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웨인의 약탈자
- 감독
- 레이 앤라이트
- 제작년도
- 1942
- 출연
- 마를렌 디트리히, 랜돌프 스코트, 존 웨인, 마가렛 린제이, 해리 캐리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 인천(오! 인천) >(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 윤미라 *주 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 프렌치 커넥션 >(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 서부로 가는 길 >(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 007 살인번호 >(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 007 썬더볼작전 >(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 햄릿 >(로렌스 올리비에, 1948), <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1944), < 리차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빅터 플레밍, 1939)와 < 애수 >(마빈 르로이, 1940),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 *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 구중모 , 2015, 212쪽) *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 김호길 , 2016, 116쪽) *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 박광남 , 2023, 112~113쪽) *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 *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 *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 이티 >(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 *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 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 용가리 >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 이문걸 ,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 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 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 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 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낙원상가와 함께 탄생한 극장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56(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28)에 위치한 낙원상가는 1960년대 후반 서울시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1969년 아파트와 상가가 공존하는 지상 15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이 완공됐을 때 볼링장, 당구장, 다방, 캬바레 등 다양한 상가가 입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허리우드 극장은 낙원상가 4층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개관 당시의 운영주체는 고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였던 신필름이었다. 낙원상가는 서울시 도시 계획으로 건축된 1세대 주상복합건물 중 하나로 1967년 10월 완공됐다. 지금도 남아있는 건물의 현판에는 ‘낙원삘딍’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당시 서울시는 종로구에 대규모 건물을 지을 만한 넓은 대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4차선 도로 위에 지상 15층 규모의 건물을 올리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 낙원빌딩 1층은 주차장과 신호등, 건널목까지 있는 4차선 도로가 됐다. 이는 도로 관련법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던 시절에 준공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지금은 공공도로 위에 민간업체가 건축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낙원빌딩의 지분을 소유한 법인이나 개인은 토지세가 아닌 도로 점용료를 내고 있다. 1970년대 말까지 낙원상가는 다양한 상가와 아파트가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을 유지했지만, 1979년 탑골공원 정비 사업 이후 다수의 악기 점포들이 들어오면서 악기전문상가로 특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한때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건물의 상징성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씨네필의 메카였던 때 1980년대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낙원상가는 서울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찾는 인기 명소였다. 영화 애호가들과 음악인들이 찾는 중심지로 호황을 누리던 허리우드 극장은 1980년대 강남 개발 사업이 시작되고 1990년대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겨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1997년 기존 2000여석 규모의 개봉관을 레드, 블루, 그린 3개관으로 분리하며 시대의 변화를 적응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대형 극장의 몸집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허리우드 극장은 예술영화관 전용관에 장소를 임대하는 곳으로 공간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나란히 낙원상가로 자리를 옮기면서 허리우드 극장은 ‘시네필을 위한 전당’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사단법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희가 위탁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며, 2002년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문을 열었다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사 이모션픽쳐스의 대관으로 운영됐던 필름포럼은 기존 허리우드 극장 3개관 중 2개관을 임차하며 각각 480석과 300석의 규모를 자랑하는 예술영화관이 됐다. 당시 기획·운영은 임재철 영화평론가가 맡았다. 필름포럼은 2008년 4월 이화여대 후문으로 이사했고, 서울아트시네마는 2015년 3월까지만 낙원상가 내에서 운영되다가 계약이 만료되어 인근 서울극장으로 위치를 옮겼다. 실버세대를 위한 영화문화의 공간으로 허리우드 극장 입구의 돼지국밥 골목 인사동 거리와 탑골공원에 인접한 허리우드 극장은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 노인 인구에게 모두 접근성이 높다. 따라서 서울아트시네마가 계약을 맺었던 2015년까지 예술영화를 즐기는 젊은 시네필이 방문하기에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2009년 개관한 실버영화관 역시 노인 인구가 높은 인근 거리 일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지속 가능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16년 8월에는 육의전 빌딩부터 낙원상가까지 이어지는 ‘송해길’이 만들어졌다. 낙원동에서 오래 활동했던 고 송해 선생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낙원상가 입구에는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돼지국밥 식당들이 줄지어 있어 이곳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돼지국밥 골목 옆 낙원상가 입구 계단 현재 허리우드 극장은 ‘낙원악기상가’로 명칭을 변경한 건물 4층에서 임차 형태로 개별 극장에게 공간을 내주고 있다. 극장 앞에 위치한 광장은 허리우드 극장 시절부터 각종 공연 및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현재는 노인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은 정원으로 인테리어를 바꿨다.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허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은 2009년 1월 이곳에 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 자리한 낭만극장은 서울아트시네마가 떠난 자리에 2015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필름포럼이 이사한 후 공연장으로 활용되던 기존 허리우드 극장의 상층, 낙원상가 5층에 해당하는 공간은 현재 ‘모두의 극장’이란 이름으로 추억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허리우드 극장 입구의 정원 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에 소속된 직원의 90% 이상은 노년층이다. 오전, 오후 그리고 주 3일 로테이션으로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어 고용노동부로부터 60대 이상 노년층을 채용하고 사회공헌 일자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야외매표소 ※ 5층은 공연장인 "모두의 극장"으로 활용 중 인터뷰: 김은주 대표(추억을 파는 극장 대표, 헐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 운영) 실버영화관을 운영 중인 (주)추억을 파는 극장 김은주 대표 임수연 _낙원상가에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이 입주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세요. 김은주 _원래는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있었는데, 필름포럼이 먼저 이사를 한 뒤 그 자리에 제가 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이 들어오게 됐어요. 서울아트시네마가 이사를 한 뒤에는 낭만극장이 입주했습니다. 현재는 ㈜추억을 파는 극장에서는 영화관을, 낭만극장에서는 영화관 1개관과 공연장을 운영합니다. 처음 극장을 대관하게 됐을 땐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어요. <더티 댄싱> <영웅본색> <미션> 이런 옛날 영화들을 상영을 해볼까 해서 왔는데, 사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올 줄 알았는데 노인 관객들이 대거 오시는 거예요. 그때 그분들이 옛날 영화를 갈망하는 눈을 봤고, 그 눈을 제가 뿌리칠 수 없었어요.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2009년 1월 실버영화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임수연 _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김은주 _낭만극장 대표님은 2013년 관객으로 처음 만났어요. 은행에서 오래 일을 하시고 퇴직한 직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시길래 실버영화관과 같은 결을 갖고 있는 극장을 운영해보시라고 제안드렸어요. 그래서 2015년 서울아트시네마가 떠난 자리에 낭만극장이 문을 열게 됐습니다. 실버영화관이 영화만 상영한다면, 낭만극장은 영화도 상영하고 공연도 합니다. 실버영화관은 7~80대를 대상으로 상영한다면, 낭만극장은 그보다는 젊은 영화들도 틀어요. 그래서 낭만극장에서는 도전해볼 만한 영화들도 틉니다. 저희가 히트했던 대작 위주로 진행한다면, 낭만극장은 ‘오드리 헵번’전, ‘존 웨인’전, ‘윌리엄 웰먼’ 특집전 같은 기획전 위주로 프로그램을 짭니다. 실버영화관(좌)과 낭만극장(우) 입구 임수연 _실버영화관의 상영 프로그램은 어떻게 결정되나요. 김은주 _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종이에 써서 집어넣는 함이 있어요. 이를 토대로 저작권이 협의된 작품들을 추립니다. 아직은 이 시장의 저변이 확 넓어진 건 아니기 때문에 마니아성 영화보다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으로 노년층들이 좋아하는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주로 언급됩니다. 임수연 _공간 인테리어 측면에서 어떤 부분을 신경 쓰고 있습니까. 김은주 _코로나 이전에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미세먼지였어요. 전 시대에 비해 폐렴으로 돌아가시는 노인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만큼 미세먼지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거죠. 실버영화관도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원과 같은 극장을 만들려고 했어요. 노인을 위한 극장이라고 초라하고 허름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거죠. 영화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삶의 질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식물들로 장식된 4층 로비 벽면 임수연 _이곳을 찾는 노년 관객들의 성향은 어떤가요. 김은주 _눈을 뜨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되게 행복하신가 봐요. 부산에서 표를 끊어 올라오셔서 굳이 티켓까지 보여주시면서 “자리가 없으면 서서 볼 거다” 라고 하세요. 여기 오시는 분들은 극장 매표소에 있는 박스에 사식 넣듯 자꾸 초콜릿, 과자 같은 것을 집어넣으세요. 어떤 날은 집에서 재배했다면서 감자를 엄청 삶아갖고 오시고, 사과나 곶감을 보내시기도 해요. 일반 극장은 관객과 소통할 일이 없는데 저희는 관객과 쌍방향 소통을 상당히 많이 한다는 게 굉장히 독특하죠. 실버영화관 내부 코로나로 인해 격석으로 좌석을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임수연 _실버영화관에서 일하는 직원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김은주 _㈜추억을 파는 극장에는 30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중 10% 미만이고 나머지는 다 노인 분들이에요. 병원도 가셔야 하고 스케줄이 많아요. 그래서 오전과 오후, 그리고 주 3일 로테이션으로 업무를 나누느라 많은 사람들이 근무를 하게 됐어요. 또 저희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됐어요. 고용노동부에서 60대 이상 경험자들이 현장에 파견 나가 일을 할 수 있게끔 돈을 주고 지원하는데, 그렇게 사회공헌 일자리로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죠. 임수연 _상영환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면? 김은주 _아쉬운 건 필름으로 계속 상영을 하고 싶지만 전 세계적으로 필름이 공급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필름으로 영화를 틀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다행인 건 필름의 거의 마지막 시대에 가장 좋은 필름으로 고전 명작을 많이 구입했어요. 만약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상영한다면 저희가 갖고 있는 거의 원판에 가까운 필름으로 트는 게 가장 화질이 좋을 거예요. 필름비는 한편당 500만원, 번역과 통관까지 합치면 1000만원 이상 드는데 2004~2005년쯤 작품을 대거 구입했습니다. 실버영화관 영사실 내부와 영사기 임수연 _앞으로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요. 김은주 _예산 지원이 뒷받침돼야 하지 않을까요. 실버영화관이 멀티플렉스는 아니지만 멀티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했던 영화 키드 세대가 지금은 노인 세대가 됐어요. 이분들이 좀더 품격 있는 노년을 맞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친구가 돼서 항상 곁을 지켜줘야 해요. 어려운 것부터 가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겁게 시작할 수 있는 시도를 해 나가려고 해요. 극장이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영진위에서 다양한 예산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김종준 대표(낭만극장 운영) 낭만극장 김종준 대표 임수연 _대표님은 과거 허리우드 극장에 대한 추억이 있을 법한 세대입니다. 그 기억이 낭만극장을 운영하는데 영향을 미쳤나요. 김종준 _제가 62학번입니다. 60~70년대에는 영화를 관람하는 게 제일 좋은 취미였습니다.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도 영화 보는 게 제일 큰 행사였죠. 500원, 1000원이면 영화도 보고 불고기도 먹을 수 있었죠. 그때 기억 때문에 영화도 지금까지 좋아하는 거예요. 어느덧 저도 늙었으니까, 노인들의 행복을 위해 아지트를 만들고 외로움을 덜어드리고자 낭만극장을 열었습니다. 임수연 _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의 프로그램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김종준 _차이는 없어요. 코로나19 전에는 관객이 1500~2000명씩 왔어요. 한 극장에서 프로그램 한번 할 때 3~4일 정도 상영하거든요. 여기 오는 관객들은 오늘은 낭만극장에서, 내일은 실버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식으로 하다 보면 일주일에 영화를 4~5편 봐요. 그래서 시너지 효과가 좋아요. 내가 영화관에 가야 사는 것 같다고도 하시고요. 서대문의 청춘극장도 김은주 대표가 맡고 있는데, 거기까지 티켓 2000원으로 서울시로부터 위탁을 받아서 영화를 틀고 있습니다. 임수연 _낭만극장과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고 계세요. 5층은 언제부터 공연장으로 만드신 건가요. 김종준 _2년 정도? 그 전에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다른 공연팀이 있었는데 몇 천 명씩 와서 공연을 봤어요. 그러다 코로나 때문에 중국 관광객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저희가 국내 공연을 하는 곳으로 만든 거예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2~3번씩 공연을 했어요. 낙원상가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악기상가가 있잖아요. 악기상들이 자기 고객들에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로 소개하면 저희가 대여를 해주기도 했죠. 지금은 극장 2개관이 각각 300석, 공연장이 400석, 총 1000석입니다. 5층 공연장 모두의 극장 내부 임수연 _낭만극장과 실버영화관이 공유하는 라운지를 꾸밀 때 특히 어떤 점에 신경 쓰셨나요. 김종준 _영화를 안 보시는 분들도 로비에 와서 즐기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코로나 이전에는 식당에서 간단한 음료와 간식도 팔았어요. 공기 정화를 위해 공기청정기도 설치했습니다. 임수연 _낭만극장을 주로 찾는 관객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김종준 _가장 많은 건 80대에요.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70대였는데 그분들이 지금은 80대가 됐을 테니까요. 5~6년 전에는 90대 관객이 오면 신기해서 따로 모셨는데, 지금은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가장 많은 건 80대, 그 다음이 70대, 그 다음이 90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60대 관객이 가장 적습니다. 대체로 50년대부터 60년대 초,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보시던 분들이 많습니다. 낭만극장 내부 임수연 _튼튼하게 지은 만큼 건물 자체는 앞으로도 보존될 수 있겠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영화관이 계속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종준 _60~70년대에는 영화를 많이 봤지만 80~90년대에는 야외에 나가서 골프도 치고 다른 여가활동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 베이비부머 세대를 흡수하기 위해 공연장에서 베이비부머 연예인들이 공연을 많이 하게끔 하는 게 낭만극장의 숙제이자 목표에요. 추억의 명화를 트는 일은 70~80대가 80~90대가 되고 나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를 끌어들여야 해요. 필자: 임수연(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4월 19일
2021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확진자와 중증환자의 급증으로 산산이 깨졌다. 작년 연말이 돼서야, 이젠 2020년 2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완전히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 그렇게 달라진 건 아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좀 덜 돌아다니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딜 가든 조금만 유명한 곳들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극장의 풍경은 다르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신작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잠시 활기를 띨 만하면 방역 조치가 강화되는 악순환이 2년째 반복되면서, 극장은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 이렇게 적은 관객들로 극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영화론자’나 ‘영화주의자’들이 극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극장에서 영화보는 일을 찬미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극장의 죽음은 이젠 가까운 미래의 일이 되어버렸다. 관객이 사라진 조용하기도 스산하기도 한 극장에 갈 때마다 쓸쓸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때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은 늘 낮은 곳부터 고이므로 실질적 피해는 영화산업을 하부에서 받치고 있는 작은 회사들과 독립창작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극장에 갈 수 없는 관객에게는 OTT가 대안일 수 있겠지만, 산업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도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OTT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가급적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들을 더 많이 포함시키고 싶었다. 올해에는 나의 2021년 사사로운 리스트 10편의 영화 중 클레이 자오의 < 노매드랜드 >에 대해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좋은 평론가들의 훌륭한 글에 더 보탤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노매드랜드>가 품고 있는 고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몇 마디 더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극장에서 본 영화였고,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 영화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노매드’는 누구인가?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의 제목은 떠돌이, 뜨내기, 부랑자, 정착하지 못하는 자, 유목민, 유랑자, 방랑자 등등의 뜻을 가진 ‘Nomad’와 땅 또는 지역이라는 뜻의 ‘Land’가 합쳐진 단어인데, 원작도 같은 제목이다. 그런데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이 원작 논픽션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 Surviving America in the Twenty-First Century.” 그는 2014년 하퍼스 매거진에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글을 읽고 감동 받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노매드랜드」를 출간했다. 여기서 ‘노매드’는 ‘노매드 노동자’, 혹은 ‘워캠퍼(workapmer = work+camp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2007년과 2008년 사이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해 미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했다. 주로 이 시기에 평생에 걸쳐 쌓아온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은퇴자들인데, 전통적인 형태의 벽과 기둥으로 된 집을 포기함으로써 집세와 주택담보대출금의 족쇄를 끊어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밴과 RV, 트레일러를 집 삼아 좋은 날씨를 따라 단기 일자리에서 다른 단기 일자리로 이동하면서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계절에 맞는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물론 이들이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만으로 떠밀리듯 이런 삶을 선택한 건 아니다. ‘노매드’로서의 삶은 은퇴 후의 경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이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노매드’들끼리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도 한다. 저자 제시카는 2014년부터 무려 3년 동안 실제 RV에서 살면서 ‘노매드’들을 따라 약 2만 4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클레이 자오의 영화와 그의 세계 제시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원작에는 저자의 취재를 도와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린다 메이’라는 이름의 이 인물은 영화에도 같은 이름으로 직접 출연하는데, 영화에서도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난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을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제작자이기도 한 배우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오래된 동료 제작자인 피터 스피어와 함께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한 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다면, 그 영화는 아마도 저자인 제시카나 린다 메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매드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그럼으로써 미국 사회의 또 다른 현실을 들여다보는 정치적이고 시사적이며, 고발적인 영화, 차갑고 딱딱하고 쓸쓸한 톤의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러브콜을 흔쾌히 받아들인 클레이 자오는 뻔하고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클레이 자오는 원작의 세 번째 챕터에 나오는 미국의 오래된 기업의존형 도시인 엠파이어를 고향으로 둔 ‘펀’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냄으로써, 원작이 그려낸 부조리한 미국 사회를, 꿈과 결핍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살고 있는 클레이 자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실제 ‘노매드’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게 함으로써, 원작의 르포르타주적인 면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했다. <노매드랜드>는 마치 실제 ‘노매드랜드’라는 현실 속에 전문배우인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빗 스트라탄을 투입하여 영화를 찍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독과 훈련된 전문 배우들은 노매드들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함께 들어주고, 카메라에 담긴 이들의 이야기는 <노매드랜드>의 서사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영화만들기 방식은 캐나다 퀘백 지역을 대표하는 드니 코테 감독이 2009년 연출한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인 <카르카세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드니 코테는 수백 대의 자동차의 무덤에서 살아가는 한 노인의 집 마당에 4명의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투입하여 서사에 긴장을 만들어냄으로써 서사를 진행시켰다. 클레이 자오 감독은 이처럼 자기만의 영화만들기 방식을 통해 다루는 주제와 소재, 인물과 사회적 맥락의 역학 관계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한편, 어떤 영화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이식하고, 자신만의 인장을 찍어왔다. 그의 경력과 전작을 살펴보면 그는 정말 '이상하고 특별한' 감독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으면서도 미국적 가치와 정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그걸 섬세하게 영화에 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재능은 <노매드랜드>에서 정점을 찍었다. 198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는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기 전 에밀리 디킨스의 모교였던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도대체 왜 중국인들은 함께 모여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정치학을 시작했지만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장편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2015)와 두 번째 영화 < 로데오 카우보이 >(2017)를 연달아 만들었다. 배경, 인물, 주제, 배우, 연출방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연작이나 다름없는 이 두 영화에는 클레이 자오의 영화 세계를 떠받치는 주요 특징들이 모두 담겨 있다. 장편 데뷔작 <Songs My Brother Taught Me>는 - 국내 포털에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Brother’는 ‘형제’가 아니라 ‘오빠’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정식으로 상영된 후에 포털에 제목이 올라갔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아마도 <오빠가 가르쳐준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오빠와 여동생, 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우스 다코타의 파인 릿지 인디언 보존지구에서 살고 있는 10대 소년 조니인데, 그는 졸업 후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떠나 LA에 가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여동생이다. 한편,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지역에서 촬영된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의 주인공은 이제는 한물간 로데오를 사랑하는 브래디다. 그는 로데오 경기 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간절한 꿈을 포기하는데, 여기에도 핸디캡을 가진 여동생이 등장한다. 이 두 영화는 모두 가족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청년과 여동생으로 상징되는 가족, 그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이 두 편의 영화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동생은 마치 클레이 자오 감독처럼 느껴지는데, 감독은 이런 방식을 통해 그가 품었던 ‘가족주의’에 관한 질문과 그 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낸다. 클레이 자오가 담아낸 노매드의 세계 클레이 자오가 <노매드랜드>에서 창조한 ‘펀’이라는 인물 역시 상실감과 결핍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펀은 2편의 전작에서 창조한 두 청년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남편을 잃은 ‘펀’은 마치 이들의 40년 또는 50년 후의 모습 같다.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한 이 두 청년들은 평생 결핍과 상실감은 숨겨둔 채 살다가, 가족마저 사라지면 그들의 어깨에는 허무함이 하나 더 얹어질 것이고, 결국 그들은 평생을 부유하듯 살게 될 것이다. 뗄 수 없는 결핍과 상실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 이터널스 >에서도 변함없이 등장한다. 게이, 흑인, 애정 결핍, 치매, 청각 장애 등 너무 정치적이어서 오히려 재미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초능력과 함께 결핍을 부여받은 히어로들, 결국 지구인에 대한 애정으로 창조주를 배신한 그 히어로들은 영원히 상실감을 껴안고 살아갈 것이다. 클레이 자오의 세계에 존재하는 중요 인물들은 이런 상실감과 결핍으로 규정된다. 클레이 자오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과 함께 살았던 하지만 이제 망해버린 엠파이어를 떠난 펀의 이야기, 그리고 펀이 길 위에서 만난 노매드 노동자들의 이야기,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결핍과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는 도구로써, 미국 서부의 눈부시도록 쓸쓸하고 아름다운 실제 풍경을 영화 곳곳에 배치한다. 그는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약 5개월간 25명의 스텝과 함께 일곱 개 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표현법 때문에 너무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능한 비판이겠지만, 기억할 것은 아무리 고단한 인생이라도 삶의 숨통을 띄워주는 낭만의 순간들을 에너지원 삼아 한발 한발 전진한다는 것이고, 또한, 항상 슬픈 표정으로 있어야만 피해자가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늘 고통받고 힘든 표정으로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피해자에게는 피해자답기를 요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답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들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의도치 않게 사회가 약자와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약자성’ 또는 ‘피해자성’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펀의 내면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고, 그는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돈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편하게 정착해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다시 길 위에 선다. 이제 길 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주어진 노동을 하고, 밴을 타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차박’을 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진실하지 않거나, 그가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서부극으로써의 <노매드랜드>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의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펀’의 여동생이 던진 말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언니를 방어해주기 위해 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노매드들이 하는 일은 개척자들이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난 펀이 미국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서부극과 연결시킨다. 이미 클레이 자오는 서부극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가 공개된 후 언론은 이 영화를 ‘웨스턴’ 장르로 이해했고,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에 대해 ‘한 중국 이민자 출신의 영화감독이 미국의 가장 오래된 장르(웨스턴)를 혁신적으로 바꾸어냈다’고 평했다. 실제로 클레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도 웨스턴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이터널스> 전까지 자신의 모든 영화를 촬영했던 촬영감독 조슈아 제임스 리처드와 함께 <노매드랜드>를 촬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펀’이라는 인물은 결국 집을 떠나 황야로 걸어 들어가는 존 웨인의 현대적인 캐릭터이어야 하고, 존 포드의 고전 영화를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쇼트들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해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포획된 한 인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극에 등장하는 서부개척자들 또는 영웅들과 노매드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부극의 인물들은 도착과 정착을 원하지만, 노매드들은 떠남과 방랑을 원한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집과 마을을 지을 장소를 향해 전진한다. 그들은 항상 수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노매드랜드>의 노매드들은 정착했던 곳을 떠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수평선을 향해 가지만, 그 너머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은 길이다. ‘펀’이 분명하게 말했던대로 그들은 houseless지만 homeless는 아닌 것이다. 로드무비로써의 <노매드랜드> 그러므로 <노매드랜드>의 인물들은 정착하고 머물던 곳을 떠나 길 위에 선다는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기보다 오히려 로드무비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서부극은 마지막에 갈등이 해결되고, 로드무비는 끝날 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은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태반의 로드무비는 성장영화와 동의어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는 이런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다르다. <노매드랜드>의 펀은 길 위에 있지만, 목적이 없다. 그는 생존을 위해 길을 선택한 자다. 그의 목적은 방랑이다. 그래서 그는 정착을 두려워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두 번씩이나 정착할 기회를 얻는다. 한번은 여동생에게서, 한번은 남자친구에게서, 그러나 그는 편안한 침대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선다. 모두가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실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일부러 육체적 불편함을 선택하는 일은 그렇게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몬티 헬만의 마스터피스 < 자유의 이차선 >의 낭만주의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8년 파격적인 결말을 담은 전설적인 로드무비 < 이지라이더 >가 세상에 나온 지 3년 만에 나온 이 영화는 건조하고 불친절하지만 도전적인 로드무비이면서 <이지라이더>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다. 몬티 헬만의 최고 걸작이며, 영화사에서도 <분노의 총성>과 함께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로드 무비의 장르적 컨벤션을 전복시키는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이 왜 차를 집처럼 여기면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끊임없이 자동차 경주를 하면서 앞으로만 달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주한다. 목적지가 동부인 것 같지만, 왜 거기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 <자유의 이차선>이 내재하고 있는 주제는 이렇게 <노매드랜드>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두 영화 모두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차의 이미지로 끝이 난다. 물론 <자유의 이차선>이 한 발 더 나아가지만, 목적과 목적지 없이, 오직 차로 달리는 것만이 목표인 로드무비는 50년 후에 한 이방인 출신의 미국 감독의 손을 통해 환생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격변의 60년대를 방황하던 <자유의 이차선>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은 50년 후 <노매드랜드>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파산한 ‘노매드’의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 선 것이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제시카 부르너의 <노매드랜드>의 원작 첫 장에는 레너드 코먼의 문구가 써 있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클레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원작을 클레오 자오의 방식으로 변주한 영화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틈과 빛’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의 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집이 아닌 길을, 정착이 아닌 방랑을 선택한 자들에 관한 영화. 그‘노매드’들이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찾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그려냈다거나, 눈부신 미국 서부의 풍경 때문이 아니다. 살아갈 이유가 사라져버린 희망 없는 인생도 살아낼 수 있는 세계,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도 가능한 삶이 존재하는 세계, 전통적인 사회적 통념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를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긍정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쓸쓸한 세계에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오빠가 가르쳐 준 노래), 결국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며(로데오 카우보이), 살기 위해 길 위에서 노동을 하고(노매드랜드), 각자 결핍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사랑 때문에 창조주(부모)의 명령을 거부한다.(이터널스). 이렇게 클레이 자오의 세계 속에는 꿈 같은 거 없이 상실감과 결핍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존엄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좁은 틈으로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