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극교실
- 감독
- 조용수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박은영, 조용석, 조주연
1953년에 발표된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신봉승의 각색을 거쳐 김수용 감독이 1965년에 장편으로 완성한 영화다. 1965년 11월에 개봉한 < 갯마을 >( 김수용 , 1965)은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신상옥 , 1961), < 벙어리 삼룡 >(신상옥, 1964)과 더불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영화로까지 의미가 확장된 ‘문예영화’의 기준을 확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적이었고, 이후 1967년까지 폭발적으로 이어진 문예영화 전성기를 연 기념비적인 영화다. 장편영화만 109편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이 영화의 성공으로 문예영화의 기수로 떠오르게 되는데, 한국 문예영화의 전성기는 김수용의 영화 활동의 전성기와 대략 일치한다. 예술성 있는 문예영화가 수익성도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이 영화의 경험으로 김수용 감독은 소설의 영화화에 더욱 매진하였던 것이다. < 까치소리 >(1967), < 안개 >(1967), < 산불 >(1967) 등 그의 대표작은 거의 문예영화였던 점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짧은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작에 없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을 더하여 좀 더 스토리라인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해순과 시어머니, 상수, 그리고 동네 아낙들로 이루어진 원작의 단순한 캐릭터 구성 위에 영화에서는 시동생을 주요 캐릭터로 더하였다.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후, 해순이 상수와 함께 하는 육지 생활과 산속 생활이 새롭게 추가되어 구체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영화의 드라마적 구성이 더 풍부해졌다. 결혼한 지 이제 열흘이 된 새댁 해순( 고은아 )의 남편 성구( 조용수 )가 고깃배를 타고 출항한 후 거센 폭풍우로 인해 사망하고, 그녀는 시어머니( 황정순 ), 시동생 성칠( 이낙훈 )과 함께 살아간다. 바닷가 갯마을은 과부가 많은 동네로 시어머니도 일찍 남편과 사별했다. 경제적 토대와 일상적 생활이 서로 한데 엮인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갯마을 과부들은 끊임없는 성적 농담으로 자신의 척박한 처지를 이겨낸다. 그러던 중 아름답고 해맑은 해순을 쫒아 다니는 건장한 상수( 신영균 )는 그녀와 새출발하고 싶어 하고, 도망 다니던 해순은 결국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성칠과 어머니는 해순과 상수 사이를 눈치 채고 해순을 설득하여 보내기로 한다. 원작은 상수가 징용에 끌려가자 홀로 산에 남은 해순이 바다를 그리워 하다가 병이 나서 갯마을로 돌아가는 결말이다. 이에 반해 영화는 서사적 확장을 꾀하기 위해 에피소드들을 추가한다. 채석장에서 행복하게 일하던 두 사람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자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살던 중, 지나가던 사냥꾼이 해순을 겁탈하려 한다. 그러자 상수가 사냥꾼을 죽이고, 해순은 기절한다. 상수는 약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가 산으로 뛰어오던 중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 정성스럽게 남편의 장례를 지낸 해순은 그리운 갯마을로 돌아온다. 시어머니와 마을 아낙들은 해순을 반갑게 맞이하고, 해순은 다시는 바다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원작이 해순과 상수의 해후를 열린 결말로 놓았다면, 영화는 두 번이나 사별한 해순이 운명에 순응하면서 다시 갯마을에서 갈아가기로 결심하는 닫힌 결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운명의 비정함과 삶의 건강한 활력이 뒤섞이는 보다 풍부한 마무리를 생산해낸다. <갯마을>은 <벙어리 삼룡>처럼 향토색 짙은 서정성의 로컬 컬러 경향의 영화로 보이지만, 이전 향토성 문예영화들과 다른 면이 많다. 갯마을은 시대성이나 외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원형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부들로 구성된 여성 공동체에서는 성적 욕망을 마음껏 발산해도 된다. 남편 없는 이들이 섹스를 그리워하는 직설적인 농담을 나누거나, 서로의 맨 다리를 베고 누워 서로의 육체를 찬양하거나, 여성들끼리 진하게 포옹하고 키스하며 뒹구는 장면은 에로틱하면서도 건강한 생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갯마을이라는 원형적인 공간은 원초적인 삶의 양태들로 가득 채워져 생동하는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표현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원초적 건강성이 뿜어내는 매혹은 비관적인 신파성과 거리를 둔다. 이 위에 1960년대 한국 감독들이 의식하고 있었던 유럽 모더니즘 영화의 영향이 더해진다. 캐릭터들의 농담과 태도에서 보여지는 보다 건조한 표현은 영화적 품격으로 나타난다. 해순이 상수를 받아들이던 날 클로즈업의 투 쇼트를 보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루이 말의 영화처럼 내면의 환희와 갈등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처럼 분열된 의식세계가 감각적인 서구의 예술영화적 기법으로 표현된다. 바다와 갯벌, 이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성적 욕망은 원초성의 자연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사회적 규범이 깨어지는 장면들은 어색하지 않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 이제 막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며느리를 재가시키는 것, 다시 돌아온 며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환영하는 것과 같은 장면들은 이전 영화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진보적인 애티튜드다. 굿과 성황당 또한 원초성의 상징으로 기능하는데, 이전 영화들에서 무속이 전근대성의 표상으로 타파해야 할 구습으로 비춰지는 면이 있었다면, <갯마을>의 무속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삶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갯마을 사람들에게 무속은 또 하나의 자연의 일부다. 해순이 남편의 혼백을 건져내는 푸닥거리 장면, 그리고 아들의 넋을 건져내 정성스레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오는 어머니의 행동은 기이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일상적 제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갯마을>은 신파성에서 한걸음 나아가며 모더니즘 영화언어에 대한 갈망을 그려내는 전환기적인 작품이며 문예영화의 기준이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보적인 이상적 여성 공동체는 지금 봐도 놀랍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과 동시대적 이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계속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 갯마을 VOD 보러가기 <<
한국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기록들을 살펴본다면, ‘1964년 겨울’은 매우 중요한 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7인의 여포로>(검열후 <돌아온 여군>으로 제명 변경)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북괴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던 일련의 사건은 1964년 12월 11일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권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의 존재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이만희를 구속시켰던 법률적 근거는 ‘검열법’이 아니라 ‘반공법’이었다. 하지만 검열이 단지 법률 조항의 위반 문제만이 아니라 상상의 범위를 제한하고 실천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권력 효과의 문제라고 봤을 때, 1964년 겨울,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은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 감각을 설정하는 동시에, 영화의 재현 가능성의 범위를 규정한 문제적인 검열 사건이었다. 중요한 점은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검열이 단선적이거나 일관된 논리로 점철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4.19 혁명의 정치적 열망을 일부나마 군부 정권의 통치성 내부로 포섭하려했던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반공영화’라 할지라도 체제의 우월성을 기계적으로 선전하는 차원을 넘어 이념 대립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나아가 냉전 체제의 모순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1) 그러나 1964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민적 저항(6.3 학생운동)을 법질서를 중단하는 계엄령을 통해 무화시키는 순간은 박정희 체제의 통치 전략이 근본적으로 수정된 시점이었다. 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내적인 논리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데, <7인의 여포로>(1965)와 <남과 북>(1964)의 검열 과정은 그 분기점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은 영화 검열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이 작품은 <7인의 여포로>와 함께 반공영화의 가능성과 표현의 임계를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관객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던 해당 영화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는데, 신파적인 감성으로 넘쳐나는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은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반공영화에서 공산주의자가 인격이 소거된 채 성격화되지 않은 인물로서 그려졌다면, <남과 북>에서는 사랑을 찾아 전선을 넘어온 공산주의자 장일구 소좌(신영균)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산주의자를 재현하는 방식 또한 매우 극적으로 전환되게 되는데, 이는 이산 멜로드라마의 문법이 반공영화에도 적용됨으로써 공산주의자에 대한 영화적 표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전환의 과정은 북한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북한에 대한 발화를 금기시했던 이전 시기와 달리 “북한에 대한 유동적인 지식 일반의 흐름을 관장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최종적인 유통 여부와 진위를 판별하여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는” 2) 방식으로 체제가 변화된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 1] 영화상영 허가신청서 어찌 보면 매우 불온한 영화가 어떻게 검열에 통과될 수 있었을까.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검열 문서철을 보면, <남과 북>은 극동흥업 주식회사의 이름으로 1964년 11월 11일 ‘영화 제작 신고서’와 ‘배역 명단’ 및 전속배우 활용에 관한 요강을 준수한다는 ‘서약서’가 공보부에 제출되면서 제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원작자인 한운사가 직접 각색을 하고, 극동흥업의 사장인 차태진이 제작을 맡아 만들어진 영화는 1964년 12월 8일에 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제작 기간은 약 한 달이 못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사 검열을 위해 제출된 필름은 총 35미리 12권 8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검열을 위해 원본 네거티브가 제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복사본을 모두 포함하여 8편의 필름이 제출되었다는 점은 해당 영화에 대한 제작사의 흥행 기대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서철을 통해 볼 때, 상영 허가를 위해 실사 검열이 신청된 일자는 1964년 12월 29일이고, 검열이 완료된 시점은 12월 31일이었다. 상영허가가 유효한 기간은 검열이 완료된 시점으로부터 1년이기에, 영화는 1965년 12월 30일까지 8편의 복사본에 대해 상영 권한을 갖게 된다. 박정희 체제의 검열 권력을 사유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화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이념을 초과한 사랑이 서사의 중심으로 제시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특히, 영화를 이끌어가는 신영균(장일구 역)의 스타 페르소나는 스크린의 안팎에서 민족계몽을 이끄는 지도자이자 개발주의적 근대화를 이끄는 실천가, 영웅적인 국군이자 미성숙한 군인들을 남성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소비되었던 만큼, <남과 북>의 공산주의자 형상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점은 이와 같은 영화적 표현이 당대의 검열 과정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림 2] 영화검열 기안지 #1 기안지(1964년 12월 31일) 기안자 : 공보부 영화과 행정주사 이달형 기안년월일 : 1964년 12월 31일 (중략) 제한사항: 화면 2개처, 대사 6개처 [그림 3] 전언통신문 #2 전언통신문(1964년 12월 31일) 송화자 : 중앙정보부 5국 보안과 김 조정관 수화자 : 영화과 행정사무관 이영희 국산극영화 <남과 북> 검열의견 통보 극동흥업주식회사 제작 <남과 북>에 관한 검열 의견을 다음과 같이 통보하오니 허가에 반영조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제한 요청사항 가. 보초가 “신세한탄”하는 대사 삭제 나. 장일구 대사 중 “목숨 걸고 애인 찾는다.” 삭제 다. 이 대위 대사 중 “어떤 …38선” 삭제 라. 미군대위 나오는 화면 전체 삭제 마. 장일구 대사 중 “북녘하늘 어머니 돌려보내주시요” 삭제 바. 장일구와 이 대위가 “어깨동무하고 술 먹는 장면” 화면 삭제 검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해당 영화는 대사 6개 처와 화면 2개 처를 삭제하는 것으로 검열에 통과된다. 기안지와 전언통신문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이는 문서 작성 과정에서의 실수로 보인다. 제한 요청 사항을 분석해보면,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해석상의 문제가 야기되는 부분은 대사가 삭제되나, 미국이 등장하는 장면과 장일구와 이대위(최무룡 분)가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화면이 전체적으로 삭제된다. 이는 ‘감상적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서 민족 개념을 분화하고 전유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전략이 검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영화는 관람등급 신청에서도 별다른 제한 사항 없이 ‘국민학교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는다. 즉,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규범 아래서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좇는 한 인간으로서 공산주의자를 그리는 방식은 당대의 검열 기준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영화는 1965년 1월 1일에 개봉한 후 11일 만에 6만 관객을 돌파하여 1965년 1월 21일에 복사판 상영 허가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화가 상영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해당 영화는 갑작스럽게 문제적인 작품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림 4] 내무부 의견서 <남과 북> 내무부 의견서 수신처 : 공보부(1965.2.5)/결재(2.8) 치안국장 귀하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남과 북”(아카데미 극장 상영 중) 줄거리 38선에서 괴뢰 소좌가 애인을 찾아 투강하여 왔으나 그녀는 이미 국군 대위와 결혼한 처가 되고 말았으며 이 사실로 인하여 국군 대위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소좌는 자살하고 국군 사단에서는 소좌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단장 이하 뒤흔들리는 설명 영화임. 영화 감상 후 나의 의견 1. 괴뢰 소좌는 자유를 동경하여 투강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관계로 투강하였으며 동괴뢰 소좌는 남성적이고도 용감하며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 성으로 묘사되었고. 2. 투강장교 1명으로 말미암아 전 사단이 휘둘리는 것은 국군의 위신에도 관계가 있고 3. 괴뢰 소좌에 비하여 국군대위는 연약성이 엿보이고 있음. 결론 본 영화 괴뢰 소좌를 동 영화의 주연으로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영웅화한 스토리임으로 수준이 얕은 대중 에게는 결과적으로 괴뢰군의 훌륭한 것만을 남기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예술공세에 있어 노골적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데에 부합되는 느낌이 있었음 . - <남과 북>, 검열 문서철.(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1965년 2월 5일, 내무부에서는 공보부 치안국장에게 <남과 북>과 관련하여 의견서를 제출한다. 의견서에는 해당 영화가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사용하는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는 소견을 담고 있다. 문서 작성자는 전선을 넘어 온 “괴뢰소좌”가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이라는 점과 “투강 장교 1인에 전 사단이 휘둘리게” 묘사한 점 그리고 괴뢰소좌에 비해 국군대위가 연약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그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중앙정보부에서 검열을 실시한 이후 명기한 ‘제한 요청사항’과도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구도와 배우의 페르소나 자체를 의구심에 부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당시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고 활발히 상영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남과 북>은 1965년 2월 5일에 이르러 ‘불온한 텍스트’로서 발견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의 불온성이 누구에게 소구되는가라는 문제와 남성성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는 “수준이 얕은 대중”에게 “연약성을 엿보이는” 국군과 대조적으로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인 “괴뢰소좌”를 부각시킴으로써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무부에서 갑작스러운 의견서를 공보부에 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65년 2월 5일은 이만희 감독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이 제출된 날이기도 하다. 영화에 각인된 성별화된 이미지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법률적인 문제로 전환시킨 해당 공소장으로 이만희는 긴급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례적인 내부무 의견서는 그래서 단순한 요식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무부 의견서가 상당한 수준의 의혹을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미 상영 중인 작품의 제작자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후 1965년 4월 22일, 제작사는 영화의 추가 상영을 위한 16미리 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그에 따른 검열 당국의 입장은 해당 영화가 “1964년자 당부 허가번호 제3595호로 신규상영 허가된 바 있는 영화”이기에, “상영을 허가하고 별첨 허가증을 교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다. 영화를 둘러싼 이적성 혹은 용공성 시비는 일단락된 듯 보이나, 4년이 지난 1969년 1월 13일, 정익진이라는 사람의 탄원서가 제출되면서 또 다시 시비에 휩쓸리게 된다. 영화는 1968년 5월 29일 재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신청자는 합동영화주식회사의 곽정환으로 되어 있다. 검열 후 제한사항은 “본편 영화 신규 검열시와 같음(화면 단축 2, 대사 삭제 6)”이라는 판정을 받고 상영이 허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재상영되는 국면에서는 해당 영화가 홍보 수단으로 삼은 ‘전장 실화에 기반한 영화’라는 문구가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 [그림 5] 영화상영허가확인의뢰, 국방부 문서, 극영화 “남과 북” 검열 합격에 관한 확인 통보 국방부 1969.1.13. 수신 정익진(서울시 용산구 *****) 제목 전장 실화 전사 확인 건 귀하가 1968. 12. 30부로 제출한 육군 제 9사단 전장실화 확인 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신함. 질문: 1953. 4. 18 중부 전선 제9사단에 괴뢰군 소좌 장일구가 자기 사단의 총공격 작전 명령지도와 보급창고의 위치도를 가지고 귀순한 사실 여부에 대한 전사기록상의 확인. 장익진이라는 이가 제기한 탄원에 대하여 국방부는 전사기록상에 그와 같은 기록이 없음을 확인 후 이를 통보해준다. 이후 그는 “이 영화가 1965~1969년 현재까지 전국에 상영 중인데 내용상 ‘1953. 4. 18. 휴전 전 제 9사단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자막(S#4)에 크게 박아 선전하고 있는데 공보부 검열 허가 시 이 허위조작 여부를 어떻게 검토하여 허가하였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또한 “국방부 검열관계는 어떻게 행정처리가 됐는지 여부”를 회부해주기를 요구하면서 행정 당국의 검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근거로 검열 합격을 취소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검열 당국이었던 공보부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실화를 근거로 하여 극화된 것이거나 순전한 픽션으로 구성된 것인가의 여부”는 개의치 않고 “영화 제작자가 영화법에 제정한 절차에 따른 요식행위를 구비하여 검열 신청한 경우 그 내용이 관계 규정(검열기준)에 저촉되는가를 검토하여 검열합격 여부를 결정, 시행”함을 밝히며, 검열 과정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린다. 그러나 해당 소원은 영화가 전사(戰史)를 위조하여 제작되었음으로 이를 제작한 자들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용공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검열 합격 취소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1970년 6월 12일에 이르러 소원의 취지가 불분명하고 소원의 기한이 말소되어 허무하게 기각된다. 한 개인의 탄원으로부터 시작된 1969년의 용공시비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으나 이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개인이 이를 전유하여 국가의 검열 절차를 문제 삼음으로써 국가의 의도를 초과하여 구성된 과잉된 반공적 주체성의 곤란함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1. 이에 대한 논의는 졸고, 「반공의 감각과 불화의 양식 – 박정희 체제 하의 ‘반공영화’를 읽는 방법론에 대한 고찰」, 2015년 1월 극예술학회 발표자료집 참조. 2. 4.19와 5.16 이후의 시간 속에서 북한에 관한 언설들에 가해진 극단의 공포정치(조용수의 필화사건)와 달리 북한에 대한 논의 자체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해 볼 때, 박정희 체제는 “북한이라는 정체에 대해 적어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접근을 요청”했으며, 북한에 대한 지식과 표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관리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 장세진, 「원한, 노스텔지어, 과학」, 『사이』 제17호, 도서출판 역락, 2014, 147-150쪽.
김기영 감독의 영화 < 하녀 >를 말할 때 주로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동식( 김진규 ) 부부의 2층 양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조하는 것은 비단 이 밀폐된 공간만이 아니다. 초반부 동식과 여공 곽선영(옥경희) 사이의 에피소드는 뒤에 이어질 동식의 운명을 예견케 하는 복선인 동시에, 상경한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이를 방치하는 비정한 사회를 보여주는 독립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곽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사감 선생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고선애 (高善愛)다. 동식의 신고에 처벌을 잠시 주저하지만 사감실로 불려온 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통보하는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다. 이 장면에서 무엇인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선애의 얼굴이다. 양미간의 찌푸린 주름과 직삼각형 모양으로 힘을 준 눈매, 깎아지른 양볼 위로 윤곽이 드러나는 광대뼈, 그리고 단호하게 다문 작지 않은 입은 뒤돌아 서 있는 곽선영의 처연한 어깨와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 입술 사이로 굵고 건조한 그녀의 음성이 ‘에누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선애 는 특유의 인상과 목소리로 프레임을 장악하는 힘을 지닌 배우였다. 이를 알아본 것은 역시 김기영 감독이었던 것 같다. 고선애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첫 작품은 김기영의 두 번째 장편 < 양산도 >였고 이 작품에서 그녀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로 나온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반 실성한 상태로 아들 수동(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곡을 하다가 혼례 가마를 타고 그 앞을 지나는 아들의 연인에게 비수를 꽂는 여인을 연기한다. 탈춤을 추며 언덕을 올라오는 혼례 행렬과 그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수동 어머니, 칼을 맞고 수동의 무덤으로 기어가는 옥랑( 김삼화 )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고선애는 원시적인 모성을 발산하며 내러티브를 주술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이 직후에 옥랑과 수동의 영혼이 줄을 타고 승천 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1911년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난 고선애 는 대구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스물넷이 되던 해에 순회공연 중심으로 신파극과 희극을 주로 상연하던 극단 신무대(新舞臺)에 입단하면서 무대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녀를 배우로 살아가도록 바꿔놓았다. 해방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한때 극단 금성좌(金星座)를 경영했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박제행 (朴齊行), 고설봉 (高雪峰) 등과 함께 해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 소속으로 극단 예술극회(藝術劇會)를 창립해 활동했으며, 국방부 정훈국 후원으로 제작되어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1일에 개봉한 영화 < 나라를 위하여 >를 통해 영화 데뷔했다. 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극무대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 구원의 애정 >과 < 양산도 >를 통해 영화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기영 감독의 작품과는 달리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고선애 는 비중이 적은 단역을 맡아야 했다. 작은 역할일지라도 연기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었는데, 평범한 아낙네에서부터 교사처럼 지적인 여성이거나 상층계급의 부인까지 소화해냈다. 열사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 유관순 >)이나 YWCA 총무(< 상록수 >)처럼 식민지 시기의 엘리트 여성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교편을 잡았던 배경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 양산도 >의 비극적인 어머니라든가 < 서울의 지붕밑 >에서처럼 미신을 믿는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아낙 역할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었는데 신필름의 영화들은 그런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본처들의 모임 ‘꿀벌회’의 회장으로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 로맨스그레이 >나 YWCA 총무로서 농촌계몽을 위해 젊은 학생들을 불러모아 가르치는 백현경 역할을 맡은 < 상록수 >는 고선애 의 지적인 인상을 정형화해서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인지 큰 역할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신필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런 그녀를 ‘신상옥 사단’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일찍부터 < 천지유정 >이나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로 한·홍합작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신필름의 합작영화 제작에도 함께 했다. < 대폭군 >, < 반혼녀 >, < 흑발 > 등 필모그래피 후반의 영화들 상당수가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며, 특히 <반혼녀>에서는 주인공 연화(리칭)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주선자 역할을 하는 늙은 유모로 극을 끌어가고 있다. / 글: 김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