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 감독
- 클라이드 브러크먼, 버스터 키튼
- 제작년도
- 1927
- 출연
- 버스터 키튼, 마리온 맥, 프랭크 바네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조립식 미니어처 완구에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다. 노스롭 그러먼(Northrop Grumma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Raytheon Technologies) 등 완성된 미니어처 외벽의 간판에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 산업체 이름들이 새겨진다. 그 위로 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년의 읊조림이 얹힌다.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 우리가 겪었던 위대한 전쟁들에 대해 배웠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지/ 언젠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1964년 발표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저항적인 포크 송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What Did You Learn At School Today)’는 미니어처 모델의 양식화된 조립 과정과 기이한 대조를 이룬다. 정글의 소리와 멸종된 짐승의 포효가 곁들여진 공룡 뼈의 모형으로 열리는 영화 < 소년 >(2025)은 제임스 베닝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의뭉스러운 도입 직후 작가 특유의 엄격한 패턴을 제시한다. 베닝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적인 세계 이미지가 아니다. 베닝은 풍경을 포기하고, 텅 빈 블랙박스를 배경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라디오를 듣는 소년의 관점을 취한다. 시간을 횡단하는 이 가상의 소년은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무언가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구조는 명확하다. 플롯은 8개의 분절로 구성되는데, 각 파트는 미니어쳐 모형을 조립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 샤이렐스(Shirelles),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냇 킹 콜(Nat King Cole) 등의 노래, 그 뒤를 이어 완성된 모형을 배경으로 하여 1961년부터 2016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을 형성한 정치적 연설을 병치한다. 이미지는 순수한 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운드는 군산 복합 비즈니스를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연대기를 재생한다. 냉전의 종식과 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흑인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이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즈(César Chávez),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을 인정하는 보수의 상징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기후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환경운동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 미군의 지속적인 이라크 주둔을 옹호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핵무장 종식을 촉구하는 반핵운동가 헬렌 칼디콧(Helen Caldicott)의 연설과 군산복합체의 성채는 아이러니하게 충돌한다. 시대의 아젠다를 초점으로 한 연설의 선집은 인종 분리와 시민권, 이주 노동자 착취, 중동 위기, 복지와 환경 문제, 전후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망라하면서 권력과 자본 또는 둘 다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노래가 연설에 응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니면 모두가 풍자와 야유의 찬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임스 베닝의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집단 기억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지만 이번에는 사뭇 노골적인 어조와 직설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정의해 온 사색적 무드를 탈피한 생동감이다. 언제나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유머를 가미한 표현 요소들, 예컨대 붓질을 하는 손동작, 리드미컬한 음악, 그리고 풍부한 질감의 연설 대사 때문에 활력이 넘친다. 이미지, 소리,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호한 통일감을 전달한다. 한편으로 지난 10년간 베닝의 작업들처럼, 구조나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난다. <소년>의 경우, 설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에 대해 상상한 뒤, 곧바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에 색칠을 하는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일까? 저들은 평소에도 모형을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장면을 위해 고용된 배우들인가? 정치 연설과 ‘손’의 소재(所在), 정체성은 관련이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게임을 통해 하나의 모델-패턴을 제시하고 노래와 연설이라는 발화 형식의 의도적인 병치를 창조하여 ‘청취’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엄격한 구성, 역사와 기억을 유희하는 개념적 구조로 관객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권력과 파시즘의 은유이자 현재에 재건되고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베닝은 <소년>을 “수십 년 동안의 일기를 읽으며 만든, 친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하지만 영화는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며, 꼰대의 한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정도 초월한다. 베닝이 제시하는 8개의 스토리는 군국주의의 포괄적인 역사를 회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엿보기와 수사적 장식을 제공하는데, 이와 같은 병치의 전략은 계보학의 차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닝은 과거의 렌즈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6천5백만 년 전 공룡을 사라지게 하는 대절멸의 도래, 뼈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다음에 소멸할 종(種)은 인류가 될 것, 이라고 경고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그들의 위협받는 미래에 대한 근심을 담은 이 영화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초래할 것들에 대한 전망도 보여준다. 투쟁과 몰락, 재건에 익숙해진 것처럼 계속해서 모형을 칠하고 조립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파괴적이다. 마지막에 베닝은 군산 복합 비즈니스의 최종 장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의 모형은 소문자 영어 제목(<little boy>)에 담긴 ‘소년’의 순수성을 폭파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소년의 사색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진보와 그 대가, 역사의 폐쇄적 순환 궤도에 대해 성찰하는 <소년>은 인류의 서사가 주요 사건뿐 아니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결정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청각 요소들의 조합은 일관된 패턴을 따르고 베닝의 전작들에 비해 해석의 어려움이 덜 하지만, 이 영화의 시청각 은유는 개별 요소들의 총합을 능가한다. 상징적인 연설과 정적인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베닝은 시적인 환기와 정치적 명제 사이를 왕래한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시민권 연설이나 헬렌 칼디콧의 핵에 대한 경고처럼, 언어의 힘이 이미지를 이기는 순간들은 깊은 영감을 준다. (상) <엘.코헨>(2018), <알렌스워스>(2022) (사진: " L. COHEN ", " ALLENSWORTH ", VIENNALE) (하) <미국>(2022), <브레스리스>(2023) (사진: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BREATHLESS ", RÉEL Archives) 제임스 베닝이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던 ‘풍경’에 관한 에세이로 영화를 읽을 수도 있다. <소년>에는 두 가지 경관 양식이 작동한다. 먼저 파랑, 노랑, 갈색 등의 채색으로 지속하여 변동하는 경관이다. 두 번째는 완성된 미니어처 모형을 길게 비추는 타블로 쇼트가 자아내는 인상으로 여기서 연설은 일종의 음성 해설처럼 기능한다. 환경음과 음악의 지배를 받는 베닝의 영화들(< 엘.코헨 >, <알렌스워스>, <미국>, < 브레스리스 >)처럼 <소년>은 역사적 풍경에 대한 인내심 있는 응시가 된다. <미국>(2022)은 <소년>과 매우 유사한 도식을 구현한 영화이다. 같은 길이의 정지 이미지 50장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이미지 앞에는 검은 무지의 배경에 미국의 50주를 나타내는 캡션이 붙는다. <미국>은 베닝의 다큐멘터리 실천이 세상을 향한 창, 즉 화면 속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경험을 창조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소년>은 <미국>의 전략을 확장한다. 정지 카메라로 촬영한 롱 쇼트, 역동적인 요소들이 섞인 정적인 피사체를 포착하는 베닝의 스타일 서명은 <소년>에서 개별 쇼트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서 단조로운 요소들의 기하학적 배치로 대체된다. 대중음악과 정치 연설이 어우러진 미국의 작은 풍경들을 기록하는 단조로운 타블로를 통해 베닝은 미국 역사의 토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풍경화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미니어처로 관람하는 <소년>의 시청 경험은 시간의 지속과 인내를 요구한다. 베닝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이 개념적 퍼즐을 조립하도록 내버려두고, 조립을 위한 부품들만을 제공한다. 그가 모델을 구축했듯이 관객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 인종 정치, 노동운동, 핵전쟁, 기후 위기에 대한 사전 지식과 선입견, 그리고 음악적 취향에 따라 <소년>은 베닝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3년 여름의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충격적인 컬트’라는 수식어와 함께 심야 시간대 KBS2에서 방영되었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1화 오프닝은, 그때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의 내가 돌이켜보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1화 첫 장면부터 ‘시체를 던진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학교 축제에서 여왕으로 선정될 만큼 트윈픽스 마을의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고등학생 로라 파머가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차가운 강물 속에 몇 시간 동안 떠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잿빛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도 생기를 잃은 채 푸르죽죽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박제’된 시체가 주는 불편한 매혹.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부유한 가족의 외동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심지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누구에게나 칭찬을 듣던 밝고 화사한 소녀 로라 파머가 시체로 발견된 뒤, FBI 요원 데일 쿠퍼가 전담 수사관으로 트윈 픽스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한낮의 햇살 같던 로라에게 실은 암흑 같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있었고, ‘공인된’ 남자 친구는 한명이었지만 다수의 남성들이 로라 주변에 존재했다. 심지어 마약과 매매춘, 새디스트의 고문이라는 엄청난 단어들이 FBI 요원의 입술에 오르내린다. 트윈 픽스는 어떤 곳인가. 침엽수림이 우거지고, 큰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새들이 평화롭게 우짖으며, 미국 최고로 맛있는 체리 파이와 뜨거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영업 중이고, 새롭게 유입된 사람은 거의 없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지내는 그런 마을이다. 따스한 세피아 톤 화면 속에서, 서로 마주치면 미소와 덕담을 주고받은 마을 사람들의 과장되게 따뜻한 관계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나오미 왓츠가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노부부와 주고받는 밝고 희망차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뒤돌아서면 그 사람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거나, 음험하고 차갑고 비열한 표정은 시청자들만 볼 수 있는 일종의 ‘방백’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냐고? 모두에게 혐의가 있고, 모두가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모두가 떳떳하지 않다. 심지어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제시되는 데일 쿠퍼마저도 극이 진행됨에 따라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종국엔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얼어붙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익숙한 전제이지만, 드라마로 이런 이야기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 살해당했고, 모두가 수상하고, 모두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 겉으로는 그토록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부패와 심지어 악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린치의 <블루 벨벳>의 유명한 오프닝 신처럼, 장미꽃 아래 떨어져 있던 사람의 잘린 귀 같은 그런 세계. 그리고 <트윈 픽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육체관계로 얽혀 있는데, 문제는 이 모두가 치정 혹은 제도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관계라는 것이다. 배우자 몰래 저지르는 불륜이라든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다든가,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맺은 관계라든가.... 그들은 우울한 현실과 복잡한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연애를 선택했고, 그 말로는 당연히 모두 처참하다. 배신과 기만, 거짓된 정체성의 폭로. 이별과 살인과 자살. 이 복잡한 치정 관계들은 로라 파머 사건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면서 정교한 추리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진 않는다(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데일 쿠퍼는 추리하지 않는다. 그는 ‘계시’를 받는다). 로라 파머의 죽음 이후 연루된 이들의 사소한 비밀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거나, 당사자가 그 폭로를 막기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서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들이 터지는 식이다. 즉 확실한 인과관계 없이 충동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주요 플롯을 이룬다. 그런 면에서 <트윈 픽스>는 일일드라마적 전통(내지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 <가이딩 라이트>라든가 <제너럴 호스피털> 같은 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쓰기 한 작품) 1) 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물론 회가 거듭할수록 악령과 명상, 신비로운 체험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장르는 오컬트 스릴러의 색깔이 상당히 진해지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왓챠를 통해 <트윈 픽스> 시즌 1, 2를 다시 본 다음 가장 최근작인 (25년 만에 돌아온) 시즌 3의 초반까지 챙겨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데이빗 린치가 이끄는 대로 넋을 놓고 따라가며 그 낯선 세계의 토끼 굴을 탐험했다면, 이후의 무수한 자칭 타칭 ‘포스트 <트윈 픽스>’들까지 충분히 경험했던 2021년의 관람자로서 새롭게 느낀 점은 <트윈 픽스>가 얼마나 느슨한 이야기였나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크 프로스트가 로라 파머 살인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실제 사건이 있다. 스무 살의 헤이즐 드루(Hazel Drew)는 1908년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수사 기법이라는 게 전혀 확립되지 않은 20세기 초의 그 살인 사건은, 남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낯선 사람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예쁜 아가씨의 죽음을 둘러싼 수상쩍은 호기심과 무성한 소문과 함께, 이 남자 혹은 저 남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모호한 가능성만 여럿 남긴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마크 프로스트가 헤이즐 드루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꼬마 시절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일종의 유령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꼬마들이 밤에 집 밖으로 나가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 미제로 끝났던 헤이즐 사건을 다소 무시무시하게 각색하며 초자연적인 무언가와 섞어서 마크 프로스트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프로스트에게는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 헤이즐에 대한 상상이 뇌리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고, 결국 수십 년 뒤 헤이즐은 로라 파머로 재탄생했다. 2) 그리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의 이야기가 재탄생한 1990년 전후의 시기는 어떨까. 인터넷 등의 각종 통신 수단이 발달하기 직전이었던,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이전의 시기다. 비밀은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고 이중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심지어 악마가 인간 세계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했던 시기다. 그래서 프로스트와 린치는 그 모호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확한 전개라든가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연상 작용처럼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런 헐거운 흐름과 자유로운 리듬이 전형적인 드라마투르기에 익숙했던 당시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작가가 완전히 장악하여 정확하게 짜놓은 세계 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감상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구전 설화를 듣는 것처럼, 화자가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잊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휙 건너가는 것처럼 다소 맥락 없고 뒤죽박죽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쩌면 눈으로 본다기보다 귀로 듣는 옛 이야기의 부활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드라마 내내 과잉처럼 쓰이는 바달라멘티의 음악 역시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다시 큰 그림을 보자. 데이빗 린치는 드라마 <트윈 픽스> 이후 영화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1992년)를 재차 만들었다(웨이브와 구글 플레이 무비즈에서 대여 혹은 구매로 볼 수 있다). 이는 시즌 1의 프리퀄로서, 드라마에서는 늘 누군가의 회상 신이나 대사를 통해서만 언급되던 로라 파머가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장악하며 살아 움직인다. 드라마에선 ‘냉혹한 미녀’처럼 그려지던 로라 파머가 영화에선 좀더 순진하고 따뜻하고 가련한 인물로 재해석되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의 딸이자 영화감독 겸 작가인 제니퍼 린치는 소설 <로라 파머의 비밀 일기(The Secret Diary of Laura Palmer)>를 썼다. 이것은 로라 파머가 생전에 썼던 비밀일기장의 내용을 상상하여 완성한 책이다. 1990년의 드라마 시즌 1과 시즌 2사이에 출간된 스핀오프다. 당시 22살이던 제니퍼 린치는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로부터 로라 파머에 대해 처음 듣고 자신이 그 인물과 대단히 가깝다고 느꼈으며, 마치 ‘자동기술’을 하듯이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다. 3) 헐거운 ‘트윈 픽스’ 세계관에서 작가와 감독이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혹은 않았던) 빈 공간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을 때, 시청자들이 의외로 그 여백에 열렬히 반응하며 새로운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을 때, 감독은 별개의 영화와 그리고 25년만의 새로운 시리즈로 그에 응답했다. 감독의 딸이자 또다른 크리에이터는 거기서 파생된 로라의 일기라는 새로운 픽션을 완성했다. <트윈 픽스> 시즌 1이 시작될 무렵에는 미처 계획하지 않았던 디테일과 주석이 지속적으로 덧붙여지면서, 트윈 픽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도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드라마 시즌 1~3, 독자적인 장편 영화와 장편 소설까지,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팬픽션 혹은 유니버스와 그렇게 많이 다를까? 어쩌면 유니버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하게 대중적인 무언가로 정착되기 이전의 초창기 버전의 형태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트윈 픽스> 제작진마저 데일 쿠퍼처럼 트윈 픽스의 세계에 갇혀 버린 건 아닐까? <트윈 픽스> 시즌 3의 2화에서, 외팔이 남자는 데일 쿠퍼에게 묻는다. “이건 미래인가요? 아니면 과거인가요?” 과거에서 상상한 미래라고 해야 할까. *** 1) 아래 아티클에 따르면, 각본가 마크 프로스트는 극중극 형태로 등장하는 <사랑의 초대(Invitation to Love)>를 소프 오페라의 노골적인 패러디로 작심하고 썼다고 한다. https://www.dazeddigital.com/film-tv/article/40177/1/invitation-to-love-soap-within-twin-peaks-david-lynch 2)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4336146/The-real-life-murder-Sand-Lake-NY-inspired-Twin-Peaks.html 3)https://en.wikipedia.org/wiki/The_Secret_Diary_of_Laura_Palmer
1. 2015년,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의 매혹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36년 만의 귀환이다. 특히 1981년에 개봉했던 < 매드 맥스 2 >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이미 이 당시 <매드 맥스 2>는 묵시록 이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펼쳐내면서 당대 유행했던 사이버 펑키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흙먼지 날리는 웨스턴의 풍경으로 되돌렸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낙후할 것이며,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 본능과 폭력의 강인함이 지배할 것이라는 잔혹한 비전은 당대 날것처럼 생생했다. <매드 맥스 2>는 영화의 혼종성이 성취할 수 있는 쾌감을 이미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풍경으로 제시되었다. 불모한 서부의 풍경이 미래 사회의 폐허를 대체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득세했던 80년대 초의 살벌한 정치 사회(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야만과 폭력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허의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속도전이었다. 지금 이 영화 속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굉음과 속도로 질주하는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생존의 유일한 무기이자, 사실 이 영화 <매드 맥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2015년에 귀환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다시금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서사의 측면이나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속도전의 전략에서 이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 영화 개봉 이후 많은 글들이 페미니즘적 요소와 대사가 필요 없는 무성 영화적 수사학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쾌락할 수 있게 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것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해방을 이끌어서도 아니었으며, 또한 대사가 억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성영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근거도 되지 못한다. 2.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유독 나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적 숙련도, 그리고 산업 내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감독들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SF 대작 영화들 말이다. < 프로메테우스 >의 리들리 스콧, < 그래비티 >의 알폰소 쿠아론,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한 미래’를 재현해 왔던 < A.I. > < 우주전쟁 >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과 좀 다른 위치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서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란 개의치 않는 마이클 베이, 올드한 리버럴리스트 마인드와 고전적 영화 서사를 고수하는 < 아바타 >의 제임스 캐머런,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live action) 영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이미 오래전부터 개의치 않고 작업하고 있는 < 하늘을 걷는 남자 >의 로버트 저메키스. 그리고 드디어 36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새삼 입증한 < 매드 맥스 >의 조지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 중 어느 한 지점과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손쉽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리들리 스콧의 < 프로메테우스 >일 것이다. 70년 이상의 삶을 훌쩍 살아낸 두 노장들이 할리우드 내에서 여전히 대규모 예산의 SF영화들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리우드 시스템의 노련함과 영악함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감독은 이제는 ‘아날로그’로 치부되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천착하는 감독들이다. 흔히 ‘실재의 힘’ 또는 ‘지표(index)의 힘’(퍼스와 마노비치의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를법한 그들의 영화적 스펙터클의 공통점은, 영화란 여전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둔다는 점이다. 70년대부터 영화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화계 전반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필름의 역사로 대변되는 영화의 프로-필르믹한 속성(실재를 기록-촬영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와 제반 기술의 변화로 더 이상 ‘찍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에 기반한 ‘그리는’ 작업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의 판도라 행성도, < 스타워즈 >의 우주공간도,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실체일 뿐이다(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 프로메테우스 >와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두 노장들은 여전히 영화적 이미지를 ‘찍는’ 행위에서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실재하는 대상이 발휘하는 물질적 크기와 중력의 힘을 믿는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면 관객에게 이미지와 시각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한다. (< 인셉션 >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도 대부분 실제 이미지를 찍는다) 그리고 시네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긴장이 여느 그려진 세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혹 의구심도 생겨난다. 괴력의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던 <프로메테우스>나 < 매드 맥스 >의 힘은 정말 ‘실재의 힘’, ‘찍는’ 영화적 힘에서 생겨난 것일까? <인톨러런스>(위) <카리비아>(아래) 3.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중, “영화, 그것은 ‘나는 본다’가 아니라 ‘나는 난다’이다”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비릴리오는 비행술과 영화가 19세기 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미래파의 속도와 운동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영화적 비전과 유사한지, 무엇보다도 전쟁과 비행과 시각 사이의 접합으로서 항공투시법의 순간성과 ‘질주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이를 설명하는 중에 D.W 그리피스의 좌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피스가 < 인톨러런스 >라는 작품으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무렵,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지오바니 파스트로네의 1914년 작 < 카비리아 >를 보고 의기소침해진다. 그 영화에 비하면 자신의 영화가 너무 뒤처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비리아>는 “기술효과와 시점 촬영의 역동적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의 내러티브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품이었다. 파스트로네는 3차원적 공간에 집착하면서, 카메라를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각적 구도를 분리함으로써 깊이의 환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동 촬영기(카렐로)를 사용하고 남용하면서, 카메라가 사물의 크기와 차원을 조작하고 위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전쟁과 영화, 60-62p)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가 창조하는 시간과 운동. 그리고 속도의 문제. 이러한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 할리우드 특수 장르 영화의 디지털 미학으로서 주목받는 지점과 다시금 연결된다. < 그래비티 >의 탈육화된 롱테이크 쇼트와 유동적 프레이밍, 이냐리투가 < 버드맨 >에서 위장된 롱테이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통제와 시간의 재창조, < 인터스텔라 >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병렬하거나 중첩된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적 디제시스, 그리고 이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제시되는 속도와 시간. < 매드 맥스 >에서의 시간 역시 여러 층위로 구성된다. 일단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서의 시간, 영화적 디제시스에서 제시되는 비확정된 미래사회-포스트 묵시록적 세계의 시간, 그리고 각 쇼트가 각자의 자율성(고속과 저속 촬영 등)을 통해 획득하는 파편화되고 분리된 시간. 그런데 이 모든 시간에 대한 창조와 감각은 하나의 목표로 집중된다. 그것은 ‘속도’라는 개념이다. 다시 비릴리오로 돌아가자면, 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른 지점을 카메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점의 유동성에서 읽어낸다. “영화에서 가짜인 것은 원근법의 효과가 아니라, 깊이 그 자체이며, 투사된 공간의 시간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위대함으로써 나타나며, 깊이의 근원으로서 나타난다” <제너럴>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기계 4.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초창기 영화와 연결짓는 지점은 대사의 억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온전히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체험(속도체험)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초창기 영화연구에서 제기된 일명 ‘매혹의 시네마’라는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로 재구성된 영화 전략의 주요 수사학이기도 하다. 초창기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가 제공했던 것은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체-시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핵심에는 영화가 현실의 속도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속도를 구성하고 질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열차 체험이 근대적 시각 경험의 혁명이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관객들에게 도착했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 상영관에서 관객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뒤로 도망쳤다는 그 유명한 일화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대 관객들 역시 자신들이 보는 것이 환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미지의 사실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지각하는 이미지 매체의 낯섦이었다. 낯선 이미지 형식이 제공하는 두려움과 경이. 그것이 근대의 새로운 ‘경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초창기 영화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서사적 체계로 표준화하기 이전, 지각과 경험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로서 소구되었다. 이 형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구성하는 경이로운 매체였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에서, 꿈을 꾸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의 불가해 한 전환능력은 초기 영화적 매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버스터 키튼이 < 제너럴 >에서 당대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증기기차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감,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지배능력은 2015년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가 취하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험하는 영화: <그래비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하늘을 걷는 남자> 5. < 제너럴 >에서 버스터 키튼은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를 빈번하게 부감의 롱숏으로 제시한다. 이 거대한 기계와 그것을 담아내는 공중에서의 롱숏은 관객에게 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영화의 많은 쇼트들은 나미비아 사막을 조망하는 공중 쇼트로 구성된다. 미래사회의 폐허를 증명하는 쇼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관객에게 쇼트-이미지에 대한 지배의 위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지배에 대한 감각은 초기 영화에서 골똘했던 ‘경험’의 사실주의와 연결된다. 즉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가짜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허구적 이미지를 진짜 경험으로 쾌락하는 이중적 인식의 문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 영화라는 매체를 진짜 경험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매체의 흔적 자체를 지워야 한다. 매체의 새로운 형식을 쾌락하면서도 매체 자체를 지우는 일, 즉 ‘비매개적 매체’의 환각-가상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최근 디지털 시네마의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력하는 것은 서사의 촘촘함이 아니라, 거대한 스펙터클의 속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 그래비티 >에서 한없이 지속되는 공중회전의 순환이나,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단순하게 반복하는 추적의 스펙터클과 카니발적 회전운동을 구성하는 쇼트들에는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의 후반부, 오로지 텅 빈 공간을 오가는 행위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과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가속화된 시간에 대한 지배를 제공한다면, <하늘을 걷는 남자>는 위태롭게 한발 한 발 내딛는, 지연된 시간의 감각을 제공한다(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이 시퀀스들은 두 개의 경험적 위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줄 위를 걷는 남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관객을 연루시키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빌딩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관람객들의 자리이다. 극장의 관객은 두 자리의 시선을 교차하며 3D 체험의 미장센으로 극대화된 영화적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속도가 어찌하든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적 시간성을 영화의 비매개적 경험의 핵심 장치로서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인한다. 영화, 그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다’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릴리오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난다’라는 개념은 ‘경험’의 자리를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주요한 쇼트들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쇼트와 프레이밍의 새로운 자리를 지배하는 자리이다. 2015년 첨단의 전략으로 무장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결국 초창기 영화에 해당하는 < 제너럴 >과 유사한 쇼트의 시간 감각에 집중한다. 버스터 키튼은(존 포드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남북전쟁이 한창인 광대한 공간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의 물질적 거대함과 속도를 강화하기 위해 개별 쇼트들의 속도를 전략적으로 달리한다. 즉 빨리 감는 방법으로 대상의 긴박감을 배가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들을 소개하는 쇼트들은 자동차들의 질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조작한다. 마치 다른 종류의 인류를 목격하는 듯한 엑조티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전쟁기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후 이 영화는 질주의 숙명을 위해 내달린다. 육중한 기계들이 자신들의 물질성을 증명하듯, 폐허의 사막을 모래바람과 함께 질주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속 자기장 속으로 질주한다. 거대한 폭발들과 그 순간 누군가의 시점인지 모를 상태로 제시되는 파편화된 쇼트들 (오로지 폭발의 외양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제시할 수 위치에서 구성된 쇼트들)은 이미지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공중 부감 쇼트와 롱숏들로 구성된다. 이 순간 관객들이 체험하는 영화적 속도는 일명 ‘라이딩 영화’라 불리는 체험 영화로서 구성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산업은 TV와 다른 영화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스펙터클 구성에 골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3D의 광범위한 활용, 와이드 스크린,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네라마나 아이맥스와 같은 그 어떤 매체도 제시할 수 없었던 거대한 크기의 제공이었다. 특히 시네라마나 아이맥스는 서사가 아니라 주로 공중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나 롤러코스터 같은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포착해 관객들로 하여금 체험을 하는 듯한, 라이딩 영화 경험을 제공하였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6. 2015년,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서사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거의 유아적 수준의 지능만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을 스토리와 캐릭터가 제시되고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한 ‘스펙터클’로 구축된다. 이 스펙터클이 가 닿고자 하는 끝점에는 롱테이크 전략(탈육화된 시선의 전능성과 지배의 감각) 혹은 극단적 쇼트 분할(주로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클로즈업 쇼트들)로 제시되는 ‘영화적 체험’의 쾌락이 자리한다. 영화는 백 년 이상의 역사적 서클을 한 바퀴 순환하고 결국 초창기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가 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쾌락으로 되돌아왔다(매혹의 시네마). 디지털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3D와 이미지의 극사실주의(라이브 액션과 CG의 구분이 불가할 정도의 사실주의)를 통해 비매개의 환상을 획득하는 영화적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의 최전선일까? 초창기 영화가 그랬고, 50년대 극장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던 영화체험의 극대화가 그랬듯, 지금 영화도 어떤 전환점(디지털의 광범위한 확장과 산업 시스템의 전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매체 시대에 반복되는 극장의 위기)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강조하는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매혹에 탐구하는 역사적 순환의 한 국면 말이다. 어쨌거나 산업이 추동했던 영화 미학과 매혹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초창기 영화나 지금 영화나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는 운동이며, 질주이며,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는 매혹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