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manii]컴퓨터 조립 동영상 Part 1
- 제작년도
- 2009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조립식 미니어처 완구에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다. 노스롭 그러먼(Northrop Grumma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Raytheon Technologies) 등 완성된 미니어처 외벽의 간판에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 산업체 이름들이 새겨진다. 그 위로 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년의 읊조림이 얹힌다.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 우리가 겪었던 위대한 전쟁들에 대해 배웠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지/ 언젠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1964년 발표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저항적인 포크 송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What Did You Learn At School Today)’는 미니어처 모델의 양식화된 조립 과정과 기이한 대조를 이룬다. 정글의 소리와 멸종된 짐승의 포효가 곁들여진 공룡 뼈의 모형으로 열리는 영화 < 소년 >(2025)은 제임스 베닝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의뭉스러운 도입 직후 작가 특유의 엄격한 패턴을 제시한다. 베닝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적인 세계 이미지가 아니다. 베닝은 풍경을 포기하고, 텅 빈 블랙박스를 배경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라디오를 듣는 소년의 관점을 취한다. 시간을 횡단하는 이 가상의 소년은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무언가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구조는 명확하다. 플롯은 8개의 분절로 구성되는데, 각 파트는 미니어쳐 모형을 조립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 샤이렐스(Shirelles),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냇 킹 콜(Nat King Cole) 등의 노래, 그 뒤를 이어 완성된 모형을 배경으로 하여 1961년부터 2016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을 형성한 정치적 연설을 병치한다. 이미지는 순수한 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운드는 군산 복합 비즈니스를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연대기를 재생한다. 냉전의 종식과 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흑인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이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즈(César Chávez),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을 인정하는 보수의 상징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기후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환경운동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 미군의 지속적인 이라크 주둔을 옹호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핵무장 종식을 촉구하는 반핵운동가 헬렌 칼디콧(Helen Caldicott)의 연설과 군산복합체의 성채는 아이러니하게 충돌한다. 시대의 아젠다를 초점으로 한 연설의 선집은 인종 분리와 시민권, 이주 노동자 착취, 중동 위기, 복지와 환경 문제, 전후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망라하면서 권력과 자본 또는 둘 다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노래가 연설에 응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니면 모두가 풍자와 야유의 찬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임스 베닝의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집단 기억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지만 이번에는 사뭇 노골적인 어조와 직설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정의해 온 사색적 무드를 탈피한 생동감이다. 언제나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유머를 가미한 표현 요소들, 예컨대 붓질을 하는 손동작, 리드미컬한 음악, 그리고 풍부한 질감의 연설 대사 때문에 활력이 넘친다. 이미지, 소리,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호한 통일감을 전달한다. 한편으로 지난 10년간 베닝의 작업들처럼, 구조나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난다. <소년>의 경우, 설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에 대해 상상한 뒤, 곧바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에 색칠을 하는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일까? 저들은 평소에도 모형을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장면을 위해 고용된 배우들인가? 정치 연설과 ‘손’의 소재(所在), 정체성은 관련이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게임을 통해 하나의 모델-패턴을 제시하고 노래와 연설이라는 발화 형식의 의도적인 병치를 창조하여 ‘청취’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엄격한 구성, 역사와 기억을 유희하는 개념적 구조로 관객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권력과 파시즘의 은유이자 현재에 재건되고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베닝은 <소년>을 “수십 년 동안의 일기를 읽으며 만든, 친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하지만 영화는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며, 꼰대의 한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정도 초월한다. 베닝이 제시하는 8개의 스토리는 군국주의의 포괄적인 역사를 회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엿보기와 수사적 장식을 제공하는데, 이와 같은 병치의 전략은 계보학의 차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닝은 과거의 렌즈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6천5백만 년 전 공룡을 사라지게 하는 대절멸의 도래, 뼈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다음에 소멸할 종(種)은 인류가 될 것, 이라고 경고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그들의 위협받는 미래에 대한 근심을 담은 이 영화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초래할 것들에 대한 전망도 보여준다. 투쟁과 몰락, 재건에 익숙해진 것처럼 계속해서 모형을 칠하고 조립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파괴적이다. 마지막에 베닝은 군산 복합 비즈니스의 최종 장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의 모형은 소문자 영어 제목(<little boy>)에 담긴 ‘소년’의 순수성을 폭파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소년의 사색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진보와 그 대가, 역사의 폐쇄적 순환 궤도에 대해 성찰하는 <소년>은 인류의 서사가 주요 사건뿐 아니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결정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청각 요소들의 조합은 일관된 패턴을 따르고 베닝의 전작들에 비해 해석의 어려움이 덜 하지만, 이 영화의 시청각 은유는 개별 요소들의 총합을 능가한다. 상징적인 연설과 정적인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베닝은 시적인 환기와 정치적 명제 사이를 왕래한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시민권 연설이나 헬렌 칼디콧의 핵에 대한 경고처럼, 언어의 힘이 이미지를 이기는 순간들은 깊은 영감을 준다. (상) <엘.코헨>(2018), <알렌스워스>(2022) (사진: " L. COHEN ", " ALLENSWORTH ", VIENNALE) (하) <미국>(2022), <브레스리스>(2023) (사진: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BREATHLESS ", RÉEL Archives) 제임스 베닝이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던 ‘풍경’에 관한 에세이로 영화를 읽을 수도 있다. <소년>에는 두 가지 경관 양식이 작동한다. 먼저 파랑, 노랑, 갈색 등의 채색으로 지속하여 변동하는 경관이다. 두 번째는 완성된 미니어처 모형을 길게 비추는 타블로 쇼트가 자아내는 인상으로 여기서 연설은 일종의 음성 해설처럼 기능한다. 환경음과 음악의 지배를 받는 베닝의 영화들(< 엘.코헨 >, <알렌스워스>, <미국>, < 브레스리스 >)처럼 <소년>은 역사적 풍경에 대한 인내심 있는 응시가 된다. <미국>(2022)은 <소년>과 매우 유사한 도식을 구현한 영화이다. 같은 길이의 정지 이미지 50장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이미지 앞에는 검은 무지의 배경에 미국의 50주를 나타내는 캡션이 붙는다. <미국>은 베닝의 다큐멘터리 실천이 세상을 향한 창, 즉 화면 속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경험을 창조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소년>은 <미국>의 전략을 확장한다. 정지 카메라로 촬영한 롱 쇼트, 역동적인 요소들이 섞인 정적인 피사체를 포착하는 베닝의 스타일 서명은 <소년>에서 개별 쇼트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서 단조로운 요소들의 기하학적 배치로 대체된다. 대중음악과 정치 연설이 어우러진 미국의 작은 풍경들을 기록하는 단조로운 타블로를 통해 베닝은 미국 역사의 토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풍경화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미니어처로 관람하는 <소년>의 시청 경험은 시간의 지속과 인내를 요구한다. 베닝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이 개념적 퍼즐을 조립하도록 내버려두고, 조립을 위한 부품들만을 제공한다. 그가 모델을 구축했듯이 관객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 인종 정치, 노동운동, 핵전쟁, 기후 위기에 대한 사전 지식과 선입견, 그리고 음악적 취향에 따라 <소년>은 베닝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잘 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어떤 춤을 추면서 너와 나는 둥글어질까, 여름의 장례식, 우리는 오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우리는 오렌지의 영혼을 팔에 안으며 혼자서 둥글어졌다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주1 - 허수경, 「오렌지」 이렇게 한번 주장해보고 싶어진다. 영화는 군중의 걸음걸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믿어보고 싶다. 영화는 단지 걷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매혹할 수 있다고. 요약해보자면 < 미망 >(김태양, 2023)은 헤어짐과 장례의 시간으로부터 빠져나온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나란히 걷는 것을 기록한 영화이다. 이들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정육면체를 쌓아 올리는, 붕괴와 재건의 행위가 끊임없이 갱신되는 서울의 복잡한 풍경 사이를 가로지른다. <미망>을 독해하는 첫 번째 방법(이자 대부분의 감상)은, 영화가 결국 인물들의 관계를 매듭짓지 않음으로써 생성되는 ‘서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분절된 3편의 이야기와, 각 이야기의 틈에 단단하게 박혀있는 ‘단절’과 ‘공백’이라는 영화적・실제적 시간 *주2 이 이 영화의 고유한 시적 리듬감과 정감을 형성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 넘실대는 서정을 곱씹어보는 동시에, 엔딩 시퀀스에서 화면 밖으로 서둘러 사라지며 종적을 감춘 남자( 하성국 )의 행방을 계속해서 쫓아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김태양 감독에 따르면, 그의 차기작 <서울 이야기>에는 <미망>의 두 주인공 하성국, 이명하 배우가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인용한 시구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이 어김없이 실행되는 곳, 이야기의 지속을 굳게 믿으면서 인물들이 담담하게 작별하고 외화면으로 탈주하는 곳, 이곳은 김태양 감독의 프레임이자 그가 ‘멋진 도시’ *주3 로 명명한 서울의 영화적 설계도이다. 그렇다면 <미망>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감독이 서울을 매핑하는 방식을 가늠해 보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은 무엇이며 어디일까. 오류로부터 산출된 서울이라는 픽션 “잘못 내렸어요.”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을지로3가역을 비추는 영화의 첫 숏 안으로 사람들이 마치 쏟아지듯 들어온다. 남자는 아마도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과의 통화에서 자신이 잘못 내렸음을 알린다. 공사 현장과 초록색 잎사귀가 무성하게 달린 나무 앞을 지나며, 남자는 ‘여기가 이렇게 연결되네요’라고 말한다. 그의 발걸음은 어떤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다음 숏에서 남자는 과거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자(이명하)와 맞닥뜨린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대화하면서 영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실수로 내리지 말아야 할 곳에 내린 남자는 생경한 장소로 잘못 배송됨으로써 우연성이 내재된 세계로 뛰어든 오배(誤配)의 존재이다. 예정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야만 시작되는 이야기. <미망>은 남자의 잘못 내린 행위, 다시 말해 오류로 산출된 행위들로 조합된 서울의 픽션이다. 물론, 우연성에 기대어 영화를 읽는 것은 유별난 발견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술했던 마지막 시퀀스를 다시 떠올려보자.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창밖으로 뿌옇게 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광화문 광장으로 보이는 곳을 버스가 지나치자 황급히 하차벨을 누르고 프레임의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프레임의 왼쪽으로부터 걸어 들어오며 출현했던 오프닝 숏을 환기하는 이 남자의 몸짓은 여자와 헤어진 후 또다시 잘못 내리기를 결심한 것 같은, 즉 불확실성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배역의 이름과 플래시백이 부재하는 이 영화에서, 불릴 이름과 기억이 없는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신체로 오류를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다. 적어도 <미망>에서 남자가 잘못 내린다는 것, 그리고 어딘지 모르겠는 미로 같은 서울의 한복판을 걷는다는 것은 끝을 맺지 못했던 관계의 대상과 다시 조우하는 행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망>은 안타까움의 서정과 서울이라는 복잡한 노선도를 해체하며 재회를 향하는 반복적인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공존하는 영화이다. <미망> 중 남자와 여자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남자의 발걸음이 길 잃은 사람의 것이라면, 여자의 발걸음은 죽음을 겪고 다시 생의 공간으로 걸어 나온 사람의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고백하는 여자는, 그 후 연락처를 바꿨음을 말하며 남자에게 ‘나 변한 것 없어?’라고 물어본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그녀는 ‘서울극장’이라는 장소의 죽음을 선언하며,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함께 알던 예전 사람의 넋을 기리는 장례식에서 남자와 재회한 후, 광화문 일대를 다시 걷는다. 여자에게 죽음은 지난 관계를 매듭지으면서 새로운 관계로 연결되는 선험적인 사건이며, 그런 그녀가 걷는 걸음이란 장례의 시간으로부터 나와 생의 공간으로 복귀하여, 살아있는 사람과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빚어낸다. 여자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옛 친구에게 ‘난 죽을까봐 운전 못 하겠어’라고 말한다. 운전하지 않는 그녀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감각하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미망>이 그려내고 있는 서울의 거리란 길 잃은 사람과 삶으로 복귀한, (이미지적으로) 환생한 사람이 멈추지 않고 각자의 궤도에 따라 걸으면서 서로의 간격을 좁혀보고자 하는 몸짓들이 조우하는 잠재적인 시공간이다. 영화는 촘촘하게 조립된 서울의 노선도를 해체하고, 출발시간과 도착시간, 환승 방법들이 지겹도록 나열된 정합적인 도시인 서울을 탈영토화시킨다. 세 번째 이야기 중간 즈음, 택시 안에서 이뤄지는 세 사람의 대화 사이에 초월적 시선으로 서울의 저녁 풍경을 담은 익스트림 롱숏이 등장한다. 이 숏은 다시 한 번 나를 부추긴다. 미세혈관처럼 배치된 긴 도로와 그 위를 채우고 있는 차량들,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사람들. 어쩌면 이들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길 잃은 사람들일 뿐이며, 누구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는 우연과 잠재성으로 가득 찬 도시, 서울의 이름 없는 시민들은 아닐까. 그러니까 서울은 순수한 강렬함을 가진 미세한 입자들이 끊임없이 탈주하는 선들로 구성된 기관 없는 신체 *주4 인 것은 아닐까. 이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걷던 길 위로, 배우와 카메라 사이를 개의치 않고 침입하여 활보하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영화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한다. 아니,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걷고 있다고 해야겠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유기체처럼 조직된 노선도를 벗어나 구태여 길을 잃고, 살아있음을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감각하는 곳. 김태양 감독의 장편 데뷔작 <미망>은 기관 없는 신체, 서울의 픽션을 발명한다. 20세기의 결말 없는 영화와 이름 없는 이들의 발걸음을 호명하면서 두 번째 이야기.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간 어둠 속 스크린에선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의 < 미망인 >(1955)이 상영되고 있다. 여자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극장 문을 열고 나서면 1955년과 같은 거리를 걷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가 하면, 여자를 따라나선 남자( 박봉준 )는 피맛골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서울의 뒷골목에 무수히 쌓여온,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상기시킨다. <미망>은 결말이 유실된 20세기의 영화와, 서울의 길거리를 채웠던 사람들의 무한한 발걸음을 호명하면서, 서울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픽션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걸었던 자리를 다시 걸어보는 신체의 반복적 행위가 역사를 환기할 수 있을까? 마지막 이야기에서 여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대낮의 빗방울이, 남자에게는 여자와 헤어진 후 홀로 골목길을 걷던 밤이 되어서야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던 골목길로 돌아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헤어진 존재의 행위를 복각해보면서 지금은 내 옆에 없는 상대방의 마음을 그림자처럼 어렴풋하게나마 추적하는 것. 이것은 <미망>이 서정의 회로를 만드는 방식이자, 신체의 재연을 통해 발현되는 픽션의 역량을 믿어보고 싶게 만든다. <미망> 중 골목의 여자, 그를 따라나선 또 다른 남자 올해 2월 21일부터 3월 1일까지 진행되었던 ⟪ 각각의 영화사 ⟫는 한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맺는 연속적인 관계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된 기획전이다. <미망>은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과 더불어 강대진 감독의 < 마부 >(1961), 이용민 감독의 < 서울의 휴일 >(1956)과 한데 묶였다. 나는 이 영화들을 하나의 이미지 집적체로 상정하기 위해, <미망>이 사용한 방식, 즉 행위의 반복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을 마치 하나의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둥근 나선의 형상으로 모아보는 것.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은 영화가 이미 성취한 바 있다. 그 중,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작품 중 < 엉클 분미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2010)의 한 시퀀스를 언급하고 싶다.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식사 장면이 그것이다. 분미와 젠, 통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고 있을 때 19년 전 죽었던 분미의 아내 후아이의 유령이 나타난다. 늙지 않은 모습 그대로. 이어서, 13년 전 가출했던 아들 분쏭은 원숭이 유령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이 시퀀스에서 산자와 망자, 인간과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는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재현 불가능성을 초월함으로써 영화의 한계를 극복한 <엉클 분미>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존재들과 그들이 머무는 불가능한 시공간을 태국의 숲으로 한 데 불러 모아 하나의 숏 안에 현시한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안부를 묻는다. <엉클 분미> 중 (사진: " Loong Boonmee raleuk chat ", IMDb) <미망>과 함께 상영된 세 한국 고전을 한 데 묶는 가장 명료한 방법은 사람들과 자동차, 대중교통과 마차가 복잡하게 교차되는 서울의 광장이라는 시공간과 그곳을 누비고 있는 인물들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사건’ 후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세 고전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형상을 포착한다. 그리고 <미망인>, <마부>, <서울의 휴일> 모두 죽음과 죽음이 촉발하는 인물, 그리고 서사의 변화를 그린다는 점에서 <미망>의 여자와 겹쳐지며 네 영화는 성글게 연결된다. <미망인>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욕망을 대담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마부>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예컨대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e)을 떠올리게 하면서, 한국전쟁 후 한 가족이 겪는 질곡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부>에서 첫째 딸, 옥례( 조미령 )가 죽은 후 수원댁( 황정순 )이 이 가족의 비어있던 어머니 역할을 메우면서 네오리얼리즘에서도 두드러졌던 연대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의 휴일>은 살인 사건에 휘말린 신문기자 송재관( 노능걸 )의 행적을 좇는 동시에 남편의 부재로 계획과 다른 휴일을 보내게 된 의사 남희원( 양미희 )의 하루를 채우는 여러 해프닝을 나열한다. 그녀는 우연히 한 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는데, 그녀는 살인자의 아내라는 점에서 죽음이 생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세 고전과 <미망> 모두, 여성이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간다는 점에서도 유사점을 갖는다 할 수 있겠다. (상) <미망인> 중 클로즈업되는 이신자의 발걸음 / (하) <마부>, <서울의 휴일> 중 길 위의 인물들 <미망>의 인물들이 걷던 서울의 길. ⟪각각의 영화사⟫는 이 거리의 형상을 재편한다. 주위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삶을 이어나가려 했던 이신자( 이민자 )의 굳건한 발걸음, 춘삼의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망설임 없이 내어주며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던 수원댁의 온정어린 발걸음, 초조한 마음으로 시험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눈길을 헤쳐 나가던 수업( 신영균 )의 무거운 발걸음. 그리고 유혹에 굴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남희원의 발걸음. ⟪각각의 영화사⟫에서 추출해볼 수 있는 서울이란, <미망>의 인물들이 증언하였듯 사람들의 무수한 발걸음으로 구성된 도시이자 역사이며, 과거와 현재, 서정과 삶의 의지가 역동적으로 진동하는 픽션이다. 비평이라는 퇴행하는 몸짓에 대하여 얼마 전 ⟪씨네21⟫ 편집부로부터 올해 영화평론상 공고문에 들어갈 전년도 수상자의 소감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물론 당선 시점을 생각하면 아직 1년에 한참 모자라지만(그렇게 믿고 싶다), ‘전년도’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지 1.6매의 짧은 분량 안에서, 비평을 ‘퇴행하는 몸짓’이라 말했다. 더 겸허한 자세를 취하겠다는 다짐을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비평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건 내 탓이 아니라는 새침한 변명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는 왜 ‘비평에 대한 생각’은 끄트머리에 짧게 등장하고, ‘비평’만 가득한 것인지 불만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등단 이후 쓴 글 중 가장 요란한 고통의 몸부림을 치게 한 이 글의 개요를 구상할 때부터 이러한 구조를 생각했다. 마지막에 등장하기. 이건 피날레를 장식하겠다는 야망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는 ‘몫 없는 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라는 텍스트가 선행되어야 할 테고, 그 이후에 텍스트를 중심으로 생성되는 얕은 사유들이 뒤따른다. 이상적으로는 담론을 형성할 것이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읽히지 않은 채 ‘요즘에 누가 비평을 읽어?’라는 뼈아픈 비판을 견고히 하는 예시로 사용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평을 가까이하려는 누군가가 ‘혹시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나요?’라고 빈곤한 A4용지 너머로 물어봐준다면, 그제야 쑥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사실은 말이에요’라며 나타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용량을 초과한 이 글의 대부분은 <미망>에 대한 비평일 수밖에 없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미망>을 다시, 그리고 치열하게 보게끔 해준 ⟪각각의 영화사⟫에 대한 단평인 것이다. 이 글을 읽다 지쳐 중간에 떠난 사람들은 마지막 문단을 보지 못할 테지만, 선행하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이라면, 전년도 수상자가 말하는 비평에 대한 이 고백을 읽고 있을 것이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영화는 흔한 장소인 공공 공간이다.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토론과 행동의 공간이다. 그것은 하나의 생태계다.” *주5 라고 말한 바 있다. 비평의 영역을 만들어주는 것 같은 이 말은 조금은 희망적이다. 한편, 연극에 대한 두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의 논쟁을 다룬 책 『무대』(2020)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혔다. 두 개의 대화가 처음으로 함께 출판되었다. 두 대화는 서로 긴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지만, 그 목표는 언제나 두 대화 상대자 사이에서 새롭게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토론은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주6 - 장-뤽 낭시 이 책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과는 별개로, 둘의 대화를 단절시킨 것이 죽음이었단 사실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죽음 외엔 이 사유를 멈출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점에서 작은 안도감을 느낀다. 한편에는 비평의 무용함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영화의 죽음을 예견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 어정쩡하게 서 있다. 언제까지 두 목소리 사이를 오가며 비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죽음을 말하기엔 아직 못 본 영화들과,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들이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한 영화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적어도 비평을 쓰는 동안만은 지구상에서 그 영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만 한다는 허황된 다짐을 하곤 한다. <미망>을 여러 차례 보면서도, 그런 절박함에 휩싸인 순간들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싶다.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 주1. 허수경, 「오렌지」의 후반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 지성사, 2016, pp. 42~43. 주2. <미망>은 두 단편 < 달팽이 >(2020)와 < 서울극장 >(2022), 그리고 중편 <소우>(2022)를 한데 모아 배치한 장편이며, 여기에는 4년이라는 시간이 축적되어있다. 영화는 코로나로 인한 단절의 시간을 겪으면서 완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공백과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체화한 배우들의 변화는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지속을 증명한다. 주3. 지난 3월 1일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김태양 감독은 차기작의 제목을 <서울 이야기>로 정한 배경에 대해, < 동경 이야기 >(오즈 야스지로, 1953), < 타이페이 스토리 >(에드워드 양, 1985), < 뉴욕 스토리 >(우디 알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1989)는 있지만 <서울 이야기>는 아직 없다며, 이 ‘멋진 도시’를 영화 제목으로 선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4.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 CsO)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가 함께 집필한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개념은 잔혹극의 창시자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주5. George Baker and Pierre Huyghe, An Interview with Pierre Huyghe , The MIT Press, 2004, p. 96. 주6.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 조만수 옮김, 『무대』, 문학과 지성사, 2020. 문주화(영화평론가) l 2024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통해 등단했다. 아직은 비평이라는 퇴행하는 몸짓이 가진 역량을 믿고 있다. 세상이 지겨울 때 영화관을 가고, 좋은 영화를 만나면 세상이 다시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