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가는 길
- 감독
- 조지훈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강혁일, 이지원
2021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확진자와 중증환자의 급증으로 산산이 깨졌다. 작년 연말이 돼서야, 이젠 2020년 2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완전히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 그렇게 달라진 건 아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좀 덜 돌아다니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딜 가든 조금만 유명한 곳들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극장의 풍경은 다르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신작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잠시 활기를 띨 만하면 방역 조치가 강화되는 악순환이 2년째 반복되면서, 극장은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 이렇게 적은 관객들로 극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영화론자’나 ‘영화주의자’들이 극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극장에서 영화보는 일을 찬미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극장의 죽음은 이젠 가까운 미래의 일이 되어버렸다. 관객이 사라진 조용하기도 스산하기도 한 극장에 갈 때마다 쓸쓸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때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은 늘 낮은 곳부터 고이므로 실질적 피해는 영화산업을 하부에서 받치고 있는 작은 회사들과 독립창작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극장에 갈 수 없는 관객에게는 OTT가 대안일 수 있겠지만, 산업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도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OTT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가급적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들을 더 많이 포함시키고 싶었다. 올해에는 나의 2021년 사사로운 리스트 10편의 영화 중 클레이 자오의 < 노매드랜드 >에 대해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좋은 평론가들의 훌륭한 글에 더 보탤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노매드랜드>가 품고 있는 고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몇 마디 더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극장에서 본 영화였고,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 영화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노매드’는 누구인가?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의 제목은 떠돌이, 뜨내기, 부랑자, 정착하지 못하는 자, 유목민, 유랑자, 방랑자 등등의 뜻을 가진 ‘Nomad’와 땅 또는 지역이라는 뜻의 ‘Land’가 합쳐진 단어인데, 원작도 같은 제목이다. 그런데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이 원작 논픽션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 Surviving America in the Twenty-First Century.” 그는 2014년 하퍼스 매거진에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글을 읽고 감동 받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노매드랜드」를 출간했다. 여기서 ‘노매드’는 ‘노매드 노동자’, 혹은 ‘워캠퍼(workapmer = work+camp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2007년과 2008년 사이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해 미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했다. 주로 이 시기에 평생에 걸쳐 쌓아온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은퇴자들인데, 전통적인 형태의 벽과 기둥으로 된 집을 포기함으로써 집세와 주택담보대출금의 족쇄를 끊어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밴과 RV, 트레일러를 집 삼아 좋은 날씨를 따라 단기 일자리에서 다른 단기 일자리로 이동하면서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계절에 맞는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물론 이들이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만으로 떠밀리듯 이런 삶을 선택한 건 아니다. ‘노매드’로서의 삶은 은퇴 후의 경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이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노매드’들끼리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도 한다. 저자 제시카는 2014년부터 무려 3년 동안 실제 RV에서 살면서 ‘노매드’들을 따라 약 2만 4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클레이 자오의 영화와 그의 세계 제시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원작에는 저자의 취재를 도와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린다 메이’라는 이름의 이 인물은 영화에도 같은 이름으로 직접 출연하는데, 영화에서도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난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을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제작자이기도 한 배우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오래된 동료 제작자인 피터 스피어와 함께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한 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다면, 그 영화는 아마도 저자인 제시카나 린다 메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매드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그럼으로써 미국 사회의 또 다른 현실을 들여다보는 정치적이고 시사적이며, 고발적인 영화, 차갑고 딱딱하고 쓸쓸한 톤의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러브콜을 흔쾌히 받아들인 클레이 자오는 뻔하고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클레이 자오는 원작의 세 번째 챕터에 나오는 미국의 오래된 기업의존형 도시인 엠파이어를 고향으로 둔 ‘펀’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냄으로써, 원작이 그려낸 부조리한 미국 사회를, 꿈과 결핍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살고 있는 클레이 자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실제 ‘노매드’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게 함으로써, 원작의 르포르타주적인 면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했다. <노매드랜드>는 마치 실제 ‘노매드랜드’라는 현실 속에 전문배우인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빗 스트라탄을 투입하여 영화를 찍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독과 훈련된 전문 배우들은 노매드들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함께 들어주고, 카메라에 담긴 이들의 이야기는 <노매드랜드>의 서사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영화만들기 방식은 캐나다 퀘백 지역을 대표하는 드니 코테 감독이 2009년 연출한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인 <카르카세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드니 코테는 수백 대의 자동차의 무덤에서 살아가는 한 노인의 집 마당에 4명의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투입하여 서사에 긴장을 만들어냄으로써 서사를 진행시켰다. 클레이 자오 감독은 이처럼 자기만의 영화만들기 방식을 통해 다루는 주제와 소재, 인물과 사회적 맥락의 역학 관계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한편, 어떤 영화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이식하고, 자신만의 인장을 찍어왔다. 그의 경력과 전작을 살펴보면 그는 정말 '이상하고 특별한' 감독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으면서도 미국적 가치와 정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그걸 섬세하게 영화에 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재능은 <노매드랜드>에서 정점을 찍었다. 198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는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기 전 에밀리 디킨스의 모교였던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도대체 왜 중국인들은 함께 모여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정치학을 시작했지만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장편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2015)와 두 번째 영화 < 로데오 카우보이 >(2017)를 연달아 만들었다. 배경, 인물, 주제, 배우, 연출방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연작이나 다름없는 이 두 영화에는 클레이 자오의 영화 세계를 떠받치는 주요 특징들이 모두 담겨 있다. 장편 데뷔작 <Songs My Brother Taught Me>는 - 국내 포털에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Brother’는 ‘형제’가 아니라 ‘오빠’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정식으로 상영된 후에 포털에 제목이 올라갔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아마도 <오빠가 가르쳐준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오빠와 여동생, 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우스 다코타의 파인 릿지 인디언 보존지구에서 살고 있는 10대 소년 조니인데, 그는 졸업 후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떠나 LA에 가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여동생이다. 한편,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지역에서 촬영된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의 주인공은 이제는 한물간 로데오를 사랑하는 브래디다. 그는 로데오 경기 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간절한 꿈을 포기하는데, 여기에도 핸디캡을 가진 여동생이 등장한다. 이 두 영화는 모두 가족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청년과 여동생으로 상징되는 가족, 그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이 두 편의 영화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동생은 마치 클레이 자오 감독처럼 느껴지는데, 감독은 이런 방식을 통해 그가 품었던 ‘가족주의’에 관한 질문과 그 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낸다. 클레이 자오가 담아낸 노매드의 세계 클레이 자오가 <노매드랜드>에서 창조한 ‘펀’이라는 인물 역시 상실감과 결핍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펀은 2편의 전작에서 창조한 두 청년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남편을 잃은 ‘펀’은 마치 이들의 40년 또는 50년 후의 모습 같다.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한 이 두 청년들은 평생 결핍과 상실감은 숨겨둔 채 살다가, 가족마저 사라지면 그들의 어깨에는 허무함이 하나 더 얹어질 것이고, 결국 그들은 평생을 부유하듯 살게 될 것이다. 뗄 수 없는 결핍과 상실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 이터널스 >에서도 변함없이 등장한다. 게이, 흑인, 애정 결핍, 치매, 청각 장애 등 너무 정치적이어서 오히려 재미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초능력과 함께 결핍을 부여받은 히어로들, 결국 지구인에 대한 애정으로 창조주를 배신한 그 히어로들은 영원히 상실감을 껴안고 살아갈 것이다. 클레이 자오의 세계에 존재하는 중요 인물들은 이런 상실감과 결핍으로 규정된다. 클레이 자오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과 함께 살았던 하지만 이제 망해버린 엠파이어를 떠난 펀의 이야기, 그리고 펀이 길 위에서 만난 노매드 노동자들의 이야기,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결핍과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는 도구로써, 미국 서부의 눈부시도록 쓸쓸하고 아름다운 실제 풍경을 영화 곳곳에 배치한다. 그는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약 5개월간 25명의 스텝과 함께 일곱 개 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표현법 때문에 너무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능한 비판이겠지만, 기억할 것은 아무리 고단한 인생이라도 삶의 숨통을 띄워주는 낭만의 순간들을 에너지원 삼아 한발 한발 전진한다는 것이고, 또한, 항상 슬픈 표정으로 있어야만 피해자가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늘 고통받고 힘든 표정으로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피해자에게는 피해자답기를 요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답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들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의도치 않게 사회가 약자와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약자성’ 또는 ‘피해자성’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펀의 내면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고, 그는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돈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편하게 정착해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다시 길 위에 선다. 이제 길 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주어진 노동을 하고, 밴을 타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차박’을 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진실하지 않거나, 그가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서부극으로써의 <노매드랜드>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의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펀’의 여동생이 던진 말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언니를 방어해주기 위해 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노매드들이 하는 일은 개척자들이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난 펀이 미국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서부극과 연결시킨다. 이미 클레이 자오는 서부극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가 공개된 후 언론은 이 영화를 ‘웨스턴’ 장르로 이해했고,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에 대해 ‘한 중국 이민자 출신의 영화감독이 미국의 가장 오래된 장르(웨스턴)를 혁신적으로 바꾸어냈다’고 평했다. 실제로 클레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도 웨스턴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이터널스> 전까지 자신의 모든 영화를 촬영했던 촬영감독 조슈아 제임스 리처드와 함께 <노매드랜드>를 촬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펀’이라는 인물은 결국 집을 떠나 황야로 걸어 들어가는 존 웨인의 현대적인 캐릭터이어야 하고, 존 포드의 고전 영화를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쇼트들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해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포획된 한 인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극에 등장하는 서부개척자들 또는 영웅들과 노매드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부극의 인물들은 도착과 정착을 원하지만, 노매드들은 떠남과 방랑을 원한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집과 마을을 지을 장소를 향해 전진한다. 그들은 항상 수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노매드랜드>의 노매드들은 정착했던 곳을 떠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수평선을 향해 가지만, 그 너머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은 길이다. ‘펀’이 분명하게 말했던대로 그들은 houseless지만 homeless는 아닌 것이다. 로드무비로써의 <노매드랜드> 그러므로 <노매드랜드>의 인물들은 정착하고 머물던 곳을 떠나 길 위에 선다는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기보다 오히려 로드무비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서부극은 마지막에 갈등이 해결되고, 로드무비는 끝날 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은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태반의 로드무비는 성장영화와 동의어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는 이런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다르다. <노매드랜드>의 펀은 길 위에 있지만, 목적이 없다. 그는 생존을 위해 길을 선택한 자다. 그의 목적은 방랑이다. 그래서 그는 정착을 두려워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두 번씩이나 정착할 기회를 얻는다. 한번은 여동생에게서, 한번은 남자친구에게서, 그러나 그는 편안한 침대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선다. 모두가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실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일부러 육체적 불편함을 선택하는 일은 그렇게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몬티 헬만의 마스터피스 < 자유의 이차선 >의 낭만주의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8년 파격적인 결말을 담은 전설적인 로드무비 < 이지라이더 >가 세상에 나온 지 3년 만에 나온 이 영화는 건조하고 불친절하지만 도전적인 로드무비이면서 <이지라이더>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다. 몬티 헬만의 최고 걸작이며, 영화사에서도 <분노의 총성>과 함께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로드 무비의 장르적 컨벤션을 전복시키는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이 왜 차를 집처럼 여기면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끊임없이 자동차 경주를 하면서 앞으로만 달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주한다. 목적지가 동부인 것 같지만, 왜 거기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 <자유의 이차선>이 내재하고 있는 주제는 이렇게 <노매드랜드>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두 영화 모두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차의 이미지로 끝이 난다. 물론 <자유의 이차선>이 한 발 더 나아가지만, 목적과 목적지 없이, 오직 차로 달리는 것만이 목표인 로드무비는 50년 후에 한 이방인 출신의 미국 감독의 손을 통해 환생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격변의 60년대를 방황하던 <자유의 이차선>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은 50년 후 <노매드랜드>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파산한 ‘노매드’의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 선 것이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제시카 부르너의 <노매드랜드>의 원작 첫 장에는 레너드 코먼의 문구가 써 있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클레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원작을 클레오 자오의 방식으로 변주한 영화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틈과 빛’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의 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집이 아닌 길을, 정착이 아닌 방랑을 선택한 자들에 관한 영화. 그‘노매드’들이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찾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그려냈다거나, 눈부신 미국 서부의 풍경 때문이 아니다. 살아갈 이유가 사라져버린 희망 없는 인생도 살아낼 수 있는 세계,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도 가능한 삶이 존재하는 세계, 전통적인 사회적 통념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를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긍정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쓸쓸한 세계에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오빠가 가르쳐 준 노래), 결국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며(로데오 카우보이), 살기 위해 길 위에서 노동을 하고(노매드랜드), 각자 결핍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사랑 때문에 창조주(부모)의 명령을 거부한다.(이터널스). 이렇게 클레이 자오의 세계 속에는 꿈 같은 거 없이 상실감과 결핍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존엄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좁은 틈으로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고 있다.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엄청난 수의 영화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정점은 2019년이었다. 2019년 한국 영화 및 해외영화 제작/수입 편수는 총 2,207편, 이 중 1,740편이 개봉했고, 다시 이 중에서 647편이 실제 극장에 걸렸다. 대략 하루에 5편의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공개되고 매일 1.8편의 영화가 실제로 극장에서 개봉한 셈이다. 여기에 프리미어 상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국고 지원 7대 국제영화제에서 2019년 한 해 동안 상영한 영화는 장편, 단편 합쳐 총 1,432편. 이외의 상당수의 작은 영화제들과 다양한 상영회들도 프리미어 영화나 국내 미개봉작들을 상영하곤 하니 이런 식으로 공개된 새로운 영화까지 다 합하면 이미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넷플릭스, 와챠 등의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오리지널 영화들과 독점 공개작까지 더하면 우리는 이미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는 영화 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 2월부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는 영화산업과 극장, 극장과 관객이 만나는 길목을 틀어막고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관객은 극장에 가는 걸 꺼리고, 관객이 없으니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점점 많아지고, 개봉 영화가 없어서 관객이 극장을 찾질 않은 악순환은 수개월째 반복되고 있다. 영화제 역시 대부분 축소 또는 온라인으로 운영되면서 상영작 수도, 참여 관객 수도 확연히 줄었다. 산업 구석구석에 이익을 분배하며 순환하던 영화산업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겨울과 함께 3번째 대유행이 시작되자 산업은 거의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고통 섞인 신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IT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전통의 극장산업과 경쟁하던 OTT 플랫폼만은 이 와중에도 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순환이 멈추고 산업과 극장이 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그동안 별로 상상해본 적 없었던 극장의 죽음에 대해, 극장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그리고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영화산업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명백히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산업의 위기다. 그러나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지난 10년간 영화산업은 일정한 틀에 맞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었고, 극장은 모든 영화를 똑같이 대한 적이 없었다. 독립예술영화는 스스로 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화계 전반에 걸친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이후 코로나19로 초토화되어버린 극장을 지킨 태반의 영화는 산업과 자본이 만든 상업 영화들이 아니라 극장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립예술영화들이었다.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산업의 위기는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산업이 자초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떠오른 질문.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다큐멘터리 전문 계간 웹진 <DOCKING>의 2020년 겨울호에는 지난 11월 6일 세상을 떠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를 기억하는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씨의 글이 실렸다. (http://www.dockingmagazine.com/contents/21/177/) 이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1970년 글라우버 로샤, 장 마리 스트라우브, 미클로스 얀초, 사이먼 하르톡이 로마에서 만나 정치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하르톡은 로셀리니가 '영화는 죽었다'는 말에 동의하는지를 물었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이렇게 대답한다. “산업이 사라지면 영화가 시작됩니다.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2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글라우버 로샤의 대답: “내 생각에 위험한 것은 바로 산업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유일한 예술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시나 소설을 인쇄하기 위해 편집자가 필요하더라도, 반면에, 각본은 출판될 수 없기 때문에, 회전하지 않으면 시장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화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970년 혈기 넘치던 최고의 청년 감독들이 통찰한 영화와 영화산업 사이의 모순은 20년 하고도 30년을 더 기다렸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코로나19는 지금 영화산업이 처한 위기의 결정적 요인이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군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 상업 영화 만이 살아남지 않겠냐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후 지난 125년간 끊임없이 위기를 겪어왔다. 그 위기는 대부분 신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창작자들은 매번 실패를 반복하며 그 위기를 극복했다. 지금의 이 위기 역시 누군가에겐 절망의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일 것이다. 산업의 지형도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영악한 지금의 산업이 쉽게 폐허가 될 리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영화든 예외 없이 산업일 뿐 아니라 창작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영화는 폐허 속에 묻히겠지만, 어떤 영화는 살아남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는 산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지켜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일 년 내내 머리 속에 가득했던 이런 생각들과 함께 골라낸 영화들을 담았다. < 공포분자 >(1986),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 라이트 하우스 >(2019), < 바쿠라우 >(2019), < 분화구의 두 사람 >(2019), < 애틀란틱스 >(2019), < 언컷 젬스 >(2019), < 트랜짓 >(2018), < 퍼스트 카우 >(2019), < 휴가 >(2020).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들의 리스트이며, 산업의 징후 같은 영화이거나 산업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이거나 산업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력을 이어갈 영화의 이름들이다. 리스트를 만들다가 다른 분들이 소개하지 않을 것 같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어진 영화가 두 편 있었다. 첫 영화는 아라이 하루히코의 <분화구의 두 사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끈적이게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묘하게 자유로웠고, 기묘하게 공허했으며, 기묘하게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며 공감을 이끌어냈다. 언젠가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가 공동으로 연출한 브라질 영화 <바쿠라우 Bacurau>다. 이 기묘한 영화에 처음 관심이 갔던 건 클레버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전작 < 네이버링 사운즈 >(2012)와 < 아쿠아리우스 >(2016) 때문이었다. 사실 <바쿠라우>는 클레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줄리아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영화적 동료로서의 두 감독의 관계(줄리아노는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은 전담했다)와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과 연결되는 영화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바쿠라우>는 실질적으론 클레버 감독의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내 예상과 달랐지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 건, 피칠갑을 한 이 영화가 지난 몇 년간 봤던 몇몇 중요한 장르 영화에서 발견한 징후와도 같은 특징-가장 파괴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장르 영화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쿠라우>는 <기생충>이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레 미제라블>과 함께 공동으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브라질의 정치적 이슈 때문에 칸영화제 기간 꽤 화제가 되었고,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결국 큰 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작년과 올해 훨씬 더 화제를 되었을 영화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올해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요즘, <바쿠라우>는 각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회자되고 있다. <바쿠라우>를 연출한 클레버 멘돈사 필루는 최근 10년간 등장한 남미 출신의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 리스트를 만들 때 가장 위쪽에 놓을 수 있는 몇 개의 이름 중 하나다. 남미 출신 감독으로는 2016년 이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1968년생. 올해로 53세다. 20대 중반부터 단편 작업을 하며 영화평론가와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모든 장편영화의 오프닝에서 볼 수 있는 CinemaScopio는 자신의 제작사 이름이지만 평론가 시절 만든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45세가 되던 2012년, 첫 장편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를 연출했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영화 <아쿠아리우스>는 201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직행했다.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였지만 수상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2016년 전 세계 거의 모든 베스트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 4년 만에 전 세계 영화계와 평단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다시 3년 후 세 번째 장편영화 <바쿠라우>를 완성했고, 다시 한번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받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오지에 있는 가상의 지명이자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다양한 인종, 연령, 성향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 공동체를 이끌던 고령의 흑인 여성 리더 카르멜리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함께 장례식을 치른다. 식이 끝나자 마을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역 정치인의 무능으로 진작에 수도가 끊긴 바쿠라우에 물을 나르던 물탱크 트럭이 총격을 받고, 통신 장애가 발생하고, 인터넷 지도에서 바쿠라우가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낯선 외지인들과 함께 원반 형태의 드론이 목격된다. 이 모든 일은 지역 정치인의 사주를 받고 중무장한 미스터리한 백인 일당이 저지른 일이다. 이들은 마치 사파리에 가서 돈을 주고 사냥을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냥의 대상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선발대를 보내 마을을 살펴본 이들은 별 죄책감 없이 게임을 즐기듯 바쿠라우를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려 한다. 위기를 감지한 바쿠라우 주민들은 도망자인 트랜스젠더 룽가를 중심으로 함께 힘을 모아 외부에서 온 잔인한 이방인들을 처단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바쿠라우’는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17세기 브라질, 농장에서 도주한 노예(시마론 Cimarron)들이 건설한 공동체 마을 ‘낄롱부 Quilombo’를 연상시킨다. 낄롱부를 건설한 시마론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를 결속시켰다. 때때로 노예들의 도주를 돕거나 농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현재 브라질에는 2천 개가 넘는 낄롱부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바쿠라우’는 ‘리믹스된 낄롱부 remixed quilombo’라고 할 수 있다. ‘바쿠라우’가 낄롱부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공간이라는 건 주민들이 밤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며 브라질의 전통 무예인 카포에이라를 추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인, 원주민, 흑인, 트랜스젠더 등으로 이루어진 주민들은 이 의식을 통해 저항의 역사를 공유하고 새로운 싸움을 준비한다. 그렇게 ‘바쿠라우’는 가난하지만 존엄한 공동체, 저항의 역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클레버 감독은 이 장면에서 <더 워드>(2010) 이후 음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존 카펜터의 인더스트리얼 뮤직 ‘Night’를 그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 음악의 뮤직비디오에서 백인 일당의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공포 영화의 거장에 대한 이같은 오마주는 이 영화가 어떤 장르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쿠라우>는 마치 민족지 영화처럼 가상의 역사적 공동체가 놓인 지리적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1/3지점부터 장르 영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중반에 접어들면서 SF, 스릴러, 호러, 웨스턴 등 온갖 장르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배경(선인장, 말, 총, 인종차별적 악당) 속에서 마지막까지 긴장과 힘을 유지하며 정부의 무능과 부패, 식민주의의 모순 같은 정치적 주제까지 그 세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점점 피범벅으로 변해가는 이 영화에서, 잔혹한 폭력은 약자의 생존과 권리가 위협받을 때 권력과 힘에 저항하여 공동체를 지켜내는 필수 도구로 묘사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장르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고, 평론가 출신의 클레버 감독은 이런 장르의 관습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설명하면서 ‘디스토피아적 웨스턴’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유사한 장르 영화나 타란티노의 몇몇 영화들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그러나 <바쿠라우>는 물론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장르 영화지만 오히려 장르의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여 완성한 강력한 정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9년 브라질의 남동부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지사는 범죄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무장 요원과 스나이퍼들을 시내 빈민가에 은밀하게 배치하여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0월 브라질 대통령으로 당선된,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치인 자이루 보우소나루는 경찰이 더 많은 범죄자를 사살해야 한다면서 범죄자들을 재판 회부보다는 약식 처형(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숫자는 2019년 한해에만 하루 평균 5명, 총 1,81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쿠라우>가 담으려고 하는 건 동시대 브라질의 이러한 현실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면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로 설정하여 ‘영화 속 현실이 곧 다가올 실제 현실과 별다를 게 없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는가 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지역 정치인 토니 주니어와 그의 사주를 받은 잔인한 백인 그룹을 통해 브라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복수극으로 영화를 끝낸 다음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검은 화면 위로 3줄로 된 자막이 뜨는데,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이 영화는 800개 이상의 일자리와 함께 국가와 문화, 산업의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창출했습니다.” 과거 국책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낯선 문구는 건조하고 단정하게 씌여있지만 칸영화제가 개최되기 약 4개월 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한 연설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자 풍자이며 냉소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바쿠라우>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식의 정치영화는 아니다. 클레버와 줄리아노의 방식은 훨씬 정교하고 유희적이며 영화적이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축된 영화적 서사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창조해낸다. 특히 클레버 감독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고 압축된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능하다. 장편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는 감독의 고향인 헤시피의 한 중산층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동네 건물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프란치스코와 그의 조카 주앙을 중심에 두고 동네의 안전을 위해 사설 경비 업체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마을의 미세한 변화를 담는다. 이 영화에서 쇠창살과 철제 대문, 감시 카메라와 사설 경비원 같은 현대적 안전장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적 모더니티는 이웃의 접근을 차단하고 중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동네는 피로 물든 식민주의 역사의 산물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공간, 피로 물든 폭포 속에 선 지주의 후예인 주앙의 모습, 그리고 역사적 피해자의 후손과 지주와의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담아내고 싶었던 정치적 의미를 극적으로 창조해낸다. <아쿠아리우스>의 핵심 공간인 주인공의 오래된 빌라도 마찬가지다. 음악 평론가 클라라는 지속적인 철거의 위협 속에서도 과거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집을 자본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싸운다. 문화와 역사의 아이콘인 클라라의 고집과 싸움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역사를 지키려는 저항과 투쟁의 몸짓인 셈이다. 영화는 유려하게 과거와 현재, 클라라의 집과 외부를 오가며 이 모든 걸 담아낸다. 클레버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공간의 실제 과거 사진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화적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헤시피의 옛 지명 페르남부쿠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연달아 보여주는 시퀀스로 시작하고, <아쿠아리우스>는 오버헤드숏으로 찍힌 해변 도시 헤시피의 과거의 모습 - 보아비아젱 해변의 모습과 오래된 차들로 가득한 길게 뻗은 거리, 거대한 고층 건물이 슬럼가를 대체하는 부감 쇼트의 흑백사진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쿠라우>에서는 마을의 작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과거 사진들과 리더 카르멜리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특히 <바쿠라우>는 공간의 지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남미, 브라질, 바쿠라우로 하강하며 좁혀들어오는 오프닝숏은 로컬리티가 고스란히 담긴 공동체를 세계의 중심, 서사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에서 시작되어 <아쿠아리우스>를 경유한 다음 <바쿠라우>로 수렴된 클레버 멘돈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의 세계는 시간이 축적된 영화적 공간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함께 역사를 소환한 다음, 강력한 저항을 촉구한다. 이 세계는 영화적 전통과 관습, 현실의 로컬리티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정교하게 뒤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기존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세계는 1970년 브라질의 선배 감독 글라우버 로샤가 가졌던 영화산업의 모순과 산업 논리가 가진 위험성, 이를 극복해야 하는 영화제작자의 숙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대가 영화산업과 영화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 저항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떤 답변도 알아서 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장르 영화의 전통 속에서 저항과 투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담아낸 <바쿠라우>는 다시 한번,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선언과도 같은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니라 믿음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그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가의 일상과 예술의 창작과정은 늘 대중의 궁금증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위대한 작품일수록 대중들은 잘 보이지 않은 그 세계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영화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가의 일생과 예술의 창작과정을 담아왔다. 대부분의 이런 영화(다큐멘터리)들은 남아있는 자료들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여 예술가의 삶과 예술 작품들을 번갈아 보여주는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주인공의 예술 세계를 담아낸다. 이렇게 재구성된 세계는, 그것이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극적 또는 예술적 과장을 피할 순 없다. 예술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예술적 과장을 가미한 자기 복제를 거듭하며 스스로의 신화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강화해왔다. 그러나 사실 예술가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거나 그렇게 비루하지만은 않다. 그들의 예술 작품 또한 크고 멋진 작업실에서 천재적인 영감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직장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또는 어렵게 마련한 작은 작업실에서 일상과 창작을 반복한다. 예술은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탄생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의 집필 과정에서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매일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장편 소설을 쓸 때에는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규칙적으로 쓴다. 더 쓰고 싶어도 20매 정도에서 멈추고,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도 어떻게든 20매까지는 쓴다. 장기적인 일을 할 때에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규칙직인 작업을 통해 예술작품을 탄생시켜온 한 화가가 있다. 이름은 이재헌. '그리고, 지우는' 방식의 회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탐구해 온 화가다.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 아들의 시간 >(2014)으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던 원태웅 감독의 세 번째 다큐멘터리 < 나의 정원 >(2019)은 이재헌 화가의 직업 화가로서의 일상과 하루키가 말한 그 규칙적 일상을 통해 탄생하는 예술, 그리고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주목한다. 같은 창작자로서 다른 분야의 창작자가 영위하는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원태웅 감독은 2015년 5월부터 약 20개월간 15일에 한 번씩 그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가 담아낸 그의 일상은 크게 세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세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첫 번째 세계인 화가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트에 가고, 아이와 놀고, 가족들과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고 TV를 본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다음 자신의 예술적 일상 속으로 이동한다. ‘보성 타일 인테리어’라는 간판이 달린 작업실은 영화가 담아낸 두 번째 세계이면서, 그의 예술적 일상이 지속되는 보금자리이자 그의 예술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 퇴근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그림을 구상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통화하거나,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고, 낮잠을 잔다. 영화는 낮에서 밤으로, 봄에서 겨울로, 그리고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세계 속에 존재하는 소소한 일상과 작품들이 스케치 되고, 채색되고, 지워졌다가 다시 채색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완성되는 신비로운 창작의 과정을 온전히 담아낸다. 그리고 여기에 화가 이재헌의 예술가로서의 내면과 예술적 여정을 형상화한 상상의 이미지들을 연결한다. 감독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된 화가의 내면과 공간의 기억은 이 다큐멘터리가 새롭게 창조한 세계이자,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마지막 세 번째 세계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형식 속에서 충실하게 일상을 담아내면서도 때론 대담하게 현실과 상상을 오간다. 그리고 세심하게 포착되고 가공된 시간의 변화와 사운드를 배치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미지와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감독의 이런 작업 방식은 그림을 그리고 덧칠하여 지운 다음 그 위에 다시 그리면서 예술적 내면을 그림에 축적해가는 이재현 화가의 작업 방식과 닮아 있다. 정리하자면, 부분적으로 한 콜라주 작품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하룬 파로키의 단편 <자라 슈만의 그림 Image by Sarah Schumann>(1978)을 연상시키고, 전체적으로는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하며,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온전히 담아낸 짐 자무쉬의 < 패터슨 >(2016)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나의 정원>은 매일같이 비슷하게 반복되고 지속되는 한 직업 화가의 일상, 그리고 자기 확신과 자기 의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꿈과 일상 사이에서 부유하는 예술가의 내면, 그리고 작품들이 완성되어 가는 창조적 과정을 한꺼번에 목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나면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오래되고 진부한 질문이 더 이상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동시대 독립 다큐멘터리의 지형도를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감히 2019년에 공개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중에서 단연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