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반세기
- 감독
- 김광수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위키 리, 남일해, 박재란, 이미자, 이금희, 고복수, 백년설, 현인, 강계식, 주일몽, 권오상, 최성웅, 김은옥, 문미봉, 배수천, 김진규, 구봉서, 곽규석, 송해, 박시명, 오천평, 박옥초, 패티김, 윤복희, 최희준, 김용만, 남진, 현미, 한명숙, 최영희, 정훈희, 강정화, 유주용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시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고, 개인적으로 참 애정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 래를 보면서 <화양연화>의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이 오버랩될 때가 종종 있었다.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영화인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면서도 진중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남녀 주인공의 미묘한 엇갈림과 모호한 상황들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전해주며, 동시에 연기나 대사 외에도 색채와 영상미 등 진중한 스토리에 녹아든 화면의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인 정훈희의 노래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의 주제가이기도 한 것처럼, 왕가위의 <화양연화> 역시 1930-40년대 중국 가수 주선의 히트곡 '화양적연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안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개(Fog)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지표 가까이에 작은 물방울이 떠 있는 현상을 말한다. 구름과 안개는 떠 있는 위치가 다른 것으로, 하늘 높이 떠 있으면 구름이고, 지표 가까이 떠 있으면 안개이다. 구름일 때는 시야 속 경관을 아름답게 하지만, 안개일 때는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도 특이점일 것이다.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흘러나오는 정훈희의 노래도 그렇거니와, 사건도 감정도 인물 간의 관계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이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쉬운 흥행 스코어 속에서도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이유도 서사구조는 심플한 데 비해 그것을 전달하는 장치들은 다양한 층위와 모호함을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각자 인상 깊거나 여운이 남는 (흔히 말하는 ‘꽂힌’) 부분에 대해 나름의 해석들을 자유롭게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예전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던 이 한 문장은 살짝 유머 코드를 갖고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운 변태’라는 말이 좀더 어울릴 것이다. 영화계에서 자타공인하는 영화광다운 해박한 지식과, 미장센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열정은 박찬욱이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영화감독에서 칸이 사랑하는 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찬욱 감독이 그리는 영화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다. 영화는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재현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온전히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작가로서의 해석과 재창조가 들어가야 한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본인이 그리는 영화 속 세상이 아주 사실적인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라, 비유의 세계이다. 감독으로서 박찬욱이 중시하는 것은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 겠는 딜레마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어떤 도덕적인 성격이 개입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한다. 관객들이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윤리적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윤리적 질문이 난처할수록 영화는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영화감독 박찬욱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들 앞에 ‘배운 변태’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연결짓게 만든다. <헤어질 결심> 역시 ‘배운 변태’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요소들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산과 바다로 대표되는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이면서, 용의자인 서래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형사 해준의 딜레마가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해준과 서래 둘다 기혼자라는 점에서 (서래의 남편은 극이 시작되자마자 변사체로 등장하긴 하지만) 불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리얼리티가 아닌 비유의 세계,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로서의 자아와, 아름답고 묘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남자로서의 욕망. 그 둘 사이에서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황에 처한 해준의 딜레마.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질곡동 살인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되어준 서래의 말은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불륜’이라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윤리적 질문까지 얹어 놓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이 밤새 서래의 집 앞에서 망원경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스마트 워치에 녹음하는 장면은 용의자 감시이면서 동시에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해준은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때우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서래를 지켜본다. 해준에게 서래 집 앞의 잠복근무는 감시이면서 관심이고, 의심이면서 매혹이다. 해준의 수사과정은 점점 더 서래에게 이끌리게 되는 마음의 동요이고, 연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용의자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후, 서래와 해준은 비 오는 날 산사에 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시간들. 굳은 살이 박힌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해준을 보며 서래는 마음을 전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라는 서래의 말에, 해준은 ‘경찰치고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이라며 서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장난인 듯 아닌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서래 역시 장난스레 ‘현대인치고는’이라고 말하며 해준의 우산을 뺏어 들고 먼저 걸어간다. 혼자 남은 해준은 남은 핸드크림을 자신의 손에 마저 바른 후 서래를 쫓아간다. 그토록 달달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기도수의 살해 당일, 서래의 행적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를 찾아와 추궁하면서 파탄이 난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의 말에 해준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해준이 인정한 것처럼 서래의 집 앞에서 해준이 했던 행동들은 비록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랑에 들뜬 보통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길냥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하던 서래의 중국어가 번역기의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로 번역될 때 해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인 용의자인 여자가 자신의 심장을 갖겠다는 말은 생명의 위협에 다름 아니다. 후에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수정하긴 했지만, ‘심장’이든 ‘마음’이든 서래가 해준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음은 분명하다. 해준의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위험하고 소중한 무엇, ‘심장’ 또는 ‘마음’.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예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 해준의 윤리적 질문은 기혼자로서 갖게 되는 불륜이라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해준의 윤리적 딜레마는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헤어질 결심>의 장르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형사물이 아닌 로맨스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후, 해준은 월요일 할머니의 폰을 바꿔주고 중요한 증거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품위 있는, 자부심 있는 형사였던 해준이 서래를 위해 자신의 품위를, 자부심을 포기하고 범죄행위를 은닉하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범행 은닉을 도와주는 순간 끝나버렸고, 해준이 자신을 위해 품위 있는 형사이기를 포기한 것을 안 순간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나를 좋아할 확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단일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크기가 같을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긋나고 빗나가기 일쑤인 게 사랑이란 놈의 속성. 그렇기 때문에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서래는 해준의 자부심에 한 점 얼룩이 되었고, ‘붕괴되어버린’ 해준은 더 이상 서래에게 줄 ‘심장’이 없다. 서로에게 ‘꼿꼿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얘기하는 서래에게 해준은 말한다. “내가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어쩌면 해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을까? 서래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함으로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고자 한다. 보통 사람에게 짙은 안개는 이포를 떠나게 만드는 이유지만, 서래에게는 이포로 오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죽은 까마귀를 묻기 위해 흙을 파내던 청록색 양동이로 바닷가 모래를 퍼내는 서래.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킨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이는 서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서래의 실종 이후 해준이 겪을 상실감을 상상하면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이포의 바다는 무심하게도 해변의 모래알들로 서래가 누워있는 구덩이를 메운다. 강한 파도에 쌓여있던 모래 더미들이 쓸려나가고, 해준이 달려올 무렵에는 그곳에 서래가 있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해준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 그 언젠가의 서래처럼.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오르는 강렬한 석양.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거칠게 넘실거리는 만조의 파도. 그 안에서 ‘마침내’ 해준도 자신이 이미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서래가 예전 해준의 말대로 핸드폰을 바다에 버렸을 것임을 감지한다. 충격과 슬픔에 일그러지는 해준의 얼굴. 이제 해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시간도 없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풀렸던 신발끈을 다시 고쳐매고, 손전등을 켠 채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로 들어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에 몇 번씩이나 쓰러지면서도 해준은 바다로 들어간다. 서래가 있을 그 바다로. 빛을 잃어가는 하늘빛도, 보는 관객의 마음도 먹먹하다. 사랑이란,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이는 것,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거센 파도를 맞으며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것. 안개는 미혹(迷惑)과 비슷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정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는 인간의 욕망, 사랑과도 비슷하다. 혼돈과 모호함 속에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상실의 아픔도 내포한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의 감정을 소멸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을 때 그 때 보이는 풍경이 늘 아름답지는 않는 것처럼, 흐릿하게 눈을 가리던 것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진실의 모습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양연화>에서 주모운이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앙코르와트에 가만히 속삭이며 봉인해 버리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가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고자 스스로를 바닷가 모래 구멍 안에 감추어 버린다. 안개 속을 헤매이듯 모호하고 흐릿한 감정의 편린 속에서도 누 군가는 사랑을 보고 이야기하고 냄새 맡는다. 비록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봉인될 수 밖에 없는 감정일지라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라고 반문할 정도로 기억조차 못한다고 해도. 흐릿해도, ‘마침내’ 선명하게.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대중가요와 영화, 쌍끌이 부흥기의 음악영화 한형모 감독의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1966)는 제목과 감독, 제작연도만으로도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세 가지가 주목할 만한 중요 키워드인 셈이다. 첫 키워드는 워커힐이다. 1963년에 개장한 호텔인 워커힐은, 주한미군을 비롯한 외국인을 위한 호텔로 만들어진 시설로 1973년에 선경(현 SK)이 인수하기 전까지 국제관광공사 소유였다. 미8군 사령관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의 이름을 딴 것이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선호텔·반도호텔 등과 달리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 광나루 언덕에 지어진 것, 1968년 카지노장까지 개장한 것 등도 워커힐이 지닌 이런 성격 때문이다. 당연히 워커힐에는 극장식당이 갖추어져 있고 주한미군 등 외국인의 취향을 고려한 쇼로 채워졌다. 워커힐의 쇼는 당시로는 세련된 고급의 쇼인 동시에 다소 높은 수위의 노출도 가능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에서 한국의 관객이라면 ‘호텔’이 아니라 ‘쇼 공연장’에서 만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작품의 제목에서 워커힐 쇼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많은 쇼 장면을 보여주는데, 비단 워커힐 쇼만이 아니라 다양한 호텔 쇼와 방송국 쇼 프로그램까지 망라한다. 노출된 여자무용수의 허리의 꿈틀거리는 동작을 클로즈업한 오프닝 화면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에 비하자면 쇼의 관능성 수준은 시원찮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이 정도가 ‘19금’ 등급이었다. 둘째 키워드는 한형모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 작품과 이듬해의 < 엘레지의 여왕 >으로 끝이 난다. 1950년대 후반 < 자유부인 >과 < 청춘쌍곡선 > 등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세련된 촬영과 편집으로 전후 상업영화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했던 한형모 감독으로서는, 두 편의 음악영화로 마지막 피치를 올린 셈이다. 그는 줄곧 음악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꾸준한 시도를 해온 사람이었고, 음악영화가 요구되는 때에 그가 불려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유부인>에서 가수 백설희의 노래와 댄스홀의 라틴댄스 쇼 장면을 화려하게 보여준 그는, <청춘쌍곡선>(1958), < 나 혼자만이 >(1958)에서는 좀 더 음악과 춤의 비중을 높이거나 뮤지컬적인 장면을 시도했다. 그러니 아무리 1960년대 후반이라 해도 노래와 춤을 영화에 버무려 넣는 기법에서 그는 확실히 많은 노하우를 지닌 독보적인 감독임에 틀림이 없었다. 셋째 키워드는 1966년이라는 시기이다. 영화사에서 1960년대가 보기 드문 전성기였음은 두루 아는 사실인데, 대중가요사에서도 역시 전성기였다. 한 해가 다르게 양적으로 팽창해가는 한국영화계는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온갖 장르를 시도하게 됐고 음악영화 역시 그중 하나였다. 대중가요사로 보자면, 1960년대 초에 한 번도 선두 장르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트로트의 기세가 꺾이고 ‘양풍’ 가요인 스탠더드팝이 가요계의 선두를 차지한 후, 196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이미자 열풍과 작곡가 이봉조 시대의 개막, 록그룹 키보이스 등장 등 다양한 경향이 함께 솟아오르는 시기가 이때였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남진, 문주란, 배호, 정훈희 등 폭발적이라 할 만큼 여러 신인 가수가 두각을 나타내는데, 1966년은 그 직전의 상승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가요를 활용한 음악영화의 출현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대중가요를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까지 만족시키며 즐기고 싶은 관객들의 요구란 늘 있다. TV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당시에, 대형 컬러 화면으로 다양한 종류의 쇼를 구경한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부터 < 청춘대학 >( 김응천 , 1966), < 엘레지의 여왕 >(1967), < 폭풍의 사나이 >( 박종호 , 1968), < 이 강산 낙화유수 >( 조길현 , 1969) 등 음악영화가 쏟아져나왔고 이 흐름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인기 가수의 노래 장면을 틈틈이 배치한 국책영화 < 팔도강산 >( 배석인 , 1967), 영화로 만든 한국대중가요사라 할 만한 < 가요반세기 >( 김광수 , 1968) 등도 이런 흐름 속에 놓여있다. 그러니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는 무엇보다도 틈틈이 화려한 대중가요 쇼를 보여주는 것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시골 사람의 어리바리 서울 구경,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의 극적인 만남 같은 극영화의 기본 얼개는 매우 상투적이며 부실하다. 심지어 한형모 감독이 무려 10년 전에 시도한 <청춘쌍곡선>의 뮤지컬적 장면조차 이 영화에는 없다. 대사를 대신하는 노래는 전무하며 모든 노래는 가수들의 쇼 장면으로만 소화되고 있다. 사건은 그저 쇼 장면을 연결해주는 느슨한 끈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 대중가요 쇼의 배치는 공들여 다채롭게 배치된 티가 역력하다. 트로트부터 스탠더드팝, 경음악까지 두루 능란하게 다루는 작곡가 박춘석이 음악을 맡았으니 음악의 질도 나쁘지 않다. 당시 최고의 사회자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여러 장면에서 쇼의 진행자로 등장하고,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자니부라더스의 <방앗간집 둘째 딸> 등 박춘석의 작품뿐 아니라, 1960년대 초중반을 휘어잡은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그 외 이금희와 위키리 등의 외국 곡도 두루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익살스러운 복장의 윤항기가 <울리불리>를 부르는 키보이스 연주 장면까지 넣어 당시 아주 젊고 새로운 록 음악까지 선사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악과 쇼를 보여주기 위해, 위해 ‘부르스’ 추는 호텔 나이트클럽과 공연의 중심인 시민회관 쇼, 회전무대를 갖춘 화려한 워커힐 쇼, KBS TV의 쇼 스튜디오, 젊은이들이 소울풀한 몸짓으로 춤추는 명동의 뮤직홀까지, 어리바리한 두 시골 사람이 돌아다니도록 만들었다. 주인공인 신인가수 남보라(남정임 분)가 부르는 주제가 격인 노래는,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의 중간쯤 되는 <파란 이별의 글씨>(전우 작사, 박춘석 작곡, 성태미 노래로 영화에서는 립싱크로 처리되었다)를 배치해 안정감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켰다. 거의 모든 쇼 장면에는 무용이 들어있어, 당시 쇼의 무대미술과 연출, 백댄스의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충분히 의미를 발한다.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강근식 구술을 통해 보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주목받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시대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영화들로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인력의 구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구별되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림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포스터 (그림2)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포스터 특히 이 영화들은 1970년대 각광받기 시작한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1960년대와는 달라진 새로운 청년세대의 등장을 강조하였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매 시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이민이 연기한 춘호가 전쟁 직후 미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프레게르’ 세대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한 두수와 요안나가 4.19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방황하는 ‘청춘’ 세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분한 경아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신인 신분으로 파격적으로 기용된 윤문섭, 하재영과 아역배우 출신의 이영옥이 연기한 병태, 영철, 영자는 이들 세대와는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히피 세대의 등장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을 담당했던 강근식이 “히피 감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세계적인 유행은 다양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콘텐츠에 녹아들었다. (그림3)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문오와 경아 (그림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의 병태와 영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력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 연출의 스타일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문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강근식은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합류한 대표적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본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영화와 미국음악에 오롯이 영향을 받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예술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즈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음악적 취향은 이들 영화를 동시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영화와 음악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연관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놓았다. 이렇듯 강근식을 비롯하여 당대 청년 세대에게 호응을 받은 소설가 최인호, 음악인 이장희, 송창식 등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이장호, 하길종 감독 등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대중의 열망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대중문화의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강근식의 프로필은 시대를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청소년 시절, 역사의 큰 분기점인 4.19와 5.16을 겪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음악에 심취해 학내 밴드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음악살롱에서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하며 상업영화와 상업광고음악계까지 진출한 그의 음악 프로필은 1960~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까지 살펴보는 데 일조한다. 특히 1970년대 TV산업의 확장과 성장으로 동반 성장한 광고산업과 이에 따른 하위문화의 번성이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는 데 유용한 구술이기도 하다. 강근식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매체의 넘나듦’이다. 이 시기 영화와 TV 그리고 공연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무대와 영화의 영향관계 내에서 활동한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멀티 엔터테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영화작업이 그러하며 (최인호는 자신의 원작이나 각색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걷지말고 뛰어라>(1976)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강근식을 비롯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인들 또한 본업인 음악작업 외에도 영화음악과 광고음악을 넘나들면서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는 TV 산업의 성장으로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쇠퇴한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체의 경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함으로써 매체 간의 영향이 다각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밴드음악과 영화음악 그리고 광고음악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림5)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최인호 출연 장면(아래 왼쪽) ‘평생 음악인’ 강근식의 음악이야기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60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청춘의 음악 만들어낸 영원한 청년 음악인」을 수정·보완했다. 강근식은 194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탄광촌인 강원도 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락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환경에서 기타를 치던 형님들과 나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는 누이를 보며 음악을 배웠다. 가수 활동을 하던 삼촌 손인호는 때때로 악극단 활동에 얽힌 무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생활한 덕에 그는 평생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림6) 홍대강당에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홍익캄보의 첫 공연. 왼쪽에서 두번째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그림7) 밴드 홍익깜보 시절 신입생 환영회. 가운데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홍익대학교 도예과 재학 시절 학내 밴드인 홍익 캄보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강근식은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수상 후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음악프로그램 <TBC 쇼쇼쇼>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음악의 산실이라 부를 수 있는 오리엔트프로덕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이장희와 동방의 빛>, <조동진>, <현경과 영애>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이장희와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할 때는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직접 무대의상을 제작해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림8)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 공연 사진. 2회 연속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당시에는 무대 모니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밴드 공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9) <쇼쇼쇼> 출연 사진. 왼쪽부터 이장희, 진행자 곽규석, 강근식 (그림10) <동방의 빛> 공연 사진. 앙드레 김 선생이 맞춰준 옷을 맞춰입고 공연하였다. 이후 강근식은 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음악인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인들 그리고 광고인들과 협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에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화천공사의 만남으로 탄생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충격과 파장을 끼쳤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이 영화들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1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OST (그림12) <바보들의 행진> OST 영화음악과 더불어 그가 작업한 광고음악은 음악인 강근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프로필이 되었다. 김세환이 부른 “부드러운 껌”(<해태껌>)과 정훈희, 윤석화 등이 부른 “열두 시에 만나요”(<부라보콘>),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트라이>) 등은 CM송을 넘어 시대를 소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광고음악을 창작하며 경험한 대중문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그의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197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에서 광고의 거리로 변화하는 모습, 영화가 아닌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 광고의 종류가 식료품 위주에서 전자기기로 변화하는 모습 등은 광고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13) <부라보콘> 광고 (그림14) <부라보콘> 광고 (정윤희와 신일룡이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시도로 탄생한 새로운 청년영화 강근식이 작업한 영화음악은 총 13편으로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1970년대 작업한 영화가 6편(<바보들의 행진>,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 <미스 영의 행방>(박남수, 1975) <걷지말고 뛰어라>(최인호, 1976)(편곡), <내마음의 풍차>(김수용, 1976)), 영화음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1986년 작 <가슴을 펴라>(최원영)를 포함해 1980년대 작업한 영화가 8편(<하얀미소>(김수용, 1980), <강변부인>(최동준,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별들의 고향 3>(이경태, 1981), <이별없는 아침>(이경태, 1985))이다. 그중 1970년대 작업한 6편은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197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이끈 화천공사와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한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국가의 제도로 제약을 받고 있던 1970년대, 화천공사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들을 통해 새로운 메이저 제작사로 등극했다. 이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 분야에 새로운 인력을 영입해 활용한 것 또한 주효했다. (그림1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신문광고 (그림16)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신문광고 특히 음악은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현격하게 비중을 높임으로써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화천공사는 도시 중심의 청년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대중 전체에게 어필했다 볼 수 없는, 밴드와 통기타를 기반으로 ‘젊은 음악’을 선보이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협업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이장호, 하길종, 최인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맥 기반의 우연한 기획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관객층을 공략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작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의 결과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강근식이 구술에서 언급하는 <별들의 고향>의 음악살롱 장면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되는 장면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당시 강근식, 이장호, 최인호가 드나들었던 음악살롱 등의 아지트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이는 원곡의 가수인 이장희도, OST를 부른 김세환도 아닌 가수 백호빈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여러 명의 가창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제 존재하는 대중문화 그룹에 가상의 가수와 극 중 인물들을 동시에 투입시킴으로써 허구와 현실을 함께 녹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허구의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 당대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예술인 그룹을 직면하게 된다. (그림1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백호빈) (그림18)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바보들의 행진> 또한 비슷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대학생 신분인 배우들의 학교명을 광고에 활용하여 마치 이들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노린다.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송창식의 <왜 불러> 가사와 박자에 맞춰 편집된 장면은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장면은 인파 속에서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과 시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과 교차 편집을 통해 현실감을 높인다. (그림19)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장발단속 중인 경찰에게 붙잡힌 장면) (그림20)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그림2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육교에 매달린 장면) 이처럼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의 관계처럼 이 영화들의 장면 장면들은 이야기와 음악이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시도해 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인 강근식 구술의 의의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화천공사가 제작한 청년영화의 음악작업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인 동시에 당시 청년문화를 직접 겪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대학생 밴드 활동과 이장희, 송창식, 조동진 등의 음악을 작업한 오리엔트프로덕션(사장 나현구)의 작업 방식과 회사의 분위기, 대중문화예술인과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다. 말하자면 강근식 선생의 구술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1960~1970년대 젊은 대중문화예술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술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음악의 역사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구술이기도 하다. (그림22) 쎄시봉의 현장. 왼쪽 아래에 안경낀 사람이 이백천. 이백천은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을 기획하였다. 더불어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대중문화의 경험과 초기 문선대의 공연 모습도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1975년 첫 번째 대마초파동에 얽힌 뒷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근식은 이 사건에 엮여 고초를 받은 당사자로서 당시 대마초가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후의 과정과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이 일로 인생의 목표 설정이 많이 변해버린 것을 담담하게 소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음악부터 영화음악, 광고음악까지, 평생을 음악 ‘일’을 해온 백발의 노신사는 현업에서 은퇴한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한 음악인 강근식의 모습은 이제 무대 위 ‘기타리스트 강근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림23) 강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