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클루니의 표적
- 감독
- 스티븐 소더버그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조지 클루니, 제니퍼 로페즈, 스티브 잔, 돈 치들, 마이클 키튼, 낸시 아랜, 알버트 브룩스, 사무엘 L. 잭슨, 루이스 구즈만, 캐서린 키너, 빙 레임스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에 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 결핍이 필요하다 - 쇼펜하우어 SF의 변곡점 SF(Science Fiction) 영화가 ‘공상 과학 영화’로 번역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에스에프’라고 불리는 것 같다. 공상(空想)과 과학은 다른가? ‘공상 과학’의 어감은 과학이 첨예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임을 은폐하는 듯하다. 마치 ‘괴짜의 상상력’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자의 위치를 이동시킬 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공상 과학’은 사회적 위치성(포지션)을 공상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한다. 수많은 SF 영화가 있지만 나는 우주(외계인)와 지구를 대립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불편하다(솔직히 말해, ‘분개한다’). 대개의 SF에서 주인공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은 외계인과 친하든, 그들을 연구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대표한다. 실제로 미국은 지구를 ‘지킨다(지배한다)’. 그들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칭하면서 대외적 군사 개입을 “경찰 활동(police action)”이라며, ‘국내 치안’으로 생각한다. 한국전쟁 참전도 공식적으로 “경찰 활동”(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전 세계가 미국의 땅이라는 발상이다. 자기만 ‘지구의 1등 시민’, ‘제1의 성’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9․11 이전까지 국방부가 없었다.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는 우리나라처럼 자국 방위를 위한 부처가 아니라 전 지구를 대상으로 업무를 보는 곳이다. 9․11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기 땅이 침략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진짜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토방위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신설했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 외계인과 싸우는 지구의 대표가 ‘파키스탄인’이거나 ‘에콰도르인’인 영화가 있었던가. 닐 블롬캠프 감독의 <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년) 가 걸작인 이유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섹스나 감염 문제를 다룰 때 실험 대상은 백인 남성이 아니라 유색 인종이거나 여성임을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나오지 않는, 실종된 미국 우주인을 그린 < 그래비티(Gravity) >는 <디스트릭트 9>과 함께 SF의 역사의 한 챕터에 등장할 만하다. 더불어, <그래비티>는 우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이스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비록 중국이지만’)아시아 국가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우울증과 중력 내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첫 영화는 < 이 투 마마(Y Tu Mama Tambien, And Your Mother Too) >(2001)였다. 황홀했다. 나는 한동안 디에고 루나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나 친구들과 신나게 영화 감상을 나누지는 못했다(‘미남’ 배우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었다). 이후 두 배우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는 말할 것도 없다. 제작자로 참여한 < 비우티풀(Biutiful) >이나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 모두 굉장한 세계였고 <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 <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 >에 대한 내 의견은 사족이리라.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다. 나는 아직 <로마>(2018년)를 보지 못했고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지만, <그래비티>(2013년)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내 인생의 영화’다. 하지만 두 번 볼 용기는 없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직면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를 ‘호러’로 분류하면, 미친 짓인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비티>는 물리학과 실존주의를 융합하고 그 두 세계를 모두 넘어서, 제3의 지식을 만들었다. 우울증에 관한 설명이 그것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우울증은 묘사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보니,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다 보니, 이제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물론 우울증은 고대부터 있었다). 대개의 질병은 ‘원인’은 다양하고, 증상은 비슷하다. 그래서 증상을 통해 병명을 진단할 수 있다. 우울증은 반대다. 원인은 ‘하나’인데, 증상은 다양하거나 극단적으로 반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의사도, 환자도 진단이 어렵다. 불면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내 자는 사람도 있다. 폭식증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병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의 ‘body’는 본래 시체라는 뜻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인 듯하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어 욕창으로 사망하는 이도 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극한의 자신과의 투쟁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도 있으며, 심지어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마지막의 경우 오래가지는 못한다. 대개 육십 세를 전후하여 자살한다. 더는 그럴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모든 곳에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萬有引力, 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 중력(重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따르는 원심력이 더해져, 우리는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중력의 법칙에서 배제된 이들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다. 우울증의 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다니며, 먹고 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은 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지표면에서 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우울증은 살기 싫은 병이기 때문에, 몸과 땅이 붙지 않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기겠는가. 중력이 버린 몸. 자살은 이 증상으로 인한 질병사일 뿐이다. 마흔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삶을 지속하고 있는 내 친구는 말한다. “난 그때 죽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야? 그때 죽었는데, 내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알아? 매일 내 장례식에 다녀온 기분 알아?” 우울증 환자가 24시간 아픈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감정 상태에 ‘몰빵’되어 다른 인생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울증에 걸린 그 순간 이후의 삶은 잉여,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시간, 비참하고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약으로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인생이라는 배가 돌아다니기(움직임) 위해서는, 일단 정박(碇泊)할 곳이 있어야 한다. 정박할 곳이 없으면 이동하지도 못한다. 정박하지 않은 배는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받는다. 배는 서서히 부서지고 부식된다. 살려는 의지와 죽음의 욕망(‘충동’이 아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것이다) 사이에서의 투병 생활은 매 순간 ‘선택’의 압력에 시달리는 상태다. 이때, 선택은 자유 의지로 하는 선택이 아니다. 기분이 날뛰며(업앤 다운이 반복) 기진맥진해지는 기분 장애(mood disorder)의 상황이다. 내가 아는 우울증 환자는 이 병으로 인해 그녀가 평생 노력해서 얻은 ‘좋은 직장’을 잃었다. ‘성취’가 끝나자마자 질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행복한 기억이 없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지, 한국을 떠날지, 지구를 떠날지. 지구를 떠난다면 갈 곳은, 단 한 곳 우주이다. 그녀는 매번 ‘선택’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조언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한없이 응대할 사람은 없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중력이 없어서 생존 가능한 공간, 우주 우주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지구와 달리 우울증 환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가 배경인 <그래비티>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구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중력이지만, 첨단 장비가 끊어진 중력과 자신을 연결해주니 발버둥 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지구에서 이 연결은 사람과 사랑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끈이다. 우주의 무중력은 지구의 중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은 같지 않다.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하는데, 나누지 않아서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슬프고 기쁘고 우울하고 들떠 있다. 다양한 기분 상대를 산다. 그리고 누구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약간 우울한 사회, 고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反사회적 인간의 조증(躁症)이 판치는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대로, 안정된 삶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우울, 걱정, 슬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이다. 이런 우울한 상태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정신 질환(mental disease)과 신체적 질병(physical disease)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사회는 유독 ‘정신병자’와 ‘암’ 환자를 다르게 생각한다. 둘 다, 고통받는 몸(body in pain)인데도 말이다. 정신 질환은 가볍게 취급되거나(“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반대로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정신병자가 탈출했다!”)이라는 식의 극단적 인식을 오간다. <그래비티>에서 산드라 블록은 아이를 잃은 전문직 여성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누가 우울하지 않겠는가. 비통하지 않겠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애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이다. 반면,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의학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진전될 수 있다. (일견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이 영화에서 그녀가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구에서는 땅을 디딜 수 없었던 그녀가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우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여행(journey)하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우리가 우울할 때 혹은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두 경우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집에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동과 운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견해가 다른데,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주, 가장 먼 이동이다. ‘우울과 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한 통찰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시리아나(Syriana) 이 영화에서 어떻게 조지 클루니를 빼놓을 수 있을까. < 시리아나(Syriana) >, < 마이클 클레이튼(Michael Clayton) >,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를 보길 권한다. 특히 <시리아나>를 강력히 추천한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반미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이며, 인생의 바닥을 수십 번 치고도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매력적인 루저이며, 패배를 반복하고도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을 연기한다.
< 헤일, 시저! Hail, Caesar!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감독 | 조시 브롤린, 조지 클루니, 엘든 이렌리치, 랄프 파인즈, 요나 힐, 스칼렛 요한슨, 프랜시스 맥도먼드, 틸다 스윈튼, 채닝 테이텀 이 영화를 기대하는 모든 이유가 ‘코엔 형제의 신작’이라는 네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장르의 관습을 아무렇지 않게 뒤틀며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빗겨난다. 그 예상치 못한 길의 끝에는 우리네 삶의 소소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 헤일, 시저!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든 대작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주연배우 베어드(조지 클루니)가 사라진다. 이에 할리우드의 해결사 에디(조시 브롤린)가 그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진실 찾기는 늘 보잘것없는 답을 구하는 데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요지경 같거나 허무한 풍경 그 자체다. 그렇다면 <헤일, 시저!>가 그리는 그 풍경은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찬란했던 모습일 테다. 과연 코엔 형제가 지금의 스타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바라본 할리우드 황금기는 어떤 시대일까. < 워 머신 War Machine >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 | 브래드 피트, 벤 킹슬리, 에모리 코헨, 토퍼 그레이스 < 트리 오브 라이프 >(2011) < 머니볼 >(2011) < 노예 12년 >(2013) < 셀마 >(2014) < 빅쇼트 >(2015)로 확실해진 사실 하나.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실험적이며, 완성도 높고, 문제의식 가득하며, 대담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는 바로 플랜B라는 사실이다. 맞다. 브래드 피트가 소유한 바로 그 영화 제작사다. < 워 머신 >은 플랜B가 2016년에 선보이는 코미디 전쟁 영화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의 이야기를 쓴 동명 논픽션(2012)이 원작이다. 맥크리스털은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돼 사령관직을 사직했다. 플랜B는 이 영화에서 맥크리스털(브래드 피트)이란 인물을 통해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얼마나 신랄하고 기발하게 풍자할까. 더욱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이는 호주의 기대주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이다. 최근작 < 더 로버 >(2014)는 실망스러웠지만, 그의 첫 장편 < 애니멀 킹덤 >(2010)이 안겨줬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플랜B가 선택한 미코드 감독의 연출력을 한 번 더 믿기로 한다. < 곡성 > 나홍진 감독 | 곽도원 , 황정민 , 천우희 첫 장편 연출작 < 추격자 >(2008)로 강렬하게 증명했듯, 나홍진 감독은 한국영화 특유의 사실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장르의 박진감을 증폭하는 전략을 쓴다. 그의 두 번째 장편 < 황해 >(2010)는 그 실험이 더 극한으로 치달았던 작품이다. 연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구남( 하정우 )의 수난기는 사실적이다 못해 극단적이었고, 대형 트럭이 맞부딪치고 나뒹구는 액션 장면은 기존 한국영화 속 자동차 액션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뛰어넘겠다는 야심이 엿보였다. 그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극단적 사실성과 장르적 쾌감 모두 배가하려는 <황해>의 시도는 그 둘의 불균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연 나홍진 감독은 <황해>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 곡성 >이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기이한 소문과 사건을 그리는 미스터리 영화라는 것밖에, 지금으로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 지독한 감독의 절치부심이 어떤 작품을 낳았을지,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실험의 결과가 궁금하다. <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 자비에 돌란 감독 | 가스파르 울리엘, 나탈리 베이, 마리옹 꼬띠아르, 레아 세이두, 뱅상 카셀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이 그저 ‘젊고 잘생기고 재능 있는 인물’에 열광하는 힙스터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돌란 감독은 < 마미 >(2014)를 통해 똑똑히 증명해 보였다. <마미>에서 보듯 그의 영화에는 흡사 뮤직 비디오 같은, 젊고 감각적인 영상이 있는가 하면, 낡고 나이 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한눈에 세상을 뒤흔드는 사랑에 빠지는 순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다. 매혹의 뒤편에 공포와 슬픔을 그리고, 희망의 뒷면에 절망을 새긴다. 돌란은 한마디로 똑 떨어지는 단순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단지 세상의 끝>은 만드는 영화마다 자신의 세계를 한 발씩 넓혀온 돌란이 <마미> 이후 선보이는 신작이다. 1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작가 루이스(가스파리 울리엘)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 안에 돌란의 더 넓은 우주가 담겨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촬영현장 < 레스터 버티컬 Rester Vertical > 알랭 기로디 감독 | 크리스티앙 발레트, 인디아 헤어, 로르 칼라미 2013년 한 영화제에서 알랭 기로디 감독의 < 호수의 이방인 >을 봤을 때를 기억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노골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호숫가에서 벌어진 살인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그 무엇도 거리낄 것 없는 대담한 표현과, 한 순간 영화의 분위기를 뒤흔드는 강렬한 연출로 알랭 기로디란 이름을 관객의 뇌리에 박아 넣었다. <호수의 이방인>이 등급 심의 문제로 여전히 국내 개봉을 못하고 있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기로디 감독은 그동안 벌써 다음 영화의 촬영을 끝냈는데 말이다. 그의 신작이 바로 < 레스터 버티컬 >이다. 그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비밀에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집에 가까이 가는 긴 여정에서 믿기 어려운 것을 믿게 되는 광경을 그리고자 했다.” 배짱 넘치는 그의 신작을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한 말이다. 올해 영화제에서 볼 수 있기를 첫손에 꼽는 작품이다.
2D 애니메이션이 정지된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을 채워준다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생명을 얻은 무생물을 마주하는 쾌락을 선사한다. 이 쾌락은 ‘실제가 아니라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 없이, 인형이 움직인다던지 사람이 날아다니는 등 존재할 수 없는 광경의 연출이 가능한 스톱모션은 실사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때문에 스톱모션에서 어느 정도의 부자연스러움과 조악함, 그러니까 ‘가짜 티’는 굳이 숨기지 않아도 좋다. 환상과 실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톱모션 세계의 묘미는 가짜가 용인되는 데 있으니까. 로알드 달의 동화 《멋진 여우씨》를 원작으로 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 판타스틱 Mr. 폭스 >는 그 쾌락의 지점을 영리하게 짚어낸 여우같은 영화다. 《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 《 찰리와 초콜릿 공장 》 등 판타스틱 영화의 단골 원작으로 쓰이는 로알드 달의 동화와 <로얄 테넌바움>, <다즐링 주식회사> 등의 영화에서 결핍된 인간 군상들을 그려온 웨스 앤더슨의 만남은 너무나 사람 같으면서 지극히 야생동물인 Mr. 폭스를 만들어냈다. 닭털이를 업으로 삼아오다가 처자식이 생기면서 신문 칼럼니스트로 전업해 고상하게 살고 있는 중년 여우다. 그는 번듯한 슈트 차림에 뻔뻔하게 이족 보행을 하고 신문을 본다. Mr. 폭스 역을 위해 태어난 듯한 조지 클루니의 목소리는 사람보다 여우가 젠틀하고 섹시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준다. 반면, 식탁 위에 정숙하게 차려진 식사를 으르렁대며 뜯어먹고 굴착기보다 빠른 속도로 땅을 파는 모습은 영락없는 야생여우다. 의례 인간이 동물 캐릭터를 치장할 때 덧붙이는 귀여움도 그들의 외모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불완전한 의인화가 주는 기괴한 매력과 조악한 움직임은 가짜의 ‘환상’을 보여준다. 반면, 소품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동물들이 입고 있는 옷, 집 안의 가구, 건물 등의 재질과 디테일은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다. < 판타스틱 Mr. 폭스 >는 스톱모션이라는 기법 안에서 ‘진짜’와 ‘가짜’ 사이의 간극을 장점으로 끌어안아 동화책과는 다른 매력을 갖게 됐다. 어설픈 교훈을 내세워 착한척하지 않는 쿨한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장기 ‘골탕 먹이기’는 애니메이션에도 잘 살아있다. 그 진가는 Mr. 폭스가 닭털이 여우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택하면서 발산된다. 그는 농장주 3인방 보기스, 번스, 빈의 거대한 농장을 상대로 도둑질을 일삼고, 인간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훔친 여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숲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Mr. 폭스와 동물들은 더 치밀하고 과감하게 농장으로 침투하지만 이야기가 조롱하는 대상은 Mr. 폭스가 아닌 사회의 권위가 만들어낸 정의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야생동물의 편에 서서 엄숙한 권위만 남은 인간들이 골탕 먹는 것을 관람하며 낄낄거리게 된다. 물론 우리가 거들고 싶은 부분은 동물들의 권익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반듯함을 거부하고 생긴 대로 사는 삶에 대한 응원이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도발이 불편하지 않다면 스톱모션의 다듬어지지 않은 영상도 매력 있게 느껴질 것이다. 오히려 스톱모션을 선택했기에 < 판타스틱 Mr. 폭스 >는 가장 판타스틱한 방법으로 동화책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