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련하는 소녀시대 태연
- 제작년도
- 2009
현재의 거울 대학교 졸업을 앞둔, 통상적인 교육의 끝자락에서 돌이켜 본다.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다르게 살 수 있을까. < 디어 마이 지니어스 >( 구윤주 , 2020)는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감독이 교육의 시간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후회되는 부분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곰곰이 들여다보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통과해버렸다는 것이다. 감독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없지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어린 동생 윤영이 있다. 감독은 어머니의 관리하에 촘촘하게 짜인 윤영의 일상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위한 답을 찾고자 한다. 영재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고 홍보되었지만, 정작 영재 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머니의 교육열은 남다르다. 어머니는 한 달에 두 번 도서관에 출근해 딸이 읽을 만한 책을 선별하고 한 번에 대출할 수 있는 최대 권수인 26권을 꽉꽉 채워 대출한다. 책을 운반하기 위해 장 볼 때 쓰는 카트는 필수다. 미리 비워둔 책장 속에 26권의 책을 꽂아두고 딸이 하나씩 빼 읽을 것을 상상하는 기쁨은 욱신거리는 팔목 통증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꼼꼼하고 성실한 매니저인 어머니는 매번 딸이 돌파한 책의 권수와 제목을 노트에 기록해왔고 지금 막 기록된 숫자가 7,000을 넘었다. 영어 학원에서 주최하는 1만 원의 상금이 걸린 100단어 영어 콘테스트를 위해 우는 딸을 달래가며 늦은 시간까지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유난스럽기는 해도 어딘가 소박하게 느껴져 정감이 갈 정도다. 영재가 되고 싶다는 윤영의 소망도 대책 없이 솔직하다. 과거 영재 시험을 통과한 감독은 동생에게 ‘영재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진실을 누설한다. 그렇다고 해도 영재 시험에 통과하고 싶은 윤영의 소망은 꺾이지 않는다. 윤영이 영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언가 높아진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재는 허상이지만, 그 허상이 주는 열매는 실재한다. 높은 교육열을 비판하기 이전에 성적이 곧 정체성이 되는 학생의 시간에서 학업 성취의 기쁨은 쉬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디어 마이 지니어스>는 교육의 당사자로서 가족을 비판적으로 보진 않는다. 교육 현실은 오직 가족을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결과적으로 교육을 비판한다고도 보기 힘들다. 남은 건 어머니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고 어린 동생을 구하고 싶은 감독의 욕망 그 자체다. 이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 사이에 놓인 감독의 위치 때문이고, 실패한 원인 역시 그 때문이다. 감독은 종종 어머니에 대한 냉정을 잃는다. 특히 어머니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깔끔하게 청소된 집을 보는 것과 윤영의 하루가 계획대로 실행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요즘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아 속상함을 토로할 때 감독은 어머니보다 먼저 눈물을 보인다.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감독의 눈물은 그런 딸을 보는 어머니의 표정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교육의 당사자로서의 어머니와 윤영이 아닌, 이들의 눈에 비친 감독의 모습이다. 감독은 질문으로 무장한 채 호기롭게 동생을 대하지만, ‘도대체 이걸 왜 찍고 있냐’와 같은 동생의 뼈 때리는 역질문에 종종 맞닥뜨린다. 애초에 윤영은 감독에게 ‘아주아주 재미있게 찍어 달라’고 주문하며 아무렇지 않게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바 있다. 감독은 윤영의 일기장 속에 어느 날 ‘굶주린 독수리’였다가 다른 날 ‘월트 디즈니’도 된 자신을 발견하며 감정의 널을 뛴다. 이쯤 되면 조련당하는 쪽은 윤영이 아닌 감독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카메라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찍는 딸과 언니의 모습을 비춰낸다. 인생의 세 시기를 상징하는 모녀는 서로 과거를 투사하는 선형적인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가 향해가는 곳은 각자의 현재를 찾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두고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은 이들은 서로의 현재를 비추며 각자 저마다의 출발선에 선 사람으로 존재한다. 감독은 마치 하나의 쌍처럼 종종 자신을 어린 동생의 옆에 나란히 세운다. 함께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하거나 카메라 앞에서 양팔을 물결치는 장난스러운 춤도 추며 둘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그리고자 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동생은 ‘나는 구윤영이 될 거야’라고 답했고, 그 의미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라 똑 부러지게 정의한다. 그 대답은 영화가 다다른 장소가 어디인가를 보여준다. 그곳은 내가 나를 비추며, 내가 다시 내가 되는 자기 증식의 세계다. 가족을 통해 교육 현실을 찍고자 했으나 돌고 돌아 나를 성찰하게 되는 무한의 미로. 영화는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답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단면을 마주할 넉넉한 표면을 제시한다. 마침내 우리는 교육을 통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원점과 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
<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 >(클로이 자오, 2017)를 보는 동안 몸이 아팠다. 이건 영화의 인상에 관한 수사가 아니라, 물리적 경험의 차원에 대한 표현이다. 그 감흥은 이 세계가 특별한 육체성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후에야 나는 인물을 연기한 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 브레디 블랙번은 실제로 로데오 카우보이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했던 브레디 잰드로고,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잰드로 가족이며, 스타 카우보이였으나 낙마 사고로 장애를 입은 레인은 같은 과거를 가진 레인 스콧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연기에 모방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껴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느낌은 그들의 연기가 숙련되고 능숙하다는 평가와는 좀 다른 맥락의 문제다. 연기 경험이 없는 자가 영화 안에서 자신으로 분해 과거에 겪었던 사건을 재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효과가 따르는 건 물론 아니다. 요컨대 브레디 블랙번과 브레디 잰드로가 동일 인물이라고 해서 실제 육체와 극의 육체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에 진짜가 들어오는 순간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이 돌출된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캐릭터를 분석해서 서사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일반 배우들과 비교한다면 이 경우 ‘나’는 영화 안에서 ‘나’를 가장 어색하게 흉내 내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로데오 카우보이>가 성취한 자연스러움은 신기하고 기이한 것이다. 감독의 뛰어난 역량이나 이 영화로 데뷔한 이들에게 잠재된 배우로서의 재능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앞서 말했던 <로데오 카우보이>의 ‘특별한 육체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이를테면 레슬러도 음악가도 무용가도 아닌 로데오 카우보이의 세계라는 점이다.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현실을 재연하는 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그들의 실제 직업적 활동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감독은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정체성을 영화의 몸으로 반복하고 싶어 한다. 잘 알려져 있듯, 로데오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나 소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을 선발하는 일종의 스포츠 혹은 엔터테인먼트다. 흩어진 소들을 직접 한 곳으로 모는 카우보이의 일거리가 점차 줄면서 로데오는 공식적인 경기가 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울타리가 쳐진 작은 공간에서 조련되지 않은 말 위에 올라 최대한 오래 버티는 행위. 그래봤자 몇 초 안에 승부가 판가름 나는 말과 인간의 싸움. 로데오를 보다 보면 개인적으로는 짜릿함보다는 씁쓸함과 비애감이 먼저 찾아온다. 그건 아마도 사라진 서부의 자리와 의미를 더없이 인공적인 행위를 통해 오직 육체만으로 가까스로 좇고 있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말을 타고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거나 황야로 근사하게 사라지는 카우보이가 아니라, 저 비좁은 곳에서 오래 버티는 쇼로 단시간의 흥분에 도취된 카우보이의 형상. 말은 카우보이의 조력자가 아니라, 이겨야만 하는 대립항이 된다. 아니, 말은 가짜 적이 되어 카우보이와 함께 ‘서부의’ 연극을 수행한다. 로데오의 장소는 자기 죽음을 외면하는 서부의 시간이 극단적인 오락의 형태로 돌아온 곳처럼 보인다. 로데오 카우보이가 야생마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몇 초는 말하자면 그 환상이 유지되는 짧은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카우보이가 몸을 다쳤다. 몸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로데오 카우보이가 서부의 환상을 구현하거나 그 안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이 <더 라이더>의 시작점이라고 짐작한다. 영화는 로데오 경기장에서 밀려난 그를 서부극의 행위자를 연기하는 장소로 부른다. 그곳은 고전적인 서부극을 지탱하던 장르적인 구조와 질서가 사라지고 다친 카우보이와 거친 말만 남은, 달리 말해, 실은 서부극이 성립되기 어려운 세계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미 사라진 서부의 시간을 영화의 몸으로 환기하며 불러내기 위해서는 로데오라는 환상만큼이나 간절한 환상의 활동이 필요하다. 현실의 로데오 카우보이는 육체적 충돌을 피해야만 그 환상을 유지할 수 있지만, <더 라이더>에서 그 환상은 육체적 충격을 통해서 지연될 수 있다. 그 사실이 이 영화에 고인 슬픔의 기원인 것 같다. 로데오 카우보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경기 장면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찍어둔 영상으로 나올 뿐이다. 그 영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몸은 로데오 쇼에 임할 수 없을 만큼 이미 망가진 상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우리는 그들의 육체적 상흔을 마주한다. 브레디는 머리 한쪽에 붕대를 감은 채 등장해서 붕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박은 철심을 뜯어내는데, 수술 부위엔 피가 맺혀있다. 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손가락에 마비가 와서 말고삐를 제대로 쥐지 못하는 장면들도 종종 보인다. 그를 찾아온 카우보이 친구들은 로데오를 하다 갈비뼈가 부러진 경험이나 뇌진탕이 일어난 순간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고통에 굴복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레인의 모습이 나올 때, 우리는 그 다짐의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고 말도 하지 못하며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생각을 전달한다. 이전 장면에서 친구들은 그의 재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만, 레인의 장면은 그 염원을 아프게 무력화한다. 그러니까 로데오의 활동이 아니라, 그것에 의한 육체적 충격의 결과, 혹은 여전히 진행 중인 충격의 잔상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 카우보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환상을 지탱하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브레디가 데려온 아폴로는 조련을 거부하는 말이었지만, 점차 브레디의 손길에 익숙해진다. 더 이상 로데오 경기에 임할 수 없는 브레디에게 아폴로는 카우보이로서의 마지막 소망이 투영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말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리가 심하게 찢어져 피를 흘리는 상태로 발견된다. 아폴로가 탈출을 시도하다 철창에 다리를 찔린 것으로 생각되나, 영화가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다리를 다친 말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히 상기시키고는 브레디의 아버지로 하여금 총을 쏴 죽이게 한다. 말의 급작스러운 부상과 영화가 멀리서 지켜보는 죽음의 광경은 말의 운명을 극화하며 그것을 서부극의 시간과 풍경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말이 달리며 생성하는 행로가 아니라 말이 쓰러진 자리에 생긴 구멍을 응시한다. 어떤 가치나 사건이 아니라 충돌, 찢김, 구멍이 <로데오 카우보이>의 시간을 버티게 한다. 육체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한계에서 육체성을 체념하지 않기 위해 이 세계는 육체에 충격을 각인하는 방식으로 존립하려 한다. 이를테면 브레디는 로데오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한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레인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그건 회복할 수 없는 몸을 가진 로데오 카우보이가 육체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하고 막다른 방식이다. 로데오에 다시 도전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다음, 브레디는 레인을 찾아가서 그 문신을 보여준다. 그런 브레디에게 레인이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자 브레디는 휠체어 앞에서 레인의 손을 잡고 마치 말의 고삐를 쥐고 로데오 경기를 하는 것처럼 움직여본다. 그 간절한 동작에 담긴 마음을 실현해주듯, 영화는 하얀 말을 타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브레디의 장면으로 전환되며 끝난다. 서로 마주 보며 과거의 육체적 기억을 함께 더듬는 두 남자의 장면에는 로데오 카우보이의 표식들, 이를테면 말도, 안장도, 로데오 경기장도, 무엇보다 육체적 부딪침의 격렬한 현재성도 없다. 오직 두 남자의 부자유한 몸과 서로의 몸을 주시하는 눈빛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과 인간이 공존하며 함께 운동하는 마지막 장면의 서정은 앞선 브레디와 레인의 경직된 몸의 장면이 꾸는 꿈일 것이다. 언젠가 도래할 미래도 실현될 희망도 아니라 불가능한 육체가 접속한 불가능한 환상. 이 끝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그래서 더없이 비통하다.
< 웨건 마스터 >는 여러 면에서 이색적인 서부극이다. 예산은 999,370달러로 포드 서부극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며, 흥행성적도 당시 포드 서부극의 평균수입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포드의 영화에 여러 번 등장했던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당대의 스타 대신 무명에 가까웠던 벤 존슨과 해리 캐리 주니어(무성영화 시절 포드 영화의 스타였던 해리 캐리의 아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포드의 배우라고 해도 좋을 평생의 영화적 동지였지만 영원한 조연이었던 워드 본드가 여기선 그나마 가장 알려진 배우였다. 또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포드가 스스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1930년 이후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포드의 가장 개인적인 서부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웨건 마스터 >에는 서부극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카우보이(여기선 말 장사꾼), 무법자, 인디언, 정착민 마을, 황야의 횡단, 마차의 질주, 총격전과 같은 전형적 서부극의 관습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취한 광대(철학자), 도박과 춤과 노래와 같은 존 포드 서부극의 특징적 요소들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포함한 어떤 서부극과도 닮지 않았다. 극히 단순하고 느리고 천하태평이며 사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기이한 서부극을 두고 포드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했다. 앞서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이 최고의 서부극 마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고전적 서부극 혹은 관습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비전형적 서부극 중에서도 가장 일탈적인 이 영화를 가장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포드의 편에 선다면(사견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부극은 다시 정의되거나 정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여기엔 문명과 황야, 동부와 서부, 질서와 무질서 같은 서부극의 기본적 대립항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민 공동체도 인디언 마을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집단이며, 그저 마차의 경유지일 뿐이며, 악당들이 등장해 여정을 지체시키지만 짧은 액션만으로 퇴치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 웨건 마스터 >는 가장 비서부극적인 서부극이다. 장르 연구가들이 포드의 서부극을 다루면서 <웨건 마스터>를 잘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곤경은 장르 연구가들의 것이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의 것은 아니다. <웨건 마스터>는 우리의 여정에서 가장 멋진 도착지 가운데 하나이며, 또 다른 걸작이다.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100여 명의 모르몬 교도의 마차 행렬과 그들을 이끄는 두 ‘웨건 마스터’(마차 행렬의 가이드이자 한시적 지도자)는 황야의 곤경과 무법자의 위협을 극복하고 모르몬의 정착지를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극적 장치나 로맨틱한 연애담은 물론, 포드의 다른 걸작들에도 남아있는 감상적 정념조차 없다. 마차 행렬은 몇 차례의 고비를 겪지만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이것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 웨건 마스터 >를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표현한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기엔 마차 행렬의 ‘완만한 운동’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풍경이 있고 인물이 있다면,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의 움직임을 찍는다는 카메라의 가장 단순한 행위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비슷한 뉘앙스로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인물이 다음에 무엇을 하는가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의 생동의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질베르토 페레스는 그냥 “소박하고도 위대한 영화”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 웨건 마스터 >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유연한 것이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주제와 정조를 집약한 한 장면을 끄집어내 특별한 찬사를 바치고 싶어도, <웨건 마스터>는,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멈추기가 어렵다. 아마도 ‘완만한 운동’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부드럽고도 민첩한 이 영화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교류하는 수려한 멜로디는 평자에게 달콤한 패배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 아름다움을 직접 말할 수 없다면, 이 특별한 서부극의 뭔가 다른 점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리라. #1 < 웨건 마스터 >의 이례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풍경의 위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들을 순례하면서 풍경의 초월성을 몇 차례 거론한 바 있다. 사건들이 닿을 수 없고, 물질적으로는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의 아우라가 이야기를 초월하는 풍경의 이중성은 포드 서부극의 발명이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의 풍경은 인물과 친화한다. 풍경과 인물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깝거나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달리 말해 인물과 풍경이 서로를 건드린다고, 혹은 인물과 풍경이 동행한다고 말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포드의 다른 서부극에서는 이런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암석봉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으며, 주로 바위산 위에서 등장하는 인디언을 제외하고는 대개 멀리 암괴로부터 떨어져 평원을 걷거나 마차를 달린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 인물은 풍경을 쳐다보고 그것과 접촉하며 때로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샌디는 날카롭게 치솟은 한 암석봉을 쳐다보며 “언젠가 저걸 보고 산타페의 성당을 닮았다고 얘기했잖아”라고 말한다.(#1) #2 #3 #4 그들은 풍경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며, 때로 접촉하고 변형시키며 그들의 여정의 일부로 만든다. 움직임 혹은 완만한 운동이 사건의 일부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운동 자체로 제시되자 풍경이 움직임을 껴안은 형국, 달리 말해 운동의 초월성이 마침내 풍경의 초월성과 조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는 쇼트들에서 인물들은 풍경과 가까이 있거나, 아니면 풍경이 보이지 않는 앙각 쇼트로 촬영된다. 마차 행렬을 바위산의 언덕에 길을 만들어서 오른 뒤 그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2, 3, 4) 물론 이런 표현들은 모두 포드 서부극들에만 통용될 수 있다. 이야기를 지속시키려는 규범적 구심력과 이야기를 잊거나 폭파시키려는 탈규범적 원심력의 긴장이 포드 서부극의 특별한 활력을 빚어낸다. 모뉴먼트 밸리의 거대하고 황량하며 기괴한 형상은 후자의 원심력과 이야기를 넘어선 층위에서 내통한다. 포드의 인물들이 만취해 주정을 부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때로 이상심리의 광기를 보일 때, 혹은 이야기가 자신의 출발점을 잊은 듯 세부에 몰두할 때, 우리는 포드의 세계에 임한 취한 신의 손을 혹은 무심한 우주적 운명의 그림자를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는 내통할 필요가 없다. 구심력의 규범이 사라지자 원심력은 기꺼이 풍경과 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날뛰는 말(馬)들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의 동작에 극의 많은 긴장이 걸려있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은 없다. < 웨건 마스터 >는 날뛰는 말들의 서부극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고 그것으로써 인간의 서사에 봉사하지만, 휘파람, 총소리, 뿔피리 소리와 같은 모종의 자극에 날뛸 수 있다. 말이 날뜀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말이 날뜀으로써 말의 순응 능력에 의존한 인간의 운동,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말과 황야의 영화인 서부극의 이상일 것이다. <웨건 마스터>가 그런 영화이다. 말이 순응할 때가 아니라 날뛸 때의 아름다움에 관한 영화이다. #5 말들은 언제 날뛰는가. 말 장사꾼이자 능란한 조련사인 샌디의 휘파람에 날뛴다. 해리는 보안관이 헐값에 말을 산 뒤 올라타자, 동료인 트레비스(벤 존슨)과 눈빛을 교환하고 휘파람을 분다. 말은 날뛰고 보안관은 간신히 매달리다 땅바닥에 처박힌다.(#5) 보안관은 살인강도인 클레그 일당을 추적하는 질서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모르몬교도를 추방하려는(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떠돌이 약장사이자 광대패를 이미 추방한) 문명의 악덕의 집행자기이기도 하다. 포드는 여기서 굳이 이 보안관의 캐릭터를 탐구하지도, 혹은 그가 대변하는 문명과 질서의 본질을 사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와 거래한 뒤 골려준다. 말이 날뛴다고 문명과 질서가 무너지진 않는다. 다만 동요할 뿐이다. 문명과 질서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동요로서의 유희, 유희로서의 동요일 뿐이다. 그 동요와 유희의 한가운데 날뛰는 말의 약동이 있다. 샌디는 극의 후반부에 다시 휘파람을 분다. 이때도 당하는 건 보안관 일행이다. 수배 중인 살인강도 클레그 일당은 마차 안에서 총을 겨눈 채 대기하고 있고, 보안관 일행은 마차를 수색하려던 중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될 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에 해리는 휘파람을 불고 말은 다시 날뛴다. 또 한 번 혼쭐이 난 보안관은 다시 핏대를 내며 마차 행렬을 떠난다. 살육의 총격전은 저지되며 말의 날뜀으로 비로소 말과 인간의 운동은 지속된다. #6 날뛰지는 않지만 날뛰기 직전에 이르는 장면들도 있다. 워드 본드는 분노의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는 모르몬교도 행렬의 대장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곧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혈질의 사내다. 이 사내가 흥분할 때마다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동요한다.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한 이 장면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워드 본드의 흥분과 말들의 동요는 감탄스러울 만큼 너무나 적시에 이어져, 마치 계획된 동시화처럼 보인다. 이때 워드 본드와 말은 같은 기질 혹은 같은 운명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워드 본드도 말도 순응과 날뜀 사이를 오가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긴 순례, 오랜 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서사 안에서 종료되지 않는 그 순례는 아마도 그들의 삶 내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의 거친 움직임을 오해해 욕을 쏟아낸 워드 본드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에게 사과하는 장면(#6)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7 #8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은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발견한 샌디의 외침과 총소리에 마차 행렬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장면(#7)이다. 지금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날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마른 동물이 물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탈진해 있던 말들이 모종의 자극으로 호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워드 본드는 우왕좌왕하며 “말을 세워!”라고 외치지만, 말도 사람도 듣지 않는다. 그 맹렬한 속도에 흙바람이 몰아치며 마차에 매달려 있던 가재도구들이 우수수 떨어진다.(#8)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데, 가재도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감흥을 느끼게 할 줄은 < 웨건 마스터 >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말의 질주는 고결하고 무구한 천상의 운동이 아니다. 타는 갈증의 표현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운동이고, 소중한 가재도구를 찌꺼기로 남기는 불완전한 운동이며, 소란과 무질서의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통제되지 않고 통제될 수 없는 움직임이 어떤 악덕도 조성하지 않는 운동, 물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단순하고도 투명한 운동이다. <웨건 마스터>를 순수한 서부극이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말의 순응과 날뜀이 운동의 투명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9 < 웨건 마스터 >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서부극을 잠정적으로나마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서부극은 인간과 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의 영화다. 그 움직임은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운동이다. 비록 그 인물과 장소가 과거에 속한 것이라 해도 과거에 닫혀있지 않으며, 질베르토 페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래에 열려있는 과거”이다. 황야의 순례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강을 건너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