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날
- 감독
- 홍혜승
- 제작년도
- 2020
초점이 맞지 않은 침침한 화면으로 치도곤을 당하는 한 소년이 보인다. 폭행을 가하는 패거리들 가운데에서 피해자를 무자비하게 두들기는 가해자의 얼굴도 희미하게 드러난다. 폭행에 가담하진 않고 있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해자로 보이는 두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피아 구분이 불분명한 혼란 상(像)은 앞으로 우리들에게 제시될 사건의 성격을 말해준다. 내레이션(Narration)이라는 관점에서 < 파수꾼 >(2011)은 복합적 서사 라인의 겹침과 교차, 미궁에 빠지는 인과율, 내레이션의 시간 조작이라는 현대적인 스토리텔링 장치들에 의해 운항된다. 다성적인 기원을 갖는 인간 행위의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 이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캐릭터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도록 자율성을 부여한다. 앞과 뒤의 서술 내용이 서로를 배반하는 플롯은 서술 주체들의 입장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삽화들을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순환하는 관계를 묘사한다. 간단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이 인물들의 삶에 비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연출자 윤성현은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무질서하게 배치된 것처럼 보이는 쇼트와 신, 시퀀스들의 관계를 유기적인 사슬로 엮는다. 한국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십대 드라마는 외부인이나 교사의 관점을 포함하여 청소년의 행태를 극화함으로써 국가 시스템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관찰은 정형화된 스토리 패턴에 종속되는 스테레오타입화된 십대 캐릭터를 앞세우는데 모든 사건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 주인공은 대개 결손 가정 출신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쉼터이자 사춘기 이후 악몽의 온상인 학교와 가정의 중층적인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파수꾼>은 십대 드라마의 클리셰를 부분적으로 차용하면서 이와 본질적으로 갈라선다. 장르의 전형을 뛰어넘는 성취는 명백한 인과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십대 드라마의 서사 관습에 도전하는 것이다. <파수꾼>은 한 명의 프로타고니스트에 의해 주관(主管)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인물들이 교대로 플롯을 끌고 가며, 시간은 선형성을 도외시한 채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오가고, 연대기적 인과관계의 전복을 통해 전통적 스토리텔링의 유습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다. 요컨대 플롯이 추구하는 목표 내지는 관객들이 던지는 질문은 국면에 따라 종류를 달리 하고 그때마다 화자가 교체되면서 목표와 질문의 깊이도 달라진다. 서술 주체가 변경될 때마다 내레이션은 미스터리를 해소하고 이야기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기차 선로 마냥 미스터리의 해결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야심찬 <파수꾼>의 서사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 기태(이제훈)의 죽음을 추적하는 일종의 탐정 스토리에서 최초로 탐정 역할을 맡은 인물은 희생자의 아버지(조성하)이다. 도입부에 관객들은 미스터리 장르의 관습과 규범에 따라 기태의 아버지가 죽음의 비밀을 밝혀 갈 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희준(박정민)을 만난 이후부터 그의 소임은 끝난다. 현재의 탐사자이자 질문자인 아버지는 기태의 죽음과 관련한 피상적인 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누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내려진 이후 그는 서사의 동력을 상실한다. 그때까지 가해자로 보였던 기태가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가해자는 왜 죽음에 이르렀고, 피해자는 그로부터 도피하였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행한다. 덩달아 죽음의 미스터리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희준, 동윤(서준영)에게 초점이 이동한다. 플롯의 효과가 랜덤의 배열이 아니라 치밀한 내레이션의 작용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질서와 논리에 주목해야만 한다. 기태를 가학적인 악마와 속 깊은 친구로 번갈아 보여주는 도입부의 플래시백은 이 장면이 누구의 관점에서 전달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간 혼란스럽다. 하지만 기태의 죽음을 둘러싸고 희준과 동윤이 용의자로 좁혀지는 순간,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다. 죽은 친구의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소년들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에 비난을 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두 소년은 기태와 친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하거나 다른 친구들이 기태를 더 잘 안다고 질문을 회피한다. 영화의 서사 전개, 갈등과 대단원은 도입부에 제기된 쟁점에 종속된다. 즉, 도입부에서 결과(기태의 죽음)를 먼저 제시함으로써 이것이 내러티브의 모든 국면을 관장하도록 설정하였다. 기태가 희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먼저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기태에게 마음을 주기 어렵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전환되면서 보다 진실에 가까운 기태의 입장(폭력의 원인과 그 내면)이 드러나는 식인데 이 대목에 이르러 관객은 그를 동정하고 깊이 이입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화자의 교체와 더불어 오인의 매설, 수정은 이 구조의 핵심 의제로 떠오른다. 고전적 내레이션의 경우 단선적인 갈등의 유도와 해결이 일반화된 반면, <파수꾼>은 핵심 사건과 갈등이 다중적인 흐름으로 유도되고 있으며, 이러한 내레이션 전략은 사소한 오해와 차이가 누적되어 붕괴하는 관계라는 주제를 견인한다. 질문의 이행과정에서 정보, 심리의 전개 방향을 분명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고전적 내러티브 구조와 달리 이 영화는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지점을 그윽하게 감춘다. 기태의 죽음과 연관된 인물들이 서로 공유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정보는 관객에게 공유됨으로써 누적된다. 그러나 관객들 역시 죽음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이는 기태와 희준, 동윤의 스토리를 거의 균등하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관계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설득력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희준과 동윤은 기태의 아버지를 매개로 하여 기태와의 과거를 회상하지만 이는 아버지에게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내용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경험이 자신의 입장에서 나열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서사의 끝에는 말끔한 미스터리의 해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희준이 기태와 함께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카메라는 소년들이 공유하는 유쾌함과 웃음을 가까이에서 포착하지만 그들 사이에 심연이 형성됨에 따라 점차 정적인 제스처로 변한다. 친구의 얼굴 사이에서 카메라의 이동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서로 마주보고 위치할 때 멈춘다. 멈춤과 경직은 지속되고 곧 메울 수 없게 된다.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희준과 재호(배제기)가 기태의 콤플렉스인 모성의 부재를 입에 올렸기 때문인지, 짝사랑하는 보경이 기태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희준이 질투하는 것인지, 세정(이초희)에 대한 풍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든 것이 묘연하다. 기태는 회피하는 희준에게 짜증을 내고 절친을 때리는 것으로 좌절감을 표출한다. 또는 희준은 기태가 자신을 위협하는 방식을 싫어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친구인 척한다. 희준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동안에도 기태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소년들은 어른, 작중 인물, 관객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 안에서 말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미묘하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소년들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정신분석적, 사회학적, 전지적 관점을 지양한다. 여러 갈래의 관점이 교차하는 이 영화의 구조는 만족할만한 결말, 명쾌한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 기껏해야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은 퍼즐 조각의 조각난 그림들일 때 더욱 그렇다. 윤성현은 십대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영화적 언어로 효과적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감독이다. 욕설 외에 1분 동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잘 되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완전히 남이 된다. 흔해빠진 십대 성장드라마에 독창성을 부여한 것은 이야기의 형식이 이야기의 성격을 결정하도록 한 스토리텔링의 효과이다. 탐색의 주체가 봉착한 딜레마를 강조하는 조각난 비선형 구조는 악마의 모습으로 등장한 소년이 수줍고 연약한 아이로 귀환하여 위력적으로 마음을 휩쓸고 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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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에 담겨있는 ‘영화’들에 관하여 영화가 시작하면 두 명의 양아치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네가 내 옷을 몰래 입었네 마네를 가지고 말씨름을 한다. 구제 옷을 훔쳐 외국으로 넘기는 브로커 형을 통하면 300벌 정도를 팔았을 때 100불은 벌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장호( 안재홍 )와 “가오 떨어지게 그지 새끼도 아니고 남이 입던 옷을 으트케 팔어?”라며 불평하는 기훈( 최우식 )의 대화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이들이 편의점 문을 나설 때 따라 나가서는 거리 풍경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훑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출발하면 퉁퉁탁탁거리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에 박힌다. 나는 이 첫 시퀀스에서 이미 <사냥의 시간>이란 영화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장호와 기훈이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친구 준석( 이제훈 )의 출소 날에 마중을 나가는 이 첫 시퀀스는 비유하자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빠져드는 터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신이다. 이 영화는 앞으로 망해버린 미래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 거리의 주인공들은 ‘스투시’와 ‘슈프림’을 즐겨 입는 양아치들이 될 것이란 사실을 끝내 주는 사운드와 미술로 꾸며서 보여준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이렇게 용감한 오프닝 신을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편의점에서부터 장호와 기훈을 따라 나선 카메라의 움직임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가 커피를 사서 카페를 나서다가 폭탄이 터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두 사람이 준석을 만나러 교도소까지 가는 와중에 보여주는 길거리 풍경에는 <아키라>가 상상하며 담아낸 2019년의 망해버린 도쿄 거리의 이미지와 <공각기동대>의 홍콩과 상하이 뒷골목을 섞어 만들어낸 이미지, <증오>에 등장하는 파리 외곽 상트르 레비뉴의 낡은 아파트 이미지 등이 뒤섞여 있다. 윤성현 감독이 제시하는 미래 도시 서울의 이미지는 수많은 서브컬처 이미지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로 신속하게 빠져들도록 의도한 이 오프닝 신이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이 영화를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TV로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이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닌) 내가 지금 뭘 본 것인지, 이미지를 믿지 못한, 혹은 속지 않은 관객은 아마도 다음 신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됐을 것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해 수중에 지니고 있던 화폐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고, 도모할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준석의 무리들은 범죄를 모의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그 책임을 준석 혼자 떠안고 감옥에 다녀왔으며 이제 이들은 또 다른 범죄를 구상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묘사하는 이 클럽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낯간지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어떤 섬에 가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 20만 불만 있으면 아는 형님이 소개해준 대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로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말, “야 거기 가서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서.”라는 준석의 대사를 들을 때 아마도 추정컨대,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저 허황된 것들을 휘황찬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7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눈과 귀를 모두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런데 나는 <사냥의 시간>이 공개된 후 지난 몇 주간 이 오프닝 장면을 10번도 넘게 돌려봤다. (어떤 스피커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가슴을 울리는 프라이머리의 음악과 허공을 헤매는 듯한 카메라워크, 그리고 직설적인 대사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나의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켜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는 중인데 <사냥의 시간>의 오프닝은 말그대로 키치적이다. 나는 진지한 몰입을 스스로 거부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이 판타지의 세계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동화에 가깝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신이 용감하다고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를 지옥에 갇혔다고 여기는 순진한 악동들이 끔찍한 범죄를 모의하는 오프닝. 별 의미 없는 20만 불이란 숫자. 인생 역전을 모의하면서 펼쳐 놓는 너무나도 소박한 하와이 같은 대만의 섬 이미지. 윤성현 감독이 꾸며 놓은 서브컬처 기반의 환상 동화 첫 페이지를 2020년의 관객들은 상당히 낯설어 하는 듯하다. 2019년, 윤성현 감독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가 후반작업과 편집 중인 <사냥의 시간>을 소개하며 해준 말도 기억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헬조선’에 대한 문제의식, 데뷔작 < 파수꾼 >(2010) 이후의 두 번째 윤성현 영화라는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향한 애정에 대해 그는 꼼꼼하게 설명했다. <사냥의 시간>에서 윤성현 감독은 헬조선에 관한 문제의식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영화 내내 준석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범죄가 뭐였는지, 이들을 추격하는 한의 사정이 무엇인지, 준석과 상수( 박정민 )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파수꾼>의 한 장면을 재현하듯 하는지 등등 저간의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탈주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거대한 조직의 보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순간의 핏빛 안개가 곧 헬조선이다. 또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파수꾼>을 감독 윤성현이 가져가야 하는 방향이나 테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파수꾼>은 어찌 보면 내 안에 없는 재료를 가지고 나를 바꿔가며 만든 작품이다. 남자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파수꾼>의 연장선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정서적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현상 체험은 윤성현 감독이 좋아하는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기인한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와 <아키라>를 꼽는 그는, <파수꾼> 이후 한동안 사이버펑크 영화를 준비하다가 <사냥의 시간>으로 선회했다. 추격자 한과 준석 무리의 대치를 통해서 그는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를 오마주한다. 준석이 친구들에게 도박장을 털자고 꼬시면서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는 부감숏에서는 저 멀리 화려하고 거대한 빌딩들이 만들어내는 마천루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그 위에는 네온사인을 내건 애드벌룬이 하나 둥둥 떠다닌다. <블레이드 러너>가 상상하며 꾸몄던 영화 속 2019년의 도시 풍경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사냥의 시간>에서 가장 마음을 뒤흔든 이미지는 예고편에도 잠깐 등장하는 장면인데 이 무모한 범죄를 모의하고 나서 준석 무리가 창고에서 총을 테스트해보는 장면의 이미지다.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청년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며 웃고 떠들지만 며칠 뒤면 그들의 인생은 세상에서 처음 겪는 끔찍한 악몽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마지막으로 콩알만한 행복에 겨워하는 순간. <시티 오브 갓>과 <고모라>의 이미지가 <사냥의 시간>에도 담겨있다.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이미지의 재료가 무엇이 됐건 관객은 어색한 가짜라며 충분한 거리두기를 지켰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며 댓글을 토해내던 관객들이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극장 시스템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그 압도적이면서 디테일이 뛰어난 총격 소리와 음악에 지금보다는 더 빠져들 수 있었을까. 안개 자욱한 도시의 뒷골목, 사방이 꽉 막혀 미로 같은 지하 주차장, 더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항구의 끝자락이 지닌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를 대형 스크린에서 봤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블과 블록버스터의 시대에, 그리고 하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OTT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냥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든 더 길게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그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영화적 향수로 가득한 레퍼런스 영화 리스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냥의 시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의 재료에 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성장영화’라고 하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보편적인 스토리 진행 방식이 있다. 고난과 역경을 겪는 등장인물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 후에, 무사히 다음 생애 주기로 진입하여 비로소 예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성장영화의 한 기준점으로 자리 잡은 이 독립영화는 어떨까. 어느새 개봉 1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영화 < 파수꾼 >( 윤성현 , 2011)에 대한 비평과 담론은 꾸준히 생성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가 등장하면 <파수꾼>과 비교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덧 우리나라 청소년 성장영화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이 영화가 사실 우리가 익히 알던 성장영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구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파수꾼>은 곧이어 삭막한 아파트가 늘어선 전경을 비추며 영화의 진행이 밝지만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아들 기태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희준, 동윤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영화는 등장인물 각각의 미세한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 지금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젊은 피들이지만 당시에는 풋풋한 신인이었던 배우들의 날 것 그대로의 연기는 모두가 거쳐왔으나 망각하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기존 성장영화의 철칙과 달리, <파수꾼>의 아이들은 상처는 단지 상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온몸으로 역설한다. 한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추적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결국 명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난다. 세 소년이 어긋난 소통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입고, 또 상처 입힌 자국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나의 성장기는 본의 아니게 <파수꾼>과 함께였다. 기태, 동윤, 희준 세 친구보다 어렸던 중학교 3학년, 그들과 같은 나이였던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성인이 된 지금.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람 시기에 따라 <파수꾼>은 변해왔던 내 나이만큼이나 다른 느낌을 안겨주었다. 열여섯 살의 나는 교실 내부의 보이지 않는 서열화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 위에서 군림하려 드는 아이들을 기피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내가 기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희준에게 이입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열여덟의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중재자’ 역할을 하던 아이였다. 그러므로 기태와 희준의 갈등으로 걱정하는 동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희준 같은 중학생이자 동윤 같은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두 인물처럼 당시에는 기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다시 본 <파수꾼>의 소년들은 학창 시절의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생각보다 희준은 강인했고, 동윤은 위태로웠으며, 기태는 여렸다.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나와 달리, ‘어른’의 문턱을 넘은 현재의 나는 비교적 넓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지러운 핸드헬드의 화면 속에서 기태와 희준, 희준과 동윤, 그리고 동윤과 기태는 야구공을 통해 이미 색이 바래버린 서로의 마음을 뒤늦게 전하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관객들은 자살한 인물이 당연히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인 희준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해자인 기태를 자살의 주체로 제시하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린다.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서열의 최상위권 기태에 비해 희준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태의 눈빛은 흔들리는 반면 희준의 눈빛에는 강단이 서려 있다. 뺨을 맞고 머리채가 잡히는 인물은 희준이지만 어째서인지 기태가 아파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희준은 자신의 ‘자존심’을 알음알음 건드리는 기태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소통을 일방적으로 단절함으로써 기태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기태는 희준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유도,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결국 신체적 폭행을 통해 희준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입힌다.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그들의 관계는 각자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어그러져버렸다. 기태는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했지만 사과에 미숙했고, 희준은 이미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는 아이였다. 완고한 희준에게 기태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중한 자신의 야구공을 던져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기태의 자살 이후, 희준은 ‘무슨 일인지 나한테 얘기 안 해도 돼. 그래도 네가 기태 아버님은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동윤에게 기태의 야구공을 건넨다. 기태가 자살한 것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태 아버지께 사건의 전말을 말씀드리는 책임을 동윤에게 전가함으로써 희준은 기태의 진심을 결국 외면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마음을 닫아버리는 방식은 희준이 아픔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하는 행위이기에, 우리는 동윤에게 야구공을 내미는 희준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기태나 동윤과 달리, 희준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지킬 줄 알았던 파수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윤은 기태와 이야기를 나눴던 식탁에서 희준이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집어 들게 된다. 동윤과 기태 사이의 틈이 점점 더 벌어지게 된 이유에는 그들의 대화 방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소년은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야, 네가 뭘 아냐?/ 모르니까 물어보잖아.’, ‘그냥 좀 넘어가. 설명 못 하는 일도 있잖아.’와 같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문장을 남발하며 그들은 소통 없는 대화를 반복한다. 이는 동윤의 회상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동윤과 기태의 대화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없어질 것에 목매지 마라’라는 충고를 해주는 동윤에게 기태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비참해져도, 너만 알아주면 돼’라는 신뢰의 말을 건넨다. 서로가 진실한 말로써 소통할 수 있는 사이였다는 것을 동윤은 조금 늦게 깨닫는다. 세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유일한 공간이었던 기찻길에서 동윤은 기태를 회상(어쩌면 상상)하며 ‘누가 최고야?’라고 묻는 기태에게 ‘그래. 네가 최고다, 친구야.’라는 늦은 대답을 전한다. 희준이 애써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간직하고 있던 동윤은, 그것을 다시 기태에게 건네주며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을 ‘후회’한다. 영화는 아이들이 성장의 다음 단계로 무사히 진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끝을 맺는다. 한 아이는 죽었고, 한 아이는 회피하고, 한 아이는 후회하는 모습만을 남겨둔 채로 엔딩 크레딧은 무심히 올라간다. 한 인터뷰에서 기태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에 관한 질문에 기태 역의 이제훈 배우, 동윤 역의 서준영 배우, 희준 역의 박정민 배우 모두 ‘나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전부 충분히 이해되는 대답이다. 기태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관심과 애정을 갈구한 죄가 있고, 동윤은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말로 기태를 무너뜨린 죄가 있으며, 희준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일찍 마음을 닫아버린 죄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라는 기태의 질문은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들보다 더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라고 자부했던 성인 관객들은 기태의 물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유일한 어른이자 진실을 알고 싶어했던 기태의 아버지가 결국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은 것처럼, 아이들이 파국에 이를 때까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관객에게 <파수꾼>은 ‘어른’과 ‘성장’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하며 우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고통과 성장이 필수 불가결한 관계가 아님을 역설(力說)하는 이 영화는 역설(逆說)적이게도 한국 성장영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매체에 등장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어른이 되기 전 단계’로서의 어리숙한 이미지로 소비되었지만, <파수꾼>은 ‘청소년기’를 아동기에서 성인기 사이의 순간적인 이행기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시기로서 세밀하게 다룬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기 위해 도약을 꿈꾸는 미성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수꾼>은 모두가 충분히 아팠지만 세월 앞에서 잠시 잊어버린 그 시절을 생생히 돌이켜보는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이라며 아프고도 성장하지 못했던 희준, 동윤, 혹은 기태였을 우리를 덤덤히 위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