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제천 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 개막식 1
- 제작년도
- 2010
처음엔 독감 수준의 전염병인 줄 알았지만, '코로나19'는 단순한 질병을 넘어 인류사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 정도의 전지구적 위기가 되었다. 이제 삶의 모든 것은 코로나로 수렴되고 있으며, 예전엔 평범한 일상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젠 아득한 추억처럼 여겨진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주말이면 북적이는 극장에 가서 신작을 즐겼던 시간들은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다. 극장가는 확진자 수에 따라 출렁이고, 개봉을 연기하는 영화들도 속출했다. 극장뿐만 아니라 영화 현장도 제대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산업 전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영화제도 예외는 아니다. 2월부터 팬데믹 상황이 발생하자 많은 영화제들이 연기하거나 축소하거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겸하며 진행되었다. 울주세계산악영화제(4월→10월), 전주국제영화제(4월→5월), 무주산골영화제(6월) 등이 그런 경우다. 인디다큐페스티벌(4월)과 서울국제사랑영화제(6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7월) 등은 좌석 수를 대폭 축소해야 했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6월)는 다행히 원래 기간(6월18일~23일)에 오프라인으로 진행될 수 있었지만, 적잖은 부분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했다.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도 무사히 영화제를 치렀다”는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 대신 올해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몇 가지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바로 '코로나 시대의 영화제'다. 대한민국은 100여 개의 영화제가 열리는 나라다. 1년 내내 전국의 수많은 지자체에서 크고 작은 영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일단 예산을 책임지는 지자체들이 영화제(를 포함한 지역 축제와 문화 행사)에 대해 재고할 것이며, 대중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기에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우린, 지난 20여 년 동안 관성처럼 반복했던 한국의 영화제 문화를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시대의 영화제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첫 번째, 집중보다 확산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영화제 문화는 일상의 영화적 경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한정된 기간 안에 평소보다 몇 배의 강도로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시공간의 집중이며, 이것은 감염의 최적 조건이다. 이제 한국의 영화제는 이런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예산 문제 등으로 기간을 늘리기 힘들다면,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만큼은 멀티플렉스를 벗어나 최대한 넓은 공간으로 확산되어 인구밀도를 낮춰야 한다. 쇼핑몰이나 백화점과 결합되어 있기 마련인 멀티플렉스는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이다. 티켓팅 과정에서 관객의 신원을 파악한다 해도, 비관객에 의해 얼마든지 감염될 수 있다. 그러려면 영화제에 대한 평가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관객이 운집한 풍경이나 객석이 꽉 찬 상영관으로 영화제의 성패를 가늠해선 안 된다. 지금까지 동원 관객, 상영편수, 경제 효과 같은 양적 가치로 영화제를 평가해 지자체에 어필했다면, 이젠 '질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적당한 수의 관객들이 알찬 프로그램과 만나고, 그 콘텐츠는 온라인이나 순회 상영전 같은 방식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영화제가 열리는 1주일 정도 되는 기간도 중요하지만, 그 기간을 통해 발굴되고 만들어진 콘텐츠가 1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환기되는 것도 중요하다. 즉 시공간의 확산이며, 이 과정에서 영화제의 적절한 규모와 예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영화제가 공간적으로 확산되면 관객들이 영화제를 즐기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한국의 영화제는 도시 중심이며, 따라서 멀티플렉스 중심이다. 즉 극장가 중심의 영화제인 셈이며, 이것은 영화제가 열리는 그 도시의 공간성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게 한다. 물론 우린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남포동과 해운대의 정취를 접했고,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통해 호반의 낭만을 경험했으며, 무주산골영화제에선 덕유산에서 심야에 야외상영으로 걸작들을 접하기도 했다. 앞으론 이런 특별한 경험들이 더욱 강조될 것이다. 멀티플렉스를 벗어나면, 영화제에 훨씬 더 다양한 공간적 가능성이 열리는 법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인상적 영화적 체험들을, 그리고 그 지역이 지닌 독특한 정서를 더욱 원하게 될 것이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영화제에 와서 하루에 서너 편씩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하루에 한두 편을 보더라도, 상영관과 상영관 사이를 걸으며 산책을 하고, 지역의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고, 상영관 인근의 핫 플레이스에 가보는 힐링의 시간이 영화 관람만큼 중요해질 것이다. 영화제는 프로그램에선 에디팅의 기능이 강화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 영화 제작이 타격을 입고 있다. 신작 수급이 예전 같진 않을 수 있으며, 해외 게스트를 초청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기존의 영화들을 잘 조합해 '구성의 묘'를 살린 섹션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며, 외국 감독과 직접 관객과의 대화를 하지 못하는 대신 그것을 보완할 만한 프로그램 이벤트가 필요하다. 이것은 좀 더 세심한 프로그래밍이 필요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셀럽이나 신작으로 화제를 끄는 방식은 이젠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온라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진 회의적이다.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고, 영화제가 온라인으로 플랫폼을 옮기게 되면 넷플릭스 같은 강력한 상대와 경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영화제에 나눔의 의미가 결합되길 바란다. 코로나 시대가 준 가장 큰 교훈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적 유대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감염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코로나라는 재난의 시대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예술영화관 종사자일 수 있고,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으며, 일감이 줄어든 현장 영화인일 수 있고, 영화제 단기 스태프들일 수 있다. 더 확장하면, 영화제가 열리는 지역의 빈곤 계층일 수 있고,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일 수 있다. 영화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비록 작은 도움밖엔 안 되더라도, 그들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영화제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대에 열리는 문화 행사들이 갖춰야 할 미덕이 아닌가 싶다. 축제는 이제 더 이상 축제가 아니다. 축제는 달라져야 한다. 영화를 매개로 일상을 회복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시간. 소박하게 꿈꿔 보는 '코로나 시대의 영화제'다.
이성구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 장군의 수염 >(1968)을 꼽는 데 이견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본이라는 당대 최고 조합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이며,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심리적 리얼리즘의 한국 상륙으로 보일 정도로 세련된 영화적 표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전에, 196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성구 감독에게는 황순원 소설을 영화화한 < 일월 >(1967)과 이효석 소설을 영화화한 < 메밀꽃 필 무렵 >(1967)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로써 이성구 감독은 문예영화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메밀 꽃 필 무렵>은 1965년부터 시행된 우수영화 보상정책으로 인해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문예영화 전성기의 한 작품으로 베니스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소설가 이효석이 193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1시간 40분 장편영화로 옮기면서 새로운 캐릭터와 사건들을 추가하였다. 장돌뱅이 허생원, 조선달, 동이 등 세 인물이 나귀를 끌고 봉평장을 오가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 안에 서정적인 문체로 공간과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아름다움이 원작의 특징이다. 반면 영화는 허생원의 첫사랑 분이와의 만남을 한 시퀀스로 구성하고, 분이의 떠돌이 생활과 분이를 찾아다니는 허생원의 분투기를 길게 묘사하며, 병으로 골골한 장돌뱅이 윤봉운의 이야기와 조선달의 아내 이야기 등을 삽입함으로써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윤봉운(허장강)과 조선달(김희갑) 평생을 장터로 떠돌아다니며 지낸 장돌뱅이 허생원( 박노식 분)은 조선달( 김희갑 분), 윤봉운( 허장강 분)과 봉평장에서 다음 장터로 이동하는 중에 젊은 장꾼 동이( 이순재 분)를 만난다. 허생원은 주막집 주모와 농담을 나누는 동이가 꼴 보기 싫어 손찌검을 하지만, 애지중지하던 나귀가 끈을 끓고 도망가려는 것을 동이가 잡아오고, 병든 윤봉운의 뒤처리를 해주는 모습에 동이를 다시 보게 된 허생원은 그와 점점 가까워지며 동행한다. 그 와중에 동이도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임을 알게 되는 허생원이 동이의 홀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천을 향해 함께 떠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가족 결합을 염원하는 허생원의 로드무비다. 허생원의 외로움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조선달과 비교되거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늙은 수컷 나귀를 연민 어린 감정으로 돌보는 것에서 잘 표현된다. 하고 또 한 말, 분이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조선달에게 또 늘어놓는 허생원의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이동하기 위한 내레이션으로 활용하면서 그의 과거 로맨스가 플롯 구조 안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톱스타 김지미 가 허생원의 첫사랑 분이로 등장함에 따라 그의 극중 비중은 높아졌고, 그의 비극적 사연과 운명은 더욱더 극적으로 플롯화된다. 분이(김지미) 천하일색인 분이를 장에서 우연히 보고 마음을 빼앗겨버린 허생원은 밤새 뒤척이다 메밀꽃밭에 나가고,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려가게 될 분이와 마주친다. 원작에서는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신세 한탄을 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합방하게 되는 아름다운 사연이지만, 영화에서 허생원은 강압적으로 분이를 범한 후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훗날을 기약한다.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하고 분이와 아들 동이는 이리저리 팔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허용할 수 없는 표현이나, 60년대 멜로 영화가 관음증적 재미를 위해 관행적으로 그리던 겁탈 장면 방식을 노골적으로 사용하여 성적 긴장감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치명적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국영화니 일부러 배제하고 감상하거나 빼버린 채 영화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이는 사랑을 맹세한 남자가 제시간에 데리러 오지 못해, 원래 계획되었던 아버지의 빚을 탕감하고자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이후 이리저리 되팔려가며 거래 대상이 된다. 이때 그녀의 값어치는 남자들에 의해 반반한 얼굴과 밤자리 실력으로 매겨진다. 철저히 돈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어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유린당하지만 살아남는 이 여성은 영화에서 원시적이고 신성한 기호로 재위치 된다.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신성함과 메밀꽃으로 기억되는 자연의 원시성을 동시에 가진 이상화된 여성이라는 기호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60년대 위로부터 강요된 열망이 낳은 일그러진 교섭 장소다. 이는 당대 문예영화의 향토성이 가진 공통감각이기도 하다. ‘왼손잡이’의 유전성 여부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 현대과학의 숙제이긴 하나 대체로 유전되는 경향이 많다고 하니, 허생원이 동이가 왼손잡이임을 알고 반기는 장면은 경험치에서 나온 믿음이다. 이 장면은 허생원과 동이를 더욱 강하게 연결하는 결정적 장치로 기능한다. 허생원(박노식)과 동이(이순재)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허생원과 동이가, 물어 빠진 허생원을 젊은 동이가 업어주기까지 점점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의 유대와 연대감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간다. 두 사람의 심정적 변화는 그들의 물리적 위치와 맞물리며 잘 고안된 방식으로 시각화된다. 이제 정착해야 할 때, 오랜 유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다는 늙어가는 몸이 전하는 애처로움, 그리고 평생 찾아다닌 숙명의 여인에 대한 애달픈 갈망이 영화 전체에 아우라를 남기는, 처연함과 원시성이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메밀꽃 필 무렵> VOD 보러가기→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에서 내달 무대에 설 뮤지션의 오디션을 갖는 중이다.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대 앞에 여유롭게 앉아 있고, 바텐더이자 덩치로 보이는 남자는 다소 성마른 표정으로 바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휑뎅그렁한 플로어에는 몇몇 뮤지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섰다. 그러다 모던락을 연주하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이 떠나고 다시 무대는 조용해진다. 내공을 겨루기 전 실력을 가늠하려는 걸까, 무대 주변은 흡사 고수들이 무협을 겨루는 객잔을 방불케 한다. <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 >라는 제목으로 먼저 소개된,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의 풍경은 그러하다. ‘머저리클럽’의 두 멤버와 그들의 친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으나, 영화는 오디션 무대에 선 뮤지션들의 연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모던락에 이어 헤비메탈이 무대를 뒤흔들고, 여성 재즈 듀오가 퓨전의 아름다움을 펼치는가 하면, 흑인 블루스 연주자가 기타 연주와 노래로 흑인의 영혼을 전한다. 마침내 등장한 머저리클럽이 펑크를 연주하지만 그들의 무대는 실패의 판정을 받고 만다. 그들의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뒤늦게 나타난 플라밍고 기타 연주자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황량했던 무대는 점차 음악의 전시장으로 변한다. 흑백의 이미지 위로 색채를 입히는 것은 음악의 색깔들이다. 어지간한 음악 프로그램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듣는 맛이 눈길을 끄는 영화인 셈이다.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은 제천영화제에서 단편으로 앞서 소개된 바 있고, 황욱 감독은 앞과 뒤에 ‘늦가을 편’과 ‘봄 편’을 덧붙여 부천영화제의 장편 섹션에 초대받았다.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만큼 오리지널 단편과 새로 추가된 파트는 촬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두운 지하의 공간에서 주로 촬영된 겨울 편이 인물 가까이 긴밀하게 접근한다면, 늦가을 편과 봄 편의보다 넓은 앵글은 느슨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오디션과 해프닝의 기록에 가까운 겨울 편과 비교해, 인물의 배경이 추가된 장편 버전이 오밀조밀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춘 것은 물론이다. 덕규(크리스 라이온 분)는 멀리 한국에 와 블루스를 연주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요구되는 건 인기 있는 힙합이다. 겉보기에 그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머저리클럽의 베이스 주자인 철( 이재호 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베이스나 잘 치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머저리클럽의 리더인 임재(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자취를 감추었고, 남은 멤버인 철과 섭(갈치 분)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은정( 공민정 분)은 임재를 사랑하는데 그는 매번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 여자들이 떠나면 그가 언제나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음악에 관한 영화였던 ‘겨울 편’은 ‘가을’과 ‘봄’ 편을 얻으면서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의 이야기로 화한다. 황욱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결합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다.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인지 앞으로도 그런 스타일을 유지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지금까지 소개한 두 편의 영화 - < 개 >(2015)와 < 라이브하드 >의 스타일은 그러하다. 한국에서 근래 발표된 음악영화들이 대부분 다큐멘터리였던 상황에서 <라이브하드>의 형식은 괜히 낯설다. 두 편의 필모를 가진 감독답지 않게 황욱은 배우들의 연기 연출에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뮤지션인 사람과 뮤지션이 아닌 사람, 배우인 사람과 비전문 배우인 사람이 뒤섞여 있으면 영화가 뒤뚱거리기 마련인데, <라이브하드>는 그런 단점 따위는 없다는 양 자유롭다. 뮤지션들의 연주 부분과 이야기를 맡은 배우들의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돼 단순한 영화 너머로 일상의 한순간을 완성한다. 전작 <개>가 마치 사건 르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듯이, <라이브하드>는 가난한 뮤지션들이 처했음 직한 상황에 세세한 마음을 쓴다. 그것으로 현실감을 득한다. 그게 전부다.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태도가 없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위대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일까.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는 적지 않다. 거꾸로, 차가운 현실을 따뜻하게 포장한 영화는 더 많다. <라이브하드>는 좀 이상한 영화다. 차가운 현실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 뮤지션의 하루를 절감하게 하면서도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차가운 방에 작은 스토브를 켜놓아 온기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천사처럼 한 남자가 그들 곁에서 계속 춤을 추며 기운을 북돋우기 때문일까. 세 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영화에서 뮤지션과 친구들은 각자 거울을 바라본다. 헤비메탈 밴드의 리더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는다. 덕규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는다. 철은 현실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울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는 그들 자신밖에 없다, 당연히.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영화일까?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들이나 할 짓이다. 뮤지션들은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대 앞의 관객을 바라보며 연주를 해야 한다. <라이브하드>에서 관객에 해당하는 사람은 클럽 ‘라이브 와이어’의 사장이다. 카메라는 문득, 기타를 들고 포크를 부르는 여자 싱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그는 분명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눈길은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한다. 홀로 객석을 지키는 남자인 그의 눈길은 현실의 슬픔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관객은 혼자 남았고, 뮤지션은 그를 보며 슬픔을 연주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슬픔을 위로하는 존재다. 그게 작은 불씨를 만든다. 그 불씨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라이브하드>의 마지막 장면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상영작: 2018.9.29.(토) 17:00 시네마테크KOFA 2관(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