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타운
- 감독
- 전규환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주유랑, 라미란, 오성태, 이준혁, 노슬기, 이용주, 성정선, 장영주, 정대용, 이새로미, 윤태성, 안영남, 이설구, 정희라, 박건탁, 최유림, 박승배, 정미남, 송대중, 육미라, 송진영, 안민영, 백현주, 유하복, 문호진, 이시훈, 이윤상, 박충신, 남아현, 홍윤지, 김소라, 정진성, 허영우, 장대웅, 정계순, 스트립팬더, 이정현, 도유승, 임채선, 함은영, 이준원, 달시 파켓
<장손>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곰곰이 뜯어보면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오묘하다. 비평(critic)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는 통설에 근거하자면, 비평이란 그 성질상 한사코 안녕(安寧)할 수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안녕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비평가는 위기를 발견하고, 때로는 그것을 인식의 표면에 올리고자 위기를 조장해야 한다. 통념과 상식의 범주에 포착되지 않는 요소를 끝내 사유의 영역으로 회수해내는 일—그곳에 비평가의 덕목과 기쁨이 있다. 물론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고 기쁨을 누리는 비평가도 안녕하기는 어렵다. 상식과의 불화를 견지하면서 평안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녕한 비평’은 존재할 수 없고(안녕하면 비평이 아니다) ‘안녕한 비평가’는 소속감을 불안으로 받아들이고, 불화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의 희귀한 기질을 갖춰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주1 ) 비평가는 탄탄대로를 지척에 두고도 굳이 외줄을 탄다. 탄탄대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마땅히 안녕할 수 없는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이렇게 읽힌다. ‘비평, 설마 안녕히……하고 계신 건 아니죠?’ 내게 비평가란(등단 등의 제도를 통해 부여되는 자격이 결코 아니고) 비평의 기능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조금만 비평가다. 그렇지만 질문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 그러니 질문을 핑계 삼아 외줄에 올라보자. 다시 한 번, 김현은 이렇게 쓴 적 있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 없이는 느낄 수 없다.” *주2 비평가는 투사와 예술인의 세계를 오가고, 부지런히 샛길을 만든다. 잠깐, 자부심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기에 아주 멀리 우회하고 감추고 파편화할 것이다. 2. 이두용 의 < 장남 >(1984)은 고향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노부모가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장남( 신성일 )을 중심으로 담은 극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 동경 이야기 >(1953)처럼 처음 장남의 집에 모셔진 노부모는 도시화된 생활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집터로 사둔 변두리에 잠시 머물고 결국 노인에게 불편한 아파트로 옮겨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제주도로 장남이 출장을 간 사이 노모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틀니를 전달하지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장남이 도착한 건 엘리베이터에 실을 수도 없어 관이 ‘짐짝’처럼 곤돌라로 내려지고 있는 때였다. (상) 아파트로 이주한 노부모와 노모의 관이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남 (하) 공중전화에 두고 간 수첩을 전달받는 장남 이렇게 글줄로 옮기니 장남이 적극적으로 불효를 저지른 것 같지만, 장남은 결코 지탄받을 정도의 불효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잘 잊는 사람’일 뿐이다. <장남> 그리고 이두용의 탁월함은, 이 성격을 구축하는 표현법에 있다. 5분, 장남이 공중전화에서 막내에게 전화를 하고/다음 이용객이 장남이 수첩을 두고 갔다고 불러/수첩을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슬래쉬(/)를 기준으로 세 컷으로 이뤄진 이 장면은, 장남이 ‘잘 잊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intention)를 드러낼 정도로 강조되어 있지만, 몰입을 저해할 만큼 웅변조는 아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시작된 ‘잘 잊는 사람’이란 성향이 연속되며 결말이 엄습해온다. 장남의 유실물이 점점 중대해진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을 잊고, 어머니의 틀니를 해주는 것을 잊고,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에는 어머니의 다가오는 죽음을 잊는다. 그 제목만으로 <장남>과 ‘ 각각의 영화사 ’를 상상하게 하는 < 장손 >(오정민, 2023)은 여러모로 다른 영화다. 노부모가 장남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상경한 손자가 가족이 사는 대구의 고향 집으로 내려온다. 장남과 달리 장손 김성진( 강승호 )은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임권택 은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에게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남성성과 운전). 그리고 무엇보다 장남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한다. 그렇지만 장손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장손은 조부모의 영정사진을 찍는 일을 회피하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도 곧잘 들어오지 않으며, 병실 바로 앞에서도 고모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창밖의 햇볕에서도 눈을 돌리듯, 가족의 문제를 외면(外面)한다. 고모부를 보지 못하고 병실 앞에 앉은 성진 물론 <장남>의 잦은 망각도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에 검열된 결과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다만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라는 검열과 부딪칠 때마다 쌓였던 에너지는 노모의 죽음과 함께 슬픔으로 폭발하고 관객에게 전이된다. 그리하여 이두용 영화에 내재한 미묘한 냉엄함과 별개로, <장남>은 가족주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주3 이와 달리 가족의 무게를 결단코 외면하지만 (지극히 특권적이고 결단코 반항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러므로 단언컨대 성진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핵심적 구동원리인 ‘장자우선주의’의 수혜자인 덕에 가족주의의 전(全) 과정을 익히 알 수 있는 성진의 특권적 시야로 인해 <장손>은 건조한 케이스 스터디로 귀결된다. <장남>과 <장손>의 이 차이는 흥미롭다. 그렇지만 지금 남겨둘 질문은 하나다. 어쩌다 장손은 외면을 하게 되었는가? 3. 유산(heritage)은 벽이다.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 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은 단 하나다. 그것을 정확히 대면하는 것. 나는 여기에 관한 최량의 우화를 하나 알고 있다. 남재일 : 당신의 영화는 매우 공격적이고 신랄하게 발언한다. 지금 ‘아버지’라고 표현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격하고 싶은 건가? 임상수 : 나는 모든 권위 혹은 권위주의를 철저하게 경멸한다. < 그때 그사람들 >(2005)을 본 사람들은 임상수가 이렇게까지 존경심이 없다는 데 당혹해한다. 좌파와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런 걸 보면 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경멸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경멸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조롱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조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뿌리 깊은 속성부터 아무런 존경심이 없다. 그 근원은 내 부친이다. 그는 존경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출세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투가 있었지만, 나는 한 세대를 겪고 나오면서, 그 질투를 정확하게 걸러냈다. 그의 경멸만을 물려받았다. 경멸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만큼도 존경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허투루 존경받고 있다는 치명적인 사실 말이다. (강조-인용자) ‘남한’을 구축했다고 할 만한 최대의 유산인 박정희를 경멸하기 위해 임상수 는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임상수는 박정희를 거의 촌부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해직기자이자 영화평론가였던 아버지 임영(林英)의 덕이며, 심지어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가 이 영화의 공동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층위는 다소 다르지만) 유산의 성격이다. (박정희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대면하면 그것을 경멸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임영이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4 한국의 영화에도 많은 유산이 있다. 나는 이 유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유산은 일종의 물과 어항이다. 나는 그 안에 살기에(물) 제한된다(어항). 제한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의심이 시작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을 외면(外面)하는 것이 ‘안녕’한 선택이다. 그리고 ‘안녕’을 위한 외면도 반복된다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비평은 어항의 ‘바깥’을 향한 몸짓이다. 그 몸짓의 방법과 정도는 가지각색일 수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지느러미로 어항을 가늠하고 빈틈을 탐색할 수도 있고, 눈알이 빠지도록 대가리를 어항에 처박을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사를 돌아보면 많은 비평은 어항을 새로이 만드는 일에 참여해왔다. 초기의 비평은 세계영화에 비해 기반과 역사가 빈천한 ‘한국영화’의 위신(prestige)을 위해 투쟁했고, 1990~2000년대 ‘뜻밖의 연합(Unexpected Alliances)’ *주5 이 이뤄진 시기의 비평은 ‘스크린쿼터 운동’을 문화제국주의에 대립하는 첨예한 전선으로 잡고 독립과 인디(indie)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기금의 조성에 헌신했다. 이들의 투쟁과 헌신이 얼마나 상례적이었고 유효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제도는 분명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비평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가 오늘날 영화에서의 유산이다.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영화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기억컨대, 2010년대의 영화계는 제도 비평의 활기가 가득했다. 혹자는 이들의 제도 비평을 두고 지면(紙面)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라고 저열한 힐난을 했지만, 내가 아는 한 제도 비평에 열을 올렸던 비평가 중 영화계에서 안정된 지면을 얻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도 비평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제기한 논점을 두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는 회담이 열린 적도 없다. 솔직한 토론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들의 지적 기반과 역사적 모순이 노정될 게 두려웠던 것일까?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말하자면, 영화계는 제도 비평을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비판을 지면의 요구로 해석하는 사람이나, 비판의 실질이 아니라 태도를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사람들은 영화를 문화가 아니라 산업으로 보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게 아닐까? 그들은 종종 이렇게 무의식적인 고백을 한다. “이런 비판에는 동업자 정신이 결여되어있어……” 재원의 전부가 국가지원금인 경우에도……) 어쨌거나 그때의 비평가들은 대개 미술이나 문예 계열의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2020년 COVID-19로 인한 팬데믹(Pandemic)이 도래했다. 2010년대가 핵심적으로 겨냥한 유산이 ‘뜻밖의 연합’이 창안한 제도였다면, 이러한 역사적 우연은 지극히 공교롭게 느껴진다. 초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의 위신을 추구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단관극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뜻밖의 연합’ 시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와 독립영화의 ‘다양성’을 ‘보장받길’ 원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멀티플렉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상영관에서 한국의 영화를 확실히 몇 자리 확보하고자 하는. 그리고 팬데믹은 정확히 멀티플렉스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2010년대의 제도 비평을 지금 보면 어딘가 예언적인 게 있다. 그때 지적된 다양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적해 있고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학습의 효과일까. 오늘날 영화 비평은 더는 제도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내 대가리만 깨지고 말 텐데?)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마이크로시네마’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씨네21》이 서로 너무도 이질적인 집단을 묶고 이들을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제시했지만, 그 요체인 소규모-(비)공식-영화보기 모임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최근의 ‘마이크로시네마’가 새로운 현상인 것은 이 기획에 비평가가 다수 참여하고 있고, 과거와 달리 (위법성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홍보로 호객을 한다는 점일 테다) 그 실질은 제도 비평과 아무 관계 없다고 실소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구조적으로도 팬데믹 시기에 강화된 OTT라는 미디어 환경이 영화를 초과공급하고 있기에 강력한 큐레이팅 기능을 요구하는 수요를 포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의 시야에서 2010년대의 제도 비평과 2020년대의 마이크로시네마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혹은 착각일지라도, 이 착각이 적잖이 생산적일 거라고 자신한다. 이러한 착각을 지속하자면(사실 비평가는 착각의 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스트 2010년대’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영화 제도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유통과 인정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 혹은 제도화 없는 비판이 내파(implosion)와 외파(explos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토대로 시작한 참호공사. 어항과 금붕어의 비유를 계속 들자면, 전자는 작지만 작은 어항을 새로이 만들자는 것이고, 후자는 어항을 부술 수 있을 때까지 머리를 단단하게 만들자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보니, 제안받은 원고의 매수와 주제를 모두 훌쩍 초과했기에, 이쯤에서 서둘러 마무리해보자. 나는 비평이란 그 성질상 위태롭고 불쾌하고 불건전할 때 적절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다시 어항에 대가리를 처박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2010년대에 예견되었듯, 멀티플렉스는 머지않아 시장에 의해 자동조절 될 것이고 줄어드는 관객에 따라 영화에 부착된 사회적 기능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실천이 아니라, 제도 비평의 계절이 다시금 오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제, 감히 대명사를 바꿔 보자) 우리의 ‘제도 비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나의 근심이자 고민이다. 나는 성진-장손이 택시를 돌려 다시 집으로 가길 바란다. 그것이 그의 몸과 정신을 찢어놓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2010년대 재방문’이 너무 늦지 않기를. “장자의 무용지용에 대한 퉁명스러운 반론: ‘그래 그렇게 오래 살아 뭐하자는 게요, 제기랄.’” *주6 *** 주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3, 128쪽. 주2. 위의 책, 168쪽. 주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건대, 영화의 결말이 가족주의인 것이 영화의 질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4. 고백하자면 나는 초기의 (영화적, 문화적) 세계관을 남재일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전수받았다. 유산은 강력하다…… 주5. 포스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영화산업과 국가, 그리고 독립영화가 어떻게 예기치 않게 연합을 이뤘는지를 설명하는 동명의 저서(박영아, 2014)의 제목. 주6. 위의 책, 156쪽. 금동현(영화평론가) l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2024), 『하녀: 하녀 따위에 흥미를 가져요?』(2024) 등을 집필했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매거진 《삼삼오오》를 기획하고 있다.
돌아오는 한국영상자료원 특별전의 주인공은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배우 윤정희 다. 윤정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 배우이며,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연기로 영화를 빛내는 배우였다. 게다가 작품 선택에도 신중해서 ‘윤정희가 출연하는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성이 한 영역에서 중요한 축으로 잘 회자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여배우를 중심으로 영화사의 궤적을 보는 기회란 매우 소중하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의 다양한 여성상과 함께, 우리 영화사에 중요한 작품 및 다양한 민족심리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중 주인공인 윤정희의 존재감이 잘 드러나면서 지금 시점에서도 가깝게 호흡할 법한 영화들을 골라보았다. < 야행 >은 여성의 내적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60년대에 동거 중인 커플을 그린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영화에는 결혼관계에 회의적인 남녀의 모습이 등장한다. 알콩달콩과 지리멸렬로 반복되는 가정의 모습이 현실적이고 또 공감된다. 영화의 문제의식은 미스 리( 윤정희 )의 여정을 따라 나아간다. 그녀는 사랑했던 이를 베트남전쟁에서 잃었고, 육체적인 관계에 집착하는 남성들로 넘쳐나는 폭력적 도시와 이와 마찬가지인 동거남에 환멸을 느낀다. 여기서 여성을 통해 보는 한국의 과거는 비극이고, 현재는 공허하다. 여성의 심리적 눈을 통해 구성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흥미롭다. 한국 사회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담은 영화로는 < 화려한 외출 >도 빼놓을 수 없다. 성공 가도의 여성경영인이 갑자기 섬마을의 아낙으로 끌려가 아무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설정은 한국 사회의 불안 그 자체다. 전후에 짧은 시간 동안 이룩한 근대화 과정에서 전근대의 자장을 신경질적으로 두려워하는 사회심리가 한 여성의 이상한 여행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여성의 사회진출을 이야기하는 커리어우먼과 남편에게 맞는 시골 아낙으로 동시에 분한 윤정희의 모습은 그녀가 재현하는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한 번에 느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여섯개의 그림자 >에서 현주( 윤정희 )는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가 가장 두려움에 떠는 대상은 그를 스토킹하는 전남편 상국이다. 현주는 재산보다도 자신의 새로운 사랑과 일상을 방해하는 그를 견디지 못하고, 상국이 기차로 이동하는 틈을 타 그를 달리는 기차 밖으로 밀어버린다. 또 그녀는 애초에는 자신의 재산을 보고 접근했던 태일과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그를 용서하고, 복수를 당해 죽을 뻔도 하지만 되려 자신의 범죄 앞에 오열하는 등 감정적으로 솔직하고 행동에 있어 변화무쌍한 여성이다. 돈과 사랑의 스릴러야말로 현대의 드라마가 아닌가. < 신궁 >에서의 무당은 위의 현대 여성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 내내 억척스러운 왕년이( 윤정희 )의 모습이 윤정희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남편을 지키지 못해 굿을 접은 무당 왕년이의 마지막 굿판이 주는 긴장감과 복수에 성공한 후 보이는 왕년이의 신랄한 미소가 극적 반전과 쾌감을 전한다. 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 명이었던 윤정희는 주로 요염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인식되었다고 하는데, 핍박당하는 기층 여성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윤정희의 표정과 미소에는 그녀를 당찬 여성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윤정희 는 한국의 다양한 얼굴과 고민을 성실하게 담아낸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배우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대표작 20편의 목록만 해도 신분의 장벽 앞에 놓인 기생, 부박한 삶의 조건을 이겨내는 민중, 현대사회 욕망의 굴레에 빠져드는 도시인까지 인물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특별전 제목이 말하듯 윤정희의 색채로 물든 영화에는 지적이고 세련되게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는 배우가 깃들어 있다. 윤정희라는 배우가 무수한 영화에 등장하는 일은 그 기록 수치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만큼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렸다는 면에서 중요하고 값진 영화사의 유산이다.
임권택 의 < 왕십리 >(1976)는 내게 기이한 몽환적 경험을 전해준 영화다. <왕십리>가 임권택의 초 중기 장르 영화 걸작 중 한 편이라는, 혹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도 수작에 속한다는 공인된 평가와 나의 그 몽환적 경험이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어쩌면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잊히지 않는 그 몽환의 경험 때문에, 동시에 임권택 영화 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나의 첫 번째 임권택 영화의 걸작으로 <왕십리>를 꼽고 싶다. < 왕십리 >에서 나를 혼미하게 만든 건 이 영화에서 한 차원 더 발전되었다고 평가받는 임권택 식 회상 장면들의 쓰임새가 아니라, 그 회상 장면들 이후에 찾아오는 기괴한 ‘출현과 재출현’의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예외 없이 여주인공 정희( 김영애 )의 등장과 전부 관련이 있다. 주인공 준태( 신성일 )는 14년 만에 돌아온 고향 왕십리에서 옛 연인 정희를 다시 만나 보기를 원한다. 정희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이 셋을 둔 행복한 귀부인이 되었으니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친구들이 말리지만 준태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마침내 정희가 나타난다. 그녀는 듣던 대로 귀부인이 된 것도 같고 영화가 회상 장면을 통해 보여 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청순함을 지닌 것도 같다. 이제 첫 번째 출현의 시간이 온다. 사기꾼 정희의 출현이다. 그녀는 사실 배다른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왕십리의 소문난 바람둥이이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기꾼이다. 14년의 세월이 정희의 순진함을 더럽혔거나 준태가 그녀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홀로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처럼 위장한 그녀는 준태의 유년 시절 친구이자 자신의 현재 애인인 충근( 백일섭 )과 짜고 준태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준태에게 연약하고 쓸쓸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던 정희는 준태가 떠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아휴 살기 힘들어”하며 성질을 내면서 천박하게 병째 소주를 들이켜고는 아이들에게 입조심들 하라며 주의를 준다. 사기꾼 정희의 정체가 드러나는 이 순간은 너무 갑작스럽고 노골적이어서 잠시 어리둥절하다. 이 장면의 ‘결’은 적지 않은 상영시간을 들여 과거의 그녀를 소개하던 회상 장면의 ‘결’과 너무 다른 탓에 거의 우격다짐으로 여겨지거나 서사적 위반 혹은 거친 속임수처럼 느껴진다. 회상 장면의 정희는 순박했는데 이 장면의 정희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 충격 요법이 전부였다면 < 왕십리 >는 그저 범작에 그쳤을 것이다. 정희는 그치지 않고 다시 출현한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준태 앞에 또 나타난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는 이 이상한 가정을 마치 홀린 듯이 연거푸 읊지 않고서는 <왕십리>의 감동을 말할 능력이 없다. 정희의 사기 행각이 전부 드러난 뒤 그녀는 준태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곱고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왕십리역 광장 목재들이 쌓인 그 좁은 틈 사이에서 그녀가 준태를 기다리고 있다. 정희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앞 장면의 천박한 정희와 지금 이 자리의 정희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확연히 다른 톤으로 그려낸다. 그녀는 지금 천박하기는커녕 낮고 떨리는 음성으로 사랑을 배신한 것에 슬퍼하고 죄를 지은 것에 속죄하는 청순의 여인이다. 이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이다. 준태는 정희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충근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결혼식까지 올려준다. 정희에 대한 이러한 양립된 인물 묘사가 투박한 서사적 결함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순 있다. 그런데 그것이 결함이라 해도 그 결함을 능가하고 주관하는 기이한 무드가 정희의 출현 때마다 솟아난다는 걸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정희의 기이한 출현과 재출현마다 그 무드가 어김없이 생성된다. 그걸 잠재적 가능성의 무드라고 불러도 될 것인가. 가령 < 왕십리 >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두 명의 정희가 출현한다. 천박한 정희, 순수한 정희. <왕십리>는 기승전결을 지닌 내러티브 영화이므로 우리는 이 천박함과 순수함을 한 인물이 지닌 양면적 성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명의 정희의 출현을 좀 더 비상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인물의 두 가지 성격이 아니라 한 인물이 가질 법한 삶의 두 가지 잠재적 가능성이 번갈아 출현하는 대목으로 느꼈다. 그 때문에 출현이라고 내내 말하고 있다. 정희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졌을 법한 두 개의 삶의 가능성의 출현인 것이다. 준태는 왕십리로 돌아와 정희라는 한 인물의 두 측면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희가 가졌을 법한 두 개의 삶의 가능성을 차례로 혼란스럽게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준태를 따라 왕십리에 도착한 관객인 우리 역시 혼란에 빠지지 않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마침내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밤에 준태가 자신의 숙소 방문을 열었을 때 정희는 또 다시 홀연히 출현한다. 충근과 신혼여행을 떠났어야 할 정희가 준태의 방에서 그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누가 찾아온 것인가. 천박한 정희가 온 것인가. 순수한 정희가 온 것인가. 정희의 어느 쪽 삶의 가능성이 온 것인가. 이날 밤만큼은 애매하고 모호해서 확신할 수 없다. 그녀의 자태 그리고 고백의 말들이 후자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지만 정희는 끝내 준태가 잠든 사이 그의 지갑을 털어 조용히 방을 나선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기꾼 정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정희는 이날 밤 자신의 진심을 말한 것 같다. 그녀는 순수했다. 방을 빠져나온 정희는 마침내 새 삶을 다짐하며 이 날의 범죄를 모의한 충근에게도 헤어지자고 말한다. 정희와 정희의 삶은 잠재적 가능성을 짐작할 뿐 끝내 정의될 수 없다.“세월을 거슬러 그때로 돌아갔으면... 이대로 시간이 멎어 버렸으면...”그날 밤의 정희가 준태와의 첫 정사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그녀를 위한 한 치의 회상 장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애틋한 밤의 이 냉혹한 판단, 이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영화의 도입부에서 준태는 회상 장면을 따라 자신의 주관적 기억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적 주체로 상정된 인물이다. 영화는 정희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관성의 경로를 갖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의 주관적 기억이 형성되어 그녀 또한 준태와 같은 주체적인 인물로 상정될 때, 우리가 느껴온 그녀의 모호한 잠재적 가능성은 허물어지고 그녀는 정박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왕십리라는 기이한 고향의 땅에 출몰하는 가능성의 유령, 가능성의 정희로 머물다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해가 밝는다. 애틋한 밤이 지나고 정희는 떠나고 냉혹한 현실의 낮이 준태를 기다린다. 준태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젊은 호스테스 윤애( 전영선 )를 찾아가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말하려 하지만 오히려 윤애는 티 없이 밝게 웃으며 말한다. 고향 출신의 남자와 맞선을 볼 것이라고. 영화 내내 정희의 과거태로 현존했던 그녀조차 준태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준태의 정착이 결정되고 정희와 윤애가 떠난 자리에 준태가 대신 남는다. 그러니 우리의 가정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14년 뒤 정희와 윤애가 돌아와 준태를 만나는 그때에 그들이 매 장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출현하는 서로 다른 준태들, A라는 준태와 B라는 준태를 만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련의 감상의 과정을 겪고 나면 < 왕십리 >에서 왕십리는 순박한 회귀적 고향보다는 흥건하게 무드에 젖은 몽환의 땅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왕십리>가 임권택 영화 세계의 본류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많이 언급되어 온 한국 문화의 전통성이나 감독 자신이 강조해 온 인본주의 사상은 <왕십리>에서 희미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한 희박함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다. 임권택 영화에 무수하게 출몰하는 어떤 명장면들, 예컨대 돌출적이고 기괴하고 매혹적으로 무질서한 감각적 차원의 명장면들과 연계되는 비밀 통로가 <왕십리>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왕십리>의 길이 이후 임권택이 주력해서 걸어간 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왕십리>가 지금보다 더 높은 주목과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걸작인 것은 더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