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gi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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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과 연계한 기획입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8 아직 건강했던 즈음의 모습이나 목소리의 억양 등을 부족하나마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생각에 고인 화장을 한 채로 말도 없이 누워 있는 아오야마 신지--그건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고 후에 들었다--의 마지막 모습을 접하는 등의 일은 이 서글픈 늙은이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 마음을 배우자인 도요타 마호에게 전화로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다부지게 대응하는 마호의 씩씩함에는 그저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오야마 신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밖에 없었던 노령의 나는 그 시각, 식이 행해지고 있을 공간을 생각하면서 어느 일간지 덕분에 영화작가로서의 그의 특이한 매력과 생각지도 못한 훌륭함을 이것저것 쓰고 있었지만, 쌓이는 생각과 그것을 전하려는 말이 신문 특유의 행수와 글자수의 제한에 막혀 마냥 공전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처럼 글이 잘 진행될 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도 끝날 무렵에는 역시 피곤한 나머지 축 늘어진 채 일하던 책상에서 벗어나 소파로 도망쳐, 담배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TV 수상기를 향해 리모컨 버튼을 눌러야 할지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아마도 태생적인 나태함 때문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렇다 할 확실한 이유도 없이 심야 흡연과 심야 TV 화면 점등을 거의 동시에 시작하고 말았다. 그러자 작은 화면에는 뭔가 돌계단 같은 경사진 공간에 서 있다가 앉아 있다가 하는 남녀가 비쳤는데, 아무래도 연속극의 마지막회스러운 그 화면 구도가 하나하나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심야의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치고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것은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의 작품이구나 싶어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 이야기의 줄거리도 작중 인물들의 관계도 전혀 모른 채 뜻하지 않게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화면의 연쇄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오야마 신지적인 부분도 있어, 도대체 누가 이런 드라마를 찍었는지 궁금증이 커졌고, 마지막에 흐르는 캐스트와 스태프 이름의 연쇄를 눈여겨보다 보니, <시쥬카라>(シジュウカラ)라고 하는 제목인 것 같은 그 드라마의 연출가 이름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大九明子’(오오쿠 아키코)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그날 오후 집에 도착한 단행본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필름아트사, 2022)의 목차에서도 봤던 이름이어서 그 사실에 새삼 놀랐고, 발행사의 편집자인 다나카 류스케 씨에게 메일로 문의했더니, 그 사람은 영화 < 제멋대로 떨고 있어 >(2017) 등을 통해 관객을 매료시킨 여성감독이라고 알려줘서, 나 자신의 무지--그것을 나이 탓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를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바로 그다음 날 아침부터 오오쿠 아키코 감독과 메일 교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이메일 교환을 통해 감동을 받고, 더불어 알게 된 것은 <시쥬카라>의 연출가가 영화미학교 1기 수료생으로 아오야마 신지를 스승으로 추앙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오야마 신지의 장례식 날 심야에 완전한 우연으로, 아오야마 세미나 출신자가 연출한 ‘양질’이라고 하는 말에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극상’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마음이 깊이 움직여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아오야마 자신이 그 명함--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을 곁들여, 이 여성 감독을 나에게 소개해준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 DVD를 그 자리에서 즉시 구입한 것은 물론이다. 앞서 언급한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에는 아오야마 신지 또한 마치야마 히로미(町山広美)와의 대담 「영화의 틀은 이미 사라졌다」(映画の箍はすでに外れている)를 실었기 때문에, 오오쿠 아키코 감독은 자신이 쓴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특별 강의」가 스승 아오야마 신지에게 읽히게 될지도 몰라 멋쩍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인 아오야마 신지의 서거로 인해 그 기회는 영원히 상실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불합리하게 우리들의 곁을 떠난 아오야마 신지는, 말로 하지는 않았으나 오오쿠 아키코가 만든 탁월한 숏의 연쇄를 마치 의도하지 않은 유언처럼 나에게 알려준 것이 되었으므로, ‘아오야마 신지, 고맙다’라고 심야에 고독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는 이 후기 고령자에게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선물이었다. 아오야마 신지는 릿쿄대학 시절의 나의 제자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히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형뻘인 구로사와 기요시나 만다 구니토시 등의 세대처럼 그들이 만든 8㎜ 필름 작품을 수업 중에 상영하거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영화 얘기를 하고, 그 후에도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때 나 자신이 릿쿄대학의 교사직을 이미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비상근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는 제도적인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오야마 신지라는 이름은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인식한 것은 훨씬 뒤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아테네 프랑세에서 열린 다니엘 슈미트 작품 상영회 때, 그의 조감독이었던 아오야마 신지로부터 조용히 인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풍성한 장발을 어깨에 휘날리고 있던 그의 얼굴을 인식한 첫 번째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문학부 1학년이었을 때 쓴 학기말 리포트가 무척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영화에 대한 소론이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영화의 “눈”은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이었다’라고 쓰기 시작해, ‘그 따뜻함이 두렵고, 그 다정함이 공포를 증폭시키는 것이다’라고 끝맺었듯이, 그 ‘따뜻함’과 ‘두려움’, 그리고 ‘다정함’과 ‘공포’와의 변증법적 기술(記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대학 1학년 후기의 리포트이기 때문에 갓 스무 살이 된 젊은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는 것에, 교사로서의 여유를 넘어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대부분의 리포트는 거의 처분해 버렸는데, 〈a〉보다도 훨씬 뛰어난 〈A〉라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는 그 짧은 글이 아직도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이 ‘아오야마 신지’라고 하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글쟁이이기도 했다. 그것은 걸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유레카>(2000)의 소설판을 통해, 누군가가 쓴 『백작부인』 같은 것보다도 15년 정도 전에 이미 미시마유키오상을 수상한 것에서 엿볼 수 있음에 틀림없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예를 들면 근저인 『다카라가이케의 가라앉지 않는 거북--한 영화 작가의 일기 2016-2020』(boid, 2022)의 어디라도 좋은 단 한 페이지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오야마의 글재주는 누가 봐도 확실한 것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비평가였으며 그 비평적 눈의 선명함과 강렬함은 이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영화작가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은 현대 일본의 가장 뛰어난 영화평론가의 죽음 그 자체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비평가로서의 측면은 구로사와 기요시와 나와의 공저 『영화장화』(리틀모어, 2011)에서의 긴 시간에 걸친 토론을 통해서 매번 느끼고 있던 것에 다름이 아니며, 그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은 이미 『아오야마 신지와 아베 가즈시게와 나카하라 마사야의 시네콘!』(리틀모어, 2004) 등을 통해서도 충분할 정도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영화를 잘 찍는 감독에 그치지 않고, 뛰어난 언어로 영화를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비평가였던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의 마치야마 히로미와의 대담에서, 마치야마 히로미가 언급한 칼 드레이어의 <게르투르드>(1964)를 놓고 “현대영화의 기선을 잡은 <게르투르드>는 누구에게나 넘어야 할 ‘영봉’임에는 틀림없다”면서도 보다 현대성이 강한 <아네트> 같은 영화는 “<게르투르드>의 엄격한 가치 기준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 경지에서의 머뭇거림을 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면서, 이 같은 정확하기 짝이 없는 가치판단을 내세울 수 있는 비평가가 지금 몇 명 있는지, 적이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오야마 신지와는 2월 하순까지 이메일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신경 써서 보내준, 걸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 구름 위에 살다 >(2020)를 아내와 나란히 보면서 소파에 몸을 맡기는 다베 미카코의 몸놀림이 터무니없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아내의 반응을 전하자 아오야마 신지는 순순히 기뻐해줬다.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 추모글을 쓰게 되면서 아오야마 신지가 찍은 몇 편의 작품을 DVD로 다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극히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때문에, 전부 도중에 보는 것을 그만뒀다. 예를 들면, < 헬프리스 >(1996)에 몇 번인가 삽입된 기타큐슈의 어떤 공장의 무인 숏.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또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 숏의 적확한 삽입이 눈물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 피사체를 향해야 할 몇 개의 앵글 중에서,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적확하기 짝이 없는 카메라의 위치를 아오야마 신지가 선택하고 있다고 하는 그 절대적인 올바름이,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점으로부터, 내가 아오야마 신지의 ‘눈’을 깊게 신뢰하게 된 계기인 < 셀레브레이트 시네마 101 >(1996)을 다시 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VHS 테이프로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두려워하는 그 예스러운 장치에 낡은 테이프를 삽입했더니 갑자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기묘한 소리가 기계로부터 흘러나오며 어느 버튼을 눌러도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테이프를 꺼내려 해도 금속제 뚜껑이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때까지는 간신히 기능하고 있었던—사실 『존 포드론』의 집필 때문에 그의 TV 작품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 기재는, 아오야마 신지 때문에 기능 부전에 빠져 버렸으니, 부디 책임을 져달라고 말하고 싶은 바다. 다행히도 지금은 VHS로 봐야 할 작품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오야마 신지 이 사람아’라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자네는 우리 집의 낡은 VHS 재생장치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네. 얼마나 밉살스러운 남자인가. 하기야 『다카라가이케의 가라앉지 않는 거북』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아오야마 신지의 비평적 선명함과 강렬함이 다소 무뎌지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시로 그렇게 지명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 자신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순간이다. 2018년 월드컵 때 그와 메일을 교환하다가 모드리치를 남군 장교에 비유한 것은 틀림없이 바로 나였다. 실제로 아오야마 신지는 그 비유를 보고 이렇게 썼다. ‘잠이 부족한 나날에 대해 보답받았다고 할까, 내가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가르쳐 주셔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렇다. 나는 모드리치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남북전쟁을 그리는 포드와 페킨파의 서부극을 월드컵에 겹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납득이 가는 해설’(p.189)이라고 반응하고 있다. 맹세코 말하지만, 그렇게 쓴 나의 의도를 이해해 주는 것은 이 좁지 않은 세계에서도 아오야마 신지 한 명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에 대한 은밀한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 일을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그를 울려 버린 적도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낮에 도착한 《문학계》에 실린 「존 포드론 제1장-II. 수목」을 단숨에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눈물샘이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 말 없는 사나이 >를 거쳐 <일곱 여인>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 사정을 모른 채 옆에 있던 여배우가 “웬 오열?”이라며 놀라워했다. 이것은 나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시게오미 군과 관련된 일이 깊게 관계하고 있는 것 같다. 외아들을 잃은 분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p.422)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오열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써주는 사람은 아오야마 신지밖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확신하고, 나 또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미우라 하루마를 <말 없는 사나이>의 모린 오하라처럼 나무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터무니없이 감동적인 < 도쿄공원 >(2011)을 찍고 난 직후였다고 생각되는데, 시게오미가 스즈키 다쿠지 감독의 <나는 고양이 스토커>(2009)나 스가누마 에이지 감독의 <속삭임>(2009)의 음악 작업을 끝낸 이후 몸이 약간 좋지 않아 처음으로 입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문병을 가서 그 병실에 가까이 다가갔더니 안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오야마 신지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당분간 젊은이들끼리 대화를 즐기도록 놔두자고 생각하고 대기실로 돌아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신진 작곡가인 시게오미와, 그의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를 아내로 둔 영화작가 사이에는, 도요타 마호를 둘러싼 무수한 화제가 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5분이 지나도, 반 시간이 지나도, 결국은 1시간이 지나도, 아득한 병실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1시간 반 정도 후에야 야구 모자를 쓴 아오야마 신지가 복도를 지나며 ‘아아, 와 계셨습니까’라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자, ‘아아, 시게오미 군, 아주 건강해 보였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하고 그곳을 떠났다. 병실에서 나를 맞아준 시게오미는 시게오미대로, 몸이 나아지면 함께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아오야마 신지로부터 차기작의 음악 작업을 의뢰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오지 않았고, 아오야마 신지의 수줍은 표정도, 그 통통 튀는 웃음소리도, 그와의 긴 대화를 진심으로 즐기던 시게오미의 자랑스러운 미소도, 이제는 영원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머지않아 86세가 되어 가는 이 후기 고령자는, 이를 위한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오야마 신지를 함부로 추모하지 않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신초」2022년 6월호) 필자 - 하스미 시게히코: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영화평론가. 영화 분야 저서로는 『영상의 시학』(1979), 『감독 오즈 야스지로』(1992), 『영화의 신화학』(1996), 『고다르 혁명』(2005), 『보기 레슨: 영화사 특별 강의』(2020), 『쇼트란 무엇인가』(2022), 『존포드론』(2022) 등이 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이 글의 무료 게재를 허락해주신 「신초」 편집부와 하스미 시게히코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この文の無料掲載をお許しいただいた「新潮」の編集部と蓮實重彦様にお礼を申し上げます。) ※ 이 글의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note.com/monthly_shincho/n/n442dd74c8048 )
이번 회엔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1941)를 말하려 한다. 청컨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라면 먼저 영화를 보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 글을 먼저 읽는 것이 혹시나 영화를 볼 때의 충만한 감흥을 빼앗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존 포드의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지만 아름답고 슬프고 감상적이고 냉혹하면서 괴이한 이 영화를 아무런 사전 정보와 지식 없이 만난다는 것은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이면서, 아마도 그의 영화 생애에서 가장 많은 세속적 영예를 가져다준 영화일 것이다. 하워드 혹스의 < 요크 상사 >와 더불어 그해 최고의 흥행작 대열에 올랐고,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둬들였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작으로 꼽히는 오슨 웰즈의 < 시민 케인 >도 같은 해 여러 부문의 오스카 후보에 올랐으나,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미술상을 존 포드에게 넘겨주고, 각본상만 수상했다. 개봉 당시 주류 평자들도 이 영화에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즘 비평가 중 하나였던 보슬리 크로더는 개봉 다음날 「뉴욕 타임즈」(1941. 10. 29.) 기고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거친 현실의 날카로운 대조”를 “시적 이미지”로 빚어낸 “놀라운 걸작”이라고 평했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 시민 케인 >을 반세기 가까이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아온 후대 비평가들 사이에서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가 미운털이 박혀 오랫동안 폄하되어온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후대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감상적 주류영화이며 기껏해야 오스카 맞춤형 작품 정도로 간주했다. 데이비드 톰슨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눈물과 석탄 가루의 흉측한 뒤범벅”이라고 혹평했다(「Biographical Dictionary of Film」). < 수색자 > 외엔 존 포드의 모든 영화를 감상주의와 폭력성의 교활한 결합으로 간주하는 철저한 포드 비판론자인 데이비드 톰슨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그의 책에 실린 간략한 존 포드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악랄한 험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존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가장 풍성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지만 “장식적이고 ‘실용적’(applied) 기교로 연출”되었으며 이 때문에 “포드의 다른 영화에 비해 더 많은 오스카를 받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다소 부정적으로 논평했다.(「About John Ford」) 그토록 널리 알려진 영화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오해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당겨 말하면,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주류적이지도 고전적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단순히 모던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괴이한 영화다. 이 영화의 괴이함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재탐구되어야 할 존 포드의 걸작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존중받고 사랑받게 될 것이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50년 동안 살아온 탄광 마을을 이제 떠나려는 휴 모건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노스탤지어의 정조가 깃든 제목과 유년기의 회고담이라는 설정만으로도 감상적 멜로드라마라는 이 영화의 인상은 운명처럼 정해져 버린 것 같다. 이 영화가 얻은 대중적 성공과 비판적 논평은 이런 최초의 인상이 낳은 기대를 존 포드가 저버리지 않았음을 뜻할 것이다. 물론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존 포드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훼손한다. 이 영화의 괴이한 점 가운데 하나는 충족과 훼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충족인지 훼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장면들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많은 비판자들이 이 영화에서 충족의 면만 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훼손의 면을 볼 필요가 있다. 휴 모건이라는 화자(내레이터)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면서 일인칭 화자이다. 첫 장면은 스카프에 책을 싸는 그의 손동작이다. #1 #2 휴 모건의 내레이션과 함께 제시되는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생긴 지 오래지 않은 웨일즈의 탄광 마을에 사는 가난한 광부 가족의 이야기. 휴는 모건 부부의 6남 1녀 중 막내이며 휴를 제외한 남자는 모두 광부이고 어린 휴도 곧 광부가 된다. 고단하지만 정겨운 공동체적 삶을 누리던 휴의 가족과 마을은 탄광주의 횡포, 파업과 해고, 불의의 사고로 무너져가고 유년의 낙원처럼 보이던 푸른 계곡(#2)은 점점 석탄으로 검게 물들어간다. 린지 앤더슨조차 ‘오스카적’이라고 간주했던 이 이야기는 과연 주류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충실한가.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 사람은 후대의 시네필 비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구세대 주류 평자인 보슬리 크로더였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 영화가, “하층민의 삶의 탁월한 디테일 묘사와 그들의 섬세한 감정표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의 구체적 패턴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영화의 의도가 삶의 형식 없는 흐름을 따르는 것이긴 하지만, 산발적인 에피소드로만 이루어져 있어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크로더는 이것이 약점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포드는 놀라울 정도로 극적 구성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이만큼 에피소드 중심적인 포드의 다른 작품은 그가 가장 아끼는 영화 중 한편인 < 웨건 마스터 >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 중 한편인 < 세계는 전진한다 The World Moves on > 정도다). 여기엔 중심적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으며 모건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점진적 해체와 몰락을 초래하는 사건들이 수평적으로 나열될 뿐이다. 이 영화의 강렬한 정감은 사건들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 어린 휴 모건의 순결한 얼굴과 표정과 말투에서 비롯된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애처로운 아름다움이 있어 그가 나쁜 선택을 하는 경우조차 그의 편에 서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 어린 휴의 마취적 아름다움에서 이 영화에 대한 매혹과 비난이 동시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매혹된 이들은 그토록 순결한 아이의 거듭된 불행에 눈물을 쏟았고, 비난한 이들은 존 포드가 아이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켰다고 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현실을 소재로 삼은 멜로드라마가 사회적 불의의 최종적 희생자를 아이로 설정하는 것, 관객은 “동정의 형식으로 (아이라는) 약자에게 막대한 감정적 에너지를 투자”하고 그로부터 정서적 안정을 얻는 것(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그 과정을 비판적 논자들이 나르시시즘적인 도피로 간주하는 것 등은 영화 세상에서 드물지 않게 보아온 광경이다. 하지만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에 대한 매혹과 비난은 한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어린 휴의 현재적 드라마가 아니라 늙은 휴의 회고담이라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회상의 자의성 자체가 모티프가 아닌 한 관객인 우리는 영화의 플래시백을 영화 내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약속된 가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플래시백에서의 자의성의 은밀한 작동이 이 영화의 비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첫 시퀀스의 모종의 얼룩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얼룩은 즉각적으로 의식된다기보다 플래시백 서사의 기묘한 점들이 그것을 거꾸로 되짚게 만드는 편에 가깝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맏형 이보어가 탄광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에게는 임신한 아름다운 아내 브론윈이 있다. 모건 가족에게 가장 끔찍한 불행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은 이상하리만큼 간략하며 심지어 건조하기까지 하다. #3 #4 물론 장례식이 치러지는 집 안은 깊은 어둠과 침묵에 잠겨 있다(#3). 그때 어머니는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브론윈의 출산을 돕고 내려와서 “손자가 태어났다”고 태연한 말투로 아버지에게 알린다.(#4) “하나가 가니 또 하나가 왔군” “그런 이상한 소리는 며느리하고나 해요” “조용히 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어지는 대화에서 어머니의 말과 표정은 자식을 잃은 어미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시큰둥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거의 매 시퀀스의 화자이자 목격자였던 휴 모건이 유독 이 시퀀스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비극적 사건을 맞은 아이의 클로즈업에 한 쇼트도 할애되지 않았을까. 다음 시퀀스에 실마리가 있는 것 같다. #5 #6 휴의 성적표를 보며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고 있다(#5). 아버지는 휴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는다. 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후경에 있는 브론윈이 어머니에게 “매일 이보어의 신발과 옷을 준비하지만 그는 오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휴는 그것을 듣고 있다(#6). 아버지가 다시 장래 소망을 묻자 휴는 “광부가 될래요”라고 답한다. 만류하던 아버지는 결국 “네 뜻대로 해라.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는 마라”고 말한다. 곧이어 휴는 브론윈의 집으로 옮기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얻는다.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다소 끔찍한 상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결혼 전 브론윈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휴는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고 보이스 오버로 말했다. 휴는 브론윈의 남편 자리, 즉 맏형 이보어의 자리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건 이보어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보어의 죽음은 휴의 말해지지 않은 소망이다. 소망이 성취되자 그는 슬퍼할 필요가 없었고, 곧이어 이보어의 자리를 대신한다. 휴가 광부가 되려는 이유는 이보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것 말고는 이 서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천진한 소년은 가혹한 현실의 순결한 희생자라기보다는 금지된 욕망의 소유자다.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휴의 주체성을 중심에 놓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람은 역시 태그 갤러거다. 갤러거는 공동체에 대한 휴의 맹목적 집착이야말로 그의 불행을 초래한 것이며 이 영화의 표면적 감상주의 아래에는 휴의 천진난만한 선택, 그리고 가망 없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 갤러거는 또한 ‘자라지 않는 소년’이라는 훌륭한 관찰을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플래시백 서사에서 또 다른 기묘한 점이다. ‘이 소년은 극 중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제작자 대릴 자눅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20세기 폭스의 제작 책임자였던 대릴 자눅과 존 포드는 주로 편집권 문제로 수없이 다투었으나, 끝내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존 포드와의 기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자눅 뿐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는 작소 왜소한 아이가 관객을 동정을 끌어내기에 더 적합하며 그러기 위해선 어른 휴가 등장해선 안 된다는 상업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존 포드는 그 아이디어를 확장해 플래시백 서사의 모호한 진실성 혹은 은밀한 자의성에 녹여 넣으면서 미학화했다.(성장한 휴 역에는 타이론 파워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 한 장면을 살펴보자. #7 #8 #9 휴 모건은 탄광주 아들과 결혼한 뒤 멀리 떠났던 누나가 마을 내 탄광주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누나를 찾아간다. 그런데 탄광주 저택에 들어선 휴는 너무 왜소해 보인다#7). 단순한 착시일까. 그렇지 않다. 다음 장면에서 휴는 대문에 걸린 쇠고리로 노크한다.(#8) 그런데 쇠고리는 까치발을 해야 손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 있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는 영화는 이미 종결을 향해 가고 있고 플래시백의 시작 시점으로부터, 영화 내적 시간이 짐작건대 2년 이상 흘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맞은 누나는 “정말 많이 자랐구나.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대문과 쇠고리가 모두 존 포드의 지시로 세팅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 장면을 보면 이 쇠고리의 높이는 성인인 하녀에게도 불편할 만큼 높이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9). 이 장면들에서 휴의 과소한 신체가 회상주체의 자의적 왜곡이라면, 성장의 중단은 휴 모건의 소망이라는 뜻이다. 사건들이 연대기 순으로 발생하지만 기묘하게도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휴의 신체 성장이 멈춰있기 때문이며, 모두 죽거나 떠나가지만 그만은 완강하게 집과 탄광 마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늙은 휴 모건의 소망이다. 그는 이 시기의 기억이라는 장소 안에 영원히 거주하기를 원하며, 그 장소에서는 시간이 현실적 규칙을 벗어난 원환운동을 계속한다. 성장을 거부하고 시간을 원환하려는 그의 소망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패한다. #10 이 영화의 또 다른 기묘한 점은 짧은 기간의 플래시백 서사의 마지막 장면이 플래시백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곳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푸른 계곡의 시대, 모두가 모두를 반기고 아꼈던 낭만적 공동체의 시대다(#10 ). 이 이상한 회귀는 자의적 회상 안에서조차 (가족)공동체 해체, 몰락, 이별, 죽음의 틈입을 차단할 수 없으므로 실재의 폭력이 개입하지 않았던 회상의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갔음을 뜻한다. 우리는 유년기를 이상화하는 영화가 유년기적 낙원의 한 정점에서 끝나는 사례는 수없이 만나왔다. 하지만 현재를 경유하지 않고 플래시백 내부에서 다시 최초의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맺는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첫 시퀀스에서 제시된 늙은 모건의 현재는 이미 유령적인, 부재에 가까운 시점이 아니었던가. 이 유례없는 플래시백은 다시 발견되고 탐구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 말하지 못한 이 영화의 비밀은 훨씬 더 많다. 이상화된 시대의 기억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최초의 시점으로 영겁 회귀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푸른 계곡의 시대는 그 최초의 시작 시점에 사실상의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있고(러닝 타임으로는 15분 정도에 불과하다), 이상적 공동체는 사실상 존재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존 포드는 소년의 순결하고도 완고한 아름다움이 주재하는 감상적 플래시백을 내세워, 그것의 매혹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내파한다. 여기서 감상(感傷)과 냉소는 식별 불가능하다. 태그 갤러거는 합당하게도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를 존 포드의 가장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영화라고 말했다.
존 포드에 관해 말하게 될 이 연재의 제목을 ‘존 포드 이야기’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내가 아직 존 포드 감독론을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이미 많은 존 포드론이 출간되어 있고, 이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에 접근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존 포드론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길을 찾고 있는 중일 따름이다.(사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1997년 토론토에서 비디오로 포드의 < 도망자 The Fugitive >(1947)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전부터 < 수색자 >와 < 역마차 >를 좋아해오고 있었지만, 이 영화는 내가 아는 포드의 서부극과는 전혀 다른, 괴기스럽지만 신비롭고 매혹적인 표현주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를 드디어 35mm 프린트를 보고 그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포드가 어디까지 간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도망자 The Fugitive>(1947) 다른 하나는 한국의 시네필들과 영화애호가들의 존 포드에 대한, 나아가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유럽 시네아스트들에 대한 편애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 고전기 작가들은 오슨 웰즈와 알프레드 히치콕을 제외하면 여전히 무지와 무관심의 사이 어디쯤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 같다(최근 들어서는 유럽의 혹은 유럽 출신의 옛 거장들조차 점점 잊혀져가는 듯한 불길한 징후가 보이긴 하지만). 단적으로 한국에는 존 포드에 관한 단 한권의 역서도 저서도 출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역자로 참여한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한나래)의 한 챕터의 절반가량이, 장르적 시야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존 포드를 주의 깊게 다룬 유일한 한글본이다. 이런 상황은 시네마테크 프로그램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부산에서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밍을 8년째 해오고 있는 내 경험으로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 기획전은 객석이 텅텅 비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감행하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더 많고 다양한 취향의 시네마테크 관객들이 모여 있는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유럽과 일본의 시네아스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장 르느와르, 에릭 로메르, 오즈 야스지로 등의 이름은 빈번히 오르내리지만,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라울 월시 등의 이름은 찾기 힘들다. 어떤 시네마테크도 수익 혹은 점유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아직 우리에게 존 포드는 새롭게 해석되기보다 먼저 소개되어야 할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 이야기’라는 간판을 단 이 곳에서 나는 한 사람의 해석자가 아니라 소개자로서 존 포드를 말하려 한다. 그래서 이 글을 본 몇몇 사람이라도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좋아하게 되기를 바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한 거장의 세계와 만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든 음악의 흐름은 바하로 되돌아간다”는 쇤베르크의 말을 모방해 나는 ‘모든 영화의 흐름은 포드로 되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만일 이 말을 포드가 직접 듣는다면 그는 화를 내며(그는 다혈질이었고 예술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그리피스나 무르나우에게나 어울려”라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또한 다른 만신전의 명부를 가진 많은 영화전문가들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표현은 과장이다. 존 포드만큼 우뚝 솟은 많은 감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들을 어떤 영화들보다 원형적이라고 느낀다. 고요한 대지, 말없는 사나이, 떠나는 자의 뒷모습, 발설되지 않은 신음과 폭발하는 광기, 축제와 난장의 활력과 도취, 경건한 제의, 안식으로서의 유머, 추하고 사랑스런 얼굴들, 숭고한 배려와 보살핌, 악인의 예의 혹은 성인(聖人)의 비행(非行),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매혹과 불안과 피로의 풍경, 소멸해가는 공동체의 향기, 그들의 배열이 빚어내는 리듬과 화음과 아름다움 등등 내가 영화를 보고 경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영화에 담길 수 있을까. 나는 존 포드의 영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우리가 영화에 빠지게 만든 대부분의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의 포드가 아니라 여러명의 포드가 있을 것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오슨 웰즈에게 좋아하는 감독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웰즈는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라고 답했다. 웰즈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그의 대답을 존 포드의 다면적 원형성에 대한 찬사라고 느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는 것은 장르와 사조를 넘어 시네마틱한 것들의 난장으로 입회하는 것이다. 존 포드 John Ford 존 포드는 189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었다. 1917년부터 1966년까지 무성영화, 단편,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140여편의 영화를 감독했고(무성영화의 상당수는 소실되었다), 전무후무하게 4번의 오스카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으며 < 철마 The Iron Horse >(1924)를 비롯한 많은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할리우드 주류에서 환대받았고 세속적 명예와 부를 얻은 가장 출세한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존 포드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장인으로 존중받았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존 포드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었다. 포드 스스로도 자신의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화를 ‘시’라고 부른 한 평자의 말을 ‘헛소리’(horseshit)라고 일축했다. 존 포드가 당시의 미국 특히 뉴욕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꽤 알려진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경험담이다. 존 포드의 열렬한 팬인 스콜세지는 뉴욕대학교(NYU) 강사 시절이던 1969년 존 포드의 영화를 수업시간에 상영했다. 당시 강의를 들었던 한 학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티(마틴 스콜세지의 애칭)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가짜 권총을 든 채 교실에 들어왔다. 원래 상영할 예정이던 < 이창 > 대신 존 웨인이 가증스런 인종주의자를 연기하는 서부극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창>을 보려고 모여든 학생들은 모두 낙담해 ‘우’하고 소리를 질렀다. < 그린 베레 >가 공개중인 때로 존 웨인은 닉슨 다음으로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교실을 나가는 학생은 성적을 주지 않겠어’라며 가짜 권총을 든 채 스콜세지는 교실 문앞에 버티고 섰다. ‘영화의 제목은 < 수색자 >다. 이건 서부극 최고의 걸작이야’라고 말했다. 영사가 시작됐다...... 쓸쓸한 존 웨인의 모습이 황야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문을 통해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이 끝났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마틴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 1960년대 진보적인 뉴욕 대학생들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던 < 수색자 >는 2012년 영국의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 Sound」가 전세계 846명의 영화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세계영화사 10베스트 명단의 7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존 포드는 가장 위대한 감독 리스트에서 칼 드레이어와 함께 6번째 자리에 올라있다.(<수색자>가 10년마다 집계되는 이 명단에 처음 오른 것은 포드 사후 9년이 지난 1982년이었다.) <수색자 The Searchers>(1956) 또다른 사례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에와 연관되어 있다. 두 사람은 1975년초 자신들의 작품 <모세와 아론>이 상영되는 뉴욕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마르크주의자인 브레히트의 정신적인 제자를 자임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에 2년 전에 죽은 존 포드를 보고 싶다고 말해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리처드 라우드를 당황케 했다. 당시 젊은 영화학도였던 태그 캘러거는 이렇게 회고한다. “스트라우브에 관한 최초의 책을 출간한 바 있는 리처드 라우드는 존 포드를 스트라우브의 안티테제로 통렬히 비난한 바 있다. 라우드의 태도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뉴욕 사람들은 포드의 영화가 인종 차별과 군국주의, 가부장제, 쇼비니즘, 감상적인 통속성, 진부한 상투성을 옹호한다고들 했으며, 따라서 그를 혐오하는 것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태그 갤러거는 두 사람을 집으로 초청해 거실 바닥에서 존 포드의 < 순례 여행 Pilgrimage >(1933)과 < 도노반의 산호초 Donovan’s Reef >(1963)을 16mm 프린트로 같이 보았다. 영화를 본 다음 장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존 포드와 미조구치 겐지를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경험담을 전한 태그 갤러거는 10여년 뒤 「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1986)를 썼고 이 책은 아직까지도 존 포드에 관한 최고의 연구서로 꼽힌다.) 많은 고전기 할리우드 거장들은 당대에는 비평적으로 경시되다가 영화 이력의 말기 혹은 사후에 주로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에 의해 ‘작가’로 추앙되고 미국 평단이 이를 뒤따르는 경로를 밟았다. 잘 알려진 대로 1967년에 첫 출간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저 「히치콕과의 대화」는 유능한 흥행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존 포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누벨바그 세대가 작성한 ‘작가’ 명단에서 빠지진 않았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 니콜라스 레이 등에 대한 숭배에 비하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편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것이 누벨바그 세대의 대부인 앙드레 바쟁이 존 포드의 매력에 둔감한 데서 오는 ‘바쟁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바쟁은 서부극에 관한 비평을 여러 번 썼고 < 수색자 >를 수작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같은 해에 나온 버드 보에티처의 < 7인의 무뢰한 Seven Men From Now >(1956)을 더 높이 평가했다. 누벨바그 평론가들의 기지였던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 1958년 12월호에 실린 올 타임 베스트 명단의 24위 안에는 존 포드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1위는 무르나우의 < 선라이즈 >였다). 히치콕에 열광한 프랑수아 트뤼포도 존 포드에 대해선 냉소적이었다. 1975년에 쓴 에세이에서 트뤼포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평가 시절에 나는 존 포드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악평을 두세번 썼다. 하지만 TV에서 < 말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를 보고 내가 얼마나 장님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영화를 계속 다시 보게 되었고 지금은 장 지오노만큼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The Films in My Life」). 하지만 포드의 사후에도 이 정도 논평이라면 어쩐지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74년에 쓴 추도문에서도 트뤼포는 “포드의 영화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항상 캐릭터에 우선권을 준다는 점이다.... 그는 모파상과 투르게네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썼다. 확실히 트뤼포에게 포드는 문학적인 감독으로 비쳤던 것 같다. 히치콕에게 트뤼포가 있었다면 존 포드에게는 린지 앤더슨 Lindsay Anderson(1924~ 1993)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영국 프리시네마의 기수이자 기념비적 작품 < 만약에... If... >(1968)를 만든 이 비평가/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자칭 ‘포드 중독자’였고,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을 통해 1951년부터 존 포드 영화에 관한 열렬한 찬사를 바쳤으며 다섯 차례 포드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종종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누벨바그 세대의 비평만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고, 그나마 그의 비평과 인터뷰를 모은 단행본 「About John Ford」는 1981년에야 첫 출간되었다.(하지만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 수색자 >를 퇴조의 징후가 명백한 영화로 꼽는 그의 독특한 견해는 존중할만한 예민함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존 포드는 고전기의 거장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발견된 시네아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에 대한 비평의 지체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자국 영화에 냉담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보적인 ‘전위 작가’, 보수반동의 ‘고전적인 작가’ 같은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관념들이 영화를 볼 힘을 뺏기 쉽다는 것이다. 셋째는 1970년대까지도 영화사라는 개념의 성립에 필수적인 영화를 볼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2005년 5월25일 서울의 필름포럼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하스미는 “그래서 존 포드에 대해선 우리(동양인)가 서양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기세 좋게 주장했다. 하스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리와 시기에 있는 셈이다. 이 연재는 포드의 전기적 사실들과 그의 작품을 함께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 회에는 존 포드라는 사람에 대해 주로 소개하려 한다. 존 포드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 모두 모순투성이인 복합체라고 말한 사람은 태그 갤러거다.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은 완전히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존 포드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존 포드는 사람으로서도 매우 흥미로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