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 감독
- 배해성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전무송, 박철민, 박탐희, 국정환, 이병철, 박영록, 전정희, 육세진, 조영화, 이상훈, 봉두개, 송비묵, 신양균, 김용호, 안승범, 임정수, 이준영, 조문국, 곽주언, 김하람, 임혜진, 신도형, 전희선, 장윤석, 장유림, 나현욱, 김희조, 한솔, 신진슬, 이민희
※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 ) 언제나 많은 이해자들에게 둘러싸여 일찍이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신지는 불우한 작가였다. 신작이 발표될 때마다 적지 않은 리뷰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리된 작가론이라면 지금도 결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동서고금의 영화, 음악, 문학에 정통했던 예민한 비평가였기 때문에 아오야마 신지를 논하는 것은 비평가에게는 그 대상에 필적할 만큼의 지성과 감성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도전이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소설가나 연극 연출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단순한 취미로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다재다능함이 아오야마가 하는 일의 전모를 한층 보이기 어렵게 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아오야마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 끝내 아오야마론을 쓰지 않은 태만한 영화비평가 중 한 명이었으며, 너무나도 이른 그의 죽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 만다 구니토시, 시오타 아키히코와 같은 현대 일본영화의 이름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릿쿄대학 출신이었지만 세대적으로 가장 아래 세대였던 아오야마는 일찍부터 학생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던 ‘릿쿄 누벨바그’ 선배들과는 조금 다른 경로를 거쳐 영화계에 진입하게 된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0년대의 일본영화 산업은 크게 침체되었고, 신인 감독이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는 길은 이미 완전히 막혀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 같은 반전통적인 작가가 영화계 밖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혼란을 틈탄 것이었다. 이처럼 혼미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해 성행한 것이 OV(오리지널 비디오)라고 불리는, 처음부터 렌탈 비디오용으로 양산된 저예산 영화였으며, 또 시장 확대를 위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필요로 하기 시작한 BS(위성방송)였다. 그리고 아오야마는 실로 OV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감독을 경험한 후,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료 BS 방송국 WOWOW에서 < 헬프리스 >(1996)를 찍으며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이런 형태로 시작된 아오야마의 행보는 영화의 정의가 점점 모호해져가는 와중에 영화란 무엇인가를 매번 되묻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헬프리스>는 현장에 결집한 인재들의 면모에서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후의 아오야마의 작품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 일단 당시 WOWOW 소속이었던 프로듀서 센토 다케노리가 있다. <헬프리스>는 센토가 시작한 프로젝트 'J·MOVIE·WARS'의 하나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매년 비교적 저예산인 영화 4, 5편을 한데 모아 제작, WOWOW에서 프리미어 방영 후 극장 개봉하는 프로젝트로 해를 거듭할수록 신인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데뷔의 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여러 편의 묶음 제작은 손익의 상쇄에도 용이했기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 이를 대체하는 시스템의 구축을 의식했다는 점에 센토의 비범함이 있었다. 또 하나 센토가 일본영화 프로듀서로서 선구적이었던 것은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시야에 넣고 있었던 점이었다. 가와세 나오미의 < 수자쿠 >(1997)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그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 아오야마가 센토가 프로듀싱한 < 유레카 >(2000)로 칸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에큐메닉상을 수상하는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센토의 전략에 힘입은 바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센토와 함께 결정적이었던 것은 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와의 만남이다. 다무라는 <산리즈카> 시리즈로 알려진 급진적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집단 오가와 프로덕션 출신으로, 극영화에 진출하고 난 후에도 파격적인 롱테이크로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준 소마이 신지의 < 숀벤 라이더 >(1983) 등에서 특이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특징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높은 감응력과, 살아있는 공간을 포착하는 카메라 시선의 철저한 비인칭성을 들 수 있다. <헬프리스>의 시작 부분에서 기타큐슈의 거리 풍경을 위에서 포착하고 이윽고 위태로운 진자운동을 시작하는 공중 촬영이라고 하는, 그 어떤 자의 시점으로도 결코 환원될 수 없는 마이클 스노우의 구조영화마저 연상시키는 카메라워크를 보면 그것은 명백해진다. 아오야마와 다무라는 이후에도 < 새드 배케이션 >(2007)까지 오랫동안 콤비를 이루게 되지만, 그 관계가 일관성 있게 서로 익숙한 채로 의존하는 종류의 것과는 거리가 먼, 더없이 긴장 가득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유레카>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웅대한 환경 속에 인물을 던져놓은 다음 시간을 두고 그 생태를 쫓는다는 방향성을 정한 뒤, <달의 사막>(2001)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스탠다드 사이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공간을 한정하고, <호숫가 살인사건>(2005)에서는 멀티카메라 시스템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다무라를 굳이 세컨드로 돌린 것이다. 다무라와의 결별 후에 찍은 < 도쿄공원 >(2011)과 마지막 감독작 < 구름 위에 살다 >(2020)에서 나타나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로의 현저한 관심의 이동은, 결코 스타일적인 후퇴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단한 자기 혁신 끝에 처음으로 획득한 것, 더할 수 없는 복잡함을 경험해봤던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단순함의 경지였다. 아오야마는 다니엘 슈미트가 일본에서 찍은 걸작 <쓰여진 얼굴>(1995)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가까이서 관찰한 슈미트와 촬영감독 르나토 베르타와의 관계성으로부터 다무라와의 공동작업으로 연결되는 무언가를 배웠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서, <유레카> 이후 거의 모든 아오야마 작품에서 녹음을 담당하고 있는 기쿠치 노부유키 또한 다무라와 마찬가지로 오가와 프로 출신이다.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살 충동 바이러스를 음악으로 치유하는 SF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005)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아오야마 작품에서의 음향은 종종 시각적인 영상과 길항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건 소리의 공간성을 중시하는 기쿠치의 공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헬프리스>는 내용 측면에서도 아오야마에게 있어 결정적이었다. 이 작품은 나중에 만든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과 함께 ‘기타큐슈 사가’를 구성하게 된다. 개개의 작품 테두리를 넘어 공통적인 캐릭터가 오고 가면서 전체로서 큰 강과 같은 거대한 서사의 너울을 형성하는 사가라는 형식은 근대소설사에 있어서는 포크너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오야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나카가미 겐지이다(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주인공의 이름인 겐지는 그에게서 유래한다). 고대로 이어지는 신화적인 땅 기슈에서 살아온 나카가미는 스스로가 피차별 부락 출신이라는 사실에 마주하여, 그 장소를 ‘골목(路地, Roji)’이라고 이름 붙이고 활황일 때부터 소멸 후까지를 사가로 그렸다. 아오야마에게 있어서 나카가미의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는 <로지예: 나카가미 겐지가 남긴 필름>(2000)을 보면 분명히 나타나지만, 아오야마는 나카가미의 기슈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기타큐슈로 단순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 로지예 >에서 역시 기슈 태생의 영화작가 이즈치 기슈가 나카가미의 텍스트를 낭독할 때 과장된 기슈 사투리가 특징적이었던 것처럼, 기타큐슈 사투리의 거의 음악적일 정도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이 아오야마에게는 중요했다.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규슈 이외의 사람이라면 전부를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은, 조야함과 순정을 겸비한 듯한 기타큐슈 사투리의 독특한 가락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본어’라는 통합된 개념을 불확실한 것으로 바꾸어 간다. 그리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에도 인접한 기타큐슈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말이 폴리포닉하게 교차하는 다의성을 가진 공간으로서 재정의되게 되었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에서 가장 깊이 탐구된 이 성격이야말로, 나카가미가 ‘골목’이라는 허구에 진정으로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오야마는 또한 나카가미로부터 물려받은 짙은 정치성, 특히 천황제나 국가라고 하는 대문자 정치에 대한 강한 관심에 있어서는 동시대 작가들보다 오시마 나기사 같은 작가와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미 늙어버린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하여 >(2001)에는 그러한 아오야마의 정치성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표출돼 있다. 애초에 <헬프리스>에서도 남자들을 괴롭히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상황이 쇼와 천황의 죽음과 겹쳐져 있었다. 죽여야 할 아버지가 이미 없어졌다는 사실이 남자들을 기댈 곳 없는(helpless) 고아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처럼 아오야마의 정치적 측면에서의 독창성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 있었다(전전의 국가이데올로기에서 일본 국민은 천황의 적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후 아오야마의 관심이 아버지 죽이기에서 여성적인 것의 탐구, 모성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의 속박으로 옮겨갔다는 점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무리 아이가 발버둥질해도 모든 것을 미소와 함께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사랑임에 틀림 없다. 온갖 저항이 모성으로 인해 무력화되는 개미지옥 같은 나라, 일본――절망적으로 여겨지는 한편, 그 끝없는 포용력에 희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서게 되는 그 지점에서 ‘기타큐슈 사가’는 닫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오야마의 미국문화에 대한 경도도 그 자신을 흐르는 피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여성>(1966)의 고다르는 당시 파리 젊은이들을 ‘마르크스와 코카콜라의 아이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오야마는 자신에게 흐르는 피의 절반이 코카콜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평생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영화와 음악, 문학 속에서 자라나면서 현실 국가로서의 미국에게는 환멸할 수밖에 없었던 빔 벤더스를 ‘그를 논하는 것은 나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동지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1) 아오야마가 보기에 전후 일본에게 있어서 미국은 아무리 그곳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발버둥질해도 본질적인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전술한 천황제와 같은 형식의 문제였다. 그런고로, 패전 직후 도쿄를 무대로 젊은 자매가 자신들이 사는 집을 미군 상대의 위안소로 하여 살아가는 <퇴폐자매>의 영화화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애석하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원작을 아라이 하루히코 등이 각색한 그 각본에는 “일본은 미국에 점령당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미국인의 몸을 점령해 주겠어”라는 대사가 포함돼 있었다. 2) 지금 와서 새삼 생각하는 것은, ‘기타큐슈 사가’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남긴 모든 일들이 열린 채로 있는 거대한 사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 남은 우리는 끝내 완결되지 않고 중단되어 버린 그것들을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이 얼마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피에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 사가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필자 - 후지이 진시: 일본의 영화평론가이며, 현재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문: 현대 할리우드 영화 강의』(2008),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2011), 『모리사키 아즈마 당 선언!』(2013) 등에 편저자로 관여했으며 『이와나미영화의 1억개의 프레임』(2012), 『에드워드 양 재고/재견』(2017),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2017),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2022)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1) 아오야마 신지, 『나의 영화를 발견했다』(われ映画を発見せり), 세이도샤, 2001, 142쪽. 2) <퇴폐자매>의 시나리오는 《영화예술》 480호(2022년)에 실려있다(96-121쪽). (원문) 青山真治、未完のサーガ 藤井仁子 常に多くの理解者に囲まれ、早くから国内外で高い評価を獲得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青山真治は不遇の作家だった。新作が発表されるたびに少なくないレビューが書かれはしたが、まとまった作家論となると決定的なものは今も存在しない。彼自身が古今東西の映画、音楽、文学に精通した鋭敏な批評家であったために、青山真治を論じることは、批評家にとっては対象と匹敵するだけの知性と感性を求められる厄介な挑戦だったのである。青山はまた小説家、舞台の演出家としても成功をおさめ、音楽家としての活動もたんなる趣味として片づけられるようなものではなかった。そうした多才さが、青山の仕事の全貌をいっそう見えづらくした面もあろう。かくいう私も、青山といつでも連絡がとれる距離にいながらとうとう青山論を書かなかった怠惰な映画批評家の一人であり、あまりにも早すぎる彼の死を前に、忸怩たる思いを拭い去ることができない。 青山は黒沢清、万田邦敏、塩田明彦といった現代日本映画の名だたる作家たちと同じ立教大学の出身だったが、世代的にいちばん下だった青山は、早くから学生映画の世界で評判をとっていた「立教ヌーヴェル・ヴァーグ」の先輩たちとはいささか異なる経路をたどって映画界に参入することになる。バブル経済の崩壊後にあたる1990年代の日本映画は産業としては大いに低迷し、新人監督がメジャー・スタジオで仕事を得る道はもはや完全に閉ざされていた。北野武のような反伝統的な作家が映画界の外から突然出現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そうした混乱に乗じてのことにすぎない。この混迷の時代に新しく登場して盛んになったのが、OV(オリジナル・ビデオ)と呼ばれる初めからレンタル・ビデオ用に量産された低予算映画であり、また、市場拡大のためにオリジナル・コンテンツを必要としはじめていたBS(衛星放送)であった。そして青山は、まさにOVの世界で初めて監督を経験した後、開局間もない有料BS放送局WOWOWで『Helpless』(1996)を撮り、本格的なデビューを飾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かたちで開始された青山の歩みは、映画の定義がますますあいまいになっていくなかで、映画とは何かをそのつど問いなおすものにならざるをえなかった。 『Helpless』は、現場に結集した人材の点でも内容の点でも、その後の青山作品を規定する決定的な第一歩であった。まず、当時はWOWOWに所属していたプロデューサーの仙頭武則。『Helpless』は仙頭が立ちあげたプロジェクト、「J・MOVIE・WARS」の一本として製作されたが、これは毎年、比較的低予算の映画を4、5本まとめて製作し、WOWOWでのプレミア放映後に劇場公開するというもので、年を追うごとに新人監督に積極的にデビューの場を提供す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数本を束ねての製作は損益の相殺を容易にするもので、スタジオ・システムなき時代にそれに代わるシステムを構築しようと意識していた点に仙頭の非凡さがあった。もう一つ、仙頭が日本映画の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先駆的だったのは、早くから海外進出を視野に入れていたことだ。河瀬直美の『萌の朱雀』(1997)がカンヌ国際映画祭で受賞したのはそのもっとも目立った成果だった。青山が仙頭のプロデュースした『EUREKA』(2000)でカンヌの国際批評家連盟賞とエキュメニック賞を受賞するなど、フランスを中心に世界的な名声を得ていくことになるのは、この仙頭の戦略によるところが大きかったといえる。 青山にとって仙頭と並んで決定的だったのは、撮影の田村正毅(のちに改名してたむらまさき)との出逢いである。田村は『三里塚』シリーズで知られる先鋭的な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製作集団、小川プロダクションの出身で、劇映画に進出してからも、型破りな長回しで世間の度肝を抜いた相米慎二の『ションベン・ライダー』(1983)などで特異な個性を発揮していた。その特徴としては、キャメラの前で生起しつつある出来事に対する異常なまでの感応力の高さと、生きた空間を捉えるキャメラの視線の徹底的な非人称性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Helpless』の冒頭で北九州の街並みを真上から捉え、やがて危うい振り子運動を始める空撮の、何者の視点にも決して還元することのできないマイケル・スノウの構造映画さえ思わせるキャメラワークを見れば、そのことはあきらかだろう。青山と田村はその後も『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2007)まで長くコンビを組むことになるが、その関係が一貫して馴れあいからはほど遠い、きわめて緊張に富むものだった点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シネマスコープの『EUREKA』で人間を圧倒する雄大な環境のなかに人物を放ち、その生態を時間をかけて追うという方向性を極めた後、『月の砂漠』(2001)ではすでに滅びかけていたスタンダード・サイズに空間を意図的に限定し、『レイクサイド マーダーケース』(2005)ではマルチキャメラを採用したばかりか、たむらをあえてセカンドに回したのである。たむらとの訣別後に撮られた『東京公園』(2011)と最後の監督作『空に住む』(2020)に顕著な俳優たちの演技アンサンブルへの関心の移動は、断じてスタイル的な後退などではなく、こうした絶えざる自己革新の末に初めて獲得されたもの、複雑さを極めた者だけが到達することのできる単純さの境地であった。青山はダニエル・シュミットが日本で撮った傑作『書かれた顔』(The Written Face、1995)で助監督をつとめた経験を持つが、このとき間近で観察したシュミットと撮影監督レナート・ベルタとの関係性から、たむらとの共同作業に通ずる何かを学びとったように思えてならない。ちなみに、『EUREKA』以降のほぼすべての青山作品で録音を担当している菊池信之は、たむらと同様、小川プロの出身である。人を自殺させるウイルスの蔓延を音楽によって癒すSF『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2005)にあきらかなように、青山作品にとって音響はしばしば視覚的な映像と拮抗するほど重要なものだったが、それも音の空間性を重視する菊池の貢献あってのことだっただろう。 先述したように、『Helpless』は内容の点でも青山にとっては決定的だった。この作品は、のちに撮られる『EUREKA』、『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とともに「北九州サーガ」を構成することになる。個々の作品の枠を超えて共通するキャラクターが行きかい、全体として大河のような巨大な物語のうねりをかたちづくるサーガの形式は、近代小説史にあってはフォークナーによるものが広く知られているが、青山への直接の影響源となったのは、そのフォークナーの影響を受けた中上健次である(浅野忠信演じる主人公の役名、健次は彼に由来する)。古代につながる神話的な土地、紀州に生を享けた中上は、自らが被差別部落の出身である事実と向きあい、その場所を「路地」と名づけて活況から消滅後までをサーガとして描きつづけた。青山にとって中上の影響がいかに絶大であったかは『路地へ 中上健次が残したフィルム』(2000)を見ればあきらかだろうが、青山は中上にとっての紀州をただたんに自分の生まれ故郷である北九州に置き換えたわけではない。『路地へ』でやはり紀州生まれの映画作家、井土紀州が中上のテクストを朗読する際の誇張された紀州訛りが特徴的であったように、北九州弁のほとんど音楽的な魅力を再発見することにつながった点が青山にとっては重要だった。九州以外の者には日本人観客でもそのすべてを聴きと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ものの、北九州弁の粗野と純情を兼ね備えたような独特な調子は、聴くほどに「日本語」という統合された概念を不確かなものへと変えていく。こうして、海を挟んで朝鮮半島にも面する北九州の土地は、多様な人と言葉がポリフォニックに交差する、多義性の空間として再定義されることとなった。そして、『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もっとも深く探究されたこの性格こそは、中上が「路地」という虚構に真に期待していたものでもあったのである。 青山はまた中上譲りの深い政治性、ことに天皇制や国家といった大文字の政治への強い関心において、同時代の作家よりも大島渚のような作家とはるかに近い場所にいた。『すでに老いた彼女のすべてについては語らぬために』(2001)には、そうした青山の政治性がもっとも直接的なかたちで表出されている。そもそも『Helpless』では、男たちをさいなむ父の不在という状況が昭和天皇の死と重ねられていた。殺すべき父はもはやい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事実が、男たちを寄る辺のない(helpless)孤児へと変貌させ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青山の政治面での独創性は、天皇制や国家権力というものを、自らの肉体を否定しようもなく流れる血の問題として考えた点にあった(戦前の国家イデオロギーにおいて日本国民は天皇の赤子と位置づけられていた)。その後の青山の関心が、父殺しから女性的なものの探究、母性による骨がらみの呪縛へと移っていったことは、この文脈において捉える必要がある。『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で真に恐ろしいのは、どれほど子があがいてもいっさいを微笑みとともに受けとめてしまう母の「愛」にほかならない。あらゆる抵抗が母性によってすべて骨抜きにされてしまう蟻地獄のような国、日本――絶望的に思える一方で、その底なしの包容力に希望を探りあてるしかないという認識に立ったところで「北九州サーガ」は閉じられるのだ。 このように考えることで、青山によるアメリカ文化への傾倒ぶりも、彼自身を流れる血の問題であったとわかるだろう。『男性・女性』(Masculin, féminin、1966)のゴダールは、当時のパリの若者たちを「マルクスとコカ・コーラの子供たち」と呼んだが、その伝に倣えば、青山は自分に流れる血の半分がコカ・コーラでできているという事実から生涯眼をそむけることがなかった。だからこそ、自分と同じようにアメリカの映画と音楽と文学で育ちながら、現実の国としてのアメリカには幻滅するしかなかったヴィム・ヴェンダースのことを、「その人を論じることが自分について語ることに等しい」ほど重要な同志と感じていたのである 。青山の見るところ、戦後日本にとってのアメリカは、どれほどそこから独立しようともがいても本質的な従属関係からは脱け出せないという意味で、先述した天皇制と同型の問題であった。それゆえに、敗戦直後の東京を舞台に若い姉妹が自宅を米兵相手の慰安所にして生きぬく『退廃姉妹』の映画化が実現しなかったことが惜しまれてならないのだ。島田雅彦の原作を荒井晴彦らが脚色したその脚本には、「日本はアメリカに占領されたけど、これからはあたしたちがアメリカ人の体を占領してやるのよ」という台詞が含まれていた 。 今、あらためて思うのは、「北九州サーガ」のみならず、青山の遺したすべての仕事が開かれた巨大なサーガをな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がついに完結することなく中断されてしまったことを、後に残されたわれわれは糧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そこで扱われている事柄がいくらかでも自分自身の血に流れていると感じる者なら誰一人、このサーガの登場人物である事実から逃れることはできないのだ。
“영화는 비-영화적인 메시지를 위해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빌헬름 하인과 비르기트 하인(이하 W+B 하인)이 첫 영화 < S & W >(1967)를 만든 이후 약 10여 년간 이어간 영화 제작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있다면 재생산(reproductions)일 것이다. 전후 서유럽의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에 대한 살아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XSCREEN: Materialien über den Underground-Film』(1971)의 77쪽을 보면, ‘재생산에 내재한 미학 Reproduktionismmanente Ästhetik’이라는 제목아래 쓴 짧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재생산 과정만으로도, 이미 필름의 미적 특질은 결정된다. 영화라는 공간은 서로 다른 재생산 과정 안에서 원본(vorlage)이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곳이다. 이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원본(사진)은 16mm 카메라로, 8mm 카메라로, 비디오카메라로, 그리고 스틸 카메라(슬라이드)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재생된다.” W+B 하인은 필름의 재생산의 결과로 나타나는 지각 효과를 전경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영화에서 재생산 저 혼자서 발생시키는 미학적 경험을 선명히 하려 한 것이다. 재생산의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관심사가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 작업이 바로 < 생필름 Rohfilm >(1968)이라고 할 수 있다. 《Film as Film》(1977) 도록에는 비르기트 하인이 구조영화(Structural Film)에 대해 소개하고 그 역사를 서술한 글이 있는데, 그가 구조영화의 특징 중 처음으로 손꼽은 것이 ‘필름 스트립’이다. 여기에는 구조영화가 필름 스트립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이 안내되어 있다. 첫 번째는 시각적인 ‘과정’이다. 필름의 연속이 내러티브 영화에서 내러티브 시퀀스를 만든다면, 구조영화에서는 시각적인 리듬으로 기능하는 데 이용된다. 두 번째는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필름의 화학적 현상 과정이고, 세 번째는 필름 스트립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풀로 무언가를 붙이거나, 흠을 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촬영되지 않은 투명한 필름은 스크린에 흰빛만을 영사할 뿐인데, 이것 또한 ‘영화’로 인정한다. < 생필름 >을 보면 우리는 비르기트 하인이 언급한 이러한 특징을 모두 확인해볼 수 있다. < 생필름 >은 말 그대로 눈앞에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빌헬름 하인의 얼굴이나 네거티브로 드러나는 남성의 형상, 쾰른 대성당을 롱 샷으로 찍은 장면 등 이미지의 파편들이 일정한 내러티브나 목표를 가지지 못하고 스크린에서 부유하듯 흐른다. 중간중간 남녀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장면이나 누군가가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정도만이 형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촬영된 이미지일 뿐이다. 스프로켓 홀과 필름의 경계가 화면에 드러나고, 스크래치, 일그러진 얼룩이 추상적인 조형이 되어 점멸한다. 두 종류의 필름 스트립이 한 화면에서 동시에 나타남으로써 검은 선으로 나뉜 분할화면의 효과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시각적 자극이 뒤죽박죽된 영화는 20여 분 동안 지속된다. W+B 하인은 <생필름>을 위한 필름 스트립을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 먼지, 담뱃재, 잘게 조각난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필름이미지, 종이 파편, 이어 붙인 천공 테이프 등을 비어있는 필름에 붙이고 여기저기 흠집을 냈다. 풀로 오브제를 붙여 두꺼워진 필름 때문에 회전이 때때로 멈추게 되면서 같은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매우 느린 속도로 재생되면 프로젝터의 열이 필름을 녹이고, 이미지의 형상을 변화시킨다. 이 필름은 무비올라에 올라가 다시 8mm 혹은 16mm로 촬영되고, 재촬영 본은 임의로 선택된 필름 조각이 붙여진 뒤 재촬영된다. < 생필름 >을 통해 W+B 하인이 주요하게 내세웠던 태도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필름이라는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재생산의 전반적인 과정이다. 그들이 최초로 만든 필름 스트립은 또 다른 재생산 과정을 위해 소요될 뿐이며, 물신화되지 않고 폐기된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매우 강렬한 파괴의 인상을 주는 영상 이미지이다. 여기서 ‘파괴’적인 인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생필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꽤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다른 작업을 떠올려 보자. 스탠 브래키지의 < Moonlight >(1963)는 나방의 날개나 잡초, 꽃 등을 투명한 필름 위에 붙인 것으로, 다소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운율을 전달한다. 오웬 랜드(조지 랜도우)의 < Film in Which There Appear Edge Lettering, Sprocket Holes, Dirt Particles, Etc. >(1965-66)는 여성의 상반신 초상이 담긴 필름을 중앙에서 빗겨나게 두어 스프로켓 홀과 필름에 적힌 숫자뿐만 아니라 먼지 따위가 모두 화면에 나오도록 했는데, 여기서는 영사된 이미지가 어떤 감정을 환기시킨다기 보다는 필름의 자기-지시적인 측면이 도드라질 뿐이다. 반면 W+B 하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영화의 한정적인 생산 양식 안에서 기존의 이미지를 다시 생산하는 행위 자체만으로 어떤 이미지의 효과, 미학적 상태가 발생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운드의 기능 또한 중요하게 등장한다. 사운드는 W+B 하인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W+B 하인의 초기 작업에서 대부분의 사운드를 담당했던 것은 비르기트의 형제였던 크리스티안 미카엘리스(Christian Michelis)였다. W+B 하인이 이미지에, 미카엘리스가 사운드에 집중하여 비재현적이고 형식적인 영화 만들기에 헌신하면서, 그들은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의 부조화, 그리고 비동시적인 관계를 성취하고자 했다. 사운드에 관한 미카엘리스의 생각을 살펴보자. “사운드는 영화의 분위기나 특정한 형식적 측면을 강조 혹은 무시하며 일종의 해석을 제공한다. 음향의 영역에서는 영화의 형식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재료들의 조직과 유사하다. 이론적 개념들의 유사성보다 중요한 것은, 필름과 사운드의 효과로서 즉각적으로 지각되는 감각의 상호작용이다.” W+B 하인과 미카엘리스는 (그들이 뉴 아메리카 시네마의 작품들에서 확인한 순진한(naive)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익숙한 사운드를 거부했고, 관객이 편안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의 지속 안에서 부유하며 감정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음향은 스크린에서 아주 잠깐 동안만 식별 가능한 이미지의 발생과 같은 감각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 생필름 >은 1968년 11월 뮌헨에서 열린 “유럽 독립영화 감독들의 모임 European Meeting of Independent Filmmakers”에서 처음 상영되어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빠른 속도로 주목을 받게 된다. 바로 뒤이어 뉴욕, 런던, 도쿄, 그리고 프랑스 감독 조합에 의해 설립된 비경쟁 프로그램인 감독주간(L Quinzaine des Realisateurs)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도 선보이게 된다. 그런데 비르기트가 이탈리아 영화감독 알프레도 레오나르디에게 쓴 편지를 보면 칸에서 <생필름>을 본 관객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나온다. “우리가 풀 사운드로 <생필름>을 보여주자, 관객들은 소리를 질렀고 마지막 십분 동안에는 상영을 중지하라는 박수를 쳤다. 그건 정말로 테러였다.” 이는 대부분 미카엘리스의 타협하지 않는 사운드 때문이었는데, 제5회 국제만하임영화제의 경쟁부문에서 상영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고 소리를 질렀는데, 한 신문의 지면에서는 이에 대해 “영화의 노이즈가 주는 메시지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동료들이나 아방가르드 영화감독들에게는 이 영화가 그들의 실천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것임을 적절하게 인지했다. 그들은 W+B 하인의 초기 영화들이 뉴 아메리카 시네마의 작업들과는 변별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데이비드 커티스는 그의 저서 『Experimental Cinema: a Fifty Year Evolu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름이라는 물질에 대한 확신과 프로젝터 안의 물질이 지닌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으며, 내가 본 모든 미국 영화보다 강력하다.” 스티븐 드워스킨이 <생필름>에 대해 “시각적 폭탄”이라 표현한 것도 그렇게 과장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필름의 재생산이 낳은 “시각적 폭탄”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사에 그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W+B 하인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시화하기 위한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비르기트 하인이 1975년 『스튜디오 인터내셔널 Studio International』 11/12월호에 쓴 글은 영화의 영역에서 그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리고 영화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Film as Film』 도록 마지막 부분에 개별 작가의 필모그래피와 함께 발췌되어 실렸다. “우리의 영화는 미학적인 창조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시작점은 어디인가? 예술과 과학의 경계는 어디인가? 재생산의 기술적 과정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미학적 변형의 기본 단계로 여겨지는가? 이미 재생산된 현실의 해석을 촬영할 때, 가장 단순한 카메라의 조작은 어느 정도인가? 조작된 추상과 실제적인 물질 이미지의 대결에서, 또 다른 문제는 명백해진다. 이는 예술을 다룰 때면 언제나 발생하는 문제인데, 실제 오브제와 그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도록의 볼 때의 괴리를 상상해보라. 바로 이것이 육체적으로는 경험할 수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시각적 형식의 ‘표현’이다. 이것이 하워드 아이헨바움이 영화의 ‘포토제닉, 자움(the zaum) -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성을 넘어선, 이성 앞에 뉘어있는 언어’이다. 구조에 대한 연구는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첫 시도이다. 작품의 ‘무의식적’ 요소를 의식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한지 살피면서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사회와 사회의 역사적 과정의 바깥에 예술과 예술가를 놓아두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즉 무의식의 창조적인 힘이라거나 천재와 같은 낭만을 넘어서고 싶다면 이 질문은 중요하다. 영화는 종종 ‘손가락 운동’ 이라거나 예술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곤 했다. 이러한 반응은 느슨하고 열려 있는 영화의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고전적인 예술 작품의 닫힌 형식이나 유일성의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개념 중 일부이다. 영화의 구조는 변화와 연속에 열려 있다. ‘예술 작품’은 닫혀 있으면 안 되며 반드시 그 스스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업의 과정을 열어 두는 것이 필요하며, 영화를 교훈적인 것에 가깝게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회고적으로 보면 < 생필름 >은 W+B 하인이 뒤이어 제작한 개별 영화에서 추구했던 미학적 전략이 응집된 핵심적인 작품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제목에서조차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작업 <재생산 Reproductions>(1968)은 W+B 하인이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에서 휴가를 즐기며 찍었던 흑백 슬라이드 한 종류만을 이용해 만든 영상이다. 카메라는 풍경이나 건물이 찍힌 정지한 이미지를 훑기도 하고, 초점을 또렷이 맞췄다가 흩뜨리기도 한다. W+B 하인의 초기 작업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비르기트가 말하듯 “개인적인 이미지를 형식적인 맥락에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625>(1969)는 순수한 추상처럼 보인다. ‘625’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것은 PAL(Phase Alternation by Line) TV의 프레임당 주사선의 숫자이다. 볼렉스 16mm 카메라로 TV의 화면을 찍게 되면, 아날로그 비디오와 필름 카메라의 서로 다른 초당 프레임 숫자 때문에 두꺼운 검은색 띠가 생겨나는데, 1969년 빌헬름이 쿠르트 크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1초당 8~32프레임으로 촬영 속도를 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가 <625>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카메라의 재촬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띠의 두께와 속도, 움직임 등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그 운동에서 발생하는 리듬을 느낄 수 있다. <머테리얼필름 Materialfilme>(1976) 시리즈에 이르러서는 필름의 재생산 과정보다는 이미 주어진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로 탐구의 방향을 선회한다. 이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필름 만들기를 중단하고 1978년부터 독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클럽이나 바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재생산 과정을 거친 이미지의 지각적 효과와 그 미학을 탐구한 W+B 하인의 초기 활동은 30여 개가 넘는 실험적인 작업을 뒤로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빌헬름 하인 Birgit Hein과 비르기트 하인 Wilhelm Hein (W+B 하인) 덧붙여 보자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기간 동안 W+B 하인이 영화의 영역에서 수행했던 것은 작품 제작뿐만이 아니다. 1966년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그 이듬해인 1967년은 그들이 영화에 관한 기획까지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한 해였다. 그중 하나가 67년 10월 로마에서 < Bliss >(1967)를 상영하던 자리에서 그레고리 마르코폴로스를 만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W+B 하인은 마르코폴로스를 쾰른으로 초대하여 상영회를 마련한다. 12월 11일 마르코폴로스의 < Eros, o Basileus >가 쾰른대학에서 상영되었는데 무려 1천 명의 관객이 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W+B 하인이 벨기에 크노케(Knokke)에서 열린 제4회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참석한 일이었다. 이 행사는 영화를 선보이고 토론하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영화의 유통, 비평, 프로그래밍 등의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곳이었는데, 67년의 행사는 유럽에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영화를 확산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W+B 하인은 쾰른으로 돌아와 1968년 국제적 아방가르드에 초점을 맞춘 정기적인 스크리닝 시리즈 《XSCREEN》을 그의 동료들과 기획하여 만든다. 이후 그들은 10여 년간 아방가르드 영화 이벤트를 꾸준히 마련하며 필름 큐레이팅에 대한 경험을 착실히 축적해 간다. 1977년에는 《도큐멘타 6》을 비롯해 《Film as Film》과 같은 대규모 전시에 공동 기획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뮌헨 필름뮤지엄(Filmmuseum München)에서 출판하는 DVD 시리즈 ‘Edition filmmuseum’을 통해 W+B 하인의 초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시리즈의 54번 에디션으로 제작된 『Materialfilme1968-76』(2012)에는 < 생필름 >을 비롯해 <재생산> <625> <초상들 Portraits>(1970), 그리고 <머테리얼필름> 등 W+B 하인의 주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DVD에 포함된 소책자에는 W+B 하인에 대한 마크 시겔의 소개가 있는데, 본 글은 마크 시겔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존 휘트니는 모션 그래픽의 아버지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휘트니는 1955년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에서 일했다. 여기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솔 배스(Saul Bass)를 만났고, 둘이 함께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와 광고의 특수효과를 제작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때 제작했던 대표적인 타이틀 시퀀스가 히치콕의 < 현기증 >(1958)(사진1)이다. 이 시퀀스는 지금도 모션 그래픽 교재들에서 모범 사례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휘트니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휘트니가 1960년에 설립했던 회사의 이름이 모션 그래픽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설명하는 것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휘트니의 이름 앞에 굳이 무엇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한다면, 컴퓨터를 이용한 생성예술 혹은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의 아버지라고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휘트니를 컴퓨터를 통해 소리와 빛을 연결하는 구조를 생성하고자 했던 작가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진1]<현기증(1958)>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4CZfSc6nJ8U'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휘트니는 1980년에 「디지털 하모니: 음악과 시각예술의 상보성에 관하여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휘트니의 관심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전적 배경, 음악과 영화에 대한 사유들, 비디오디스크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이해, 작업 방식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휘트니는 1917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살았던 동네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휘트니는 퍼모나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실망하고, 21살이었던 1938년에 네 살 아래 동생인 제임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유럽으로 떠났다(이 글에서 휘트니는 존 휘트니를 지시하고, 제임스 휘트니는 제임스로, 둘을 함께 언급할 때에는 휘트니 형제로 표기한다). 그 희망은 비록 1년간의 유럽 체류로 끝이 났지만, 휘트니 작업의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휘트니는 로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작업의 단초가 되고, 경력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보았다. 흰색으로 도장된 비행기 날개의 곡선, 철판의 모서리들, 철판을 연결하는 못의 기하학적 형상들과 떨림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비행에 따라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휘트니는 이 부분들을 촬영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생각은 단지 발상으로만 남았지만,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설정한 질문과 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휘트니에게 비행기의 날개와 그 부속들은 역동적인 구조와 부분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대상이었다. 휘트니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음악에 비해서 세계는 너무나도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가 설정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세계는 베토벤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 따분할 정도로 정적이다. 빛은 소리보다 빠른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은 역동적이지만 빛을 재료로 하는 영화는 음악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 이유는 영화가 카메라로 정적인 세계를 찍기 때문이고,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가 움직임이 큰 대상들을 클로즈업으로 찍거나 카메라를 빠르게 움직이고 편집의 호흡을 짧게 가져가서 역동적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음악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또한 사람들은 집요하게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에서 무엇이 어디서 찍힌 것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며, 그것들을 분별해낼 수 없다면 사진적 이미지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휘트니에게 영화의 기본적 문제는 음악만큼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영화에 설정한 과제와 목표는 ‘유동적인 건축 liquid architecture’이라는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유동적 건축은 변화와 구조를 동시에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쾨테가 “음악은 유동적인 건축이고,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휘트니는 유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동적인 건축이라는 개념을 접했고, 유동적이라는 말을 시공간 상에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휘트니는 20세기에 이르러 시각예술이 마침내 자신의 참된 구성요소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표면, 색채, 형태, 선, 질감과 같은 요소들은 시각예술의 알파벳이었고, 이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시각예술은 음악의 유동적 구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반면에 휘트니에게 영화는 늘 현실의 어떤 장소에 속박되어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영화가 유동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어딘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요구했던 것은 음악에 준하는 역동성과 추상성을 갖추는 것이었고,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제는 카메라로 매개되지 않으면서 빛을 구조화하여 음악에 상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과 소리의 구조적 상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휘트니의 생각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판단 역시 새로울 것은 없었다. 휘트니에 앞서 만 레이, 한스 리히터, 비킹 이겔링, 발터 루트만과 같은 작가들이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여 음악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탐구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메라가 현실의 대상을 찍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화가 음악과 같이 유동적이 되기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내려질 수도 없다. 이를테면 이 연재에서도 다루어질 구조영화 작가들을 생각해보면, 굳이 음악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카메라를 버리지 않더라도 영화의 구조를 유동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휘트니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계기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로부터 비롯된다. 휘트니의 유럽 체류는 1939년 파리에서 막을 내리는데, 이때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를 만나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배웠다. 이 기법을 구성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한 음렬(tone row)은 반음계의 12음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2) 한 음렬 내에서 어떤 음도 반복되지 않는다. (3) 기본(Prime, P), 반행(Inversion, I), 역행(Retrograde, R), 역행-반행(Retrograde-Inversion, RI)을 각 음정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용한다(P, I, R, RI를 각각 사분면에 표시한다고 할 때, 기본 P를 1사분면에 놓으면 기본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역행은 2사분면에, 좌우/상하대칭을 이루는 역행-반행은 3사분면에, 상하대칭을 이루는 반행은 4사분면에 위치시킬 수 있다). (4) 음렬은 반음계에서 네 가지 변형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이 원칙들을 적용해서 음렬을 구성하면 [그림1]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가능하다. [그림1]12음기법을 이용한 음렬 구성의 예시 12음으로 이루어진 한 음렬에 대한 기본, 역행, 반행, 역행-반행을 행렬로 표시하면 [그림2]와 같다. 행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을 지시하고 행에서 왼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해 역행을 하고 같은 도수만큼 이동(transposition)한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열에서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한 반행에 같은 도수만큼의 이동을 지시하고,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그 역행에 도수이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기본 12, 역행 12, 반행 12, 역행-반행 12 음렬로 총 48개의 음렬을 얻을 수 있다.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제2빈악파의 작곡가들인 베베른이나 베르크 등에게 계승되어 음렬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2]음렬의 행렬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의 핵심은 음악을 순수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위에서 서술한 원칙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 유한한 수의 원소를 갖는 집합과 이 원소들을 매핑하는 함수를 정의하고 나면, 나머지 절차들은 자동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유사 오토마타가 가능해진다(초기 상태와 상태 전이에 대한 정의는 있지만, 결과를 판단하고 종료하는 절차에 대한 규칙이 없다). 쇤베르크는 1926년에 12음기법을 처음 적용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에 착수하고 나서, “소리의 생산과 소리들의 관계의 정확성을 보장하고, 소리들을 초보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무심한 음악가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모든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쇤베르크의 목표는 음악가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직관으로부터 음악을 해방시키고, 음악을 생성하는 문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을 하나의 예술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언어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이다. 음악이 형식언어가 될 수 있다면, 컴퓨터라는 추상기계에 의해 연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쇤베르크가 휘트니에게 미친 영향은 역동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음악과 영화에 접근했던 휘트니를 생성적 구조라는 방향으로 틀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다면, 빛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발상을 가능하게 했다. 요약하면 휘트니가 유럽 체류 기간에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과제는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 빛을 매개하여 소리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이 과제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를 통해서 빛과 소리가 생성되는 구조를 발견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이 유럽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는 유럽 체류 기간에 내리고 있으며 도래할 매체인 컴퓨터를 향하고 있었다. 1939년 유럽에서 돌아온 휘트니 형제는 1936년부터 파라마운트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던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휘트니 형제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패서디나에 있던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8mm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완성한 작품들은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졌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쇤베르크의 이론을 적용한 작품들이었다(공교롭게도 쇤베르크는 1934년부터 남가좌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래에 삽입한 제임스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이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nU88XWYjE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1]제임스 휘트니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 휘트니 형제는 ‘변주곡’ 시리즈를 만들면서 피싱거의 방식(카드보드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내서 움직이는 방식)을 차용했지만, 피싱거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소리를 삽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각적인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사진2]와 같은 장치를 고안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진자를 흔들면,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에 사인파를 그려서 소리의 패턴이 새겨질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이 장치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 <필름 습작 No. 1-5>(1943-44)[영상2]이다. 휘트니 형제는 사운드트랙 위에 그림을 그려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자신들이 고안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그러한 방식을 먼저 실험했던 작가 역시 오스카 피싱거였다. 오스카 피싱거는 [사진3]과 같이 그래픽 패턴을 그려내서 소리를 생성하는 실험을 1932년에 수행했던 바가 있고, 이 결과가 <장식 사운드 Ornament Sound>이다(이 작품은 비주얼 뮤직 센터(Center for Visual Music)에서 복원되었고 비메오(Vimeo)에서 유료로 스트리밍하고 있다 https://vimeo.com/ondemand/26951 ). [사진2]진자를 이용한 소리 생성 장치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uZbgM8yxt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2]휘트니 형제의 <필름 습작 No.1> [사진3]오스카 피싱거의 <장식 사운드>의 그래픽 패턴들 제임스는 <필름 습작> 시리즈를 완성한 직후 뉴욕으로 가서 힐다 르베이(필자가 쓴 마리 멘켄의 < 노트북 > 리뷰에도 등장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 디렉터, 이름이 다소 길어서 힐라 르베이, 바로네스 르베이 등으로도 불렸다)를 만나서 작품을 구매해줄 수 있는지와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금을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르베이는 <필름 습작> 시리즈뿐만 아니라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 역시 구매했고 1944년과 1945년 초에 상영하였다. 이 상영회에는 토니 스미스, 존 케이지, 테네시 윌리엄스, 마르셀 뒤샹 등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르베이는 휘트니 형제의 작품을 보다가 영사실로 뛰어가서 작품 상영을 중단시켰다. 다행히 이 상영회에 잭슨 폴록 역시 참석해 있었고, 폴록이 개입해서 상영회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후에 이 작품들은 구겐하임에서 정기적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휘트니 형제는 1949년 브뤼셀 영화제에서 <필름 습작>으로 1등상을 수상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휘트니는 록히드사에서 초고속 미사일 사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M5 대공포 디렉터(Antiaircraft Gun Director)라는 대공방어 미사일 유도 시스템을 접하게 되었다. 이 장비는 원래 영국에서 개발했던 것으로 록히드사가 개조해서 사용 중이었는데, 무게가 850파운드에 11,000개가 넘는 부품으로 구성된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휘트니에게 M5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이 아니라,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고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에 부합하는 장치였다. 전쟁이 끝나고 휘트니는 불용품으로 경매에 나온 M5를 구입하고, 추가로 중고 부품들을 모아서 M5를 그래픽 생성 장치로 개조하였다. 휘트니가 만든 장치는 요즘으로 치면 모션 콘트롤 카메라에 해당한다. 휘트니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였던 영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들은 그가 개발한 장비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는 영화 타이틀과 광고 특수효과 작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1960년에 모션 그래픽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상업적인 작업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개발한 장치로 만든 첫 작품 <카탈로그>[영상3]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는 휘트니가 고안한 슬릿-스캔(slit-scan) 방식이 적용되었는데, 이 방식은 요즘에도 미디어 아트 작품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휘트니가 개발한 장치로 작업하는 방식은 <컴퓨터: 인간의 지배에 도전하다>[영상4]라는 다큐멘터리의 일부에서 볼 수가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bV7loKp69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3]휘트니의 <카탈로그(1961)>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5eMSPtm6u5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4]휘트니의 아날로그 컴퓨터 작업 방식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로 한 작업들로 평가를 받아서 1966년에 IBM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초청되었고 1969년까지 후원을 받았다. 여기서 GRAF(Graphic Additions to FORTRAN)의 개발자인 잭 시트론과 만나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시트론은 IBM 모델 360 컴퓨터와 2250 그래픽 디스플레이 콘솔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래픽 콘솔은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되었는데, 4000 * 4000개의 점을 실시간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GRAF를 배웠고, 이 언어를 사용하여 1966년에 < 순열 >[영상5]을 만들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dYxJ85RSd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5]휘트니의 <순열>(1966) < 순열 >은 휘트니가 디지털 컴퓨터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순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 프레임이 총 28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왜 281개의 점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짐작건대 소수들 중에서 시스템이 처리하기 용이한 수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열>은 총 281개의 점의 초기 위칫값과 일련의 명령어를 이용하여, 프레임별로 점들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졌다. 그 명령어들의 일부를 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스크린의 중앙에서부터 시작하라. 계산한 거리만큼 오른쪽으로 이동해라. 계산한 각도만큼 원주를 따라 왼쪽으로 회전하라. 거기서부터 외곽 방향으로 새로운 반지름을 계산하고, 원주를 따라 새로운 각도만큼 회전하라. 그 위치에 하나의 점을 찍고, 나머지 280개의 점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반복하라. < 순열 >의 시각적 패턴은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짜여있다. 반지름과 각도를 매개변수로 하는 일대일 대응 함수들이 전부이다(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반지름 변수를 RT로, 각도 변수를 DT로 표시하면서 이 두 변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패턴이 생성되고, 이에 대응하는 음계는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해놓았다. 다소 분량이 많은 관계로 이 글에 옮기기가 어려운데, 관심 있는 분들은 56-59페이지와 70-71페이지에 삽입된 그림만 참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휘트니가 <순열>에서 수행했던 작업 방식은 <스크리닝 룸>(하버드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이자 대학 내 필름 연구 센터를 설립했던 로버트 가드너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휘트니가 첫 번째 출연자였고 이외에도 미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출연했었다. 이 중에서 20여 편은 DVD로 발매되어 판매 중이다)이라는 TV 프로그램[영상6]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aW4DTKNfl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6]<스크리닝 룸>에 출현한 휘트니의 인터뷰 휘트니가 < 순열 >에서 사용했던 작업 방식은 디지털 컴퓨터에서 포트란(FORTRAN)과 같은 형식언어를 사용했을 때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절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휘트니에게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휘트니의 작품들에서 원형의 패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반지름과 각도라는 두 변수를 통해서 생성되는 패턴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변수를 사용했을 때 만들어지는 패턴들(대표적으로 장미꽃잎과 같은 패턴)들은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두 변수들의 비율을 변경해가면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휘트니는 반지름과 각도의 비율을 변경했을 때 특정한 패턴이 생성되었다가 점이 분산되어 임의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긴장과 이완의 반복으로 이해했다. 그가 유동적 건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순열>을 만들었던 것이다. 쇤베르크의 이론에 받은 영향을 고려하면 휘트니가 말하는 하모니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때 하모니는 화성이 아니라 가로 대 세로, 반지름 대 각도 등의 비율에 따라 긴장이 생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휘트니가 < 순열 >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카메라와 필름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와 필름은 촬영장치가 아니라 하드 디스크를 대신하는 저장장치였다.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를 사용했던 <카탈로그>부터 컴퓨터를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는 데 사용했고, 녹화와 후반작업은 필름으로 했다. 컴퓨터로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고 난 다음에 한 프레임씩 흑백 필름으로 촬영하고, 색깔은 옵티컬 프린터를 이용해서 입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당시의 컴퓨터 시스템의 저장과 그래픽 능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비로써 카메라와 필름을 내던진 것은 <아라베스크>(1975)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순열>에서 사용된 음악은 순다람 발라찬더(Sundaram Balachander)가 연주한 남인도 음악이었다. 휘트니 형제가 피싱거의 작품을 기성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의 사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선택 역시 당대 컴퓨터의 연산 능력으로 하나의 코드로 그림과 소리를 동시에 생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휘트니가 동시대와 같은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가 설정했던 과제들을 고려해볼 때, 실시간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 순열 >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색채에 있다.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한다는 과제에 비추어본다면, 색채 역시 일련의 규칙들을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특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없고 임의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영상4]에서 카메라가 위에 고정되어 있고 회전하는 이미지 디스크 아래에 휘트니가 컬러 필터를 삽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색채만큼은 작가의 선택과 회전하는 디스크의 속도가 조합되어 반쯤은 의도적이고 반쯤은 우연히 결정되도록 남겨두었다. 색채에서 어떤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라베스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점들의 위치를 계산하는데 있어서는 엄밀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결정도 아니고 완전히 우연도 아닌 둘 사이의 애매한 중립을 선택했던 것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휘트니가 사용할 수 있었던 컴퓨터의 그래픽 시스템으로는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름은 현상과 프린팅 과정에서 색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당시의 휘트니에게 색채는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한계가 휘트니가 비디오라는 매체의 미래를 낙관했던 이유이다. 비디오에서는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휘트니는 색채를 온전히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다소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화가에게 색채는 일반적으로 물감, 손, 눈이라는 세 요소간의 직접적인 일대일 상호작용으로서 직관적으로 경험된다. 이토록 친밀한 스스로 직접 하는 상호작용은 이성보다도 창의적인 마음을 요구하며, 컬러 필름으로 작업하는데 필요하다. 컬러 필름의 현상 과정을 화가처럼 통제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들은 종종 좌절되고 말았다. 현상실과 프린팅 단계들에서 걸리는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실제적인 색채 효과 사이를 단절시켰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해서 만큼은 화가의 직관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휘트니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휘트니와 동시대에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을 했던 스탠 반더빅, 벤 라포스키, 메리 엘렌 뷰트에게도 규칙에 온전히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창조의 신비성이라 불릴만한 영역을 고집하는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동시대에 독일에서 컴퓨터 예술을 개척했던 프리더 나케는 “미국/캐나다의 접근 방식은 이론이 없다. 그냥 즐기고 네 작업을 하고 창조적이 되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하라는 식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캐롤린 케인(Caroly L. Kane)은 「색상 알고리즘: 코드 이후의 색채 합성, 컴퓨터 아트와 미학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독일 방식과 신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미국 방식을 비교하였다. 이 책에서 케인은 미국 방식을 주체와 저자성(authority)이라는 낭만적인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케인의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해석은 자벳 패터슨(Zabet Patterson)의 「대포 제어기로부터 만다라까지: 존과 제임스 휘트니의 사이버네틱 영화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패터슨은 휘트니가 개발한 M5 대공 방어 미사일 유도 장치가 영화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패터슨은 영화라는 매체와 미사일 유도 장치가 인간의 시각과 신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영화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매체이다. 반면에 미사일 유도 장치는 목표물을 쫓는다는 점에서 전투기에 부착된 반구형 포탑과 같은 계열의 장치이다. 영화와 반구형 포탑 장치 모두 객관성과 투명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영화는 성찰적이고, 관객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게 한다. 반면에 반구형 포탑 장치는 시야에 들어온 목표에 신체가 즉각적으로 개입하고 반응하도록 훈련하여 시스템 회로의 일부가 되게 만든다. 패터슨은 휘트니의 < 순열 >을 분석하면서, 관객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변화하는 패턴들을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순수한 지각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고 보았다. <순열>은 사용자의 시선을 목표물에 고정시키고 신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반구형 포탑 계열의 장치로 만들어졌지만, 휘트니가 순수한 추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일부로 종속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휘트니가 색채에 대해서 주저했던 이유도 M5와 영화라는 이질적인 시각체계가 교차할 수 있는 비결정적인 영역을 남겨두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패터슨의 논의를 좀 더 전개시켜보면 요즘에 유행하는 VR영화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개념인지와 이질적인 시각체계를 결합하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1960, 7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두 가지 흐름-영화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미술과 음악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에 불만을 표했다. 휘트니는 1960년대에 한때 뉴욕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예술의 기준을 가장 젊은 예술인 영화에 이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위를 자처하는 영화작가들이 그 노력들을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 노력들 대신에 들어선 작가들과 관객들은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로 격하시키며, 성행위나 개척하는 것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휘트니는 1960년대 당시에 우연과 주역에 열광했던 지식인 부류의 태도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우연과 주역에 대한 관심을 마치 우연이라는 신비에 의지하면 시나 음악이 저절로 완성될 것처럼 간주하는 태도라고 비난하였다. 휘트니는 1970년대 초반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에 대한 열광이 연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컴퓨터가 난수를 발생시키는 최상의 장치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면 우연이라는 원칙을 따르는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당시 컴퓨터 기술이 가장 앞섰던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지만 이내 곧 물러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밑바탕부터 스스로 만들어가거나 이미 완성된 기술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 두 가지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그가 활발하게 작업했던 당대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양쪽에서 모두 환대를 받았지만 동시에 배제되기도 했다. 그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영화 쪽에서 휘트니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가 정도로 치부되고, 미술 쪽에서 컴퓨터 예술을 논의할 때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과 프리더 나케와 같은 독일 작가들 위주로만 다루어왔다.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미술, 음악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휘트니는 양쪽 모두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암묵적인 가정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 가정은 생성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휘트니는 촘스키가 두 가지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새로운 문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이고, 두 번째는 음악과 예술이 당연히 언어인가의 여부이다. 휘트니는 이 두 질문에 응대함으로써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모두의 과제라고 보았다.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전개되어왔던 디지털 영화와 미디어 아트에 관한 논의들을 돌아보면,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분리되어 별다른 교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40년여 전에 휘트니가 설정했던 과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휘트니 형제에 관한 사실과 일부 견해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Carolyn L. Kane,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Paul J. Karlstrom(ed.), On the Edge of America: California Modernist Art, 1900-19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John Whitney,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 Kingsport Press, 1980. Zabet Patterson,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 Grey Room 36, Summer 2009, pp. 3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