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길
- 감독
- 이중휘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임동진, 김교순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이 글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일러 없이는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분 중에서 이 영화를 볼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나중에 읽기를 권합니다. 저는 이미 경고했습니다) 러시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을 주제넘게 확장 시키고 싶지 않다. 아마 나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심도 깊은 대답을 해줄 수 있는 분이 계실 것이다. 여기서는 영화에서 멈출 것이다. 작년에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한 편은 우크라이나 감독인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다큐멘터리 < 파괴의 자연사 >였고, 다른 한 편은 러시아 감독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 페트로프의 감기 >이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더라도 <파괴의 자연사>를 편집하면서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우크라이나의 상공에서 쏟아붓는 미사일과 도로변을 따라 행진하는 러시아의 탱크들, 참혹하게 무너지는 공공건물들, 길거리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을 길 없이 울고 있는 아이들, 집 잃은 여자들, 구덩이에 처박힌 시신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면 모스크바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빅토르 최와 그 주변의 1980년대 러시아 펑크 락 씬의 연대기를 다룬 < 레토 >를 만든 다음 자신이 이끄는 극단 ‘플라테 포르메(Plate-forme)’에서 연극 무대를 올릴 계획으로 알렉세이 사르니코프의 소설 <페트로프, 발톱>을 각색하고 있었다. 반정부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를 러시아 정부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극단에 지급한 정부 보조금 1만 유로를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횡령했다는 죄로 자택 감금을 구형하였다. 연극은 영화로 바뀌었다. 아쉽지만 나는 원작소설을 읽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엇을 설명해야 할까. <페트로프의 감기>는 거의 난장판처럼 진행된다. 나는 이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중이다.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모스크바에 관한 초현실주의적인 풍속도하고 불렀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이 말에 저항했다. 아니에요, 지금 초현실적인 것은 러시아의 현실이에요. 이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건 당신이 러시아 바깥에 있기 때문이에요. 이 원작은 대중소설이에요.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따라오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아요.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이거든요. 이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이 말을 어디서 멈춰 세워야 할까.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영화의 첫 장면. 페트로프는 한밤중에 만원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그런데 지금 감기에 걸려서 연신 콜록거린다. 주변 승객들은 짜증을 낸다. 얼른 귀가 해야 하는데 왜 이다지도 집에 가는 길은 먼 것일까. 버스 손잡이를 붙잡고 가까스로 서 있는 페트로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자꾸만 일이 생긴다. 누군가 갑자기 버스를 세운다. 그러더니 페트로프에게 내리라고 한다. 길거리에 총을 든 사내들이 서 있다. 다른 차 한 대가 도착한다. 그리고 거기서 부자들을 내리라고 한 다음 벽에 일렬로 세워놓는다. 한 사내가 페트로프에게 소총을 들려주면서 방금 도착한 부자들의 총살형에 가담하기를 요구한다. 페트로프는 내키지 않지만, 얼른 마치고 집에 가고 싶어 한다. 버스 안은 초록색 전등으로 물들어 있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일상생활이 녹슬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금방이라도 그 안에서 숨을 쉬다가 폐 속으로 옮겨올 것만 같다. 만화가 페트로프. 누군가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만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군요.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그런 도식의 위험을 재빨리 빠져나간다. <페트로프의 감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익숙해지기 힘든 영화이다.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페트로프의 감기>는 <레토>가 아니다. 멜랑코리와 낭만적인 서정성 사이에서 유지하던 수심에 가득 찬 우울한 균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처럼 온 사방이 음산하고, 아니 차라리, 모든 등장인물은 귀신처럼 여기저기서 어슬렁거린다. 물론 두 영화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던 방향을 갑자기 선회하면서 머릿속에 가까스로 세워진 구성을 부순 다음 형식을 다시 재분배해나간다. 마치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다. 다시, 다시, 다시, 라고 어디선가 들리는 것만 같은 명령. 그렇게 다시 시작할 때마다 조각나버린 이 단편적인 시퀀스들이 서로 어디서 어디로 서로를 이어 붙여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의도적으로 <페트로프의 감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지금 작동하는 방식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장면보다도 페트로프가 작가를 찾아가서 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 집을 불태워버리는 18분이 조금 넘는 단 하나의 쇼트(lon_take)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러 개의 이야기를 겹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지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타고 흘러가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갑자기 시간이 탈선을 일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의 지층을 파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줄기들을 따라가는 것처럼, 서로 다른 시간의 여기저기로 뻗어나간다. 어린 페트로프. 청년 페트로프. 서로 다른 시간의 지층들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무엇이 무엇과 더불어 연결되어있는 것일까. 그들은 서로 다른 줄기들 사이에서 엉겨 붙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어떤 목적도 갖지 않은 채 그렇게 수렴되지도 않는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우리를 도와준다. 나는 영화가 집단적인 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스크바의 인민들이 함께 꾸는 꿈, 그런데 이 꿈은 지금 감기에 걸려 열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두통에 시달리면서 횡설수설하는 것만 같다. 온몸에서 열이 나는 아들을 껴안고 한밤중에 눈길을 달려갈 때 하늘에서 UFO가 나타나는 순간 누구라도 망연자실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다. 몇 번이고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으로 영화가 되돌아온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새해가 오지 않는 것일까.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한 번 더 우리에게 힌트를 준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감금된 상태에서 써야만 했어요. 하지만 감금되었다고 해서 생각이 멈추는 건 아닙니다. 내 상상은 몸을 빠져나와서 모스크바 시내를 떠돌기 시작했어요. 그때 나는 유령 같은 상태였어요. 페트로프는 화가 난 상태이고, 내내 불안에 시달리고, 그리고 겁먹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러면서 <페트로프의 감기>는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서사 사이에 놓인 종종 칸막이처럼 여겨지는 경계를 옮겨가고 넘어간다. 러시아 바깥에 있는 나는 이 영화가 공격 목표로 하는 정치적 대상이나 행정적 절차, 정부 기관의 비유들을 거의 읽어내기 힘들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 행간 사이에 주석을 달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쩔쩔맨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겠다. 시종일관 외관들 사이에서 환각을 일으키고 허깨비들처럼 마주한 다음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효과들 속에서 유령의 육체가 망가져 가고 있다. 그렇다. 페트로프의 감기는 무엇인가. 공기 중에 떠도는 바이러스. 어떤 공기. 모스크바의 공기. 러시아의 공기. 공기가 오염되었다. 페트로프는 점점 가쁘게 숨을 쉰다. 아니, 가까스로 숨을 쉰다. 결정적인 장면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모스크바 시내를 빙빙 돌아서 마지막에 이르자 페트로프는 관에 누워있다가 일어난다. 이제는 알겠다. 페트로프는 거리에서 죽어서 그렇게 모스크바의 구천을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저승에 가지 못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관에서 일어난 페트로프는 눈길을 걷고, 걷고, 걷고, 걸어서, 개울을 건너, 진흙탕이 되어버린 좁은 길에서 저승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러시안 래퍼 허스키가 음산한 목소리로 ‘복수(Revenge)’를 읊조린다. 아코디언 소리가 삐거덕, 삐거덕하면서 울린다. 페트로프는 새해를 맞이하지 못한다. 어쩌면 모스크바는 새해를 맞이하지 못할지 모른다. 페트로프는 떠났지만, 또 다른 유령이 모스크바를 배회할 것이다. 유령들은 외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3년 | 싸이더스 감독, 시나리오: 장준환 | 제작: 차승재 | 촬영: 홍경표 | 프로덕션 디자인: 장근영 김경희 | 음악: 이동준 CAST 병구: 신하균 | 강 사장: 백윤식 | 순이: 황정민 | 추 형사: 이재용 한국영화는 21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장르적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 지구를 지켜라! >은 그 극단일 겁니다. SF에서 시작해 코미디와 스릴러와 로맨스까지, 이 영화는 수많은 장르의 하이브리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뒤틀고 여기에 패러디와 날 선 풍자를 더합니다. 그리고 관객을 공격합니다. 당신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얼마나 병들었느냐고. <지구를 지켜라!>는 한국 상업영화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던 영역을 순식간에 돌파해버린, 당대의 컬트이자 이젠 레전드인 작품입니다. 소문만 무성한 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지구를 지켜라!>의 현장이 공개된 건 2002넌 9월이었습니다. 강원도 태백의 어느 폐광촌. S자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면 비포장 도로가 시작되고, 승합차 정도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을 지난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죠. 양봉장에서 병구와 추 형사가 맞닥트리는 장면이었는데요, 추 형사는 결국 벌떼 공격에 벼랑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어느 정도 산 속인지 가늠하시겠는지요. 멀리서 잡은 로케이션 풍경인데요, 노란색 점처럼 보이는게 양봉통입니다. 좀 더 가까이 가보니, 그 앞에서 추 형사와 병구의 긴장감 넘치는 만남과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엔 긴장감이 흐릅니다. 추 형사는 병구가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총구 앞에서 병구는 더듬거립니다. “왜 그러세요? 저…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 그냥 벌들이 배고플까봐….” 그러다가 갑자기 병구는 추 형사의 얼굴 쪽으로 꿀을 뿌리고, 이후 벌떼 공격을 받은 추 형사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습니다. 이 날 현장 공개가 조금 이례적이었던 건, 신하균의 얼굴이 내내 양봉망으로 가려 있었다는 겁니다. 이 시기 현장 공개는 일반적으로 영화를 언론과 대중 앞에 노출하는 첫 단계였거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주인공의 얼굴이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 신을 골랐을까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연출부 중 한 명은 추 형사의 허리에 묶은 줄을 꽉 잡고 있고, 그 뒤엔 두툼한 매트가 깔려 있습니다. 벌떼의 공격에 몸을 뒤틀던 배우는 매트 위로 풀썩 쓰러집니다. 짙은 안개 때문에 미뤄졌던 촬영을 빠르게 진행하느라, 이 날 거의 40컷을 촬영했는데요, 그 중 가장 중요한 컷은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추 형사 역의 이재용은 나중에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할 벌떼들의 습격을 예상한 연기를 위해 하루 종일 몸서리쳐야 했는데요, 결국 매트 위에 쓰러졌습니다. 클로즈업 장면을 위해 얼굴에 벌을 붙이고 있습니다. 냉장고에 넣어 활동력을 줄이고 침을 뽑아 공격력을 제거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방 쏘였습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