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디 포스터의 홀리데이
- 감독
- 조디 포스터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홀리 헌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앤 밴크로프트, 찰스 더닝, 딜란 맥더못, 제랄딘 채플린, 스티브 구텐버그, 신시아 스티븐슨, 클레어 데인즈, 에밀리 앤 로이드, 잭 두햄, 오스틴 펜들튼
나는 정주리 감독이 밉다. < 도희야 > 같은 엄청난 데뷔작을 내놓고 아직도 차기작을 내놓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 된다. <도희야>를 만든 감독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산업이 정말로 문제다. 이번 칼럼은 의심과 취약성의 정동이 영웅 서사를 변형하는 방식에 대한 것인 동시에, 정주리 감독의 차기작을 갈급하게 요청하는 사심 가득한 글이기도 하다. <도희야>는 한국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섬에 들어온 외부인’ 설정을 따른다. 그 설정은 대체로 다음의 서사를 따른다. “자기들만의 도덕과 관행으로 똘똘 뭉친 시골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들춰내기 시작하자, 착하고 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은 불쾌한 이면을 드러내며 외부인을 위협한다.” <도희야>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외부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익숙한 관습의 궤도에서 벗어난다. 서울에서 온 엘리트 경찰 영남(배두나)은 바닷가 작은 마을의 파출소 소장으로 발령받는다. 동성애자인 그는 아우팅을 당한 피해자지만 경찰조직은 ‘말하지도 묻지도 말라’며 품위손상을 이유로 도리어 그에게 징계를 내린다. 간부와 선배들은 징계를 내리면서도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라는 단어가 병이라도 옮기는 듯 분명하게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는다. 피해자인 영남은 그 자체로 잘못된 존재가 되어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이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문제는 경찰조직이 아니라 영남이 된다. 절대로 튀지 말라는 선배의 조언대로 애인까지 버리고 1년 정도 숨죽여 있으려 했던 영남은 그 동네에 도착하는 처음부터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영웅은 여러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누가 지금 구원을 요청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를 예민하게 인지하는 자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약자가 언제나 크게 비명을 질러 자신의 피해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줄 수 있는 조건에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예민함은 타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향해야 한다. 취약한 자는 취약한 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따라서 강함만 있어서는 영웅이 되기 어렵다. 영남은 그러한 영웅의 자질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다. < 양들의 침묵 >에서 클라리사 스털링(조디 포스터)이 어린 시절 양떼목장에서 죽어가던 양들의 울음소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여전히 들려와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 역시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갖고 있는 이 취약한 영웅들은 상처받고 약한 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영남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차로 인해 크게 물이 튀여 피해를 입었는데도 괜찮은지 확인하려 하자,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소녀 도희(김새론)를 발견한다. 그 이후 도희는 계속 영남의 눈과 귀에 뜨인다. 취약성에 대한 감각의 예민함을 표현하기 위해 <도희야>는 영화적이고 서사적인 층위 모두에서 소리를 강조한다. 욕하고 때리는 계부 용하와 할머니의 학대하는 소리, 계부인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아 비명 지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도희의 소리,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침묵의 소리, 피해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불면증인 영남이 술을 따르고 마시는 소리,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생수병에 소주를 옮겨 담는 소리, 소주가 담겨있던 빈 플라스틱 생수병이 부딪히고 구겨지는 소리, 영남과 도희가 목욕하는 소리, 도희가 영남이 목욕하고 있는 화장실에 들어와 소변보는 소리까지 영화적 사운드가 외화면과 내화면에서 지속적으로 도드라진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소문과 험담의 소리는 다양한 존재들을 위축시키고 허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웅 외에도 취약한 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이가 또 있다. 그는 착취와 학대를 가해도 자신에게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취약한 이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타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빠르게 알아챈다. 박용하(송새벽)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마을의 주요 생계인 가두리 양식장의 운영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용하는 동네의 유일한 젊은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두둔한다. 마을 사람들은 직접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험담과 소문으로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 한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년이 계급장 달았다고 동네를 들쑤시고 다닌다”며 대놓고 욕을 하고, 용하는 첫 만남부터 “솔찬히 미인이어서 소장인줄 몰랐다”는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며 영남을 공격한다. 영남이 애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용하는 영남이 이주노동자를 보호하려는 결정적 순간에 “서울서 내려온 여자하고 뭘 하는 걸 봤으면 하는데 어느 한 새끼라도 나한테 물어봤으면 좋겠네, 입이 근질근질하네”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젊은’ ‘여자’ ‘동성애자’는 모두 영남의 다층적인 취약점이 된다. 영남이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용하는 ‘성적 대상’으로 영남을 지시하며 그가 가진 권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나 영남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오히려 그는 성적 착취자가 된다. 도희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모든 행동은 성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정주리 감독은 관객들에게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이 영남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시점에 도희와 영남이 함께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 영남이 목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외화면에서 도희가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장면,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은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영남을 보여주며 둘만의 내밀한 순간들을 공들여 연출한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지나칠 정도로 반복된다. 사실 용하와 형사들이 영남에게 소아성애자라는 혐의를 씌우기 전에 관객들은 여기서 이미 이상한 긴장감을 느낀다. 게다가 영남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그의 애인을 질투하며 집착하는 도희의 모습도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이 긴장감과 불편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어떤 면에서 정주리 감독은 연출적으로 소위 ‘오해의 여지’를 점점이 뿌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로 이 행동들이 그렇게 설명 불가능한 것인가? 심지어 영남은 경찰로서, 즉 폭력 피해자를 상대해본 전문가로서, 도희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영남은 도희가 “폭력에 길들여진 위험한 상태여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고,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경찰 제복을 입고 있고 나쁜 짓 하는 남자들 혼내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여 그러는 것이라고” 매우 타당성 있는 전문적인 해석을 내린다. 영남은 도희의 애착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기 보호와 생존의 욕망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더불어 영남 스스로도 도희와 지나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관계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들에서 일말의 불편함과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남은 곧 성인 여성으로서 그리고 경찰로서 보호자로서의 정체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전에 멈칫하다가도 그를 품어준다. 그렇다면 그 긴장과 불편함을 성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레즈비언인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동들이 갑자기 어떻게 성착취의 증거가 되는가? 관객들은 정말로 경찰과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가? 존재에 자체에 대한 의심과 혐오의 씨앗은, 그것이 막연한 긴장감과 불편함에 불과할지라도 질문하지 않고 놓아두면 언젠가 그 존재의 모든 행동을 오염시킨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 혹은 동성애자가 영웅이 되기 위해선 소문과 낙인, 존재 그 자체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래서 소수자가 영웅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소수자 영웅은 타자를 구원해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존재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영남은 도희에게는 ‘맞지 말고 저항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은 경찰조직의 억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고 묻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피해자임을 부인하고 거부해 왔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은 어떤 면에선 더 많은 고통을 불러왔다. 자신뿐 아니라 애인에게도. 그러나 끝까지 도희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영남은 다시 가해자의 외피를 쓴 피해자가 된다. 여기서 영남은 도희의 구원을 받는다. 도희는 ‘순수한’ 피해자와는 거리가 멀다. 도희는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 할머니가 추락한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계부를 함정에 빠뜨려 감옥에 보내 자신과 영남을 구한다. 여기서도 전화의 사운드가 이용된다. 도희는 추문을 추문으로 막는다. 도희는 자신이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취약성은 때로 존재를 단단하게 만든다. 영남은 도희를 두고 혼자 떠나려다가 도희가 “어린 괴물” 같다는 후배 경찰의 소리에 차를 돌려 도희를 데려간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오염이 얼마나 그 존재를 갉아먹는지를 잘 알고 있는 영남은 도희를 버려둘 수 없다. 이 선택은 그녀의 경력을 무너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도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존재를 걸고 자신의 취약성을 받아들이며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남과 도희 모두 서로의 취약성을 발견하고 나서야 서로를 구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취약성을 통해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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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헐리웃 미투 캠페인 지지를 위해 글든글로브 시상식에 블랙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배우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 니체(『선악을 넘어서』) 차이콥스키 내 노트북의 바탕 화면은 대중적으로 비호감인 남자 배우의 사진이다. 내가 이 배우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의 연기와 극 중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가 쓴 글과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을 뿐이다(나는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바탕 화면 배우’ 말고 좋아하는 배우 두 명이 있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마초 발언으로 논란이 많다. 여자 배우? 많은 여성 배우들은 위에 언급한 남자 배우들의 나이까지 ‘버티지’ 못한다. 나는 노트북을 켤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000을 좋아해?” 혹은 아예, “네가 컴맹이라 다운로드가 잘못되었나보다, 내가 바꿔줄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아직은) 성폭행범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우성 배우를 매우 좋아하지만, 모든 남자 배우가 그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이 역시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난민 인권을 논하는 배우를 더 싫어할까, ‘문란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병역을 기피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모두 뇌관이다. 내 심정은 복잡하다. 일단,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자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 세상에는 내가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은 모두 내가 추구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 나는 특별한 정국(政局)을 제외하면, “ ~ 주의자”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 ~ 주의자”는 선언한다고 획득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 ~ 주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과 자기 검열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일상의 연속이다.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인간의 품성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많은, 나 같은 관객들은 고민한다. “작품은 좋은데, 그 감독 인간성은 00이라며?”, “난 그 배우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패스야. 배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지”, “네가(나) 어떻게 그런 소설가를 좋아할 수 있니”... 흔한 논쟁거리다. 이것은 ‘타인의 취향’도 ‘정치적 올바름’도 ‘똘레랑스’도 ‘작가와 작품의 분리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제3의 정치학을 필요로 하는 이슈다. 위에 적은 내용에 비해 덜 논쟁적인 문제도 있다. 단지, 무지와 통념으로 인한 혐오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어떤 클래식 애호가(?)가 내게 물었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면서요?”, “그런데요?”, “저는 그다음부터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께름칙해요”, “그러세요? 그럼 듣지 마세요”. 나는 차이콥스키와 바흐 없이 살 수 없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서 그의 음악을 못 듣겠다면, 그 사람만 손해다. 아니, 음미할 자질조차 없는 거다(참,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있다). 오스카 와일드, 트루먼 카포티, 안데르센, 소크라테스! < 주노Juno >(제이슨 라이트맨, 2007)와 < 인셉션Inc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20010)의 엘렌 페이지, 조디 포스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동성애자라서 ‘꺼려진다면’ 볼 책도 영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이슈를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뭔데?” 이 말은 사이먼 페그가 나오는 영화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의 연예 잡지 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다 실패한 이야기인 < 하우 투 루즈 프렌즈How to lose friends & alienate people >(로버트 B. 웨이드, 2008)에 나오는 말이다. 시드니 영(사이먼 페그 扮)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좌충우돌하다가, 뉴욕의 문화계의 거물을 찾아가 한심한 협박을 한다. “(기자인 나한테 뭔가 이득을 주지 않으면) 동성애자 배우, 모델, 감독, 작가들을 모두 아우팅 시킬 거다”. 상대방은 웃으며 말한다. “이 바닥에서는 거의 동성애자 아니면 유대인이야. 매장당할 사람은 당신이야” 가해자보다 더 나쁜 예술 분야뿐 아니라 정치인, 학자, 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위인 중에서 인간성과 그의 업적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간성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학대했는지(톨스토이), 남의 업적을 가로챘는지(아인슈타인), 성차별을 일삼았는지(레닌), 자기만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는지(푸코, 보부아르), 비열한 연애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권모술수를 부렸는지, 표리부동했는지,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는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위대한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이다. 성폭력범은 너무 흔해서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맷 데이먼. 누가 그를 싫어할까. 그는 왠지 미국인도 제국주의자도, 심지어 ‘남성’도 아닐 것 같은 이미지다. 미투 이전까지, 맷 데이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2016년, 영화 < 제이슨 본Jason Bourne >(폴 그린그래스)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그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 해석과 영화 철학,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다. 18살에 커리어를 시작해 구스 반 산트,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들리 스콧 등 거장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알려졌다시피 글쓰기에도 능하다. ‘바람둥이’, 왕자병’ 스타일도 아니다. 특히, 그는 물 부족 국가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www.water.org).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작품 자체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니, 그의 영화를 다 봤다. 나는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해 ‘지구화 시대 국민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2편인 <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폴 그린그래서, 2004)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사과하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상하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안소니 밍겔라, 1999)마저 순수해 보인다. 알랭 들롱의 ‘리플리’(<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 >(르네 클레밍, 1960)에서 주인공)와 다르다. 그의 인간성은 모든 캐릭터를 맷 데이먼으로 환원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최근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 과정에서 연일 ‘말실수’를 했다. 아니면, ‘본색’일까. 그의 발언을 보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과 강간, 아동 성추행은 다르다.”, “영화 제작자까지 인종 다양성을 보장할 필요는 없다.”, “성 정체성은 편견을 줄 수 있으니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성추행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결국 일련의 발언으로, 여성들만을 주인공으로 한 < 오션스 8Ocean's 8 >(게리 로스, 2018)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나,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거센 항의로 편집 당했다. ‘평균 시민의 교양 미달’이라는 측면에서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저런 수위의 발언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큰 충격은 그가 (쿠엔틴 타란티노, 벤 애플렉 등과 함께) 지난 20년 동안 하비 와인스타인과 친분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와인스타인의 셀 수도 없는 성폭행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전 남자친구 브래드 피트만이, 와인스타인에게 항의했다고 알려졌다. 더 심각한 문제, 아니 더 혐오스러운 데이먼의 범죄 행위는 그가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보도하려던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를 회유했고, 옹호 논리까지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맷 데이먼 자신은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와인스타인 같은 인물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직접 가해보다 ‘더 질 나쁜’ 행위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살인보다 살인 교사가 더 나쁘고 비리 재벌보다 재벌의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언론사, 회계사, 변호사가 더 역겨운 것처럼 보이는 심리처럼 말이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추잡’하다고 할까. 이런 나의 생각 역시, 스타의 이미지에 포섭된 미디어 시대 우중의 모습이고, 진짜 가해자인 와인스타인은 아예 제쳐 둔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불신, 문화적 억압이라는 또 다른 피해 배우는 힘든 직업이다. 지금도 활동 중인 노년의 배우가 있는데,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는 TV 연설원이었다. 그가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한 첫 마디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요, 왠지 그 양반(노태우)이 좋습디다...”였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느낌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배우의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노태우와 광주 학살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와 군부에 대한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이후 그 배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배우나 작가가 모든 면에서 결점이 없을 수 없다. 마피아부터 파시스트까지, 그리고 그들을 스폰서로 둔 사례까지... 문제는 간단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했던 배우의 영화를 더 이상 볼 ‘비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성폭력은 특별한 범죄다. 난 맷 데이먼을 잃었다. 이제 그가 출연한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과 비슷하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석학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안내 업무를 맡은 친구로부터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인 더 컷>의 마크 러팔로와 맥 라이언 ‘개념 매력남’인 줄 알았던 맷 데이먼에게 놀라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마크 러팔로도 의심이 간다. 게다가 그는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더 나쁜 X’이면어떡하지?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는, < 인 더 컷In the cut> (제인 캠피온, 2003)의 러팔로 같은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과 <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 >(케네스 로너건, 2000)에서 러팔로의 빵구 난 러닝셔츠를 생각하면서 웃곤 한다. 나는 점점 <인 더 컷>의 맥 라이언처럼 편집증 환자가 되어갈 판이다. 차라리 스파이크 리처럼 대놓고 마초인 남자가 나을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영화의 캐릭터)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투 이후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졌다. 예술가의 인성과 작품 수준의 관계는 끝없는 논쟁거리지만, 나는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있다. 좋은 인간과 좋은 예술가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사회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선(善)의 기준은 대단히 넓고, 다면적이고, 맥락적이며, 인간은 일관되고 합리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악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나쁜 사람의 작품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작품에는 반드시 나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혹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생각보다 이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어린이를 학대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얘기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이런 사람의 작품은 논쟁을 넘어 논쟁의 가치조차 없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라.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가진 배우, 감독, 스태프 하고는 일하지 않는다(해고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필버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하는 가해자는 없다. 그런데 왜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만 논쟁이 분분할까. 이 자체가 젠더 폭력에 대해 관대하다는 얘기다. 성폭력은 그 어떤 잘못보다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남성들의 반발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남성 사회는 스스로, 혹은 (피해) 여성 집단에 두 번째 기회를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부정하고 은폐하고, 가해자는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기회가 웬 말인가. 맷 데이먼.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서 속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한 씨네필의 영화 사랑을 망친 그에게 분노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느 영화평론가는 이런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2004) 월드 프리미어 참석한 그는 서구 기자들에게 ‘치여’ 제대로 입장도 못하고 곤란한 처지에 있었는데, 관람권을 미리 확보가 ‘기득권 평론가’가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는 것이다. 극장 밖에는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면서 코를 골고 잔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이들의 관람 기회를 박탈해가면서) 솔직히 살의를 느꼈다.”. 내가 맷 데이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나는 인간이며, 그것만으로도 비참하기에 충분하다 - 메난드로스 말할 곳을 찾다 인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비참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이다. 기원전부터 인생이 이랬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될지 모른다. 현대는? 미국의 ‘흑인’ 사회학자, 시카고학파의 프랭클린 프래지어(Franklin Fraz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문화 속에서) 살 만한 동기를 찾든지 죽든지.” 일단, 태어났다면 힘들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생로병사가 있고, 사랑하는 이들의 생로병사를 겪어내야 한다. 게다가 불평등, 부조리, 악의 승리, 차별, 미세 먼지, 양진호 같은 사람들……. 이제는 오래된 뉴스가 되었지만 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턴과 헤어지고 안젤리나 졸리와 ‘시끄러운’ 연애 중일 때였다. 그즈음 유명 잡지(<배니티 페어>라고 기억한다)가 애니스턴을 표지 모델로 실었다.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제가 외롭냐고요? 그래요! (Am I lonely? Yes!)” 그래, 나 당신들 생각처럼 외롭다, 그래서 어쩔래? 그런 말투 같았고, 나는 대중 매체가 잔인하다고 느꼈다. 누구나 슬퍼할 상황에다, 유명 여배우만이 겪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누구에게 고민을 말했을까?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하고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인간관계,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우울과는 다른 고립감(powerless)이 나를 휘감는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 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남들 퇴근 시간 즈음에야 직장 생활을 하는 지인에게 “오늘 만날 수 있어(요)?”, 혹은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까지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비밀 유지 걱정 등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 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 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고 본다. 이야기를 들어줄 가장 좋은 대상 간혹 자신을 나의 “독자”라고 소개하는,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받는다. 내게 E메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제가 힘든 상황입니다. 어디 말할 곳이 없어서 선생님께 씁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그들은 쓰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연을 잊는다. 편지가 오고 가거나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 나, 아니 나의 아이디는 익명의 수신처일 뿐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행위는 자기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마음속의 가시와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 가시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찌른다. 말하기(speech)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자살률이 높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이 된 시대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중요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시대의 문제, 혐오 발화(ex/citable speech)를 일종의 주인 없는 퍼포먼스라고 본다. 혐오 발화는 말하기(citing)를 초과하고, 남용하고, 선을 넘어선(ex/citable) 상황이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할 때는 말의 초과는커녕, 하고 싶은 말의 용량에 미치지 못한다. 혐오 발화는 그렇지 않다. 넘친다. 차별주의자들은 그 상황을 즐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고전 < 피고인 (The accused )>(조나단 카프란, 1988)은 지금 봐도 ‘교과서’다. 작품 자체로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시각에 있어서도.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와 페미니즘…… ‘나의 영웅 조디’(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20대 초반, 더러운 동시 상영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심지어 쥐가 돌아다녔다). 극장 간판은 선정적이었다. 시간 때우는 ‘싸구려 영화’인 줄 알았다. 조디 포스터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윤간(gang rape) 피해 여성으로, < 탑 건(Top gun) >(토니 스콧, 1986)의 캘리 맥길리스가 그를 돕는 변호사로 나온다. 작품 속 ‘조디’는 가난한 여성의 전형이다. 일찍 가출하여 거리를 전전한다. 술, 마약, 섹스, 길거리의 폭력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그녀는,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겪는 고통과 편견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젠더, 성폭력 이런 이슈들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통화 장면이었다. 그녀 자신도 당하고서야 깨달은 이 상황. 자신도 정리가 안 되고 이해할 수 없고 분노로 미칠 것 같다. 누가 지금 자기 처지를 알아줄 것인가.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미국 대륙 내 시간 차, 그리고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웬일이니”, “잘 지내니”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엄마 사랑해.”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내가 가장 원하는 경청자는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듣는 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공감과 수용이 가능한 적극적 청자(active listener), 더 나아가 치유(talking cure)가 가능한 소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가가 따르고 찾기가 어렵다. ‘전문가’들과 비슷한 범주에서 안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해력과 인간애가 깊은 친구나 멘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매번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민망하고,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빚을 진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아는 사이라면 여전히 비밀도 걱정되고, 완전하게 안전한 관계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것이다. 기도가 그것이다. “주님은 내 안에.” “부처님은 온 천지에.” 벽에게 말하자 내 안의 무엇인가를 - 주로 괴로움 - 꺼내 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고민, 고통, 외로움, 스트레스 같은 일일수록, 말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삶의 조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상황이고, 언제나 고민은 누구에게 말할까이다. 소통의 소중함이라느니, 대화를 통한 해법, 털어놓으라……. 나는 이런 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아예 모르는 이에게 그리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에게 말할 때가 상호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응이 없는 것이 좋다. 나는 이 ‘반응 없음’이 훨씬 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주 경험한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두 사람의 딸’이지만, 엄마와는 ‘여성으로서’ 관계였고 아빠는 그냥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와 겹치는 젠더 문제에다 개인적으로 극히 예민하신 분이고, 아빠는 그 반대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것이 편했다. 아빠는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러냐.” 한 마디뿐이셨다. 그러고 나서 오로지 당신 일상, 당신 주장만 하셨다. 나는 아빠의 무반응과 철저한 이기주의가 좋았다. 아빠랑 통화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아빠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받았다. 가족? 절친? 파트너? 그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인가? 의외로,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창호’니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말하지만, 정말 벽에게 말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말이 통하면 나중에 상대방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라는 공치사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넌, 아직도...? 지겹다”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걱정거리’인 인간이 된다. 나는 매일 고민이 있을 뿐이지,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란 말이다!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에서 엄마에게 전화할 때의 심정.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곤경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타인과 연결 자체만으로 상황이 ‘정리된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화양연화 왕가위의 < 화양연화(花樣年華) >(왕가위, 2000). 쓸 자신이 없다. 포기. 다만 <피고인>과 <화양연화>는 무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방식과 상대는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생의 고통, 고독, 고립, 말할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내 생각에 <화양연화>의 주제는, 인생의 본질인, ‘어쩔 수 없음’이다. 두 사람, 어쩌겠는가.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벽에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국가 안보’ 문제여서 말하지 못하는 코미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자면 복잡한” 이야기(미국 영화 대사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complicate”다), 말하면 안 되는 나의 불법 행위……. 진실에 목을 매는 상대방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상대가 가장 좋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쓰거나 청소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