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측만
- 감독
- 조현철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조현철, 성다솜, 최아름
사진: “ 너와 나 ”, 서울독립영화제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 Original message ---------- From: "함연선" Date: 2025-03-XX XX:XX Subject: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박현" 두 분께, 안녕하세요, 채연 님, 현 님. 날이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지난달 지원했던 비평매체 지원사업 공모 결과는 오늘 발표 날 줄 알았건만, 다음 주 중이나 되어야 나올 예정인가 봅니다. 이제 슬슬 마테리알 10호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메일을 드립니다. 10호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가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지난 5년간의 마테리알 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10호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독자층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잡지 자체의 완성도도 높아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뭔가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불안에 종종 시달립니다. 요즘 특히 더 그렇네요. 2019년 창간 당시 마테리알의 원동력이 되었던 기존 예술비평 제도에 대한 반발심과, 그 무모했던 열정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아서일까요? 돌이켜보면, 창간 초기 마테리알의 태도는 꽤 도전적이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처음 개최한 행사인 창간 기념 집담회 홍보문에는 “오늘날 한국 비평의 고지혈증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나눠가져야 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문구가 들어있었죠. 또 “과연 (젊은 세대가 죽이고 싶어하는 아버지가) 죽일 만한 아버지인지 먼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선배 평론가의 말에, 우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죽일 만한 아버지’인지는 자식들이 판단할 문제다” *주1 라고 꽤 건방지게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 [마테리알 창간기념 토크] 비평의 비평 – The Book Society ”, 텀블러 당시 저는 기존 비평계의 권위(일종의 ‘아버지’)에 도전하는 그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칼이 아무리 무디더라도, 그것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무모하게 큰 야심과 정확하지 못한 방법이 한데 섞여 있었던 셈입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마테리알의 초기 에너지는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에 크게 빚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다른 종류의 야심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우리가 추구했던 야심이 높고 커다란 것이었다면, 이제는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야심은 정확하되 비루하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크기에만 집착하여 막연하고 허황된 말로 시끌벅적한 마음만큼이나, 너무 정확하고자 하여 오히려 작아지는 마음 역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야심이 크기와 상관이 없다면, 무엇과 상관있는 것이어야 할까요? 이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1975)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1975년 개봉 당시에 크게 흥행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것은 흥행을 향한 상업적 계산이나, 혹은 반대로 소위 ‘실험적’인 작업들에서 보이는 관습적인 작가적 야심이 아닙니다. 거칠게 말해보자면 철저히 실패하는 야심, 절망하는 야심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이내 야심을 가진 절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분은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언제든 편히 답장 주세요. 두 분 모두 평안한 하루 보내시기를요! 연선 드림 ---------- Original message ---------- From: "박현" Date: 2025-03-XX XX:XX Subject: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함연선" ‘절망하는 야심’이라는 연선 님의 표현이 인상 깊어 저도 <바보들의 행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전우형은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을 국책 새마을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 아내들의 행진 >(1974)에 대한 패러디 로 보고 있는데요. *주2 근면한 아내들이 마을을 변화시켜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아내들의 행진>에서와 달리 이 영화에서 ‘바보들’의 ‘행진’은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죠. 인물들의 서사뿐 아니라 영화의 구성에도 뚜렷한 진행 방향이 없어요. 맨 처음 오프닝 시퀀스에서 무음 상태로 재생되는, 착착 맞아떨어지는 군대 행진의 모습을 점차 깨부수는 게 이 영화의 목표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어떤 거창한 주제 또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발맞춰 나아가는 진행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거부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연선 님의 말대로 실패와 절망을 제대로 선언하겠다는 야심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청년기의 삶은 생각만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잖아요. 어린 시절의 순진한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의 보잘것없음에 적응해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냉혹한 시대 속에 무력감을 겪는 청년들에겐 더더욱 그 낙차가 컸겠죠. 그런 실망 속에서 어떤 이들은 ‘바보’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영화는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설렘을 안고 연극 무대에 오른 영자( 이영옥 )는 고작 우스꽝스러운 하인 역할로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데요. 연극이 끝난 후 쓸쓸한 실망에 잠긴 영자의 표정도 인상적이었지만, 더욱 기억에 남은 건 이어지는 술자리 씬이었어요. 이야기의 진행에 별 역할을 하지 않는 영철( 하재영 )의 술주정에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시간을 할애하잖아요. 빨뿌리 장사를 해서 돈을 잔뜩 벌겠다는 허무맹랑한 꿈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늘어놓죠. 하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이것이 단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으며 영철은 빨뿌리 장사를 하지도, 돈을 벌지도 못할 거라는 음울한 예감만이 더욱 강해져요. 그 꿈의 종착지가 ‘고래사냥’이라는 허상이기에 더더욱요. 연극이 끝난 후, 하인 역할을 한 영자의 쓸쓸한 표정 / 술자리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영철 영철은 영화 초반부터 어딘가 부족한 말더듬이로 등장하죠. 하지만 모든 것을 그의 캐릭터성 탓으로 돌리기엔 자꾸만 영화 외부를 가리키는 힌트가 눈에 들어와요.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잠깐씩 등장할 뿐이어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영화가 암시하는 시대상을 유추해내기란 어렵지 않죠. 이상을 가진 청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 영철이 그런 사회의 희생양임을 영화는 말하지 않고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영상시대》 1호에 실린 하길종의 글에 담긴 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듯해요. “그러나 단지 영화적인 <재미>를 통해 스토리를 서술하는 일차적인 차원을 떠나서, 새 세대의 영화는 인간의 가치관과 기존 모랄을 재고하고 날카롭게 현실을 관찰하도록 대중을 선도하는 힘이다.” *주3 하지만 영화의 새로운 대안을 꿈꿨던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며 흥행에 실패하다가 결국 요절했고, 그가 몰락한다고 보았던 “흥밋거리” 위주의 할리우드 영화는 되려 끈질기게 살아남았죠. 하길종에게 영향을 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역시 결국 취사선택되어 주류에 흡수되었고요. 이전에 채연 님이 ‘독립’이나 ‘대안’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작한 움직임들이 변질되지 않는 방법은 그 전에 소멸해버리는 것뿐인 듯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요. 마테리알도 결국 소멸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싶어 당시엔 잠시 울적한 기분이 되었는데요.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은 늘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잖아요. 70년대의 청년영화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존재했기에 훗날 그 자리에 새로 태어난 또 다른 대안이 있을 테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필요한 것을 하자는 결심이 서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소멸하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마테리알이 우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남아 있을 테니까요. 혹은 어쩌면…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리를 계속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 Original message ---------- From: "박채연" Date: 2025-03-XX XX:XX Subject: Re: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현", "함연선" 두 분 메일을 읽고, 저도 서둘러 <바보들의 행진>을 보고 왔습니다. 영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아가는 진행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거부”한다고 현 님이 말씀해주셨는데, 정말 잘 표현해 주신 듯해요. 조금 다른 말일 수도 있는데, <바보들의 행진>을 보며 저는 < 너와 나 >(조현철, 2022)가 계속해 떠올랐어요. 정확히는, <너와 나>에 관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 *주4 이요. 이 비평에서 문제시하는 <너와 나>의 연출이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보이더라고요. 잘 아시는 대로 김병규 평론가는 <너와 나>가 “넘칠 만큼 치장되어” 있다며 “화면 안의 요소들은 자연스러움을 훼손하는 의식적인 ‘의도’로 (...) 화면에 돌출되어 있다”라고 평하는데요. <너와 나>에서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사물들이 등장한다면,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사건들이 거듭 등장해요. 서사의 진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맥락 없는 사건들이요. 이를테면 병태( 윤문섭 )와 영자가 처음 만난 날, 영자가 (병태에게 거짓말하면서까지) 교수를 찾아가 시험 점수를 정정해 달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 축구경기 중에 병태가 공을 차는 순간 운동화 한 짝이 날아가고 돌연 화면이 멈추는 장면이라든지, 교내에서 각종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장면 말이에요. 현 님이 짚어주신 대로 이상하리만치 긴 이런 장면들 덕에, <바보들의 행진> 또한 김병규 평론가가 <너와 나>를 칭하듯 “은유적이고 우회적”이라고 볼 수 있겠더라고요. <너와 나>에서 조현철 감독이 “통제”의 주체가 되어 연출과 편집을 행한 데 반해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이라는 (진짜) 통제의 대상이 되어, 화면이 삭제되고 대체되면서 이런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죠. 특히, 수업을 듣다가 응원전 연습을 위해 교실을 우루루 빠져나가는 학생들은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시위에 참여하러 가는 것이었다고 해요. 영철의 권유에도 꿋꿋이 교실에 남아 수업을 듣는 병태는 홀로 괴로워하는데, 이때 병태의 모습과 스포츠 경기 장면을 교차해 보여주죠. 검열받지 않은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스포츠 경기가 아닌 학생운동 현장이겠고,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병태의 심리상태가 꽤나 직접적으로 드러났을 테죠. 병태의 운동화가 하늘로 날아가며 멈춘 화면 각종 스포츠 경기 장면과 교차되는, 홀로 교실에 남은 병태의 모습 하길종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숨겨 매끄럽게 다듬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음매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이 영화가 검열되었다는 사실을 보란 듯이 드러내 보이죠. 이러한 맥락 없이 영화의 결과물 그 자체만 본다면 되게 전위적인 영화 같아요. 느닷없고 당황스러운 장면들이, 김병규 평론가의 말 그대로 “돌출되어” 보이는 거죠. 검열이 없었다면 <바보들의 행진>이 조금은 더 밋밋하고 직접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검열로 인해 영화가 어떤 형식적 효과를 얻게 된 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네요. 영화를 보다 보면 “엥?” 하는 순간이 있죠. 푹 빠져 몰입하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장면에 당황하는 순간들이요. 분명 <너와 나>를 보는 내내 김병규 평론가는 물론 많은 관객들이 “엥?”들을 경험했을 테죠. 저도 그랬고요. 김병규 평론가의 비평은 이런 장치들, 영화 속 은유와 상징들이 모두 일정한 의미값을 갖고 영화 속에서, 또 서사의 흐름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고 전제하는 듯해요. 하지만 저는 이들의 역할이, 서사 중간중간에 그런 긴장감을 줌으로써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라고 봐요. 몰입을 방해하면서, 서사가 아닌 영화에 주의를 다시 집중시키는 핑거 스냅 같은 역할인 것이지요. (“야! 너 지금 서사에 너무 몰입하고 있어”) 다른 말로, “자연스러움을 훼손”함으로써 내가 보는 화면이, 실제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역할 말이에요. (“야! 이건 영화야”)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를 해석해 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과연 그러려고 애써야 할까요? <너와 나>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두 어린이는 과연 누구를 상징하는지,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왜 물웅덩이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병태가 축구경기를 하는 장면은 어떤 의도로 삽입되었는지, 하키 경기 장면은 왜 혼자 화질이 다른지, 이렇게 물어가며 감상해야 하나요? 그걸 묻고 답을 찾을 동안 영화는 계속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엥?”이라는 감각이 추임새를 넘어서서 문장이 되고 “이건 어떤 의미일까? 무얼 상징하는 걸까?” 묻는 순간 관객은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 판 함정 말이에요. 그럴 때는 몰입하던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혀 자세를 고쳐 앉고 미간 사이 힘을 빼, 함정에서 얼른 벗어나 다시 영화로 되돌아오면 되지요. <너와 나> 중 / <바보들의 행진> 중 저화질로 재생되는 하키 경기 장면 (사진: “ [너와 나] 메인 예고편 ”, 유튜브 너와 나) 마테리알의 야심에서 시작해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다시 돌아가자면, 이 기회를 빌려 마테리알을 독자로서 접하다가 이제는 내부인원이 된 제 입장을 말씀드려봐도 좋을 듯해요. 저에게 마테리알은 연선 님 표현대로 “높고 커다란” 야심으로 무장하고 돌진하는 듯 보였어요. 마테리알이, 혹은 비평이 모종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는 효능감이 돋보였죠. 불만이 많고, 목표지향적이며, 대범합니다. 편집부원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마테리알은 실로 변화를 꾀하고, 불만이 많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며, 쉽게 겁먹지 않습니다. 마테리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연선 님이 특히 ‘동료’를 많이 언급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쩌면 마테리알의 동력은 개인의 야심이 아니라 공동의 야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포츠 경기 전, 선수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포개 승리를 다짐하는 이미지가 스칩니다. 야심의 크기가 아니라, 야심의 겹을 따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채연 드림 ---------- Original message ---------- From: "함연선" Date: 2025-XX XX:XX Subject: RE: Re: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박현" 두 분께, <너와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은 영화 내에 상징적인 것을 과하게 배치해 놓는 창작자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다 오히려 반감의 대상이 가진 논리에 포섭되어 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상징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다가, 끝내 많은 것을 상징으로 읽어내고야 마는… <너와 나>가 세월호 사건을 다룬다는 사실은 개봉 전부터 명약관화한 사실이었고, 영화의 뽀얀 화면, 컨테이너 박스에 갇힌 개들, 물웅덩이에 빠진 브라키오사우루스 인형 등은 세월호에 대한 놀랍도록 뻔한 상징이죠. 하지만 그처럼 쉬운 상징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이 상징이라는 사실을 금방 지나칠 수 있지 않나요? 그리고 영화적 현실로서 그것들을 감각할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채연 님이 말씀 주신 것처럼 상징을 읽어내는 와중에도 영화는 계속되고, 그렇기에 상징이나 의미를 발견하는 비교적 어려운 책무를 맡는다는 사실이 비평가들에게 중요한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기능에 대한 확신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예전에 같은 영화나 영상작품을 여러 번 보면서,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유사-전문성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일반 관객들은 굳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안 볼 테니까요. 그들이 다른 데 배분할 시간들을 나는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데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른 기능을 제공한다, 는 생각으로 불안을 달랬던 셈이죠.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해 비평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비평가로서의 저 개인보다는 마테리알에 집중하고 싶어져요. 얼마 전에 마테리알 7, 8호의 객원편집인이기도 했던 독립기획자 김신재 님께서 건넨 말이 생각나요. “점점 작품에 부속된 작품론을 안 다루고, 어떤 비평가의 작업을 연속선상에서 보고 비평적 야심(?)을 밀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속도와 사이클을 따라서 뭔가를 계속 뽑아내야 할 때가 많으니까요. 작가나 비평가 모두 창작의 고민과 방법론, 비평적 과제를 자기 속도와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조금 정신 차렸어요.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뭔가 막혀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자꾸만 스스로의 야심에 대해서만 고심해서였단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좁은 의미에서의 동료들의 야심뿐 아니라 같은 그라운드에서 각자의 포지셔닝을 가져가고 있는 타인들의 야심에 대해서 보다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들의 야심을 엮어내는 게 현재 마테리알의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립’이나 ‘대안’ 등의 영역에 속한 움직임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외부의 저항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동질적인 주변의 사랑—또는 그 비슷한 것—에 파묻혀 괴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합니다. 언제나 커다란 야심을 품으시길… 메이웨더와 싸운 맥그리거처럼…” 마테리알 7호 피드백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독자 코멘트를 요즘도 종종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심은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일 텐데요, 물론 위의 코멘트를 남긴 익명의 독자분은 마테리알로 하여금 “커다란 야심”을 가지길 요청하셨지만, 저는 앞선 메일에서 말했듯 우리의 야심을 ‘크기’와는 떨어뜨려 생각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맥그리거의 야심이 크기와는 관련 없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하길종 감독의 ‘절망하는 야심’과도 공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길종 감독은 검열로 인해 산산조각 난 영화의 이음매를 오히려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검열이라는 현실 자체를 폭로했고, <너와 나>는 때로는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솔직함과 직접적인 ‘상징’으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밀어붙였죠. 두 영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이 놓인 현실과의 관계를 정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닮아있습니다. 마테리알의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 역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만듦새보다는 지향점을 보려는, 자본과 제도와 관습을 걸고 넘어지려는 비평의 몸짓 말입니다. 작품이 던진 스루패스의 궤적을 감각하고, 우리도 그 공간으로 달려 나가는 열린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읽히느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키느냐의 ‘크기’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라운드 위에서 얼마나 예리하게 기존의 흐름을 간파하고, 얼마나 과감하게 새로운 공간을 향해 패스를 보내거나 패스가 보내질 곳으로 달려가느냐의 문제겠죠. 이런 관점에서 마테리알 10호는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면서도,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라는 비전에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을 더해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꾸밈없이 나누는 이 서신교환처럼요.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방금 전에 비평매체 지원사업 결과가 나왔어요. 지원이 확정되었습니다! 영화계에서는 비평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어서 결국 미술계를 통해 길을 찾아야 했네요. 다들 너무 고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좋은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마테리알의 실무가 아닌 추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여러분과 이야기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조만간 오프라인에서 뵈어요! 연선 드림 <바보들의 행진> 중 / <너와 나> 중 *** 주1. 이예지, “TEXT TEXT TEXT”, 《아레나》, 2020. 5. 13. 주2. 전우형, “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의 검열 표상 ”, KMDb, 2018. 1. 28. 주3. 하길종, 「새 세대•새 영화•새 정신」, 『영상시대』 1호, 1977. 주4. 김병규, “ [비평]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 ”, 《씨네21》, 2023. 12. 6. 마테리알(영상비평지) l 마테리알은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 박채연, 박현, 함연선으로 구성된 마테리알은 동시대 무빙이미지를 중심으로 미술계와 영화계 및 그 주변부를 아우르는 비평 활동을 펼친다. 축구에서의 스루패스가 상대팀 수비진의 틈새를 뚫어 새로운 기회를 만들듯, 마테리알은 예술계에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 영상비평지 《마테리알》 발행을 중심으로, 온라인 지면 의 비평적 텍스트 발행과 오프라인 행사 ‘오픈 스페이스’ 등을 통해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비평적 상호작용을 모색한다.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중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 유운성, 「우정의 이미지들」,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이 글은 2024년 12월 중순에 쓰이고 있다. 12월 3일의 계엄령 선포 이후라는 뜻이다. 연말의 나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해의 영화들을 순위 매기거나 놓친 영화를 돌아보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간 이미지들을 되짚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는 했었던 것인데, 반대로 요즘의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생중계되는 담화와 현안 질의 영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와중에 마감 일자는 다가왔고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청탁을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기분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원래 준비했던 글의 주제와 지금의 내 상태가 관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꽤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준비하던 글을 버릴 수는 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준비했던 대로만 쓰면 왠지 그건 평정심이라기보다는 뻔뻔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 섞인 걱정을 하고, 그럼 준비했던 대로만 쓰는 건 뭔가 아니다 싶고, 굳이 올해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사례를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와 관련된 옛날 얘기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단일한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비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유의미한 의견으로 정교히 언어화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는 각자의 개별적 경험이 스며들며 그 분리 불가능한 총합은 또 하나의 경험이 되어 각자의 마음에 남기 마련이다. 김대환 의 장편 데뷔작 < 초행 >(2017)이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개봉하게 되면 꼭 보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어떤 내용인지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편이 좋고 결말이 참 인상적이라는 말을 더해 주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스터나 시놉시스를 보건대 장르적이거나 플롯 운영에 있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는 아닌 것임이 확실할 텐데,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초행> 포스터와 스틸 <초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결말부는 2016년 가을 무렵부터 2017년 중순까지 이어졌던 광화문 촛불 집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7년 차 청년 커플을 따라가던 픽션의 세계에 돌연하게 쏟아지는 저 리얼리티의 막대함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단순히 허구와 현실의 구별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개념적 차원 그 이상의 가치로 빛난다고 느꼈는데,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가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KOBIS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내가 열심히 광화문 광장을 오가던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촬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이 영화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와 시간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망각하기 어려운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하고 보았지만, 그 물리적 간극을 상쇄시킬 정도로 <초행>의 끝이 주는 감흥은 생생하면서도 생경했다. <초행>에 기입된 광화문 광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한편으로 생경했던 이유는, 영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다는 모종의 관습을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거의 생중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은 환기되는 이상야릇함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작품 내에서 세계를 뒤집어놓는 급속한 반전처럼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난히 이어지던 이 커플이 광장으로 향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상황은, 이야기와 멀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끈끈히 달라붙으며 세계를 입체화하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영은 그 역할을 맡은 조현철 과 김새벽 으로 존재를 전환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삼척, 인천과 특별한 위계서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나의 사적인 경험, 역사적 현실, 영화적 허구가 한 데 섞여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이 기묘한 감각을 여전히 잊기 힘들다. <태풍클럽> 일본어 포스터(일부)와 국내 개봉 포스터 그 ‘너무 이른’ 경험으로부터 7년이 지나 2024년이 되었다. 올해는 정반대로 ‘너무 늦은’ 경험을 했다. 소마이 신지의 < 태풍클럽 >(1985)이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영상과 자막을 구했으며 이불에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한 영화 속의 거친 면모에 받았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태풍클럽>은 1985년 작이니 거의 3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객석이 의외로 꽉 차 있어 놀랐고, 영화가 끝난 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태풍클럽>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청춘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소마이 신지의 다른 영화들과 그의 연출 스타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차이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네필 꼰대처럼 우쭐대는 것은 아닐까? 상영관에 함께 있던 이들과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맞는 걸까?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 감상은 반드시 시차의 문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가 내게 익숙한지 생소한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풍클럽>은 개봉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며 몇몇 평자들에 의해 걸작으로 이야기되어 왔던 작품이었고, 이미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시네마테크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 감각을 수용한 상태에서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처음 본다 해도 기존의 맥락을 신경 쓰지 않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우려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의 유물을 목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2024 월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20위까지의 목록 중 재개봉 영화 목록 (출처: KOBIS / 회색 음영: 한국 최초 개봉 연도, 주황 음영: 당월 순위) 그 인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올해 개봉한 수많은 재개봉작들 때문이다. KOBIS를 참고해 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재개봉작들이 많이 출현했던 해다. 심지어 몇몇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영화와 경쟁해 당당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어쨌거나 이 통계는 한국의 사례이기에 동일한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며 이 흥행에 대한 인과론적 분석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니, 새로운 영화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쪽이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선택들이 일으키는 변화다. 영화 홍보에 있어 언제부터 ‘개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것이 빵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개봉박두’ 나 ‘대개봉’ 같은 한때의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우리네 관객이 마주하는 표현은 ‘개봉’ 대신 ‘공개’라는 심심한 표현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원 사격으로 부상한 OTT와 유튜브를 통과하며 우리는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이미지가 이전과 같은 환상성이나 신비로움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체감하다 못해 익숙해졌다. 내 손안의 영화관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속 릴스와 쇼츠로 맥락이 탈구된 수많은 밈(meme) 이미지들을 나의 취향에 맞는 알고리즘의 설계 아래 부지런히 스크롤링하며 갱신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감상 환경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구속적 방식의 영화 감상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20세기의 시대착오적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올해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해였다. 올해 나는 “무슨 무슨 영화가 재개봉한대”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아니, 그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재개봉이냐?” 가령 표의 4월부터 5월을 보면 < 남은 인생 10년 >(후지이 미치히토, 2022)이 1위를 차지했는데, 이 영화는 고작 1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차라리 재개봉 대신 재상영 내지 스크리닝이라는 심심하고 객관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재개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그 사이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재개봉’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영화가 놓인 위치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10년이 넘기는 했지만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같은 경우에도 ‘옛날 영화’라고 감각하지 않는 쪽인데, 이 영화도 ‘재개봉’을 해서 9월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20년이 넘었는데도 1등을 한다. 10월의 1등, 닉 카사베츠의 < 노트북 >(2004)이다. 이렇게 ‘재개봉’으로 소환되는 (너무 이른) 과거는 추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5년에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나카야마 미호의 출연작,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1995)가 작품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을 예정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로 자막 버전이라고 한다. 아! 그때 그 시절 …… 농담이다. 나는 극장에서 세로 자막으로 영화 본 기억이 없다. 좌우지간, 그런 점에서 올해의 극장은 추억의 공간이다. 다른 한편, 올해는 과거의 수많은 걸작들이 극장에 소환된 해다. 이들은 박스오피스권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시네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사례다. 앞서 말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오시마 나기사의 <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 < 우나기 >(1997), 다시 한 번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 큐어 >(1997), 무엇보다 90년대 한국에 뒤늦게 개봉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1986) 4K 리마스터 재개봉까지 …… 물론 이들의 방문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작’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영화가 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와 결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덩어리 내지 가치 있는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들에 익숙한 시네필들은 기꺼이 극장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라도 걸작이라는 은근한 압박에 둘러싸여 작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상) <전장의 크리스마스>, <복수는 나의 것> / (하) <큐어>, <희생> 그런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의 기획과 같은 대안적인 방식으로 상영되지 않고, 정식 개봉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최신 개봉작은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독립영화와 과거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이분법적 감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2016년에 처음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의 < 할복 >(1962)을 보고, 노인이 된 나카다이 다츠야와 이준익 감독의 대담 상영을 경험하며 그 시간의 아득함을 체감한 바가 있다. (적고 보니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예술영화 시장에는 큐레이팅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홍길동 특별전,’ ‘임꺽정 배우전,’ ‘장길산 기획전’ 같은 문구는 굳이 대안적 상영 공간을 찾지 않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딩 상품이 되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의 단편 < 알레고리 >(2024)와 레오 까락스의 단편 < 잇츠 낫 미 >(2024)가 동시대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주제의식과 레오 까락스라는 공유점으로 매끄럽게 묶여 개봉하는 상황은 시네필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자 선물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호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잇츠 낫 미> 중 그러니 이와 같은 유물의 소환을 다른 말로 ‘교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또 하나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다름 아닌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와 같은 작품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그것이다. 솔직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는 자신이 없지만, 일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의 흥행은 작품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항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대적인 요구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사회적이든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접했지만, 그 수많은 말들 속에는 왜인지 ‘나’의 시선이나 감상보다는 대체로 객관과 분석의 언어로 가득했다. 차이밍량은 “상업영화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예술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예술영화’들을 보고 나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했던 것 같다. <괴물>, <추락의 해부> 중 이제 영화관은 문자 그대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라는 무맥락적인 성격이 아니라, 지나간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혹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네마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속에서 오래된 영화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나’와 무관한 역사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나’의 그때 그 시절 향수에 젖어드는 정서적 힐링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일까? ‘재개봉’이라는 말로 너무 이르게, 혹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늦게 찾아온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비단 올해만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관에는 전통적 의미의 영화 대신 다른 영상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제목을 짚지 않더라도, 가령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스포츠 중계 등은 코로나 이후 극장 수입에 있어 효자 상품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러 가는가? 당연히 해당 작품이 다루는 대상의 팬들이 보러 간다. 그러니 팬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타겟팅 기획물 중 올해 가장 성과가 좋았던 작품은 김덕영 의 < 건국전쟁 >(2023)이다. KOBIS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11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한국에서 상영된 독립예술영화 분류 작품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이승만이라는 아이돌과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만들어낸 기념비적 성과라고 불러야 하겠다. 불현듯 “태극기 부대 속에 들어가서 <건국전쟁> 보기”라는 기획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볼 사람과 보지 않을 사람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품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이지선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내부를 그린 삽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19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를 상연하던 극장을 완전히 탈바꿈하며 바이로이트라는 이름의 극장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호화로운 장식이나 발코니석 같은 부수적 기물을 전부 떼어버리고, 바닥을 깊게 파서 오케스트라를 안쪽으로 은폐하여 관객들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관객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 미학적 파시즘의 설계는 이후 영화관의 메인 모델로 채택되었고, 그를 총애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파시즘과 짝꿍을 이루며 <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 1934)와 같은 걸작으로 당시 독일 인민들의 정신을 통합해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 플랫폼에 둘러싸인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작품을 보는 식이었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식 관람 환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얼 보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024년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영화관 모델의 역사를 떠올린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죽음, 무엇보다 우리와 각자의 문제. 혼란스러운 연말 시국 속에서 그 말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결산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나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감상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후반 즈음해서 비평에 보다 진지하게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평을 쓰는 일이 내 정체성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2010년대까지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란 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반추해보건대, 내가 20대를 통과하며 겪어온 삶의 주요한 분기점들이 내가 영화와 비평을 대하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변화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뿐만 아니라 다수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 비평이란 언제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밀접한 활동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본인의 작업과 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걸 민망해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 꺼리곤 하지만, 나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걸 즐기곤 한다. 글의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것들이 문자로 새겨졌던 순간의 어룽거리던 공기를 떠올리며, 나는 글을 썼을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만나거나 멀어져 가며 걸어왔는지 하나 둘 반추해보곤 했다. 때때로 흔적으로나마 내 안에 남아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거나, 아니면 사라져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느끼는 시절의 잔재를 감촉하며, 그 시절의 감각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써온 글 안에 박물학적으로 새겨져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나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 그가 써온 글에 투영된 시대의 감각에 관해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영화 몇 편에 대한 생각과 함께, 국내 비평계에 대한 소견을 밝혀야 하는 이 지면에서 이런 이야기로 말을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 뉴노멀을 기점으로 영화 이후의 미디어가 급격하게 확산해가는 국면에 서 있는 지금의 영화계와 비평계를 떠올려볼 때, 그 공동체가 맞이한 급격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가,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거나 쓰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때로 우리 시대의 영화 속 대화가 변화하는 양상과도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글에 대한 청탁을 받은 직후, 나는 즉각적으로 내가 몇 년 전 경험했던 그러한 대화의 유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최근의 비평계는 물론 일부 문화예술계가 처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일지 모른다고 느끼며 곱씹었던 그 대화는 몇 년 전, 내가 한 영화제에서 짧게 일했을 당시에 발생했다. 영화제가 진행되던 어느 날, 스태프 한 분이 갑자기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겨 긴급한 공지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기이한 점은 그분이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도 자꾸 미적거리며 본론으로 단도직입하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음… 어…” 와 같은 말이10초간 이어진 이후에 결과적으로 내가 들은 말은 이랬다. “아, 그…… 여러분 이게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기는 좀 뭐한데…… 혹시 얼마 전에 약간 논란이 된 적 있는 그거 아시죠?” ……? 나는 이게 당최 무슨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정도가 맥락을 전부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네네~!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태프분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구나! 그럼… 최근에 어떤 분이 그 일이랑 관련해서 약간 문제제기를 하셨었는데 혹시 그건 아시는 분도 있으신 거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이게 대체 무슨 화법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몇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별 건 아니지만, ‘그거’만 좀 신경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걸 더 이상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려고 하셨다. 이에 나를 포함한 몇 분이 당황해서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을 요청해서 겨우 내막을 듣게 됐다.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장소와 관련해서 최근에 SNS에 문제를 제기한 포스트가 올라왔으니 영화제 차원에서 공식적인 대처를 하기 전에는 가급적 관객들 앞에서 ‘그거’에 관해 입을 담지 않도록 신중해달라는 말이었다. 당시에 SNS를 하지 않던 나, 그리고 평소에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않던 여타의 스태프들이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그분은 그런 얘기를 왜 그냥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셨던 걸까? 이미 내가 말한 이야기에 그 답이 암시돼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 같은 걸 늘어놓지 않아도 알아들을 사람은 대강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대강 맥락을 파악할 정도로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실제로’ 다수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시도하거나 요청할 필요성 자체가 사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오가는 소식이라는 게 알만한 사정을 공유하는 내부자들에게(만) 다 알려져 있어 별도의 대화나 인식론적 합의를 거칠 필요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전제가 다수에게 묵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접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외주화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시대를 지나, 이제 애초에 그런 인식에 합의하지 않은 이가 본인의 내집단에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시대. 그래서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가 동반사멸”( 이광호 )한 시대. 온라인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그…… 어…… 음… ‘거기’(비평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 만연해졌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체감상 이런 경향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기점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라고 느낀다. 그 시기는 내 친구와 지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SNS 계정을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무엇보다도 현재까지도 예후적인 여파를 남기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하며 스마트폰이 일상적 시민의 사회적 관계를 보다 미시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편하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 시기 즈음해서 내가 경험한 영화제 일화를 언급한 이유는, 그 스태프 분께서 구사하시던 화법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예외가 아니게 됐다는 점을 블로그나 각종 SNS의 공론장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비평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 초중반 무렵의 블로그·페이스북 문화와 이 시기 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유저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그런 폐쇄적 경향성에 입각한 아주 확연한 차이가 발견되곤 한다. 가령 코로나 전후 블로거는 물론 공식적인 지면에 글을 쓰는 평자들조차 본인의 내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맥락이 남에게도 당연하게 수용될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물론, 그 내집단 밖에 위치한 이들과 애초에 소통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폐쇄적인 화술을 구사하기 때문에 객관화된 언어로 토론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단 대체 무슨 상황이나 맥락을 지칭하는 건지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가령 “이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해진 얘기들”이라고 말하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맥락과 그 맥락에 관해 본인과 내집단이 느끼는 감정이 다른 독자에게도 선험적으로 합의돼 있다고 상정하면서도 도통 본인이 말하는 그 얘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 공론장에 피로감을 유발하는 서브트위팅과 수동공격적 표현들, 혹은 “이렇게 말하면 분명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텐데", “보나마나 어떤 식으로 반응할 특정한 부류들”과 같은 표현을 통해 본인의 입장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조차 사전에 다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례들이 여기 해당한다. 이후에 부연하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개별적 발언들을 일일이 비판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며(보다 현명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발화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배태한 실질적인 원인을 지목해야 한다고 느낀다. 또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차원에서만 글을 끝내고 싶지 않고, 우리가 적어도 영화와 픽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금 직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을 비롯한 여러 한계로 인해 단지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시기 동안 비평계와 영화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립되고 있다는 인상만을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그와 관련해서 다시 말을 잇자면,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예술 비평과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덜 읽고 비평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접하는 분야의 텍스트나 1차 사료를 직접 파고들거나, 아니면 직접 예술과 무관한 공동체를 경험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러한 실천은 물론 개인적 필요에 따라 수행했던 사항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각종 SNS 등지에서 전술한 것처럼 직간접적인 공격성을 함유한 언행을 발설하는 유저 혹은 평자들이 너무 증가한 상황으로부터 유발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와 아울러 점차 폐쇄적으로 표준화되는 비평 글들의 관성에 저항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이 또한 새삼스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엇비슷한 온라인 서점의 추천 알고리즘, 엇비슷한 SNS 계정으로부터 유사한 정보망을 공유하는 시네필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한정된 반경과 관점의(가령 실증주의적 사료와 경제적 현실감각에 기반한 정치학적 통찰이 결여된 채 현대 프랑스 철학적 형식논리를 다루는 텍스트만 근친상간적으로 편식하기 때문에 현실과 복잡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 아연할 정도로 단순해져버리는 경향성으로 대표되는) 글을 제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적잖은 평자들이 어디서 무슨 글을 읽고 특정한 문장을 인용했는지조차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은 이전의 나 또한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집단적인 지각의 반경이 수축되고 있다는 점을 체감하곤 했다. 실제로 가령 허문영과 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와 질베르토 페레스의 글을 탐독한 후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관한 아나크로니즘적 애착도를 형성하거나, 유운성 평론가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는 소식을 공유하는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서로 SNS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팔로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인터넷 포스트에 입력된 좋아요 버튼이나 댓글을 통해 서로의 흔적을 암암리에 인지하며 은밀한 친밀감과 경쟁심을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으로 포집된다(이건 함부로 추측한 바가 아니라 내 주변의 여러 젊은 시네필과 비평가들에게 물어봤을 때 거의 다 동의한다는 답변을 들은 사항이다). 이런 생태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생성하는 문화적 요소로 기능하곤 하지만, 동시에 그 친밀감에 기반한 비평계 내부의 공론장이 점점 불가측한 변수를 수용하거나 건전한 합의를 도출하는 역량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개인은 온전히 정치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아의 일면만을 간직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정치적 존재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의 영역에 노출되지 않는 사적 영역의 안식처가 불가결하게 요청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사 영역 간의 시공간적 구별을 어느정도 유효하게 전제할 수 있었던 전통적 공동체와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 2인칭적 친밀감의 정동은 네트워크 전반에 보다 탈중심적으로 산포되어 안식만이 아닌 통제의 효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바로 온라인 공론장에 소속된 내부자들의 친밀감을 거스르는 객관화된 논의가 발설되는 것을 강력하게 방지하는 검열의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영화계나 인문예술계 네트워크에 속한 평론가들은 본인 이웃들이나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논평은 ‘굳이’ 쓰려고 하질 않는다는 얘기다. 비평이란 대개의 경우 상대적 객관성을 염두에 두며 세계를 더 자세하게 해석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반면 아렌트가 “보호받은 존재의 어둠”이라 이른 내밀한 공간은 그런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와 무관하게 완전한 의존성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안식처로 기능한다(물론 성숙한 사람이라면 친밀한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니 공적 담론장으로 기능하면서도 동시에 전적인 의존성에 관한 요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SNS 공론장의 유저들은 점점 이웃이나 팔로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쓰지 않는다. 써봤자 어차피 토론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그냥 어느샌가 줄어든 팔로워 숫자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렌트가 말했듯 개인이 소외를 유발하는 공적인 페르소나를 장착하기 이전에 전적인 의존성을 보장받아야만 한다면, 친밀감과 배치되는 담론과 정서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들의 심경도 납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가족이나 회사, 또래집단처럼 오프라인에서 안정적인 보살핌의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실패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친밀감을 찾으려는 유저들에게 “온라인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로 토론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후기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굴복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이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좀 그랬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 현상은 애초에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양면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저들이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온라인 공론장에서 객관적 논의를 창출하는 비평의 역량이 기능 부전에 처한다는 점 또한 솔직하게 시인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에서인지 2010년대 중후반을 건너오면서 블로그의 댓글창 같은 곳에서 토론이 벌어지는 일을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유저들은 점점 좋아요만 누르거나 비밀 댓글만 달곤 한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의 영화비평 블로그들의 댓글창과 지금의 댓글창을 비교하면 그런 확연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평자들도 애당초 건전한 토론이 발생하기 어려운 내집단의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인지, 종종 논쟁적 사안이 발생해도 서로 상반되는 기조의 포스트를 올리는 식으로 수동공격적인 기싸움만 할뿐 본인이 당최 누구의 무슨 글을 염두에 두고 쓰는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 상황을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어차피 이 공론장이란 대충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청자만을 선험적으로 상정한 채 발화되는 공간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현상은 상기했던 것처럼, 합리적 의미를 공유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정동적 소통에 입각한 폐쇄적 화술이 비평계 공동체 내부에 만연해지는 원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의 층위를 하회하는 신경학적 회로가 이미 통합돼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서로 다 알아듣는 상황에서 뭐하러 굳이 의미론적 담화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주로 비밀 댓글이 게시되곤 하는 영화비평 블로그 댓글창 아마도 최근의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소수의 평자들의 글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며 폐쇄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제도 비판이 이뤄졌던 상황 또한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계가 폐쇄화하거나 고립된 현상이, 예술계 바깥에서 미디어와 산업적 환경의 변화가 불가항력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며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급격하게 수축하거나 표준화한 후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술계 내부에 잔존하는 몇몇 권력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복잡계에 대한 시각을 결락한 표면적 진단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예술계 내부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 못지않게, 그 폐쇄성의 원인을 예술계 내부 제도, 혹은 상대적으로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몇몇 평자들의 책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주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계 내부 담론만 소비하는 이들에 특징적인 폐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령, 영화비평이 이전보다 훨씬 위기에 처했거나 고립된 상황의 원인이 정성일 평론가의 배타적인 태도나 《씨네21》 평론가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익숙한 견해들을 참고해보도록 하자. 정성일 평론가가 가끔 왜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유아론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내보인다거나(가령 최근에 < 희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이 개봉했을 때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숏바이숏과 같은 분석을 불허하는 신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교한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다 틀렸다고 말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숏바이숏이 명백하게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다) 《씨네21》에서 생성되는 비평이 종종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그 자체로는 타당한 지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비평계가 수축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건 기초적인 경제적, 산업적 현실감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재하다는 점을 시인하는 처사다. 이 세계가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처럼 인문예술계에서나 유행하는 담론이 설명하는 권력관계로 축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약하기 그지없는 젊은 인문예술학도들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복잡계가 작동하는 현실의 이치와는 제대로 조응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나 인문예술계 바깥에 지인이 몇명만 있어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정성일 평론가와 《씨네21》이라는 잡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비평을 덜 읽게 된 이유는 이 나라 정부와 동시대 산업이 직장생활하고 퇴근해서 유튜브 보는 게 편한 생체리듬을 구조화한 영향력이 훨씬 크지, 그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영화를 보거나 비평을 읽기로 결심한 다음, 한달에 원고료를 20만원 남짓 받을까 말까한 《씨네21》의 평론가들이 광고에 밀려 잡지 맨 뒷쪽에 있는 A4용지 2페이지짜리 분량의 비평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 다 잘라내고 짤막하게 써낸 글이 설득력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라는 매체만 다루거나 인문예술계 담론에만 익숙해서 바깥 분야에 문외한인 이들은 이 업계가 고사 직전인 이유가 자체의 잘못에서만 유래했다고 오인하곤 하지만, 사실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책이나 글 같은 건 본질적으로 무기력한 매체다. 그렇기에 유명무실하게 남아있는 잡지나 제도들은 비평의 위기를 촉발한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이미 외부의 산업적, 경제적 불가항력이 가해진 상황에서 겨우 생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계든 어디든 예술계 내부자들의 폐쇄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조차 마찬가지로 폐쇄적 시각에 빠져드는 나선에 갇히게 된다.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실질적인 원인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그 원인에 관해 책임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인식을 외면한 채 상황의 책임을 안쪽으로만 돌리며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사실 그 윤리적 책임 자체가 환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이런 얘기조차 그렇게까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적당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는 평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공격적인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서 방 안의 코끼리를 못 본 척하듯 침묵하고 있을 뿐. 비슷한 맥락에서 버나드 조지건은 인문학계가 기술권력이 지배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파급력을 행사하거나 유의미한 해석을 제출하기 어렵게 되면서부터, 산업적으로 파생된 여러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간과한 채 세계를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인문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담론 간의 사상적 대립으로 축소시키는 현실 인식을 확산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이 글에서는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그러한 경향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이면의 맥락을 간단하게만 말하고자 한다. 그 후 그 현상이 동시대의 영화에서도 상호연관된 증상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물론 KMDb 영화글이라는 알만한 사람만 알고 있는 페이지에 게재될 이 글 또한 한정된 유형의 군상에게만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지금 나는 결론을 전제하는 그런 식의 경향을 문제시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이 문장 이후에는 더 이상 무슨 무슨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은 불가피한 설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제할 계획이다. 오프라인에 앞서는 온라인의 우위와 선취매개라는 경향성 위에서 내가 언급한 사항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내가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 소속되곤 했던 공동체와 작금의 변화한 공동체를 비교해보며 한 가지 대표적 차이를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영화나 텍스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전복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박은하 기자는 언젠가 80년대생과 90년대생이 각각 경험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차이를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과 선배들이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하라고 했어요. 반면에 지금 세대들은 대학에 가면 “너 오유하니, 아니면 일베하니?”라고 묻겠지요. 즉 과거에는 오프라인을 경유해 온라인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이지요.” 그가 2010년대 전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지적한 소통 과정의 역전을 나 또한 지난 10년 동안 체감하곤 했다. 내가 2014년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프라인에서 학과 친구나 선배들이 그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 그녀 >(스파이크 존즈, 2013),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델라티브 케시시, 2012),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과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해줬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나는 각종 영화제 수상작과 걸작 목록을 검색하며 온라인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관한 정보를 다양한 지인에게 소개해주는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나는 내 주변에 약 열다섯 명의 영화평론가나 영화기자의 MBTI를 알고 있는데, 그중에 외향형은 나밖에 없다), 원래 영화나 비평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 다크 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2008)처럼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의 취향을, 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 엉클 분미 >(2010)나 알랭 기로디의 < 호수의 이방인 >(2013)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바꿔놓은 경험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물론 그때의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던 과정에서도 온라인의 선험성이 끼치는 영향력을 온전히 삭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예술과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었다는 특수성을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와 예술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흐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벡터를 띠고 있었다. 현실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오늘날 이 벡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시네필 취향이라고 선험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인이 아닌 이와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공간에 동행하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오프라인 공동체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일이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자의식의 계기로 작용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한지라 누군가가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사전에 섭렵하지 않으면 국적이 똑같더라도 외국인과 다름 없을 정도로 대화가 교통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 인랜드 엠파이어 >(2007)에서 어느 미국인과 폴란드인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떠들어대며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저 괴상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오늘날 나의 현실감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이 상황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동체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자아와 친밀감조차 고도로 정보화된 사물 인터넷 경제의 선험성에 의존하게 된 현상과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범세계적 물류 경제와 디지털에 기반한 고부가 가치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나타내는 변화 중 하나는, 이전에는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일상과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에도 보다 많은 지식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는 경제학 서적의 제목이 의아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 연준의 반응을 참조하지 않으면 부장님의 기분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세계. 그래서 우리의 취향과 일상적 감각조차 대역적 질서와 불가분한 맹약을 맺은 세계. 대학 동아리 같은 현실의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무매개적이었던 우정을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시네필 공동체가 2010년대를 지나오며 점점 사전에 영화와 커뮤니티의 정보망을 공유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기 어려워지는 현상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동시대 영화의 상황으로 우회를 하자면, 이 변화는 개별적인 영화들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징후를 발현하곤 한다. 가령 이제 가령 세르주 다네가 말한 것처럼, 영화 안에서 역사와 사건에 방점을 두는 “지리학의 영화”와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의 시청각적 물성에 주목하는 “지질학의 영화"라는 이분법적 계열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자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편재한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증거하는 예시로, 최근으로 올수록 비판적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학습하지 않는다면 동시대적인 물질성을 재현하는 예술적 과제조차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 가령 내게 2010년대 이후의 지경학적 환경에 관해 가장 놀라운 감각을 제공해줬던 두 걸작, 노엘 버치와 앨런 세쿨라의 < 잊혀진 공간 >(2010)과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 당나귀 EO >(2022)가 모두 나이가 든 남성 지식인 거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두 영화는 모두 초국적 자본주의의 연결망에 지배된 이 세계의 물질성을 경이로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도려낸 보고서다. 하지만 여러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주유하는 카메라의 동선은 세계의 지형학을 고도로 객관화한 지성의 산물이므로, 더 이상 역사적, 지리학적 통찰과 분리할 수 있는 지질학적 감수성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잊혀진 공간>, <당나귀 EO>, <파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 The Forgotten Space ”, IMDb) 올해에도 비슷한 경향은 의미심장하게 나타나서 장재현의 < 파묘 >(2024)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3)처럼 땅을 주제로 삼는 개봉작에서 토착적 지질과 무관한 고도로 지식인적이고 전문가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작위적 위화감을 선사하곤 했다(물론 우리가 이미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세계에 실제로 서식하게 된 상황에서 그런 황당한 작위를 전략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기성의 비평적 관점에 따라 비판하는 작업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반면 그런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에의 접근성과 서사적 감각의 숙련을 결여한 채 유튜브 숏츠를 마구자비로 넘기는 듯한 디지털 기기의 마취적 혼돈에 노출된 젊은 창작자들은 점점 자신이 위치한 장소의 물질성조차 오롯이 담아내길 버거워하는 경향이 발견되곤 한다. 여러 장소와 형식을 부단히 오가지만, 그중 어디에도 융화하지 못하는 청년 몽상가의 일상을 다룬 양근영 감독의 < 모르는 이야기 >(2023)는 그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물론 그 무력감을 촉발한 원인 자체가 기성세대가 빚은 세계의 질서에서 유래했으므로 그 성취도가 미비하다는 점만을 근거로 젊은 창작자들을 비판하는 것만이 온당한 논의는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오프라인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정보를 재확인하는 하위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논점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일상적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유튜브 콘텐츠나 <흑백요리사> 같은 온라인 콘텐츠를 보지 않으면 오프라인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종종 직면하곤 한다. 비평계에서도 온라인 공간의 선험성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점점 오프라인 지면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있기에, 잘 알려진 잡지의 고정된 지면에서 글을 쓰는 한 평론가 또한 SNS 계정을 만들지 않으면 영향력을 확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압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부터는 이런 종류의 온라인의 선험성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논의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리처드 그루신은 언젠가 9.11 테러 이후 미디어에 보편화된 경향을 “선취매개premediation”라는 용어로 명명한 바 있다. 9.11 테러는 글로벌 세계의 지정학적 불화가 선진국 시민의 일상적 생활공간 안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래의 모든 일상적 위협마저 사전에 제어하려는 욕망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심화됐다. 잠재적 범죄자를 사전에 제압하려는 경찰력에 관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의 흥행, 그리고 각종 방위 산업과 보험 산업, 제약 업계의 성장은 그러한 제어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사건들이다. 그루신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적 요소로, 핸드폰이나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의 출현을 거론한다. 영화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보급하던 20세기의 과거에 이미지란 롤랑 바르트와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재현하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일기예보를 하듯 미래의 주식시장, 미래의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해준다. 그리고 그런 정보의 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미래의 위협을 사전에 고지받는 것을 허가한 스마트폰과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들이다. 대중적인 예술작품에도 이 같은 선취매개적 욕망에서 비롯된 시대정신은 은밀하게 투영된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와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진도준( 송중기 ), 그리고 이 분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박마: 거짓말 사냥꾼 바쿠>의 마다라메 바쿠처럼 미래에 발생할 변수를 사전에 전부 다 예측하는 비현실적인 수싸움에 능란한 캐릭터들이 동시대 시민의 문화적 자아 이상형으로 출몰하곤 했다. 선취매개의 욕망이 투영된 작품과 인물들_<마이너리티 리포트>, <다크 나이트>의 조커 (사진: " Minority Report ", " Dark Knight ", IMDb) 선취매개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공간의 물질성과 사회적 관계를 경험할 때도 사전에 온라인에 집적된 정보를 거쳐가는 현상을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그러한 취사선택에 기반한 온라인 공동체들이 점점 고립되는 상황 또한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2020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 진단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대표적 사례는 바로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MBTI 검사가 폭발적으로 유행한 상황이다. 코로나19와 MBTI는 서로 우연의 일치로 같은 시기에 확산된 사건이 아니다. 코로나 뉴노멀은 미래에 발생할 감염의 확률값을 사전에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반화된 세계관이었고, 이는 오프라인에서 조우할 인격체의 행동반경을 예측 가능한 범주로 파악하려는 온라인 MBTI 검사의 일상적 용법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그리고 미래의 불가측한 변수를 제압하고자 하는 두 욕망을 부채질한 요소는 때마침 방역을 목적으로 스마트폰의 활용을 확대한 정책적 차원의 조치였다. 이는 정확히 9.11 테러 이후 핸드폰의 존재가 선취매개라는 미디어적 경향을 보편화했다는 그루신의 논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그루신이 글을 썼던 시기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암울해지고 확정적으로 변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비관적인 미래의 확률값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보다 현실적인 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 콘텐츠들이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시민들이 더 이상 기후위기나 정치 뉴스와 관련한 추상적 현안과 거국적 이상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워크맨>의 오해원이나 <솔로지옥2>의 덱스처럼 일상적 순간의 욕망과 책임에 현실적인 방식으로 충실한 캐릭터들의 소박한 정감에 열광하는 현상 또한 그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불가측한 위협을 제어하려는 선취매개라는 경향 또한 결국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둘러싼 위협이 적어도 현실적으로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여겨지는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의 오래된 풍요가 마침내 종식을 고하는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선취매개라는 경향이 점점 약화되는 국면을 목도할지 모른다. 사전에 예측하거나 제어할 여력도 없이 밀어닥치는 온갖 위기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몰돼 있는 것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서도 지면의 한계상 선취매개의 영향력이 끼친 파장에 관해서만 취사선택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그것이 적어도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지난 10년 동안의 온라인 환경에서는 상대적 보편성을 지니고 지속됐던 현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전도된 영화 창작의 과정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 선취매개적 경향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해온 우리 세대의 특징이, 오늘날의 영화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기했던 것처럼 한때 우리가 오프라인을 중심축으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을 확장하던 시기가 과거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영화사적 진보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말할 수 있다. 누벨바그와 네오리얼리즘의 작가들이 스튜디오 시스템을 거부한 채 거리로 뛰쳐나가 보다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를 포착했듯, 그리고 오토 플레밍거의 < 돌아오지 않는 강 >(1954)에서 뗏목을 타고 계곡을 누비는 장면이 베르너 헤어조크가 아마존에서 직접 찍은 < 아귀레 신의 분노 >(1972)에 이르러 훨씬 야만적인 생동감을 띠게 됐듯, 영화사에서 진보적 실천이란 곧 오프라인 현실로 나아가 보다 확장적인 물질성을 수집하는 방향으로 특징지어지곤 했다. 디지털이 보편화한 이후,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온라인의 선험적 기준에 종속시켜 온 최근의 세대는 이 방향성을 반대로 역전시킨다. 말하자면 현실의 물질성을 접하기에 앞서 온라인에서 ’현실이라고 상정되는 어떠한 상(像)’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선취매개적으로 구성한 뒤, 그 상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작업의 방향성이 “오, 어제 어디를 갔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런 구체적인 경험을 했어. 그럼 그 고유한 감각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볼까?”가 아니라, “오, 어제 어떤 영화나 인터넷 게시물을 봤는데 내가 저 정보들이 비추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란 아마 ‘대체로’ 저것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해. 그러므로 나도 내가 본 그 대체적인 상을 영화라는 결과물로 출력해볼까?”라는 식으로 창작의 과정이 역전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미 20세기 후반의 서브컬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현실을 참조하지 않은 채 작품 속 시뮬라크르적 기호를 재생산하는 경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가 바로 츤데레와 같은 캐릭터의 ‘모에’ 요소다. 신죠 카즈마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녀석은 분명 그러한 일을 할 거야’라는 확률분포를 여러 겹 겹쳐놓은 것”으로 정의한 모에 요소란 21세기의 시초에 이미 선취매개적 국면이 창작자의 작업 과정으로 스며든다는 점을 알리는 사례였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가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추상적 캐릭터들에 한정해 분석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과 실사라는 기준 또한 사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경계를 획정하는 절대적 준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지도 어플에서 검색한 후 맛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프라인에서 직면할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시뮬레이션적으로 정위하는 절차가 일반화된 세계를 살고 있다. 이에 따라 현실 자체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런저런 예상가능한 확률값을 근사치에 가깝게 추상한 존재로 축소되는 경향이 생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미 20년도 전에 페드로 코스타는 새로운 세대가 점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 영화 이외의 것을 참고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경향을 문제적으로 지목한 바 있다(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그보다 더 전에 다른 이들도 주장했지만). 어째서일까? 아무리 예술적 창조에서 상호참조나 오마주가 낯설지 않아졌으며 그것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좋은 예술작품이란 다른 작품을 보고 ‘뭔가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세계를 보는 태도와 방법을 배워 나만의 시각으로, 내가 관심 있는 세계를 바라본 주관으로부터 비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시네필들이 열광하기 좋은 의미 불명한 수사학일 뿐이며, 예술작품이란 결국 고유한 주관과 세계가 맺는 긴장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부수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근래의 전도된 영화 창작 과정에서 사진적 이미지란 경험적 현실(혹은 구체적 사료)로부터 도려낸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 창작자의 머릿속에 내재된 ‘현실이란 어떠할 것이다’라는 추정치를 근삿값에 가깝게 출력해낸 정보로 나타난다. 그때 사진적 이미지의 물질성이란 지표적 단독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기보다 이미지의 확률론적 추상성을 은닉하는 날조된 하드웨어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포착된 현실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사진적 이미지의 제작 과정이란 이제 미래에 경험할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확률론적 관념을 사전에 투영한 결과물로 전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2020년대 전후의 영화적 이미지를 ‘사진적 이미지’라기보다 ‘확률론적 이미지’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방하는 사진적 이미지조차 확률론적 이미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면모를 노출하곤 한다. 가령, 필름 시대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환기하기 위해 시공간적 경계를 무화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속성을 의뭉쩍게 누락한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가 이런 사례다. 박동수 평론가는 <패스트 라이브즈>에 관한 예리한 비평에서 극중 노라(그레타 리)가 향수하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해성( 유태오 )이 실재하는 인격체라기보다 한국계 미국인인 셀린 송의 머릿속에서 한국에 관한 향수어린 관념을 추상적으로 육화한 존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추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배우가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셀린 송에 의해 쓰인 어색하기 그지없는 번역투 대사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박동수는 해성의 직업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정체성이 탈각됐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실제 한국을 살아가는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셀린 송-노라라는 작가적 자의식이 배태한 인위적 피조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기준만으로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가치를 온전히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의 여러 영화 속 캐릭터들이 구체적인 인격적 속성을 결여한 채 작가가 상상한 어떤 관념의 복화술 인형으로만 제시되는 현상은, 그들이 현실에서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존재하기보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를 확률론적으로 추상한 결과물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작년에 개봉한 < 너와 나 >(조현철, 2022)에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물감을 발한 박정민 배우의 배역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극중에서 하은을 스토킹하다가 적발된 후 하은의 동급생들과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 나 잘생김~ 어 너 못생김~ 어 너 남자친구 없음~”이라는 푼수 같은 대사를 내뱉는 그는 시종 하나의 고유한 역사를 간직한 인격체가 아니라, 적당한 타이밍에 찌질한 스토커를 플롯에 외삽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구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현된 추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물론 모든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욕구에 따라 구현된 존재이므로 진정한 문제는 그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핵심은 오늘날의 미디어적 조건이 창작자가 현실을 접하는 생활감각을 변형시킴으로써, 캐릭터에 고유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량을 점점 쇠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냥 각본을 대충 써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를 확률론적 이미지의 패러다임에서 조감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가능하다. 영화적 현실을 구현해 기댓값을 넘어서는 고유한 인식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제작과정이, 영화적 이미지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관념적으로 종속시키는 양상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겨울 이야기> 전술했듯이 이 경향이 배태한 대표적 증상은 작가 자신의 생활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사회적 인격체를 그릴 때 위화감이 들 정도로 생활감과 디테일이 부족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점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를 쓰는 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안에서 대화라면 의미로 충만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진정으로 탁월한 작가적 자질은 아무런 의미론적 쓸모가 없는 대사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있다. 가령 마틴 스콜세지의 < 좋은 친구들 >(1990)에서 토미(조 페시)가 “funny how?”라는 의미 불명한 말을 연발하며 헨리(레이 리오타)를 윽박지르는 장면, 그리고 에릭 로메르의 < 겨울 이야기 >(1992)에서 펠리시(샤를로트 베리)와 막상스(미셸 볼레티)가 느베르의 길가를 산책하며, 아무런 의중도 없이 마주치는 간판과 사물의 명칭을 무심코 중얼거리는 순간들. 이 대화들은 어떤 서사적 효용과 주제의식도 부재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확률론적 추상성으로 흩어질 수 없는 단단한 시공간적 구체성으로 빛난다는 감미로운 잔향을 새기고 간다. 마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론적 환원을 거절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단독성의 확신을 남기는 절대적 순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위에서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획정한 뒤 전자에는 물질적 속성이 탈각되어 있다는 단순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거릿 모스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에 고유한 물질성과 친밀감이 깃들어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디지털 기기에 단독적인 소통의 물질성이 종종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메신저를 통해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지인들과 대화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말장난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분명 의미론적 제약을 초과하는 반언어적 활력과 친밀감이 발생한다고 느낀다. 또, 이 글만 보면 내가 선취매개적 경향 때문에 MBTI 검사를 뭐 대단히 나쁘게 생각한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는데, 일상에서 나는 애인이나 친구나 지인들과 MBTI 얘기를 안 하는 날이 없을 지경으로 과몰입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단순히 우리 시대에 고유한 문화적 산물이 그 자체로 쓸모없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에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단독성과 물질성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익숙하게 받아들인 세대가, 대체로 시공간을 3인칭적으로 조감하는 영화적 현실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려고 할 때 일종의 작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이행하며 나타나는 변화는 이런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상황에 대한 비관적이고 익숙한 진단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벌써 주어진 지면을 상당히 초월해버렸다. 확률론적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현존과 공명하는 공론장에서의 ‘확률론적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은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기술한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국면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미학적 실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지금은 이미 웹페이지로 읽기 불편할 정도로 내게 주어진 분량을 너무 많이 초과해버렸으므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김신(영화평론가) l 시각예술, 비평과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다. 진지한 얘기를 가볍게 하고 싶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을 비롯한 곳에 종종 영화비평을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