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아왔지
- 감독
- 황보강자
- 제작년도
- 1994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는, 영화사 연구자들이 섣불리 언급하기가 좀 애매한 작품으로 취급된 감이 있다. 고전적 영화사인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나 2000년대 이후에 집필된 「한국영화사-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에서도 이 작품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작품 자체만으로 보자면 그리 처지는 작품이 아니며, 정작 정창화 감독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작품을 늘 중요하게 언급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지 않고, 해외 로케이션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 영화제작 상황에서 동남아시아 분위기의 미장센을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내었으며, 정창화 감독 특유의 액션 장면들이 총알과 몸이 뒤엉키는 전쟁의 거친 느낌을 자아낸다. 정창화 감독의 회고에 의하면, 취미로 야자나무를 키우는 사람에게 사정하여 어렵사리 두 트럭을 구해다가, 촬영지인 광릉에다 심어 놓고 촬영장소마다 이리저리 옮겨심기를 거듭하며 어렵사리 찍은 작품이라고 한다. 게다가 5만의 관객이 들었으니 흥행도 성공한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 대한 영화사 연구자들의 언급이 많지 않은 이유는, 작품이 ‘후져서’라기보다는 언급하기 ‘애매해서’라고 보인다. 즉 1960년대 영화사에서 두드러진 몇 가지 경향으로 쉽사리 분류하여 자리매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반일적 내용의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이 시기에 한 흐름으로 정착한 만주활극 부류로 설명할 만하다. 그런데 정작 공간적 배경이 ‘만주’, ‘대륙’이 아닌 ‘버마’(지금의 미얀마로, 영화에서는 ‘비르마’라고 발음한다)이니, 만주활극의 전형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게다가 주인공인 조선인 지원병의 캐릭터가 강한 친일적 성향에서 출발하여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꽤나 복잡한 인물로 설정되어, 당시 반일적 성향의 액션물들이 보여주는 단순한 인물형과는 거리가 있다. 조선인 학도병인 주인공 마츠모도( 신영균 )은 총독부 관리의 아들로 ‘천황’과 ‘나라’(당연히 일본)에 대한 애국심에 불타올라, 안전을 우려하는 애인 정희( 전계현 )를 질타하며 당당하게 ‘황군’으로 입대한다. 이 설정부터가 범상하지 않다. 이미 방송극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영화로까지 제작된 한운사 원작의 < 현해탄은 알고 있다 >( 김기영 , 1961) 이후, 이런 소재의 작품에서는 조선인 학도병을 ‘반강제로 전쟁에 끌려간 피해자’로 그리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 구도야말로 반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장 쉽고 대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의 선택은, 친일적 학도병의 자발적 입대라는 설정이다. 게다가 주인공 마츠모도는, 입대 후에도 계속 친일적이다. 동료 조선인 병사들( 김석훈 , 이대엽 , 남궁원 등)이 군대 내 폭력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에도, 부대에서 탈출하여 버마 게릴라들 편에서 일본군과 맞설 때에도, 마츠모도는 시종 일본군 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인격적으로 악인인 것도 아니다. 모범적인 군 생활로 소위가 된 그는, 자기 수하의 일본군이 버마 게릴라의 아이를 함부로 죽이거나 포로로 잡힌 여자( 김혜정 )를 강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크게 분노한다. 심지어 조선인 종군위안부( 최지희 )가, 속아서 끌려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도 충격을 받는다. 그는 착하고 반듯하고 모범적인 군인인 것이다. 이런 주인공 설정은, 반일 주제의 영화로서는 아주 이례적이다. 결국 줄거리는, 관객의 민족주의적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마츠모도의 참회와 각성, 반일적 행동으로 흘러간다. 급기야 그는 아버지의 친구로 자신을 아들처럼 돌보아주던 사단장( 최남현 )을 ‘마츠모도’가 아니라 ‘민수남’의 이름으로, 눈물을 흘리며 쏘아 죽인다. 그러나 이렇게 참회와 각성을 했다고 해서 결말이 시원스러운 해피엔딩인 것도 아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 그는 버마 게릴라들로부터 자신들을 도와주어 고맙다는 감사장(感謝狀)을 받는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신과 아버지의 죄가 씻길 수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마츠모도 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아들을 잃은 버마 게릴라 대장( 주선태 )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주인공의 성격 설정이 입체적이고 복잡한 만큼, 마지막의 결말 역시 결코 시원스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니 일제강점기 배경의 1960년대 영화 속에서 이 작품을 거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정창화 감독의 작품에서도 이렇게 문제적인 설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설정은 원작자인 김기팔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동아방송(DBS)의 1964년 라디오드라마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김기팔은 한국방송드라마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1980년대 문화방송의 텔레비전드라마 <제1공화국>, <거부실록>과 조기 종방을 당한 비운의 작품 <땅>의 작가가 바로 김기팔 이다. 동아방송의 다큐드라마 <정계야화>를 오랫동안 썼고, 영화화된 바 있는 < 해바라기 가족 >의 라디오드라마 원작자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방송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회 비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작품을 쓴 김기팔의 나이가 고작 28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937년생으로 대학생이던 1960년에 KBS의 100만 환 고료 방송극 공모에 < 해바라기 가족 >이 당선되어 방송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시대에 인기를 누린 한운사, 조남사, 김석야 등의 극작가는 물론 이 영화의 연출자인 정창화 감독도 모두 1920년대에 출생한 40대였으니, 그는 10~15살 연하의 새까맣게 아래 후배였다. 1960년에 한운사가 자신의 학도병 경험을 끄집어내어 라디오드라마 < 현해탄은 알고 있다 >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40~50대에 이른 작가들은 일제히 일제 말의 경험을 피해의 역사로 그려냈다. 광복 20년이 되어 부정할 수 없는 중년이 되어가던 이 시점에서, 이들은 자신의 청년 시절을 소환했다. 청년기에 강렬한 체험을 한 세대들이 20년 후인 마흔 즈음에(마치 < 건축학개론 >이나 <응답하라 1994>처럼) 스무 살 시절을 소환하여 작품화하는 것은 대중예술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 시기 역시 그랬던 것이다. 그에 비해 김기팔 은 태평양전쟁과 6·25를 열 살 남짓한 어린 시절에 경험했다. 그의 청년기의 강렬한 경험은 이승만 정권 말기 부패와 혼란, 그리고 이를 뒤엎은 4·19혁명이었을 것이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친구와 후배들과 함께 최초의 시민혁명을 고통스럽고 가슴 벅차게 체험했을 것이며, 불과 4년 후인 1964년에 벌어진 한일수교 반대운동 역시 절실하게 체감되는 사안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는, 일제 말에 어떤 이유에서이건 ‘황군’으로 ‘복무’했던 중년들이, 5·16으로 정권을 잡고 ‘굴욕적인 한일수교’(당시 대학생 시위대들은 이렇게 표현했다)를 밀어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로지 역사의 피해자이기만 한 것처럼 그 시대를 소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냉철한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일제의 피해자임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결국 그네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비겁하게 혹은 어리석게 살아온 역사의 죄인이며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방송할 수 있었던 곳은, 당시 ‘앵무새 사건’ 등을 일으키며 정권 비판적인 색채를 드러냈던 동아방송이었다.(‘앵무새 사건’은 동아방송의 5분짜리 시사칼럼 <앵무새>에서 한일수교에 비판적인 내용을 방송한 것을 문제 삼아, 1964년 7월에 방송부장, 뉴스실장 등 6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그래서일까, 광복 70주년이자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은 2015년에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는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2013년 말,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영화 100선’을 발표했다. 2006년에 이어 두 번째 선정 작업이다. 문득 새 리스트에서 사라진 작품, 그중에서도 초기 작품들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1960년대 이전 작품 가운데 < 어화 >(1939), < 검사와 여선생 >(1948), < 미망인 >(1955), < 양산도 >(1955), < 청춘쌍곡선 >(1956), < 종각: 또 하나의 새벽을 그리며 >(이하 <종각>)(1958), < 이름 없는 별들 >(1959)은 2013년 리스트에 포함되지 못한 작품들이다. 선정위원별로 영화적 가치를 재고한 결과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차후에 누군가 위 작품들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여러 선입견이 작용해 해당 영화를 볼 마음이 전혀 없었거나 애초부터 선정 대상에서 제외했을 경우에 발생한다. 그것은 한 작품이 잊히는 수순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 종각 >은 < 미몽 >(1936)의 양주남 감독이 1958년에 연출한 작품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양주남은 편집자로 더 유명하다. <미몽> 이후 한동안 편집과 녹음 전문기사로 활동한 그는 < 집 없는 천사 >(1941), < 자유만세 >(1946), < 마음의 고향 >(1949), < 피아골 >(1955) 등의 영화에 편집자로 참여했다. 1950년대 후반에 감독의 자리로 복귀해 5편의 영화를 거푸 내놓았는데 <종각>은 그 중 한 편이다. 기록에 의하면 <종각>은 외국 영화제를 겨냥해 제작된 영화였다. 1940년대 후반 잡지 『백민』에 실린 소설 <종장(鍾匠)>을 각색한 작품이며, 각색과 제작을 맡은 청남이란 인물은 사실 원작자 강로향 본인이었다. 작가로서 활동하다 10년 가까이 외교관을 지냈던 강로향은 영화사 ‘8월 프로덕션’을 세워 자기 소설의 영화화를 직접 추진했다. 개봉 당시 여러 신문에 실린 글들을 종합해보면 ‘신파와 오락성 영화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예술영화’라는 게 중평이었고, 연말에는 여러 평자들에 의해 그해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혔다. 비록 본선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제9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종각>이 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종각>은 단순히 살아남지 못한 예술영화일까. < 종각 >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종쟁이 석승과 세 여성 옥분, 한 과부, 영실( 문정숙 이 세 인물을 연기했다)이 겪는 죽음과 고통의 연대기다. 상영시간 96분 중 1시간은 석승의 내레이션으로 고령사 종을 만들기까지의 사연을 들려주고, 다음으로 영실이 고아로 살아온 20년 세월을 이야기한다. 석승과 세 여성은 근대와 전근대가 교차하는 시기를 통과하는 인물이다. 자연스레 전근대적인 상황들이 그들의 비극을 초래한다. 석승의 첫사랑인 옥분과 아내는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목숨을 잃고, 석승의 스승도 길 위에서 객사한다. 유일한 피붙이인 딸은 홍수로 행방불명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영실의 삶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아로 가난하게 자라 매일 시냇물을 마시며 굶주림을 달랬던 그녀는 직업을 구하고자 상경한다. 하지만 일거리가 없어 문전걸식을 하다 소개업자에 속아 광산에 몸 파는 여자로 팔려간다. 밤마다 거친 남자들과 잠자리를 치렀던 그녀는 종군위안부로 팔려가기 직전에 도주해 산사에 숨는다. 석승과 영실은 전근대의 피해자이면서 스스로는 전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극중 자주 등장하는 말은 ‘고독, 운명, 슬픔, 안식’이다. 석승과 영실은 삶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기껏 하는 행동이라고 해봐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선을 넘지 못한다. 체념의 정서 아래 자기 운명을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 문학과 영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이다. 석승과 영실은 전형적인 인물인 셈이다. 심지어 그들은 낭만적인 연대를 꿈꾸기도 하는데, 석승은 종을 만들다 분에 못 이겨 자살한 소문 속 인물을 아무 의심 없이 자기 할아버지로 믿으며, 영실은 석승과 헤어진 딸이 자기와 같은 나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를 아버지라고 상상한다(유사한 이야기인 < 메밀꽃 필 무렵 >의 은밀한 정서와 다르다). 성별도 다르고 세대도 다른 두 사람이 산사 부속건물의 한 지붕 아래 나란히 기거하면서 낭만적 정서는 더욱 강화된다. 늙고 병든 석승과 세상이 두려운 영실은 주어진 공간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살다 입은 생채기투성이인 인물이 몸을 맡기기에 산사보다 나은 곳이 어디 있겠나. 그나마 석승이 늙고 병들기 전까지 흘러가는 삶을 살았던 반면, 젊은 영실이 부동의 삶을 선택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녀의 수동성은 석승이 새로 만들기로 예정된 종(결국 만들어지지 못한다)에 자기 운명을 쉽게 맡기는 자세에서 바로 드러난다. 종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될 것이라며, 그녀는 자기 운명을 내건다. 운명의 무게와 견고함은 극의 후반에 가서도 누그러들지 않는다. 일제의 금속동원령으로 종을 뺏길 위기에 처하자, 석승은 맞서지 않고 종과 함께 피신하려 한다. 그의 행동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종마저 사라진 종각에 영실이 기댄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장면을 영실이 종각에 기대 서 있던 도입부 장면과 연결된다. 이야기 전개는 그녀의 태도에 어떤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 내일의 새벽을 기다린다는 그녀는 정작 종각에 기댄 몸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종소리에서 “운명에 이겨라”라는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운명에 굴복하는 상반된 행동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석승과 영실이란 인물을 빌려 예술과 의지로 현실을 이겨내기를 의도했으나, 영화의 결말은 주제를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리고 만다. 비슷한 삶을 살면서도 종종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는 미조구치 겐지의 인물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연인지 영화의 이미지도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못하는 인물과 닮았다. 카메라는 일정한 패턴 아래 단조로운 움직임만을 반복한다. 특징이라면 클로즈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카메라가 인물과 줄곧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촬영을 맡은 유장산은 예술영화를 만들겠다는 제작자의 주문에 맞춰 영화적 표현보다 화폭에 어울리는 구도를 지나치게 신경 쓴 모양이다. 대다수 장면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안정된 구도를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원경을 사용할 경우에도,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길게 찍기로 포착하기는커녕 인물이 속해 있는 자연의 풍광에 더 중심을 둔다. 거대한 자연이 인물을 포용하자, 인물들은 현실을 사는 움직이는 생명의 자리를 내주고 그림 속의 한 점으로 기능한다. 그 결과 < 종각 >은 보기에 아름답다. 매 장면에서 멋진 스틸 한 장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다. 다만 그것이 운명 아래 굳어버린 인물과 조화 아닌 조화를 이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즉, <종각>은 몸을 부딪으며 사는 현실보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재현에 가까운 작품이다. 눈앞의 무심한 산수를 보는 듯한 무기력함. 평화로워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근대를 맞이해야 했던 인물의 성격과는 어긋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1950년대의 평자들은 < 종각 >이 창작을 위해 고뇌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란 점에 큰 점수를 줬다. 흔한 상업영화에서 보던 시시껄렁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는 고상한 주제를 이야기한다는 평가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주제와 별개로 <종각>의 외양은 썩 잘 만들어진 편은 아니다. 시선의 처리는 계속 어긋나고, 신의 연결은 어색하며, 편집이 거칠어 툭툭 튄다. 오히려 나는 <종각>의 미덕을 가난함에서 찾는다. 종각 하나만 밋밋하게 그려놓은 오프닝 크레디트나 단출한 세트의 빈곤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양주남 의 데뷔작인 < 미몽 >과 편집에 참여한 < 마음의 고향 >과 견주어 봐도 <종각>은 어딘가 빈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속이 차지 않아 허전한 것과는 다른 의미다. <종각>는 일부러 속을 비워 놓은 듯싶은 영화다. 극중 ‘맑다’라는 대사가 몇 차례 나온다. 요즘에는 거의 듣지 못하는 대사다. 굳이 말하자면 그 느낌이다. 돈을 노리고 영화를 만드는 잡배가 1950년대라고 없었을 리 없다. 더군다나 당시는 연예계의 대통령인 깡패 임화수가 영화계의 큰손으로 행세하던 시절이다. 그런 때, 작가이자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영화인들을 모아 만들어놓은 문예영화 한 편에는 올곧은 기운이 흐른다. 해를 보며 석승이 하는 다짐 - “위대한 생명이 약동하고 자유스럽고 평화스럽고 희망이 넘쳐흐르고 맑은 감동이 샘처럼 우러나는 듯한, 그러한 종소리를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울려줄 수 있는, 그런 종을 지향하게 된 것이오” - 은 곧 제작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1958년에 영화 한 편을 제작하고 사라진 독립제작사의 상황이 오죽 열악했겠나. 그런 상황 아래 혼신을 다한 사람들의 가난한 마음이 <종각>에 묻어난다. 극중 한 장면은 그 방증이다. 표현력이 미숙한 당시에 인물의 불안한 심리 흐름을 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석승이 할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듣고 극도로 불안해하는 장면은 제작진의 숙제였을 게다. 지금은 희극 캐릭터로 기억되는 허장강이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내면의 갈등을 이끌어내려 몸까지 뒤틀어본다. 피아노 독주와 여성합창단이 <성불사>의 테마를 연주해 인물의 불안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극중 드물게 짧은 컷으로 절간의 풍경들을 전환시키며 인물의 심리와 대비시킨다. 이윽고 창호지 바깥에서 비친 빛이 석승의 몸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든다. 50여 초에 불과한, 단순하면서 명징한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바친 고뇌와 노력이 느껴져, 몇 번을 돌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