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엔 좀비들루 가득해
- 감독
- 신수환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어성욱, 정수지, 김시호, 문현정, 김민지
시작은 올해 2월 열렸던 베를린국제영화제,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대부분의 영화제와 상영회가 온라인 상영과 개최라는 대안적 방식을 선택하기 전, 정상적인 형태로 개최된 마지막 국제영화제였던 베를린영화제에서 소다 카즈히로 감독을 만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공개된 < 멘탈 >과 이어지는 <정신: 제로>라는 신작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소다 감독과는 2018년 중국에서 잠시 만난 이후 재회한 셈이었는데, 정치 이야기, 미국생활 이야기, 작업이야기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신: 제로>가 소다 감독의 10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떨어지는 숫자나 년도를 기념하거나 그걸 계기로 행사를 도모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떨어지는 숫자에 맞춰 무엇인가를 하는 게, 명분이나 근거를 설명하기에 여러모로 용이하다는 현실적이라는 그간의 경험에 기반해, 자연스럽게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무엇이든 같이 해보자, 라는 제안을 즉석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전후로, 하라 가즈오 감독의 2019년 영화 < 레이와 시대의 반란 >을 보면서 소다 가즈히로의 전작 < 선거 >와 연결하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이후 모리 타츠야 감독의 <나는 신문기자다>를 본 후로는 ‘선거’와 ‘언론’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사회를 조망하는 기획을 해볼 수 있겠구나, 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봄이 지나면서, 민환기 감독이 작업해오던 제주도지사 선거전에 뛰어든 녹색당 고은영 후보를 따라가는 < 청춘 선거 >가 마무리단계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선거’라는 소재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쟁쟁한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과 일본사회가 공히 처해 있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함께 논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미리 그려보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올해 일어날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은 모두 강고한 체제로 굳어진 기존 정당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는 소수정당이나 보통 사람들의 무모한(?) 도전과정을 기록한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하라 가즈오 감독의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2019년 7월에 열린 일본 참의원 선거에 10명의 후보를 낸 신생정당 ‘레이와 신센구미’와 그들의 선거 도전기를 따라가는 영화다. 레이와 신센구미는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으로 주목을 받으며 한국에도 꽤 알려진 ‘거리의 정치인’ 야마모토 타로가 주도하는 신생정당으로, 진보적인 경제정책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반대와 원전 중단 등 일본사회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급진적 정책들을 내세우는 정당이다.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주인공은 야마모토 토로가 아니다. 물론 그가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하라 가즈오 감독이 집중하는 주인공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다. 도쿄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경제학자이자 2014년 커밍아웃한 트렌스젠더이자 ‘여장남자교수’로 유명한 야스토미 아유미가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건 2018년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시장선거에 출마하면서이다. 당시 말을 타고 유세를 벌이던 파격적인 모습과 이상적이면서 비현실적인 공약들로 화제를 모았던 그에게 야스모토 타로가 2019년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 출마를 제안하면서 그를 다시 선거판으로 불러들인 것. 2018년 당시 야스모토 아유미에게 흥미를 가졌던 하라 가즈오 감독은 유튜브 채널에서 그녀와 인터뷰를 하며 다음에도 선거에 출마하면, 관련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농담처럼 약속을 하는데, 그 약속을 기억한 야스모토 아유미 교수가 하라 감독에게 연락해온 것이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라 가즈오 감독은 사건과 인물을 집요하게, 오랫동안 촬영하며 기록한다. 대상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대상과 소통하면서, 최대한 가감 없이 그들의 말과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그런 점에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하라 가즈오 감독의 작품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영화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특이한 지점들을 동시에 지닌 영화다. 다작 감독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침묵하던 하라 감독은 2017년 <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으로 귀환한 이후 거의 매년 작품을 공개하고 여러 편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라 감독만의 작업방식은 8년이 넘게 촬영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도 그리고 올해 공개된 또 다른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미나마타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을 다룬 <미나마타 만다라>는 15년을 촬영했고 편집에만 5년이 걸려 6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완성된 그의 역작 중의 하나다.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완성까지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2019년 6월, 메일을 통해 야스모토 아유미 교수에게 연락을 받았고, 6월 26일 처음 만나 제작을 결정했고, 그리고 기자회견부터 이후 16일간의 선거운동 기간까지, 대략 3주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제작기간을 비교하자면 전작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초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감독의 언급이 있다. 그건 오락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인터뷰나 마스터 클래스 같은 강연에서도 감독은 관객이 흥미를 느낄 장면이나 요소들을 넣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라고 종종 언급하고 있는데,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감독의 작업 중에서 가장 재치 있고 오락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그건 아무래도 선거라는 제도가 지닌 연극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압권은 목장에서 키우던 말을 도심에 데려와 선거유세에 활용하는 장면들. ‘Protect our children, heal the world’를 공약으로 외치는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는 이번에도 말을 이용한 선거유세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도심에 나타난 말의 이질적인 이미지만큼 그의 선거유세는 우리에게 기이하게 다가온다. 오락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담당하는 캐릭터는 아무래도 주인공인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이지만, 영화는 레이와 신센구미 비례대표로 출마한 다른 후보들에게도 고른 관심을 보여준다. 비례대표 중에서도 우선 순위를 받은 두 명의 중증 장애인 후보, 환경운동가 출신의 후보, 싱글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는 여성후보, 일본창가학회가 모태인 공명당이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하면서 보수화되자, 그에 반발하는 창가학회 멤버이자 오키나와 출신의 후보, 편의점 세븐 일레븐 점주로 대기업 횡포에 맞서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후보 등이 등장해 자신들의 공약과 주장들을 당당하게 밝힌다. 선거는 말의 성찬이다. 다양한 주장과 선언들이 분출하는 열린 공간.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같은 무게를 갖지 못하고,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며, 그래서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 그건 선거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일상에서도 권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의 목소리는 늘 왜곡되고 감춰진다. 그건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의 주민들도 <미나마타 만다라>의 환자들과 가족들도 겪고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왜곡되고 소외되어 온 그들의 이야기. 그래서 하라 감독은 그들의 곁에서 오랫동안 기록하며 그들의 진심이,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말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레이와 시대의 반란>도 감독의 세계관과 닿아 있다. 주류 언론에서 배제된 소수정당 후보들의 주장과 진심들. 정치는 사람을 잇는 수단이지 소통을 가로막는 장치가 아니다, 라는 믿음. 그래서 감독은 10명의 후보들이 쏟아내는 말과 증폭되는 감정들을 가까이서 끈기 있게 담아낸다.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 시민들을 좀비처럼 만들어버린 사회에 대한 저항이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스릴러’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는 발상. 그래서 좀비들이 등장하는 플래시몹을 기획해 유세현장에서 진행하지만, 막상 영화에는 저작권 문제로 그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기괴한 사운드효과를 배경으로 깔고 자막과 함께 영상만 내보는 장면은, 하라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백미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진지한 연설을 하는 와중에, 술 취한 아저씨가 등장해 어슬렁거리자, 후보보다 취객에 더 흥미를 느끼고 카메라에 담으려 하는 장면도, 감독의 여유와 코미디적 감각이 건재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료화면과 유튜브 영상을 활용하고, 재치 있는 자막처리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을 내딛는 소수정당의 의미 있는 시작을 함께 한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돋보이는 건, 여전한 감각과 시대정신을 지닌 하라 가즈오 감독의 태도와 그의 영화세계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한 거리두기는 영화 산업의 존립을 위협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 매체의 가장 본질적인 체험 행위를 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위기에 부쳐 내 경우만 고백하자면,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나는 극장에 채 열 번도 가지 않았다. 2020년은 열두 살 이후의 내 인생에서 가장 극장에 안 간 해가 되었다. 교회에 절대 안 가는 기독교인은 자랑스러운 일면조차 있지만, 극장에 통 안 가는 시네필이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위기가 왔을 때 말이 아니라 육체로 증명할 수 없다면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나의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그 사실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바로 나 자신에게 뽀록났다(‘뽀록나다’는 속된 표현이나, 엄연한 표준어다). 나는 시네필로 자각할 자격을 상실했다. 지난 봄, 방역 상황을 주시하며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의 예매와 취소를 반복하던 중, 설마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되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만 하는 영화가 나타났다. 마침내 나를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인 영화는 조지 A. 로메로의 < 시체들의 새벽 >(1978)이었다. 40여 년간 국내 개봉한 적이 없었던, 모든 현대 좀비 장르물의 원본이 하필이면 “이 시국에”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오랜 사랑과 강박(커버에 “안녕하시었어요?”가 적힌, 출시 제목 <이블 헌터>의 비디오로 접한 이후, 인생이 어떻게 망했는지 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855 (오독의 라이브러리, 2017-08-03, cine21)을 쓴 적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같은 작품의 DVD가 판본별로 있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뇌내(腦內) 재생할 수도 있지만 꼭 극장이어야 했다. 4월 15일, 나는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쇼핑몰의 극장에서 <시체들의 새벽>을 보았다. 극장엔 개봉 취소나 연기된 영화들의 선전물만 덩그러니 놓인 채 관객은 커녕 표를 확인하는 직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 오메가 맨 >(1971)의 찰턴 헤스턴처럼 객석에 홀로 앉아 “이제 이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군!” 읊조릴까 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의 관객이 들어왔다. 좀비 떼를 피해 아무도 없는 쇼핑몰 안에 숨어드는 영화 속 주인공도 딱 네 명이다. 극장이 선전한 리클라이너가 편안했고, 방역이 아니라 방해받지 말라고 만들어놨던 칸막이가 있는 관람은 쾌적했다. 영화가 끝나고, 똥땅거리는 쇼핑몰 음악과 함께 좀비들이 지상에서 뒤뚱거리며 엔드 크레딧이 오르자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영화를 현실에 재현하러 온 관객이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말은 옳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 기침 소리가 들리자 나의 나들이는 심리적 자해처럼 느껴졌고, 픽션은 현실의 고민이 되었다. < 우주전쟁 >(2005)의 말미에 허망하게 고꾸라지던 외계인들처럼 인간이라는 종도 겨우 바이러스에 함락되는가. 세상이 망하기 전에 영화부터 사라질까. 그럼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나는 뭘 먹고 사나? 또 언제 극장에 올 수 있을까? 극장이 이렇게 망할 줄이야. 친구의 영화가 결국 극장 개봉 대신 OTT를 택했을 때, 강제 넷플릭스 진출을 축하한다며 주고받은 메시지는 그나마 다행이란 위로에서 어떤 우려로 남았다. 극장이 아니라면 내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는 영화일까? 극장 밖에서 영화는 진정으로 존재할까?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극장이 사라지더라도, 물론 영화까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어디에든 넘칠 정도로 있다. 손아귀의 디바이스, 책상 위 모니터, ‘언택트’ 시대를 맞아 거실에 “거거익선”으로 장만한 4K 디스플레이 속에 극장만큼 충분히 친숙하고 또렷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거의 극장에 있는 것 같은 환경을 구현해주는 VR 어플까지 있다. 영화는 아날로그(필름)가 아니라 생성될 때부터 디지털(파일)이고, 네트는 광대하며 스트리밍은 빠르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만 영영 잃어야 한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은 극장의 죽음이다. 만국의 시네필들이여 선택하라. 그러나 이렇게 외치고픈 충동이 울컥할 것이다. 아뇨, 극장에서가 아니면 그건 결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는 오로지 극장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내 망막에 눈부시게 빛으로 쏟아질 때만 영화예요. 이 빛과 어둠의 예술은 극장에서만 기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객석에서 모두와 함께 울고 웃으며 다 같이 탄식할 때만! 시네마테크를 향한 내 예전 간증을 지금 다시 적노라니 가슴이 뜨끔하다. 그 믿음은 유효합니까? 6월, 여름 시즌에 내야 할 영화들이 줄줄이 훗날을 기약하고 뒤로 밀리며 눈치만 볼 때 한 영화가 매를 맞아보겠다는 듯 용감히 개봉했다. 극장에 같이 가려 동행을 구했지만 누구도 나서질 않고, 코로나 때문이 아니어도 내가 고립된 인간임을 직시하며 혼자 < #살아있다 >( 조일형 , 2020)를 보러 갔다.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남긴 다음 극장 안으로 들어와, 테이핑으로 간격을 띄워놓은 좌석에 앉으니 이 정도면 극장은 오히려 전에 없이 쾌적한 상태로 지속할 수 있을 걸로 보였다. 처음 이 영화의 정보를 접하고, 미국 작가가 쓴 시나리오지만 한국판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같은 시나리오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제작되며, 감독의 연고지도 미국 기반이라고 했다. 나는 괜히 영화사들이 이제부터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외국에서 사오고 모국어만으로는 업계에서 버틸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했다. 캐릭터와 플롯만 정확하게 보고, 모호하게 문장력으로 눙치는 시나리오는 솎아지는 날이 오는 거다. 퇴출 확정이군. 아무튼 티저를 보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시대에 도래한 SNS 맞춤 좀비 스릴러일까 싶었는데, 시의적절한 아이템이 시국에 맞춤인 결과로 나왔다. 심지어 감독 역시 코로나 때문에 입국을 못하고 미국에서 화상을 통해 원격 편집과 마스터링을 했다니 거의 언택트 시대의 산물 같은 영화다. 좋든 나쁘든 원하건 말건 간에 세상에 의해 현실이 되는 픽션이 있고, 이 영화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바깥세상이 망해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남자( 유아인 )가 고립 끝에 별 수 없이 나도 망할까, 하다가 맞은편에 사는 여자( 박신혜 )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남고자 서로 돕는다. 좀비 떼를 피해 둘이 도망갈 수 있는 세상의 가장 멀고 높은 곳이란 겨우, 아파트 옥상이다. 이 세팅은 지금 현실과 닮았다. 팬데믹으로 집에 갇힌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서는 일에 종말이 온 듯 호들갑을 떤다. 이 영화 속 캐릭터의 생존 투쟁도 절박하기보다 호들갑 같다. 영화를 보면서 걸리는 개연성은 이제 나 같은 직업병자 아니면 위키에 비판 항목을 적는 사람에게만 문제일 것이다. 관객 눈에 즉각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읽히지 않는 의미부여 대신, 상황에만 집중해서 단순명쾌하게 콘셉트만 끝까지 밀고 가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공권력을 긍정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국가가 해시태그(#)를 검색해 당신이 SNS에 남긴 생존 증명만으로 헬기에 특수부대원을 태워 구하러 온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났는데 어째 그다지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걸 문제 삼고 싶은 내가 촌스러운 것 같았다. 영화는 무리 없이, 딱 아파트 옥상까지만 도달했고, 살아남았다. 나는 무리를 보길 기대했었다. 영화란 만드는 과정도 그 결과물의 내용도 온통 무리하는 것이라 믿어 왔는데, 그 무리한 욕망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게 영화 아닌가? 이제 다들 그런 영화는 안 만드나?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긍정하기로 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히게끔 만든, 딱 그 정도의 적당한 야심을 품은 영화가 주는 미덕을 생각했다. 이런 하이 콘셉트 영화를 더 많이 더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선사하는 현실의 우화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인 나로선, 다만 그 수준에 도달한 시나리오가 또 어느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 아니도록 애쓰면 될 일이다. <#살아있다>는 코로나 상황의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하여 초여름의 극장가가 잠시나마 지탱할 수 있도록 견인한 공이 있다. 극장이 살아있고 다녀간 관객이 무탈함을 세상에 알려줬던 것이다. 8월 중순 2차 대 확산이 발생하여 다시 극장이 셧다운을 거듭하는 동안에는 넷플릭스에서 월드와이드 영화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산 콘텐츠 중 최초 기록이라니, 팬데믹 상황의 전 세계 구독자들이 꽤 공명한 것 같고, ‘K-좀비’라는 모호한 장르도 존재감을 확인했다. K-좀비라니, < 괴시 >( 강범구 , 1981) 이후 이런 날이 다 왔다. 그러나 나는 한국산 좀비 영화의 경향에 신체를 물어뜯고 내장을 쏟아내고 그것들을 먹는 직접적인 묘사를 여간해선 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다. 내가 고어(gore)를 요구하는 건 좀비 영화의 윤리 때문이다. 굳이 보여주지 않을 윤리가 있다면, 마땅히 보여야 할 윤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좀비 영화에 대한 근본주의를 품은 사람의 무리한 요구일 뿐이려나? 뭐 이제 그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니까. 암담한 거리두기의 시간을 지나 1단계로 돌아왔지만, 극장의 위기는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기대했던 많은 영화들이 끝내 극장을 포기하고 OTT로 돌아서고 있다. 왜 영화를 마땅히 극장에 걸지 않느냐며, 손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영화는 결국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고, 극장은 믿음이 굳건한 몇몇 시네필에게만 의존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구태의연한 산업이다. 이 구태의연한 행위가 영화를 경험하기에 가장 옳은 양식(樣式)이기에 나는 OTT의 영화 독식도 극장의 명예로운 죽음도 언택트와 뉴 노멀 어쩌고 하는 대단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시체들의 새벽>을 극장에서 보며, 앞으로 인류가 지독히도 재수가 없다면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찮네? 나다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런 감상적인 호들갑보다 <#살아있다>를 보고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극장은 안전해, 다음에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영화의 구원과 극장의 부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요상한 맹신의 종교적 호들갑이 하루아침에 막막하게 만들 줄 그땐 몰랐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사양한다. 종말, 멸망, 아포칼립스란 그렇게 떠들썩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쓸쓸할 거라 생각한다. 집에 갇힌 채 홀로 훌쩍이는 일이 진짜 종말에 가깝다. 이 상황을 탈출해도 별로 대단한 미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행운을 빈다. 그 행운이 너무 힘들게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갇힌 집에서 아파트 옥상 정도의 거리에 있기를.
< 부산행 >( 연상호 , 2015)은 (마치 6.25때처럼)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울을 버리고 부산에 다다르기 위한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가족을 위한 헌신이라는 마침표로 완성되었다. 부산행으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을 그린 < 반도 >(2020)는 어디로 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한반도를 버리는 이야기다. 북한은 38선으로 보호받은 듯 보이기 때문에 한반도라기보다는 대한민국이 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심에 있는 가족 이야기로 따지면 <반도>의 가족은 수차례의 슬로모션을 거치며 천천히 결말을 향해 간다.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에 관객이 반도 차지 않기도 했지만, 웃을 법한 장면에서도, 놀랄 만한 대목에서도, 울컥할 만한 신에서도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사실이 내내 신경쓰였다. <부산행>이 끝난 뒤, 대한민국은 좀비의 땅이 되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부산마저 좀비에 점령당했다. 가까스로 부산을 출발한 배에 탑승한 군인인 정석( 강동원 )은 누나와 조카를 배 안에서 발생한 감염으로 잃고, 매형인 철민( 김도윤 )과 홍콩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한국말을 쓰면 극심한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고,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도 어렵기만 하다. 정석은 홍콩의 범죄조직으로부터 서울에 있는 달러를 가지고 나오면 그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현금을 가득 실은 트럭이 목동 오목교 근처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정석은 철민을 포함한 한국 출신자들과 네 명으로 된 팀을 꾸리고, 그 돈을 가지러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향한다. 인천항에서 목동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아포칼립스 서울의 모습이 드러난다. 웃자란 식물이며 아무렇게나 버려진 차량들 사이로, 소리와 빛에 반응하는 좀비들이 돌아다닌다. 정석 일행은 인천항에서 오목교 왕복이 수월하리라 생각하지만, 차를 발견해 빠져나오려는 순간 조명탄이 그들 앞에서 터진다. 정석은 도움을 제안한 준이( 이레 )와 유진( 이예원 )을 따라 간신히 빠져나온다. <반도>의 서울 풍경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인천항에서 오목교까지, 그리고 시내 곳곳이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뚫려있다는 것이다. 좀비가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생존자들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는 셈이다. 631부대라고 불리는 군인들은 브레인격인 서 대위( 구교환 )와 좀비 대응에 강한 황 중사( 김민재 )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편 정석은 생존자인 준이, 유진, 민정( 이정현 ), 김 노인( 권해효 )을 만나 군인들이 가져간 현금차량을 가지고 홍콩으로 가자고 설득한다. <부산행> 세계관의 연장에서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에 <반도>는 <부산행>과 비교당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관객이 <반도>를 보기로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부산행>에 대한 호의가 보답받기를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반도>의 주요 인적구성은 <부산행>때와 비슷한 데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군인들을 제하면 ‘그림체가 같은’ 인물구성이 눈에 띈다. 중심에 있는 공유와 강동원, 정유미와 이정현, 김수안과 이예원이 그렇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가족 이야기로 마무리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서의 흐름은 두 작품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가장 차별화되는 공간과 인물 구성은 바로 631부대다. 서 대위와 황 중사는 군인들의 구심점에 있으나 서로 불화하고 있으며, 서 대위가 군인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식료품의 배급과 잡아온 생존자들과 좀비를 싸우게 해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의 생존력이 어떻게 다듬어졌는지는 잘 보여지는데, 민정이 이끄는 두 소녀와 치매 노인 쪽은 무슨 수로 살아남았는지 영화 속 정보로는 파악이 어렵다. 문제는 슬로모션이 수시로 등장하는 후반부다. 정서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이미 <부산행>으로 학습을 마친 관객은, 반복되는 슬로모션으로 지연되는 결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된다. 긴장감있는 에피소드와 액션이 인간과 좀비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니 지루할 틈은 없다. 하지만, 감정은 학습한 대로 흐르고 심지어 슬로모션으로 자꾸 지연된다. 재미있지만 동시에 시큰둥한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예상한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