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 감독
- 정혜진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정행심, 엄미화, 강화숙
시간이 지날수록 잔상이 남는 영화들이 있다. 대게의 이런 경우 강렬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이기보단 행간의 여백이 도드라진 영화들일 경우가 많다. 작년 여름과 가을, 영화제의 단편예심을 진행하느라 약 400여 편의 단편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예심을 통해 본선에 오른 영화들이 지난 11월 말 영화제에서 소개되었고 영화제는 끝이 났는데, 지금까지도 문득 한 장면 한 장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정혜진 감독의 < 9월 9일 >이다. 영화는 중년 여자의 하루를 따라간다. 여자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집안을 정리하고 목욕을 가고 시장에 들러 햅쌀을 사고 그 쌀로 떡을 맞춘다. 그녀와 함께 또 다른 중년 여성들도 과일을 준비하고 전을 부친다. 오늘 그녀들에게 특별한 이가 찾아오는 듯, 마중준비를 한다. 마을의 배경은 배가 드나드는 바닷가. 그녀들은 늦은 밤 부둣가에 자리를 펴고 준비한 음식을 놓고 술도 한잔한다. 아마도 그녀들의 남편은 뱃사람이었고, 그녀들은 안타까운 사연으로 그들을 먼저 보낸 듯하다. 정작 영화 속에선 설명되지 않은 9월 9일은 ‘무주고혼제사’를 지내는 날이라고 한다. 음력 9월 9일이 되면 이름 없는 영혼이나, 떠도는 영혼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영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뱃사람들은 정확한 기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9월 9일에 합동으로 제를 올린다고 한다. 영화 속 그녀들이 모인 이유는 9월 9일제를 지내기 위함이다. 영화에서 그들이 언제 소중한 이를 잃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일에도 TV를 보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과 중년여성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 그리고 모여 앉은 그녀들의 짙은 농담으로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만 할 뿐이다. 짐작되는 시간 동안 매년 오늘처럼 모여앉아 서로의 그리움과 상실감을 살피어 왔을 것이다. 눈물이나 연민이 아닌 농담과 웃음으로 먼저 간 누군가를 추억하고 기억한다. 더불어 9월 9일은 남겨진 자신들을 보듬는 날이기도 하다. 공통의 아픔을 함께 보듬으며 단단해진 그녀들의 웃음소리는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위로로 다가온다. 괜찮다고, 잊진 않되 기억하고 함께 보듬자고.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능청스럽지 않고 기교를 부리지 않은 연출과 촬영은 그녀들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과하지 않기에, 혹은 너무 담백해서 강렬한 영화들 가운데 잊힐 법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바다에 술을 따르던 여자의 얼굴, 바다 위에 동동 떠 있던 술병, 어두운 조명 아래서 노래하던 그녀들이 차곡차곡 떠오른다. 이후에도 무언가 위로받고 싶은 일들이 생길 때면 마주 앉은 그녀들을 종종 떠올리며 위안으로 삼을 듯하다. 영화제에서 < 9월 9일 >을 본 관객들도 비슷한 감상을 전했다. 담백한 이 영화가 참 좋다고,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관객들의 감상을 받던 감독의 당황한 표정과 말들도 떠오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의 이야기였지만 앞으로 영화를 계속 만들지 모르겠다고, 자신은 영화 만들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그의 말에 관객들이 재능을 숨기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감독을 설득하며,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고 못 박았다. 감독의 차기작을 강요할 순 없지만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위로를 준 것처럼 관객들의 진심 어린 말들이 감독에게도 위안이 되었길 바라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감독의 다음 작품을 나 또한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