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
- 감독
- 조민재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곽진무, 변중희, 김현, 신문성, 윤성원, 최용현, 남미정, 정규진, 김정훈, 전일성, 이두의, 서민수, 임대용, 서순용, 주광현
좋은 사람 곁에 많은 이들이 모이듯, 좋은 영화는 고요히 있어도 눈길을 끈다. 어느 장소에 카메라가 들어서 있는지 잊지 않으며 마주한 대상과 거칠 것 없이 한 호흡으로 숨을 쉰다. 아무렇지 않게 무언가를 하는 영화처럼 보기 드문 영화는 없다. 오래도록 창신동에서 옷을 만들어온 이들의 몸에 밴 시간을 응시하는 이나연 , 조민재 의 단편영화 < 실 >(2020)은, 보는 이의 감각을 깨워 그들의 시간과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영화다. 두 감독은 영화에 극적인 장치 하나, 격렬한 대목 하나 심어두지 않고도, 창신동 골목 한 편에서 노동하며 살아온 이들의 역사를 슬며시 깨워낸다. 옷을 만드는 명선(김명선)의 작업실에는 많은 이들이 방문한다. 옷 제작을 의뢰하러 온 디자이너며, 함께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지기, 손수 만든 빵을 들고 찾아온 막내딸과 오래된 동료들이, 품이 넓은 그녀 곁에 머물다 간다. 명선는 꾸밈이 없고 동그란 몸처럼 부드러운 성정을 지닌 듯하다. 그녀는 맛깔나는 농담도 곧잘 던지는데, 일감이 줄자 제봉 일을 접고 대구로 가 새로운 일을 하려는 현(김현)에게는 재치를 뽐내는 말들을 한껏 쏟아낸다. 흥이 많은 현도 명선의 말을 잘 받아친다. 오고 가는 농담 안에서 그들은 헛헛한 마음을 나눈다. 옷을 만드는 일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병행하는 명선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상실감에 젖어드는 게 아니라 삶의 일부로 여기며 마지막까지 그들의 지속되는 시간을 비춘다. 명선의 작업실에 방문하는 마지막 손님은 명선만큼이나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희(변중희)다.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가던 중희는 명선의 작업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서는 자연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명선은 중희에게 자신이 만든 블라우스를 보여주고 그 옷을 보며 중희는 “옷이 너 닮았다”라고 나긋이 말한다. 이 말은 이상하리만치 감동적이다. 오래도록 이 골목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의 통찰력일까. 예쁘고도 품이 넓어 편안해 보이는 새하얀 블라우스는 정말 명선과 닮았다. 그리고 <실>은 명선이 만든 옷과 명선과도 닮은 것 같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영화는 처음부터 창신동 골목에서 오랜 노동을 해온 이들의 몸과 공간에 새겨진 역사를, 그들이 시간을 지낸 방식으로 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에서부터, 날렵한 손길로 옷감을 착착 재단해 내고, 매끈하게 재봉해내는 명선의 손을 본다. 그 손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세월이 스쳐가는 듯하다. 그녀의 숙련된 기술은 젊은 적부터 재봉공장에서 무수한 밤을 지새우며 셀 수 없이 많은 옷들을 만들었기에 습득된 것일 테다. 조민재 감독은 “몸에 담긴 역사는 결코 따라 할 수가 없”어 실제 오랫동안 옷을 만들어 온 자신의 어머니를 출연시켰다고 얘기했는데, 어느 누구라도 그 말을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손길 하나가 지난한 시간을 말해준다. 또한 명선과 어울리는 그녀와 닮고도 다른 개별 인물들의 얼굴들과, 그들이 서로 어울리는 품새에 이 골목의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도 같다. 거기에 골목 여기저기 엉켜 있는 전깃줄과 명선이 낮잠을 잘 동안에 더 크게 들려오는 다른 작업실의 재봉틀 소리가 어우러지면, 이나연, 조민재가 절실히 이해하고 어루만지려 한 이 공간의 시간과 리듬이 이 영화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두 감독은, 그리고 <실>은 창신동의 골목을 이루는 많은 존재들에게 무척 깊은 마음을 둔 것 같다. 그대로 보고 존중하고 닮아가고 싶어 하는 건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사랑은 아주 어렵다. 세세한 제스처와 표정을 기민하게 읽기도 하고, 다 알지 못해도 온 힘을 다해 상대의 살아온 세월을 가늠해 보려 애쓰게 된다. 이 영화의 골목길 장면들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구도가 아름다워서나,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몸짓이 생생해 보여서만이 아니다. 그 구도에서만이 공간을 이루는 사람과 사물들과 그곳에 흐르는 공기와 그들이 어울려 만드는 리듬을 조금 더 느껴 볼 수 있으리라고 이 영화가 믿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존재들의 몸짓과 표정들을 통과해 비로소 이곳의 역사와 소박하게 만난다. 명선이 블라우스 옷감을 재단할 때, 새하얀 천위로 비치는 옛 재봉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해사한 모습과 그들의 투쟁 현장에서, 그리고 명선이 현재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골목의 한 편에서 그들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명선이 이 골목을 떠난 후에도, 이곳의 한 편에는 명선과 흐엉(당티 흐엉)처럼 어두운 밤에 작업실을 떠나고 이른 새벽에 작업실 불을 밝히는 노동자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세 대의 카메라가 마주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골목 한쪽 벽에 자신이 만든 옷을 걸어놓고 사진을 찍는 명선의 핸드폰 카메라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인 관광객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며, 마지막은 <실>의 카메라다. 세 대의 카메라는 언뜻 닮은 듯하지만 대상을 대하는 태도도, 카메라 앞에 놓인 존재와 함께 한 시간도 다르다. 노동운동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에서 온 이방인은 창신동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읽으며 개별 존재들을 세부 요소들로 묶어낸다. 그는 명선의 손과 그 육체에 배인 시간과 유머감각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실>의 카메라는 명선과 그녀가 살아온 장소를 느껴보러 온 힘을 다하지만 명선이 자신이 만든 옷을 찍을 때의 마음을 다는 모를 것이다. 다만 느껴보려 한다. 그 하나하나의 마음이 영화의 숏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그 마음들이 현현하는 <실>은 놀랍고 아름다운 영화며, 무엇보다 ‘영화’인 영화다.
이미지는 오래 간다. “감독은 데뷔작의 인물에 자신을 담을 수밖에 없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일 테고, 실제로 며칠 전 한 자리에서 올해 데뷔한 감독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영화에서 인물 하나에 자신을 툭 던져놓는 정도일 것이다. 대개는 그렇다. 자기 이야기를 한답시고 조용한 인물과 소소한 가족의 이야기로 일관하는 영화에 돈을 댈 대중영화 제작자는 거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 작은 빛 >(2018)은 조민재 가 제작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작년 말 첫 번째 ’관객과의 대화‘에서 조민재 감독이 했던 말을 희미하게 기억할 즈음, 나는 1년이 지나 그와 다시 한 번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작은 빛>이 그의 자전적 이야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냥 그의 삶이 조금 반영된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할 즈음 그의 말을 듣게 됐다. 꼭 자전적 영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평범한 인물의 평범한 삶의 풍경을 그린 독립영화를 근래 많이 보았다. 은은한 내음이 나쁘지 않지만, 자칫 향이 아예 안 나다시피 하는 심심한 영화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보통 잠을 자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놓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영화가 잠을 자게 만든다. 좋은 일은 아니다. <작은 빛>은 그렇지 않다, 고 자신할 수는 없다. 시작부터 홀라당 빠져 끝까지 눈을 깜빡이며 보았을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관객은 의미를 찾다 슬며시 다른 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평범한 영화란 어떤 것일까? 위에 써놓은 글을 반복하자면, 보통 사람의 일상을 굴곡 없이 담아놓은 작품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이 못 된다. 간단하게 말해 장르성이 너무 없어 재미가 없는 영화라고 해도 되겠다. 감독을 포함해 채 열 명이 안 되는 스태프로 찍은 <작은 빛>은 분명히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평범한 것과, 평범한 것을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평범한 것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작은 빛>의 도입부에서 나는 인물의 어머니가 지내는 허름한 방을 보았다. 내 눈에 제일 박힌 건 빗물이 배 얼룩진 벽지다. 아들이 오고 딸이 찾아오지만 아무도 그 벽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흉해서 도배하자고 말할 법도 한데 그런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로 불안해 보인 건 벽에 허술하게 박힌 전기 코드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은 벽지보다는 나은 게, 어느 날 아들이 전기 코드에 손을 댄다. 그것도 전등에 고장이 나서야. 공장에서 성의껏 일하던 그는 의외로 섬세하게 코드를 정리하지 않는다. 대충했다고 보는 게 맞다. 대충이라도 어쨌든 정돈된 덕분에 천정의 등은 제 기능을 하고 그들은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내 마음속 긴장은 그렇게 해소된다. 엉뚱한 사건을 만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끼워 넣는 일은 <작은 빛>에 절대 없다. 위와 같은 일들이 그들을 설명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그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감독이 그런 의도를 지녔는지,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내게는 그랬다. 아들 진무가 엄마의 집을 찾았다. 휴가라고 둘러댔지만 거짓말이다. 그는 다니던 공장을 곧 그만둘 예정이다. 19분경, 의사가 진무의 수술을 언급한다. 잘못하면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말도 더했다. 그가 엄마, 형, 누나, 그리고 백부의 집과 아버지의 묘를 차례로 방문하는 걸 보노라면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억을 이유로 그는 캠코더를 들어 가족을 찍기 시작한다. ‘1. 잠든 어머니가 돌아누웠다, 2. 어머니와 조카 호선이 손바닥을 맞대며 논다. 3. 공장의 시계는 멈춰 있고 기계가 돌아간다. 4. 호선이 마당에 앉은 할머니, 삼촌, 엄마를 찍는다. 5. 형 정도가 문 앞에서 춤을 춘다. 6. 호선이 방에 앉은 할머니, 삼촌, 엄마를 찍는다. 7. 누나를 인터뷰한다. 8. 아들이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연결된 숏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인터뷰한다. 9. 어머니가 터미널에서 아들을 배웅한다. 10. 어머니가 병실에 누운 아들을 찍다 이어 남편이 남긴 사진을 담는다.’ 조민재는 10개의 캠코더 신 바로 다음에 영화의 카메라로 캠코더 바깥의 인물을 찍어 붙여두었다. 1-1은 어머니를 향해 캠코더를 든 진무, 2-1은 잠자는 할머니와 호선, 3-1은 기계를 향해 캠코더를 든 진무, 4-1은 캠코더에 찍힌 가족을 보는 정도, 5-1은 동생이 떠난 후 정도가 보내는 시간, 6-1은 캠코더에 찍힌 가족을 보는 누나 현, 7-1은 동생이 떠난 후 현이 보내는 시간, 8-1은 방에서 잘 준비를 하는 어머니와 진무, 9-1은 아들을 배웅한 후 집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 10-1은 이듬해 여름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 ● 정확하게 말하면 1번에 앞서 캠코더 신이 하나 더 있다. 진무가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찍은 바깥 풍경일 텐데, 조민재는 그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추상적 이미지로 만들어 오프닝 크레디트로 삼았다. 이미지의 본질이란 측면에서 캠코더 신이나 카메라 신이나 다를 건 없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에, 캠코더로 찍은 장면을 삽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두 개의 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화질이 좋고 나쁜 것 외에 차이라곤 없다. 그래서 조민재는 캠코더 신과 카메라 신 사이에 어떤 블랙 이미지도 넣지 않고 점프하듯이 넘어와 버린다. 이것을, 필름의 유령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이미지를 이어붙이는 방식이라고 불러도 될까. 어쨌든 조민재가 캠코더 신과 카메라 신으로 짝을 짓는 방식은 그러하다. 영화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서, 조민재는 그것을 그들의 삶의 흐름이라 부른다. 사건을 보겠다는데 삶의 흐름으로 박자를 만든다. 그 삶 또한 보통의 영화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유와 거리가 멀다. 1번에서 10번에 이르는 캠코더 신은 그야말로 진무라는 인물이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아픈 남자가 어쩌면 잃어버릴지 모르는 기억을 담는 행위, 조민재는 설령 당신이 그것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영화에 담아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1-1에서 10-1에 이르는 카메라 신이 바로 그의 다짐이다. 인물이 바라본 것을 그는 자기 카메라로 다시 확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알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엔 쑥스러웠던 사연들,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와 조용히 되돌아보는 순간들‘ 조민재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영화를 찍는 행위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진무의 캠코더와 조민재의 카메라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영화 바깥에서 부여된 어떤 것의 도움을 받는데, 조민재는 그것을 일컬어 ’작은 빛‘이라 불렀다.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빛은 몇몇 장면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첫 번째 순간은 8분 40초쯤, 현이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는 날 오전이다. 어머니의 집은 서너 층짜리 건물들에 둘러싸인 탓에 빛이 스며들기가 힘들다. 오전의 짧은 순간에 빛은 골목 사이로 어머니의 집을 방문한다. 물론 집 전체는 아니고 오른편 지붕 정도에 불과하다. 오른쪽 한켠 지붕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따뜻한 빛. 두 번째 순간은 가족이 외출하는 때다. 부감 쇼트로 첫 번째 순간을 포착했던 것과 반대로, 두 번째 순간은 마당의 위치에서 빛을 향한 방향으로 담겼다. 11월 초겨울의 빛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빛은 이제 집에서 거의 사라지려 하고, 카메라는 조금이라도 그 빛을 붙잡으려 한다. 세 번째 순간은 아들이 돌아가는 날 아침이다. 빛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창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다. 빛은 더듬거리는 듯이 창을 어루만지는데 떠나는 아들과 아들을 마중하는 어머니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네 번째 순간은 회사를 그만둔 진무가 자기 방에 누웠을 때다. 그의 방에서도 빛은 박하다. 빛은 머리 부분에만 살짝 비추는 대신 강렬하다. 눈이 부신 진무는 인상을 쓴다. 그에게 빛은 낯설다. 낯선 남자의 아이를 밴 어머니는 아들을 둔 남자를 만나 결혼을 서둘렀다. 그리고 현에 이어 진무를 낳았다. 아내와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남편은 젊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6살인 아들을 보며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고 알려준다. 어머니나 세 오누이나 다 유복한 편은 못 된다. 힘겹게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는 형편은 어머니부터 진무까지 다 똑같다. 빛은 때때로 그들 위에서 비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느낄 틈이 없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짧은 순간만 비추기에 빛은 남의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기억에 아버지는 원수 같은 존재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에게 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수술 전, 진무는 창고에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찾았다. 작동하는지 확인하려 셔터를 누르자, 플래시의 빛이 창고 밖으로 흘러나온다. 반짝, 반짝, 카메라는 세 번 빛을 발했다. 이 장면은 좀 특이한 곳에 배치되었는데, 조민재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시퀀스 가운데 그것을 끼워놓았다. 빛이 외부에서 내려앉았던 것과 다르게, 이 장면에서는 작은 빛이 문틈 사이를 통해 바깥으로 발산한다. 바깥의 빛과 내부의 빛은 그렇게 서로 조응한다. 아버지의 유산인 카메라 속 묵은 필름엔 그가 기록한 옛 가족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진무의 캠코더에 담긴 이미지를 보고 웃었던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보고 신기해한다. 그도 가족을 사랑했을까. 다섯 번째 순간은 이듬해 여름 즈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에 일어난다. 힘들게 아버지의 시신을 추린 뒤 어머니와 세 오누이와 손자는 산을 내려온다. 그들이 스쳐 가는 나지막한 숲 위로 빛이 내린다. 탁 트인 덕분인지 빛의 크기는 더 이상 작지 않고 한낮이 끝나 가는데도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빛은 가족 위로 쏟아져 내린다. 가족이 오른쪽에서 등장해 스크린 왼쪽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빛은 변함없이 찬란하다. 빛은 그렇게 순환하는 삶을 축복한다.
< 작은 빛 >(2018)은 독학으로 영화를 익힌 조민재 감독이 각본, 연출, 편집을 도맡아 만든 첫 작품이다. 소박하고 겸손한 제목처럼 영화는 가녀린 빛을 향해 더디지만 진중한 행로를 따라간다. 주인공 진무는 뇌수술로 인해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을 캠코더에 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엄마의 고향집이다. 주변 건물에 둘러싸인 데다 서향인 탓에 좀처럼 빛이 들지 않는 허름한 음지의 집이다. 영화는 고향집을 거점으로 진무가 다른 가족 구성원인 누나와 형을 찾아다니는 과정을 따라간다. 여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 가족들에게는 미움과 원망의 대상인 아버지의 무덤에 나무뿌리가 박혀있어 이장을 해야 하는 과정이 얹혀 있다. 진무의 수술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여서 과거의 상처를 헤집고 화해하는 서사로 흐를 것 같지만, 의외로 영화 속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장면이 없음에 주목하자. 어머니는 홀로 식당일을 하며 고향에서 살아가고, 누나는 이혼한 채 아들을 홀로 키우는 워킹 맘이며, 배다른 형은 자동차수리소에서 일하며 그 자신의 어머니와 산다. 하나의 단란한 가족으로 묶이기 어려운 이들의 사정은 정도의 고향집 벽에 걸린 가족의 사진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벽에는 가족들이 모여 찍은 사진인 소위 ‘가족사진’이 없다. 대신 크기와 스타일이 제각각인 사진들이 걸려있는데 감독은 얼룩진 벽의 이미지만으로 가족의 과거 내력을 자연스럽게 추측케 한다. 다른 벽에 있는 낡은 전기 전깃줄에는 온통 테이프가 붙어있는데 가까스로 허물어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처지를 즉물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영화가 주는 정서는 일반적인 가족드라마와는 다르게 어딘가 이질적이다. 스토리 전개로 이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실 <작은 빛>은 자연스러운 시간 순서로 진행되는 영화도 아니며 끝내 전후 관계가 불분명한 장면들도 존재한다. 가령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저해하는 장면이 중간에 불쑥 틈입하는데, 이는 흔히 영화에서 과거 회상을 보여주는 플래시백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앞서 말했듯 <작은 빛>은 진무가 자신의 캠코더로 가족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 전체를 보여주는 감독의 카메라 외에 진무의 캠코더로 찍힌 조악한 화질의 장면도 때로 보게 된다. 그런 탓에 이러한 당혹스러운 장면들이 있다. 진무가 햇빛이 들어와 잠자리에서 일어나 밥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다. 서사적으로는 자연스럽지만 진무가 잠에서 깨는 곳은 그가 홀로 사는 옥탑방이고, 밥을 먹는 곳은 고향집으로 이 장면은 어머니가 캠코더를 들고 찍은 장면이다. 한편 형의 집에서 자려고 잠자리에 든 다음 장면에 고향집에 누나와 엄마 등 가족이 모인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다음날이 아니라 형에게 캠코더에 담긴 가족의 근황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이어 같은 날 밤 잠자리에서 일어나 캠코더를 보는 형제의 모습이 비친다. 다음으로 누나의 집에서 고장 난 가구를 고쳐주는 장면 다음에 고향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밥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캠코더 장면은 다들 쓸쓸히 살아가는 가족들이 캠코더를 통해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무, 엄마, 누나, 형, 조카는 영화 속 단 한 번도 한 장소에 모이는 법이 없지만 진무의 캠코더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다른 지면에서 <작은 빛>이 카메라를 통해 기억의 잠상을 드러내는 ‘현상’의 영화이자, 본래의 요소로 돌아가기 위한 ‘환원’의 영화라고 언급했다. 진무가 캠코더로 가족을 찍는 것은 오랫동안 묵혀왔던 그들의 삶의 기억들을 드러내는 현상의 과정이고, 아버지의 무덤을 열어 20년 넘게 썩지 않은 아버지의 시체를 썰어 이장하는 과정은 본질을 되돌아보는 환원의 과정이라는 취지였다. 당시 미처 부연하지 못했던 바가 있는데, 이는 카메라와 빛의 점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의 화면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등장한다. 하나는 진무가 든 캠코더로 이를 통해 진무는 자신과 가족을 찍고, 때로는 가족이 진무를 찍는다. 영화의 중간에 다른 하나의 카메라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짐에서 발견한 필름 카메라다. 그리고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카메라, 즉 감독의 카메라가 있다. 이 카메라는 캠코더로 자신을 찍는 진무를 찍는다. 또는 이 카메라는 진무가 돌아간 다음 쓸쓸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과 누나의 모습을 찍는다. 영화는 카메라들을 통해 진무의 병을 계기로 이들이 다시 모이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엔 관심이 없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두운 밤바다에 저 멀리 등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가녀린 안도를 주기만, 여전히 강퍅한 삶을 감당하며 고독을 감내해야 할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한편 카메라는 가족의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단속적이며 돌발적인 흐름이 있는데 관련해서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고향집 형광등이 낡아서 고친 후에 시험 삼아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장면이다. 껐다 켜는 스위치의 소리가 연속되는 동안 암전에 이어 멀리 떨어진 형과 누나의 가족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치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흰 바람벽에 그가 ‘귀애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이 명멸하는 것처럼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는 마지막 가족들의 사진이 걸린 벽을 배경으로 한 정도와 엄마의 장면에서 멈춘다. 둘째는 아버지의 카메라와 함께 과거 사진이 삽입된 장면이다. 사진이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이어 장면은 사진과 카메라를 발견했던 과거 고향집의 부감 숏으로 이어지며 어두운 밤에 정도가 카메라의 플래시를 연속해서 터뜨리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명멸하는 빛의 이미지 속에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암전이며, 암전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양태를 만들어낸 ‘부재하는 기원’인 아버지와도 통한다. 하지만 나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추념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혹은 반대로 그를 무시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미이라가 된 아버지의 시체를 톱으로 조각내 새로운 장소에 이장하는 행위, 즉 공손하면서도 불경한 관여를 통해 다시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 깔린 의도라고 보았다. 명멸하는 가녀린 빛 속에서 이미지들을 부여잡는 태도 속에서, 굳건하지만 부드럽고 과묵하면서도 소박한 근성이랄까 기품 같은 것을 보게 된다. 비록 첫 작품이기는 하지만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조급하지 않고, 영화 속 체험에 깊이 잠입해 그 정서적 경험에 우리를 조응시켜가는 뚝심에서 그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