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세
- 감독
- 조긍하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신영균, 김혜정, 지방열, 김희갑, 전계현, 구봉서, 최남현, 이예춘, 황정순, 복혜숙, 유계선, 김웅, 최성, 박기택, 박옥초, 차유미, 백송, 박광수, 김세라, 최난, 박순봉, 양일민, 추석양, 남춘역, 박성근, 진남, 박광진, 이길억, 임생출, 안초명, 김월순, 현인, 장훈, 박재란, 추봉, 임동훈, 김재경, 김호연, 이민자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 중에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비장한’’ 가치를 품은 원석들이 있습니다. 그런 원석을 골라내고 잘 다듬기 위해! 아키비스트들은 오늘도 여러 단서를 모아 추적에 나섭니다.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원석 으로 발굴되기까지, 자료의 맥락을 추적하는 KOFA 추리반장 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2023년 12월, 한국영상자료원은 3년여에 걸쳐 정리한 대규모 컬렉션을 공개했다. 영화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와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이 그것. 정리부터 공개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에는 규모가 워낙 방대한 탓도 있었지만, 컬렉션 자체가 거대한 한국영화사를 관통하는 자료들로 채워진 까닭도 있었다. 故 김학성 촬영감독 (1913~1982)이 생전에 꼼꼼히 모아둔 자료들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자,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기, 한국전쟁기 그리고 전후 시기에 그가 경험하고 마주한 한국영화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와중에 끝끝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자료 역시 존재해, 정리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지난 2008년부터 그의 아들 김충남 씨의 이름으로 기증된 자료들이다 보니, 자료의 원 주인을 직접 만나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자료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단서가 될 만한 어떤 것이든 찾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료 중에는 이 일련의 사진들이 있었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사진 속 인물들의 의상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모두 같은 날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마다 카메라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영화 촬영 현장인 듯한데, 대체 무슨 영화였을까? 간혹 기증된 사진 중에는 기증자가 사진 뒷면에 관련 정보를 적어두는 경우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 사진들에는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해야 할 일은 사진 속 인물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교집합을 찾는 일이다. 위의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식별 가능한 인물들은 하이라이트 쳐진 인물들, 즉 컬렉션의 주인공인 김학성과 배우 서월영 , 최은희 , 주증녀 , 감독이자 편집 기사로도 활동했던 양주남 그리고 많은 영화에서 김학성과 함께 작업한 조명감독 고해진 정도였다(사진 오른쪽 하단 김학성 기준 반시계 방향 순). 그렇다면 이것으로 사진과 관련된 영화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정도 단서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김학성, 서월영, 최은희, 주증녀, 양주남, 고해진의 교집합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 하나. ① 이 영화는 촬영은 되었으나 공개되지 못했거나 어쩌면 완성조차 되지 못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사진이 촬영된 시점을 추정해 보는 것도 좋겠다. 배우 최은희가 스크린에 데뷔한 것이 1947년 신경균 감독이 연출한 < 새로운 맹서 >(김학성 촬영)이니, 이 사진은 적어도 1947년 이후에 찍혔을 것이다. <새로운 맹서> 이후 부부의 연을 맺은 김학성과 최은희가 함께 있는 현장인 점에서, 이 사진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헤어진 1953년 이전에 촬영되었을 것이다. 즉 ② 이 영화는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된 작품 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이 이상으로 추적할 만한 단서는 찾아지지 않았다.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되었으나 미완성된 혹은 미공개된 작품,’ ‘최은희·서월영·주증녀 출연, 김학성 촬영, 고해진 조명, 양주남 참여(역할 미상)’라는 것 말고는 영화의 구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만한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을 공개한 2023년 12월, 이 사진들은 ‘작품 미상 촬영 현장’으로 분류돼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후, 이 사진의 정체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2025년 공개를 목표로 정리 중인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가제, 영화사 연구자 배수경 조사 및 연구)”에서였다. 이 역시 방대한 규모의 컬렉션이 될 예정으로, 각종 문헌과 사진, 박물 자료를 합쳐 3천여 점의 자료가 모여 있다. 그중 사진 자료만도 1,800여 점에 달한다(이는 복본을 포함한 수량으로, 컬렉션 공개 시 조정될 수 있다). 참여 연구자의 조사·연구가 끝난 결과물을 검토하던 중에 익숙한 사진 한 장이 갑자기 눈에 걸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의 앞면 (좌)과 뒷면 (우)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서 ‘미상 작품 촬영 현장’으로 분류했던 사진의 하나와 꼭 같은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사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聖血 (성혈) 은 永遠 (영원) 히 빛나리 撮影 (촬영) 스탚과 口防部 (국방부의 오기로 보임) 映畫課 (영화과) * *은 식별 불가 / 괄호 안의 내용은 인용자 주 정일성은 < 가거라 슬픔이여 >(조긍하, 1957)를 통해 정식 촬영기사로 이름을 올리기 전에 김학성 문하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으니, 그가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충분히 그러할 만하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한 때가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을 촬영할 때였으니, 아마도 이 사진은 스승인 김학성을 통해 받은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여하튼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에서 두 개의 주요한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영화의 정체가 ③ <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라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과 ④ 국방부 영화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 이제 남은 일은 위의 ③과 ④의 가설을 입증하는 일이다.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한국영화를 집대성한 편람이나 총서, 신문·잡지 등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 소장된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_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표지는 김학성 촬영감독이 개인적으로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는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주인공 서준이 가족들과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다 이튿날 새벽, 전쟁 발발 소식에 군대에 복귀하고 악전고투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콘티 앞부분에서는 스태프 명단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 이 연출하고 김학성이 촬영을, 고해진이 조명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녹음, 미술, 음악, 편집, 배역 등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콘티는 제작진이 모두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본된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위의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홍 감독의 얼굴이 새삼 확인된다. 단체 사진에서 소매 배색 점퍼를 입고 선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김학성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김홍 감독이다. 한편 온라인 고서점에서 개인적으로 입수한 동일본의 촬영 콘티 표지에는 “崔銀姬 瑛. 役(최은희 영. 역-인용자 주)”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배우 최은희가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1 이로써 위의 일련의 사진들이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라는 ③의 가설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김학성 콘티 (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와 최은희 콘티 (우, 개인 소장) 영화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이제 제작 정보를 좀 더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 뒷면에 적힌 정보를 신뢰할 경우, 이 영화는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된 작품일 것이다. “신뢰할 경우”라 말한 이유는 사진 뒷면의 메모가 사후에 적힌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회고’와 같아서 완벽하게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 정보를 신뢰하기로 하고 좀 더 추적에 나서보자. 이것이 군 영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일 먼저 국군홍보관리소가 1992년에 발간한 『군영화 40년사』(“ 연감총서 컬렉션 ” 참조)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1950년 국방부 촬영대 발족부터 1992년 현재까지 군의 영화 제작 역사를 정리한 책으로, 군 영화 제작에 참여한 여러 영화인의 회고록과 군 영화 목록, 촬영 현장 사진 등이 수록돼 있다. 그런데 책을 훑어보던 중, 위의 사진들과 유사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군영화 40년사』 화보 면 화보 면 아랫단 오른쪽 사진에서 최은희(2열 우2)와 양주남(2열 우1)의 의상이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과 동일한 것이 확인된다. 책에는 이 사진에 대해 “‘聖血(성혈)’ 로케 현장의 촬영대원들과 최은희 씨”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를 줄여 <성혈>로 일컬은 것이지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영화 40년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이뿐이었다. 연도별 군 제작 목록에서도 더 이상 영화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가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이 있다는 추정은 든든한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추정은 위의 ②번 가설, 영화 제작연도(1947~1953년 사이)를 보다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국방부 영화과의 정식 명칭은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휴전협정 체결 후 서울 환도와 함께 1953년 8월, 정부 기구 및 국방부가 개편되면서 기존의 ‘군사영화촬영소’에서 변경된 명칭이다. *주2 영화의 서사가 한국전쟁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의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는 점, 그리고 1953년 8월에 명칭을 변경한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제작에 관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추정컨대 1953년에 촬영된 작품일 것이다. 공적 기록이 부재하는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추적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맺는다. 일단락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에 대해 추적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이 영화에 관계한 정도는 여전히 밝혀야 할 숙제이며, 촬영 콘티의 스태프 명단에 적혀 있는 “각본 협영문예부”에 대해서도 좀 더 파고들 여지가 있어 보인다. 참고 자료와 시간적 제약, 한국영화사 연구에 대한 개인의 미진함을 탓하며, 남겨진 과제들을 후속 연구를 통해 보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본다. * 미완성/미공개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김홍, 1953년 촬영 추정)에 대한 정보를 아는 분은 언제든 제보 바랍니다. *** 주1. 이 촬영 콘티는 배우 최은희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판본의 「CAST」 면에는 주인공 서준의 여동생 서영 역에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 있다. 서영은 최은희가 맡은 배역으로 추정된다. 한편 촬영 콘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배역 중 최은희, 주증녀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는 서영과 유경옥으로, 주증녀는 서준의 약혼녀인 유경옥 역을 연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우 서월영이 맡은 캐릭터와 양주남이 담당한 역할은 촬영 콘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2. 국군홍보관리소, 『군영화 40년사』, 1992, 10쪽; 12쪽; 15쪽.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정훈국 촬영대’는 1952년 1월, ‘군사영화촬영소’로 승격 발족했다. 이는 1953년 8월에 이르러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국방부 정훈국 군영화촬영소(1955년) →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1963년) → 국군홍보관리소로 잠정 통합(1979년) → 국군홍보관리소 정식 창설(1981년) → 국방홍보원(2000년)으로 변경되었다.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