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 클럽
- 감독
- 존 휴즈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폴 글리슨, 안소니 마이클 홀, 존 카페로스, 주드 넬슨, 몰리 링월드, 앨리 시디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F/02184 청춘, 성장, 정체성. 여기까지만 들으면 풋풋하고도 쓰라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시절을 그린 성장영화들이 떠오른다. 구스 반 산트의 < 파라노이드 파크 >나 이와이 슈운지의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같은. 그런데 이 단어들 사이에 섹스를 던져 넣으면 방향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섹스를 통해서 젊은 날의 방황을 진지하게 그리는 영화들도 더러 있지만 청춘과 섹스라면 대개 ‘청춘 섹스 코미디’로 연결된다. 도발적이거나 유희로 풀어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청춘 섹스 코미디의 시작이라면 1983년에 개봉한 < 그로잉 업 >을 들 수 있다. 고등학교 남자애들이 성에 눈을 뜨며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 당시에는 할리우드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후일 알고 보니 이스라엘 영화였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남녀가 함께 입영 훈련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야하기는 했지만 가슴 뭉클하기도 했는데, 1978년 이스라엘에서 개봉했을 때 인구의 40%가 본 화제의 국민영화였다. 골든글로브 해외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제임스 딘의 < 이유 없는 반항 >(1955)이나 <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청춘영화는 있었지만 하나의 장르로서 형성된 것은 1980년대였다. < 그로잉 업 >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선정적이고 머리는 비운 <포키스>가 나온 것이 1981년. 1980년대에는 청춘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수작도 많았다. 에이미 해커링의 < 리치몬드 연애소동Fast Times at Ridgemont High >(1982), 프랜시스 코폴라의 < 아웃사이더 >(1983), 폴 브릭먼의 < 위험한 청춘Risky Business >(1983) 등등. 한때 청춘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과찬을 받았던 존 휴즈는 1984년부터 <아직은 사랑을 몰라요Sixteen Candles>(1984) < 브렉퍼스트 클럽 >(1985) < 페리스의 해방Ferris Bueller’s Day Off >(1986) 등을 만들었다. 청춘영화에 성적 체험이 빠질 수는 없었지만 두드러지게 섹스를 내세운 영화는 < 리치몬드 연애소동 >과 < 위험한 청춘 >이다. 1995년에 < 클루리스 >를 만들기도 했던 에이미 해커링은 숀 펜, 제니퍼 제이슨 리, 피비 케이츠를 출연시킨 <리치몬드 연애소동>에서 남자의 성적 모험만이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그려냈다. <위험한 청춘>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려던 모범생이 콜걸을 만나 대학을 때려 치고 포주로 나아가는 ‘위험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무려 톰 크루즈. ‘청춘 섹스 코미디’는 어느 정도 감동과 후련함을 주지만 그 이상은 결코 쉽지 않다. < 아메리칸 파이 >(1999)는 아주 재미있고, 지나간 시절의 추억과 감동을 함께 주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성적 충동은 때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일상을 보내지는 않으니까. 야한 책과 영화를 보고 자위를 매일 할지라도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무엇인가를 한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거나 배신하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불안으로 방황하기도 한다. 그런 고뇌와 일상의 풍경을 스쳐 지나면서 섹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청춘 섹스 코미디는 애초에 한계가 명확하다. < 에브리바디 원츠 썸!! >도 제목만으로는 그랬다. 누구나 ‘썸’을 원해. 일단 이성을 만나고, 연애 이전에 탐색을 하며 섹스를 하고 미래로 나아갈까 말까 하는 단계. 기왕이면 연애 이전에 썸만 수없이 타면 더욱 좋지 않을까? 연애는 아주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훗날 하면 되는 것이고. 제목만 듣고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가벼운 만남과 섹스를 보여주는 청춘 섹스 코미디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리차드 링클레이터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감독을 알고는 바로 선입견을 내렸다.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연출한 청춘 섹스 코미디의 방점은 당연히 ‘청춘’일 테니까. 1991년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데뷔작 < 슬래커 >는 다수의 젊은이들을 따라간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섞이고 뭉쳐서 커다란 이미지로 남게 한다. 다음 작품인 <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and Confused >(1993)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청춘의 풍경을 그려낸다. 스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후 < 비포 선라이즈 > 3부작과 아카데미 수상작인 < 보이후드 >로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찬사를 모두 얻은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그 순간들이 어떻게 거대한 흐름으로 수렴하는지를 보여준다.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면서도 거대한 그림의 조각으로 맞춰지는 영화.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대학 개강을 하기 전, 3일 15시간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이크가 차를 몰고 대학으로 가는 장면에서 낵의 ‘마이 샤로나’가 흘러나온다. 1980년 8월의 풍경이다. 전작인 < 보이후드 >의 마지막 장면이, 성장한 소년이 대학에 입학하여 차를 타고 떠나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일종의 연장선이다. 혹은 < 멍하고 혼돈스러운 >이 1976년의 고등학생들 이야기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 겪는 사흘간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리차드 링클레이터 자신이 겪었던 1980년의 대학이기도 하고. 명목상의 시간은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다음이고, 상징적으로는 <보이후드>의 연속선에 놓여 있다. 고등학교에서 투수였던 제이크는 대학에서도 야구부 활동을 한다. 제이크의 동료, 선배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사소한 내기에 지는 것도 싫어하고, 후배들을 은근히 경쟁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에서만은 일치단결한다. 여자를 만나는 것. 디스코 클럽, 컨트리 클럽, 펑크록 공연 그리고 코스튬 파티까지 오로지 여자를 만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뭐 어떤가. 혈기왕성한 스무 살의 청년인데.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다. 제이크는 말한다. 디스코, 컨트리, 펑크를 오락가락하다 보니 뭐가 진짜이고 뭐가 아닌지 헷갈린다고. 신입생인 뷰터도 말한다. 대학은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프로에 가지 못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확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그라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공부를 하거나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오니 주전에 끼기도 쉽지 않다. 제이크가 좋아하게 된 베벌리는 공연 예술 전공이다. 고등학교 때는 다들 주연이었는데 이제는 캐스팅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사흘 동안, 선배들과 대학이라는 공간을 만나서 알게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이가 엄청 많은, 좋았던 시절을 버릴 수 없어 대학을 떠도는 월러비는 말한다.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 자신을 찾는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 하지만 그 역시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만 있다. 월러비가 쌓아놓은 <환상특급>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제이크가 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떤 여자가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아름답고 다른 이들이 엉망이었다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별종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때는 대개 그렇다. 나는 왜 이렇지?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 하지? 뭐가 맞는 것일까? 아무리 이성을 찾아 하룻밤을 탕진하며 생각을 멈춰도 마음속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월러비는 원소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결합방식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말 많은 핀은 재료가 아니라 재료를 느끼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그들 자신이 아니다. 남들이 평가하는 무엇, 나도 알고 있는 나 자신,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결합해 갈 것인가. 대학은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역시. 마지막 코스튬 파티에서 그들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 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의 모습 자체도 가면이라고. 우리는 항상 가면을 쓰고 있고, 어쩌면 가장 파티에서의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이거나 미래인 것일지도 모른다. 투수는 혼자 마운드에 올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지만, 또한 팀원들의 도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나를 찾는 것과 동시에 타자를 만나고 어우러져야 한다. 그게 대학이고, 세상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1980년대는 싸워야 하는 대상이 사라진 시대였다. 68혁명의 여파가 이어지던 낙담과 쾌락의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부유하는, 텅 빈 세계. 그러나 젊은이들의 존재는 언제나 똑같다.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불안은, 그들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결국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경험했던 1980년대의 번들거리는 풍경을 통해 그려낸 청춘의 표상이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말해준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를.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청춘 영화들은 언제나 별종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Freak’ 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여자들과 썸을 타다가 베벌리를 만난 제이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쓴 에세이에 대해서 말한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빗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의미가 생긴다고. 세상이 뭐라던 내가 할 일을 하고, 좋든 나쁘든 다가올 것을 받아들인다고. 베벌리도 말한다. 어떤 일에 열정을 갖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 그렇기에 바보처럼 보일 배짱을 가지고 예술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수없이 꺾이고 나뒹굴겠지만 시지프스를 떠올리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청춘 섹스 코미디다. 사려 깊고, 원숙한 시선으로 방탕한 청춘의 사흘을 그려낸 섹스 코미디.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 길다. 사흘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한순간의 섹스에 대한 욕망과 바보 같은 열정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무모하고도 요란한 청춘의 순간을 절묘하게 이어붙이면서 새벽, 아침의 개강 순간으로 관객을 끌어간다. 그건 파티가 끝난 후의 적막이 아니라 일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열정이다. 아침의 열정. 섹스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미열을 느끼며 미소 짓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저주를 받은 사람에게 악마나 사신이 쫓아다니는 설정은 공포영화의 흔한 공식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의 < 팔로우 >는 천천히 다가오는 사신의 공포를 청춘의 불안과 두려움을 엮어 아찔한 분위기를 잡아낸다. 기이한 오프닝 장면이 없다면, <팔로우>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청춘영화다. 제이가 뒷마당의 풀장에서 수영을 할 때면 동네 아이들이 엿본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는 장면은 <식스틴 캔들스> 같은 1980년대 존 휴즈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음악도 비슷한 톤이다.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현실의 벽 안에서 어쩔 줄 모르는 청춘들이 그곳에 있다. 휴와 첫 섹스를 하고 난 제이는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어릴 때는 자유롭게 어디론가 가는 꿈을 꾸곤 했어. 데이트를 할 때에도 차를 타고 멀리 어디론가 가고 싶었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을 느낀다. 채 20살도 넘지 않은 제이는 그렇게 두려움을 말한다. 어린 날의 꿈이 그저 공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좇아 어디론가 가고는 싶지만 현실의 벽이 거대하다는 것도 깨달았으니까. 제이는 말한다. “이제 클 만큼 컸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기억을 잃은 제이는 깨어나면서 의자에 묶인 자신을 발견한다. 휴가 말한다. 누군가 따라올 것이라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결코 너를 만지게 하지 말라고. 멀리 도망가라고.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와 섹스를 해서 넘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다시 따라온다. 다행히도 뛰거나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막다른 곳에만 몰리지 않으면 된다고. 그렇다. 핵심은 섹스다. 영구적이지는 못하지만 섹스를 해야만 일단 피해갈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섹스는 죽음의 지름길이었다. < 13일의 금요일 > 등 슬래셔 영화에서는 섹스를 한 캐릭터부터 죽어 나간다. 섹스를 하고 난 직후, 섹스를 할 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들은 금기를 어겼으니까. 슬래셔 영화의 원조인 존 카펜터의 < 할로윈 >에서 살인마 마이크 마이어스는 섹스를 한 누나를 살해한다.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이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일일이 패러디하면서 조롱하고 역으로 이용할 때에도 ‘섹스’는 중심에 있었다. 주인공은 하필이면 살인자와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한다. 애초에 제물이었던 그녀는 당당히 싸우고 살아남아 최후의 그녀가 된다.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다. 80년대 슬래셔 영화에서 ‘섹스’는 그야말로 원죄였다.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미국 사회를 반영하듯이. < 팔로우 >에서도 언뜻 그렇게 보인다. 휴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제이는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섹스는 죄의 시작인 동시에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섹스를 해야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섹스를 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그에게 저주를 넘겨주게 된다.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어떤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가 단지 원나잇을 원했으니까 저주를 넘겨준다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일까? 휴에서 제이로, 다시 그렉으로, 모르는 남자에게로, 폴로 섹스를 통해 저주가 넘어가는 과정은 기이하다. < 팔로우 >에서 섹스는 단지 저주를 주고받는 도구가 아니다. 그들에게 섹스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제이는 그렉과 섹스를 한다. 왜 그렉이었냐는 질문에, 제이는 답한다. 예전에 한 번 한 적이 있었고, 그렉이라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제이와 그렉이 섹스를 하고 난 다음 이어지는 장면들이 묘하다. 섹스를 한 병원의 침대에서 제이는 흐트러진, 어딘가 퇴폐적인 모습으로 누워 있다. 반면 그렉은 학교의 식당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히려 제이가 홀가분해야 할 텐데, 제이는 타락한 여인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곧 세상에 보이는 남녀의 이미지다. 섹스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떠올리는 남녀의 이미지. 그렉이 죽을 때, 사신의 모습은 그의 어머니다. 쫓아 들어간 제이는 마치 섹스를 하는 것처럼 그렉을 위에서 덮쳐누르며 움직이는 (그렉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신을 보게 된다. 정액처럼 보이는 끈적한 물질이 그들 사이에 있다. 섹스는 제이와 그렉,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존재다. 섹스는 아이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길을 떠나는 행위이고 일종의 여행이 된다. 제이와 친구들은 그렉의 차를 타고 휴의 행방을 찾아간다. 길가의 풍경은 스산하다. 문을 닫은 상점과 공장, 버려진 집들.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계속해서 폐허가 된다. 제이는 주의 깊게 그 풍경을 바라본다. 처음 휴를 만났을 때, 제이는 역할 바꾸기 게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변의 아무나 한 명을 골라서, 왜 그 사람과 바꾸고 싶은지 설명해보라고. 사춘기의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 경계를 넘어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 어린 시절 그들은 중심가에 나갈 때, 주 경계를 넘을 때 반드시 어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다. 섹스는 그들이 가장 쉽게 혹은 일상에서 벌일 수 있는 여행이고 위반이다. 청춘, 사춘기의 아이들은 경계에 있다. 금을 밟고 슬쩍 넘어가 보기는 해도 확 건너가지는 못한다. 아직은 아니다. 두렵기도 하고, 그럴만한 힘도 없다. 하지만 저주를 받은 후에도 제이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동생인 켈리에게도,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놀랄 것이고, 믿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믿지 않는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과 어른의 세계는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통할 뿐이다. 심지어 제이와 섹스를 한 후의 그렉조차도 저주를 믿지 않는다. 제이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여줬어도 믿지 않는다. 어른인 그렉은 믿지 않기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제이가 사신을 만나 처음으로 도망친 곳은 놀이터다. 어린 시절에 놀던, 나무와 모래 그리고 그네가 있는 놀이터.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비합리적이고 광기어린 초자연적 존재가 완전히 무시당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 제이와 폴이 처음으로 키스를 했던 그곳, 수영장에서 저주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 이 결말이 허술하다는 비판이 많이 있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총에도 죽지 않는 사신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하지만 < 팔로우 >의 사신은 형체가 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건드리면 분명하게 물질적인 형체가 있는 존재다. 형체가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 해도 약점은 있다. 공포영화나 판타지에 나오는 괴물의 캐릭터들이 그렇듯이. 그렉이 죽고난 후, 제이는 모르는 남자와 섹스를 한다. 충동적으로 처음 본 남자들과. 그리고 제이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잠시의 시간뿐이겠지만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 보이는 장면에서, 제이가 수영을 하던 뒷마당의 비닐 풀장이 부서져 있다. 물이 빠진 채로 널브러져 있다. 제이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풋풋함이 사라진 것이고, 더 이상 아이들이 엿보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폴이 찾아와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하지만 피한다. 제이는 이미 죽은 길 건너 그렉의 집을 바라보고, 폴은 화장대에 붙여진 수영을 하는 제이의 사진을 본다. 순수했던 그녀의 시간, 존재. 휴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 그 시간 이전의 순수했던 지점으로. < 팔로우 >는 존 휴즈와 존 카펜터의 작품들을 뒤섞은 청춘 호러영화 같다. 그들이 사는 교외의 풍경은 < 할로윈 >을 연상시킨다. 느리게 흐르는 영상과 끼걱거리는 음악도 그렇다. 우울하고 섬뜩하지만 동시에 반짝거리는 제이와 친구들의 청춘을 그려낸다. 젊기 때문에 그들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깊이, 어둠의 빛깔은 한없이 검다. 친구인 야라는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준다. ‘가장 심한 고통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시간 후에, 10분 후에, 30초 후에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를 떠나고 더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가장 끔찍한 건 그 확실성이다.’<팔로우>는 죽음의 확실성을 천천히 다가오는 사신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정말로 끔찍했을 것이다. 가장 밝아야 하는 순간에 가장 어두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순간은. 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수순이다. 휴가 말하지 않았던가. “가끔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그런 비극이 세상이고, 언제 어디에서건 우리는 사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사신을 늘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