매뉴얼로만 읽는 것을 넘어서 내면화하기로 결심했을 때였을 것이다. 괴로워하던 소희는 동료와 비교하고 경쟁시키며 방어율을 높이는 새로운 팀장이 전하는 동기부여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스스로 자신을 수단 삼아 회사가 정해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소희는 아들이 죽어 해지를 하려하는 고객조차도 성과를 위한 숫자로 대하게 된다. 단순히 감정을 관리하고 매뉴얼을 수행하는 데에서 심층적 차원에서 회사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감정노동을 하며 스스로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희가 성과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했을 때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인격의 일부와 거래해 받을 대가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설명-가능성의 책임은 이러한 피해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구조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그것에 책임이 있는지, 서로의 관계는 어떤 역학 속에서 맺어져 있는지 질문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을 위해선 타자뿐 아니라, ‘나’ 역시도 설명해야 한다.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런 피해가 일어난 구조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어느 위치에서 그 피해를 듣고 있는지 등을 포함한다. 유진은 모두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들도 손해를 봤다고 억울해 할 때 소희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유진은 댄스 스튜디오에서 소희와 마주쳤지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일을 기억해 낸다. 처음에는 단순 자살로 처리하려던 유진은 두 번째 만남에선 첫 번째처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착취적인 실습생 고용구조를 파헤친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많지 않다. 전반부는 주로 핸드헬드로 진행되는데 소희가 빛을 잃고 무너져갈수록 카메라는 점점 더 많이 흔들린다. 영화는 종종 소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특히 전반부의 마지막 씬에서 소희의 클로즈업 얼굴은 빛, 물, 눈과 같은 자연적인 것과 교차편집 된다. 가게에서 맥주를 먹다 문틈 사이로 다가오는 빛이 차가운 맨발에 닿았을 때, 저수지 앞에서 물을 응시하는 뒷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눈을 바라볼 때, 소희의 얼굴은 자연적인 것들과 교차된다. 눈 내리는 장면은 소희가 유진을 처음 봤던 댄스 스튜디오에서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도 동일한 구도로 반복된다. 그때 소희는 힘든 일이 있었지만, 까만 밤에 흩날리는 눈을 보며 잠깐의 위로를 받는다. 위를 올려다보는 소희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로 잡힌 흩날리는 눈의 쇼트가 교차된다. 아름다운 것은 한번은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될 수는 없다. 소희는 저수지 앞에서 응답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위를 바라보지만, 소희에게 내려온 답은 ‘견디고 참아라.’ ‘피해주거나 손해 끼치지 마라’ ‘나도 힘들다’이다. 위에서 층층이 책임져야할 어른들과 단위들은 그 위가 문제라고 말한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을 들을 수 없는 소희는 사라져 간다. 소희가 저수지로 들어가는 전반부의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프레임에서 소희는 프레임의 아래쪽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카메라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소희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면서, 응답하지 않았던 우리(사회)를 응시한다. 프레임 밖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 카메라는, 스페이스-오프에 또 다른 ‘다음 소희’가 사라지고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들에게 응답하기를 요청한다. 소희에게 다가와 주었던 빛은 실습을 나가며 소희가 잃었던, 사회가 대가로 내주기를 강요했던 빛들의 모음처럼 보인다. 그 빛은 유진이 소희가 마지막에 앉아있던 가게의 간이 테이블을 찾았을 때, 다시 한 번 다가와 응답과 설명을 요청한다. 그리고 소희의 휴대폰에 유일하게 남겨진 혼자서 춤을 추고 잘 해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는 동영상으로 시처럼 응축된다.
나는 정주리 감독이 밉다. < 도희야 > 같은 엄청난 데뷔작을 내놓고 아직도 차기작을 내놓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 된다. <도희야>를 만든 감독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산업이 정말로 문제다. 이번 칼럼은 의심과 취약성의 정동이 영웅 서사를 변형하는 방식에 대한 것인 동시에, 정주리 감독의 차기작을 갈급하게 요청하는 사심 가득한 글이기도 하다. <도희야>는 한국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섬에 들어온 외부인’ 설정을 따른다. 그 설정은 대체로 다음의 서사를 따른다. “자기들만의 도덕과 관행으로 똘똘 뭉친 시골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들춰내기 시작하자, 착하고 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은 불쾌한 이면을 드러내며 외부인을 위협한다.” <도희야>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외부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익숙한 관습의 궤도에서 벗어난다. 서울에서 온 엘리트 경찰 영남(배두나)은 바닷가 작은 마을의 파출소 소장으로 발령받는다. 동성애자인 그는 아우팅을 당한 피해자지만 경찰조직은 ‘말하지도 묻지도 말라’며 품위손상을 이유로 도리어 그에게 징계를 내린다. 간부와 선배들은 징계를 내리면서도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라는 단어가 병이라도 옮기는 듯 분명하게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는다. 피해자인 영남은 그 자체로 잘못된 존재가 되어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이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문제는 경찰조직이 아니라 영남이 된다. 절대로 튀지 말라는 선배의 조언대로 애인까지 버리고 1년 정도 숨죽여 있으려 했던 영남은 그 동네에 도착하는 처음부터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영웅은 여러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누가 지금 구원을 요청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를 예민하게 인지하는 자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약자가 언제나 크게 비명을 질러 자신의 피해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줄 수 있는 조건에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예민함은 타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향해야 한다. 취약한 자는 취약한 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따라서 강함만 있어서는 영웅이 되기 어렵다. 영남은 그러한 영웅의 자질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다. < 양들의 침묵 >에서 클라리사 스털링(조디 포스터)이 어린 시절 양떼목장에서 죽어가던 양들의 울음소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여전히 들려와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 역시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갖고 있는 이 취약한 영웅들은 상처받고 약한 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영남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차로 인해 크게 물이 튀여 피해를 입었는데도 괜찮은지 확인하려 하자,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소녀 도희(김새론)를 발견한다. 그 이후 도희는 계속 영남의 눈과 귀에 뜨인다. 취약성에 대한 감각의 예민함을 표현하기 위해 <도희야>는 영화적이고 서사적인 층위 모두에서 소리를 강조한다. 욕하고 때리는 계부 용하와 할머니의 학대하는 소리, 계부인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아 비명 지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도희의 소리,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침묵의 소리, 피해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불면증인 영남이 술을 따르고 마시는 소리,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생수병에 소주를 옮겨 담는 소리, 소주가 담겨있던 빈 플라스틱 생수병이 부딪히고 구겨지는 소리, 영남과 도희가 목욕하는 소리, 도희가 영남이 목욕하고 있는 화장실에 들어와 소변보는 소리까지 영화적 사운드가 외화면과 내화면에서 지속적으로 도드라진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소문과 험담의 소리는 다양한 존재들을 위축시키고 허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웅 외에도 취약한 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이가 또 있다. 그는 착취와 학대를 가해도 자신에게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취약한 이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타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빠르게 알아챈다. 박용하(송새벽)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마을의 주요 생계인 가두리 양식장의 운영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용하는 동네의 유일한 젊은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두둔한다. 마을 사람들은 직접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험담과 소문으로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 한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년이 계급장 달았다고 동네를 들쑤시고 다닌다”며 대놓고 욕을 하고, 용하는 첫 만남부터 “솔찬히 미인이어서 소장인줄 몰랐다”는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며 영남을 공격한다. 영남이 애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용하는 영남이 이주노동자를 보호하려는 결정적 순간에 “서울서 내려온 여자하고 뭘 하는 걸 봤으면 하는데 어느 한 새끼라도 나한테 물어봤으면 좋겠네, 입이 근질근질하네”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젊은’ ‘여자’ ‘동성애자’는 모두 영남의 다층적인 취약점이 된다. 영남이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용하는 ‘성적 대상’으로 영남을 지시하며 그가 가진 권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나 영남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오히려 그는 성적 착취자가 된다. 도희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모든 행동은 성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정주리 감독은 관객들에게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이 영남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시점에 도희와 영남이 함께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 영남이 목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외화면에서 도희가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장면,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은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영남을 보여주며 둘만의 내밀한 순간들을 공들여 연출한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지나칠 정도로 반복된다. 사실 용하와 형사들이 영남에게 소아성애자라는 혐의를 씌우기 전에 관객들은 여기서 이미 이상한 긴장감을 느낀다. 게다가 영남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그의 애인을 질투하며 집착하는 도희의 모습도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이 긴장감과 불편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어떤 면에서 정주리 감독은 연출적으로 소위 ‘오해의 여지’를 점점이 뿌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로 이 행동들이 그렇게 설명 불가능한 것인가? 심지어 영남은 경찰로서, 즉 폭력 피해자를 상대해본 전문가로서, 도희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영남은 도희가 “폭력에 길들여진 위험한 상태여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고,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경찰 제복을 입고 있고 나쁜 짓 하는 남자들 혼내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여 그러는 것이라고” 매우 타당성 있는 전문적인 해석을 내린다. 영남은 도희의 애착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기 보호와 생존의 욕망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더불어 영남 스스로도 도희와 지나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관계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들에서 일말의 불편함과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남은 곧 성인 여성으로서 그리고 경찰로서 보호자로서의 정체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전에 멈칫하다가도 그를 품어준다. 그렇다면 그 긴장과 불편함을 성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레즈비언인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동들이 갑자기 어떻게 성착취의 증거가 되는가? 관객들은 정말로 경찰과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가? 존재에 자체에 대한 의심과 혐오의 씨앗은, 그것이 막연한 긴장감과 불편함에 불과할지라도 질문하지 않고 놓아두면 언젠가 그 존재의 모든 행동을 오염시킨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 혹은 동성애자가 영웅이 되기 위해선 소문과 낙인, 존재 그 자체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래서 소수자가 영웅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소수자 영웅은 타자를 구원해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존재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영남은 도희에게는 ‘맞지 말고 저항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은 경찰조직의 억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고 묻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피해자임을 부인하고 거부해 왔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은 어떤 면에선 더 많은 고통을 불러왔다. 자신뿐 아니라 애인에게도. 그러나 끝까지 도희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영남은 다시 가해자의 외피를 쓴 피해자가 된다. 여기서 영남은 도희의 구원을 받는다. 도희는 ‘순수한’ 피해자와는 거리가 멀다. 도희는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 할머니가 추락한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계부를 함정에 빠뜨려 감옥에 보내 자신과 영남을 구한다. 여기서도 전화의 사운드가 이용된다. 도희는 추문을 추문으로 막는다. 도희는 자신이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취약성은 때로 존재를 단단하게 만든다. 영남은 도희를 두고 혼자 떠나려다가 도희가 “어린 괴물” 같다는 후배 경찰의 소리에 차를 돌려 도희를 데려간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오염이 얼마나 그 존재를 갉아먹는지를 잘 알고 있는 영남은 도희를 버려둘 수 없다. 이 선택은 그녀의 경력을 무너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도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존재를 걸고 자신의 취약성을 받아들이며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남과 도희 모두 서로의 취약성을 발견하고 나서야 서로를 구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취약성을 통해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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