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인생
- 감독
- 정지혜
- 제작년도
- 2008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첫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영화를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발견’이라는 단어의 뜻에 충실한 영화로 손모아, 안정연 감독의 데뷔작 < 가만한 >(2020)을 말하고 싶다.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는 상태에 있다’라는 ‘가만하다’는 이 영화를 설명하는 오롯한 형용사이자 영화의 주인공 준서( 박수연 )의 상태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태도의 말이기도 하다. 준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예고를 졸업하고 음악대학에 진학해 피아니스트가 되길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준서는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태다. 손가락은 굳어 쉬이 움직이지 않고, 그 가만한 손을 내려다보는 준서의 얼굴은 표정을 잃었다. 마음에 웅숭그린 발화되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적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일이 잦은 준서다. 굳어버린 건 손가락이기보다는 준서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는 준서가 한동안 떠나 있던 음악대학을 다시 찾아 그곳 학생이 아니라 임시 행정 조교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가만한>에서 우리는 준서의 존재보다도 더 크게 바흐와 쇼팽을 비롯한 클래식 피아노 선율의 존재감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음악은 준서를 떠나지 않는다. 준서가 학교에서 피아노과 학생들을 보조하며 그들의 연주회를 준비할 때든, 강박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는 편입생 수미(이화원)를 지켜볼 때든, 어째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거냐며 속상해하는 엄마( 오민애 )의 공간에 있을 때든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공기처럼 화면을 채우고, 흘러들어오고, 스며든다. 때론 먼 곳에서 누군가의 연주인지로 모를 음악이, 때론 지근거리에서 준서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준서와 그녀의 공간,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감싸 안는다. <가만한>에서 음악은 서사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도,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도 아니다. 이곳의 음악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서였고, 지금의 준서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준서를 예견하는 준서의 세계 그 자체다. 다시 쓰면, 음악이 준서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준서가 음악을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는다. <가만한>은 준서의 굳은 마음의 상태가 해빙의 과정을 거치는 시간을 따른다. 이때의 해빙이란 결코 어떤 결론이나 해결을 전제하고 진행되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그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고 음악 안에서 살며 음악을 계속해가기 위한 분투, 다르게 음악을 사랑하려는 준서의 상태의 변화를 말한다. 미묘한 점진을 구현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일관되고 그 자세 역시 의연하다. 우리는 <가만한>에서 준서의 얼굴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의 등과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의 액션에 따른 준서의 감정의 리액션 쇼트를, 스펙터클한 얼굴의 세계가 아닌 준서의 가만한 등의 액션과 리액션을 더 유심히 봐야 하고 그곳에서부터 감응은 시작된다. 뒷모습이 보이는 조용하고 은은한 떨림과 부동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는가를 영화는 설득해내고 싶어 하고 또 설득해낸다. 반대로 몇 안 되는 순간이지만 카메라가 오직 준서의 얼굴만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응시할 때가 있다. 카메라 너머에는 준서가 더는 가닿을 수 없는 음악의 세계가 있거나 더는 함께할 수 없는 불화하는 세계가 있다. 준서의 세계 이쪽과 저쪽이 완벽히 분리되는 순간을 이토록 정확하게 목격하게끔 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감정의 파고를 경험할 것이다. 한편 영화는 이것만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가만한>의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돼 있지만 몇 차례 움직임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의 장면을 말하려 한다. 준서가 연습의 압박에 시달리다 손에 마비가 온 수미를 발견했을 때다. 카메라는 인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수미가 마비된 제 손을 주무르고 그 곁으로 준서가 다가가는 순간까지를 보여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수미의 얼굴로는 이동하지 않기로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대신 <가만한>은 인물이 떠나고 난 공간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 한다. 구체적인 그 장소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남긴 진동과 여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들이 있었던 곳에는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함께할 것이다. 그 소리와 빛은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할 만큼 애틋하다. 부동 속에서 감지되는 미약한 흐름과 정동이 빚어낸 감흥일 텐데 그것은 봐야만 하는 것과 볼 수 없지만 들리는 것 사이에서 음악이 계속되듯, 준서의 삶도 계속되리라는 귀한 긍정을 목격하며 오는 것이기도 하다. 과격한 사건과 극적인 반전 혹은 자극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감동이 있음에 새삼 안도한다. 각본을 쓴 안정연의 사려 깊은 시선과 촬영을 맡은 손모아의 미더운 앵글이 가져다준 결과다.
* 이 글에는 < 링링 >의 결론이 포함돼 있습니다. 근래의 한국독립영화 가운데 보기 드문 기류의 영화가 있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윤다영 감독의 단편 <링링>(2019)이다. 소녀 진아( 김주아 )의 가족 내부에 음습해 있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공기는 예의주시해야 할 파상의 전조로 보인다. 기류의 변화는 집안 곳곳에 예시돼 있고 그 기류를 쫓다 보면 우리는 종국에 이르러 폭발하는 에너지의 실체와 마주할 것이다. 폭발 이후의 잔여물은 맥없고 허망하며 무력할 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관성과 타성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돼온 이성애 중심의 가족이 비록 껍데기뿐일지라도 이대로라도 유지되길 바랐던 진아의 바람은 힘을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남은 가족은 각자의 몫으로 남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떠안아야 한다. <링링>의 기상도, 이 태세 변화가 흥미롭다. <링링>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뉴스에서는 곧 태풍이 몰아칠 거라 한다. 진아는 불안한 눈치다. 아빠는 엄마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이면 홀로 낚시를 떠난다. 태풍이 온다고 하는 데도 아빠의 고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진아의 불안은 곧이어 의심이 된다. ‘매주 낚시를 하러 간다는데 어째서 아빠의 낚싯대는 새것 같은가. 아빠의 수첩에 암호처럼 쓰여 있는 ‘링링’은 누구란 말인가.’ 의심은 저만의 방식으로 가속도가 붙더니 금세 몸집을 불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진아는 같은 반 친구 나현(정한희)의 엄마와 담임이 바람났다는 얘길 들었다. 소녀들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바람이 어디 그곳에서만 불라는 법이 있겠는가. 게다가 결정적인 물증까지 확보했다. 댄서 ‘링링’이 있다는 주점의 명함이다. 아빠와 ‘링링.’ 이 불길한 조합을 쫓아 진아는 아빠의 뒤를 밟는다. 진아의 불안이 의심에서 확신으로 번지기까지 그 중심에는 아빠가 있다. <링링>에서 아빠의 존재, 즉 가족 내 성인 남성의 자리는 의뭉스럽고 수상쩍으며 불온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 진아는 둔탁한 소리에 잠에서 깬다. 아직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아빠)는 “뭐 하세요?”라는 진아의 놀란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진아의 방문을 닫고 나간다. 딸아이의 방을 찾은 아빠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퇴장이다. 진아의 경계 어린 시선과 수세적이고 어색한 말투 등에서 아빠의 방문이 진아로서는 꽤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며 어찌 보면 성인 남성의 일방적인 난입처럼 보일 만하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진아가 발견하는 것 역시 아빠의 흔적이다. 낚시한다며 뒤로 빠져 있던 아빠가 자신만 없는 뒷모습의 가족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액자에 넣어 진아 방에 걸고 나간 것이다.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아버지가 박제된 형식으로 가족주의와 자신의 존재를 환기하는 이 방식이 편할 리 없다. 이러한 아빠의 등장과 퇴장은 바람난 아빠라는 진아의 의심과 맞물리며 앞으로 전개될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이 영화의 은밀한 시선과 긴밀히 연동한다. 아빠만이 아니다. 진아를 초조하게 하는 건 활력을 잃은 가족 전반에 있다. “공기가 부족해.” 엄마가 내뱉던 이 말을 권태라고 다시 쓴다. 아빠에게 낚시가 있다면 엄마에게는 베란다와 화장실을 가득 채운 온갖 화초와 식물이 있다. 물고기와 식물로 가득한 집에서는 언제든 물비린내가 날 것이다. 그러니 진아가 했던 헛구역질은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의 외적 반응이자 활기를 잃은 가족에 반하는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저항이자 동시에 자기방어로 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반응은 매스꺼움과 맞붙어 있는 혐오의 감정마저 서려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링링’은 그 여름을 관통하는 태풍의 이름. (제13호 태풍 ‘링링’이 오기 전 영화 <링링>이 먼저 왔다) 진아는 아빠가 아닌 ‘링링’에게 일격을 당한 것일까.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한 방은 진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온다. ‘링링’의 맹렬한 기세 속에서 아빠의 낚싯대는 무언가가 걸리기라도 한 듯 휘청댄다. 그 가운데서 굴하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있다. 아빠의 그것. 일그러진 얼굴로 자위하며 절정을 향해 휘몰아치는 아빠는 비바람 속에서 맹렬히 자신의 희뿌연 정액을 흩뿌린다. 자연의 통제 불가능한 에너지와 오직 제 안의 뜨거운 것을 분출하려는 일념으로 서 있는 남자의 에너지가 마치 성교하듯 뒤섞인다. 에너지 대 에너지의 뒤섞임.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진아는 자신이 실체 없는 대상을 두고 그토록 불안해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아빠의 가장 내밀하고 은밀한 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이중의 당혹 앞에 섰다. 발산된 에너지는 완벽히 소멸했다. 태풍은 지나갔고 아빠는 태풍 속에서 죽었다. 나현이 진아에게 “여자처럼 온순하게 지나가길 바라며 태풍에 여성의 이름을 붙여왔다”라고 하며 “너 같으면 조용히 넘어가겠냐?”고 하던 말을 떠올린다면, 링링과 아빠의 이상한 조응은 마치 링링이 여성을 둘러싼 오래된 신화를 깨부수려는 강력하고 파괴적인 복수와 저항의 기운으로 아빠를 휘감고 산화한 듯 보일 정도다. 마지막 장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같이 얘기돼야 한다. 진아가 아빠의 유골함을 놓치는 바람에 재가 된 아빠가 바람에 흩날린다. 이 미끄러짐을 유발한 건 바람에 나부끼는 진아의 교복 치맛단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던 남성들의 시선에 있다. 진아를 다시금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시선 앞에서 진아는 재가 된 아빠를 놓치는 대신 치맛단을 매만진다. 그러니 진아의 눈물은 아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빠가 죽었다는 데서 오는 슬픔보다도 은밀하고 노골적인 남성의 사정과 시선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 진아에게 더 큰 파상의 흔적으로 남는 게 아닐까. 링링은 그렇게 파괴적으로 갔다지만, 진아는 여기 남아 계속 살아가야 하므로. 아직 멈추지 않은 진아의 눈물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이상한 시작이다. 은희( 박지후 )가 아파트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누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엄마를 부르며 문을 열어달라고, 내가 왔다고 성을 내며 소리쳐보지만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그제야 은희는 문의 호수를 확인한다. 902호. 다음 장면. 은희가 한 층을 올라간다. 다른 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이번엔 과연 문이 열릴까. 잠깐의 긴장. 이내 엄마( 이승연 )가 문을 연다. 심부름 다녀온 은희를 덤덤히 맞는 엄마와 얼얼한 표정의 은희. 1002호의 문이 열렸다. 그렇다. 은희의 착오였다. 그런데 이 착오는 어딘지 이상하다.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 은희가 보인 반응과 말 때문이다. 마치 이런 일이 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은희는 화를 내고 악을 쓴다. ‘나, 여기, 있다’는 강렬한 외침처럼. 안타깝지만 은희의 외침을 듣는 이는 당연히 없다. 애초부터 잘못된 문을 두드렸으니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은희의 성과 화가 지난 유사한 경험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수신인을 바로 써도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면? 그렇다면 은희의 성은 은희의 잘못이나 착오가 아니라 오랫동안 대답 없는 무응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김보라의 < 벌새 >(2018)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무덤덤함에 질식할 것 같은 열다섯 은희의 어느 한 해의 이야기라고. 1994년 서울. 방앗간 집 삼 남매 중 막내인 은희. 부모는 사는 게 바쁘고 아들 대훈(손상연)에게 거는 기대 같은 걸 두 딸 수희( 박수연 )와 은희에겐 두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균형을 잃은 관심을 보이거나 때때로 폭력을 쓴다. 툭하면 은희를 때리는 대훈, 자신의 세계조차 감당이 되지 않아 은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수희. 은희에게는 부모와 남매가 있다지만 그들 모두 은희를 알지는 못한다. <벌새>는 1994년 서울의 대치동에 사는 5인 가족의 미시사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곳곳에 위태로움이 웅숭그리고 있다. 가족과 더불어 중학교 2학년 은희의 또래 세계는 <벌새>의 또 하나의 작은 세계다. 단짝 친구 지숙(박서윤)의 당혹스러운 배신, 은희가 좋아했던 지완(정윤서)과 은희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유리(설혜인)와의 이해할 수 없는 단절. 허탈과 실망, 당혹과 화, 슬픔과 먹먹함이 은희를 덮친다. <벌새>는 은희가 부모와 남매, 사랑과 우정 저마다의 관계에서 품었던 기대와 그 기대가 자꾸만 미끄러지고 좌절돼가는 걸 섬세하게 그린다. 시대의 묘사는 기본이고 감정의 세공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 세밀함은 때론 잔인할 정도로 예리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은희의 부모는 수희를 혼내다 부부 싸움을 하게 된다. 엄마는 유리 전등으로 아빠를 치고 마는데 그 바람에 아빠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이내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후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모두가 이 에피소드를 까마득히 잊었을 때쯤 불쑥 그날의 흔적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우연히도 은희는 거실 소파 밑에서 그때 깨진 유리 파편을 발견한다. 이때의 은희는 더없이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가족의 삶에 매복해 있던 균열의 흔적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 은희의 슬픔을 배가시켜 버린다. 섬세하고 또 치밀하게도 <벌새>는 폭력과 상실의 슬픔을 단박에 꿰어낸다. 그리고 <벌새>는 강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반복적이고 끈질기게 은희에게 상실감을 안긴다. 앞서 말한 관계에서뿐 아니라 은희는 외삼촌의 부고를 접하게 되고, 느닷없이 침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세상에는 살던 집을 잃어야 하는 철거민도 있다는 걸 은희는 처음 알게 된다. 그런데 은희가 겪는 상실, 상실과 관련된 상황은 이상하리만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아픈 얼굴을 하고 온다. 죽기 전 은희의 엄마를 찾아왔던 외삼촌은 어딘가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얼이 빠져 보였고 은희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한 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가던 은희 엄마도 그렇다. 말을 잃은 듯한 수희의 얼굴도 기억난다. 그리고 영지( 김새벽 )에게서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은희의 한문 학원 선생인 영지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은희의 외침에 응답한 사람이다. 무책임하고 무덤덤하며 무반응의 세계였던 곳에서 숨이 막혀오던 은희에게 영지는 숨 쉴 틈이 돼준다. 마음을 아는 게 진짜 아는 사이라면 은희가 정말 아는 사람은 영지뿐이다. 하지만 <벌새>는 은희에게 찾아온 이 귀한 응답의 시간을 오래 두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벌새>는 또 한 번의 상실, 1994년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 앞으로 은희를 데려간다. 그런데 <벌새>를 생각할 때면 자꾸만 이 영화적 선택이 고민스러워지는 것이다. 은희가 내내 감당한 지속된 상실이 거대한 비극과 만나고 이 비극은 은희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와의 작별을 고하게 한다. 이때 은희와 은희를 바라보는 관객의 감정적 고조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은희의 계속돼온 상실과 사회적 비극을 마주치게끔 한 선택은 석연치 않다. 더욱이 은희는 사고 현장을 찾아가고 눈앞에 드러난 참혹한 사고의 실체를 바라본다. 상실을 온전히 떠안게 된 은희에게 그것은 가능한 응시의 방식이었을까. 그런 질문을 자꾸 곱씹게 된다. ‘어떻게 사는 게 맞을까.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가 은희에게 쓴 편지의 말처럼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을 긍정할 수 있다면. 하지만 이제 또다시 혼자가 된 은희를 보면서 아직 그 바람의 응답은 도착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