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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종소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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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EDITION WERNER HERZOG: DOCUMENTARIES 1962~2005 DVD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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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새마을의 종소리"제작신고수리및시정사항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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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매혹된 죄, 불가항력의 불안을 마주하는 시간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한국영화걸작선]삼각의 함정: 5월의 영화 Ⅰ
< 삼각의 함정 >(1974)은 이만희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제작 당시 개봉하지 못했던 < 휴일 >(1968)과 같은 모더니즘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만희 감독의 장기는 장르 영화였다. 그를 1960년대의 대표적 감독 중 하나로 만든 < 다이알 112를 돌려라 >(1962)는 최무룡 과 문정숙 을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스릴러물이었고, 이만희 감독을 한국 영화 산업 내에 각인 시키는 계기가 생긴다. 이 영화는 1969년에 < 여섯 개의 그림자 >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가 된다. 윤정희 , 신성일 , 남궁원 , 허장강 등 당대 최고의 스타시스템을 가동한 야심작이었고, 비평과 흥행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두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여섯 개의 그림자>인데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장르영화를 이끌어 가는 완숙미를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작품이 <삼각의 함정>(1974)이다. 김기영 감독이 < 하녀 >(1960) 이후 < 화녀 >(1971), < 충녀 >(1972), < 화녀82 >(1982)로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사실은 잘 알려진 편이다. 생전에 김기영 감독을 만났을 때 왜 이렇게 리메이크를 했는지 응당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에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제작자들이 원했고, 그게 돈이 되는 거였다는 식으로 답을 한 기억이 또렷하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유신시대의 등장과 함께 검열과 통제에 의한 자기 폐쇄성의 몰락을 걷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극장에서 상영할 해외영화 수입권을 얻기 위해 속성으로 한국영화를 제작하였고, 그 결과 속류와 아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열렸다. <삼각의 함정>도 이러한 시대성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이만희 감독의 연인이었던 문숙 을 포함하여 상국 역의 오지명 , 영일 역의 유장현 그리고 두 남자를 등쳐먹으려고 하는 건달 역의 춘호 역의 백일섭 은 당시에는 유명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넘어가는 부분이나 연기를 보여주는 부분에서도 공을 들이기보다는 대략적으로 넘어갔다는 인상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70년대 이만희 영화 중 <삼각의 함정>을 고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1970년대가 한 감독, 혹은 한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만희 감독은 같은 해에 < 들국화는 피었는데 >, < 태양을 닮은 소녀 >, < 청녀 >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의 말년이기도 했던 이 시기에 얼마나 빠르게 영화를 제작했는가를 숫자만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중 <청녀>는 <하녀>나 <화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하지만 제목에서는 의식한 흔적이 보인다.) 앙드레 지드의 원작 <전원교향곡>을 한국의 섬으로 옮겨와 만든 일종의 문예영화였다. 순수한 영혼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원작 소설을 근간으로 섬을 돌며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한 소녀의 사연을 지고지순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는 이러한 시대였다. 한쪽에서는 문예영화라는 이름으로 작품성을 과잉되게(때로는 신파조로)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영화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속성을 제작되는 영화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필자에게 제시된 <청녀>와 <삼각의 함정> 중 <삼각의 함정>을 고른 것은 이 작품에 이만희 감독의 특징이나 관심사가 더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완성이 된 이만희 감독의 자기 복제는 출발점이 되는 <다이알 112를 돌려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다이알 M을 돌려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식된 영화라고 할 수 있고, 이만희 감독 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장르적 탐구를 한 주요 감독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할리우드 혹은 일본 그리고 간헐적으로 유럽 영화를 어떻게 한국적인 이야기로 옮기는가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히치콕의 영화가 아내를 청부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남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듯이, 이만희가 만든 세 편의 영화는 한 여성을 둘러싸고 그녀의 돈을 갈취하려는 남성들의 욕망과 범죄가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다. 반복된 욕망과 범죄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지숙은 밤중에 집으로 오던 중 건달 춘호에게 추행당할 위기에 처한다. 지나가던 영일이 이를 구해준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전에 자신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임신을 시킨 상국이 출옥을 하면서 지숙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숙은 남편의 유산을 요구하는 상국을 기차에서 살해하고, 영일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지숙의 행동은 더 큰 위험을 가져온다. 모든 상황은 상국과 영일 그리고 춘호가 벌인 음모였고, 영일은 그 과정을 목격했다며 협박을 가한다. 이어지는 춘호의 협박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상국이 돌아오면서 세 남자와 한 여자를 둘러싼 욕망의 드라마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로가 물고 물리는 연쇄적인 파국과 그 안에 번뜩이는 인간의 욕망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68년에 제작되었지만 오랫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05년에 발굴 및 공개가 된 <휴일>은 표면적으로 보거나 스타일상으로는 <삼각의 함정>과 완전히 다른 영화 같지만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상통한다. 한 여성의 임신에 대한 이야기, 친구의 돈을 훔쳐 도망치는 주인공 허욱의 이야기에 다뤄지는 인간의 탐욕과 집착 그리고 일요일이라는 하룻 동안의 이야기이지만 교회의 종소리가 들릴 때에도 이 세계에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허무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모던한 영화에서든, 장르적 영화에서든, 걸작에서든, 장르의 답습에서든 반복적으로 곰씹는 세계였다. <휴일>의 주인공 허욱이 수술을 위해 훔친 돈으로 여자 친구에게 가지 않고 술집에서 놀아나는 기이한 장면은 비상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비이성이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성을 건드리는 기이한 인간의 행적이었다. <삼각의 함정>에서도 상국의 집착과 광기 그리고 이러한 범죄에 동참했다가 지숙을 보호하려고 변모하는 영일의 모습은 악당들의 세계라기보다는 일상의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에 가깝다. 그 가운데 폭력과 착취를 당하는 지숙이 기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상국을 살해하는 장면은 최동훈 감독의 < 타짜 >(2006)를 미리 선취하면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걸작과 범작을 오갔지만 이만희 감독이 항상 중심에 두었던 것은 욕망에 번뜩이는 인간의 변모였고, <삼각의 함정>에서도 서로가 뒤엉킨 욕망의 추격전을 살펴 볼 수가 있다. >> 삼각의 함정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한국영화걸작선]수업료: 12월의 영화 II
< 수업료 >( 최인규 , 방한준 , 1940)는 종소리로 시작하고, 흥겨운 농악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주인공 영달 ( 정찬조 )은 <애마진군가> 노래를 부른다. 종소리 전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에선 오케스트라 연주가 배경음으로 나오고, 아이들이 공을 차며 내는 함성이 종소리에 연이어 들린다. 이러한 “음향경(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은 규율과 군가와 카니발의 병치와 이접이라는 그로테스크 무드를 조성한다. 마을 농악대의 신명 들린 소리가 이런 음향경의 구성을 끝부분에서 전환시킨다. 교실에서 학생들에 내는 소음까지 더하면 영화는 소란과 함성, 군가를 마지막 농악으로 슬쩍 전환시키는 셈이다.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은 3개월 밀린 수업료다. 내야 할 것을 아직 내지 않았거나 내지 못한 미납 상황. 주인공이 초등학교 4학년이고 아픈 할머니는 지불 능력이 없고 장사하러 마을을 떠난 부모도 기별이 없다. 궁핍한 아동이 처한 이러한 상황은 쉽게 눈물로 얼룩질 수 있다. 소위 “친일국책영화” <수업료>는 그러나 눈물 이상의 것을 영화에 주입한다. 아동 영달은 “고귀”하다. 할머니( 복혜숙 ) 끼니를 챙기느라 자신은 밥을 굶는다. 효심이 지극하다. 애 어른이다. 이 영화에서 고귀한 것은 영달만이 아니다. 주 공간인 수원의 풍경과 장소, 자연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영달과 할머니가 살고 있는 누추한 초가집 뒤 우아한 가지를 내린 소나무 두 그루 , 키 큰 나무들로 은성한 언덕, 수려한 그림자, 그리고 내지 일본의 거울 이미지로서의 제국 외지, 반도 학교의 질서, 집단체조 하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영달의 경탄의 시선 등이 미장센의 우아한 기조다. 가난과 고귀의 이러한 이중주는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과 조선의 지정학적 이분법인 내지와 외지를 견지시켜 주지만 동시에 위계적 비대칭성에 부딪힌다. 영화에서 혼용되는 국어(당시는 일본어)와 반도어(조선어)는 내선어, 내선일체를 이루는 듯하지만, 일본 내지에서 검열의 문제등으로 <수업료>의 개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종화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내선일체 구호와는 달리 조선인 소학교는 일본 내지의 학교와 달리 의무교육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가 제출한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인 교사의 배려의 근간에는 내지와 외지의 의무 교육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선교환의 기획 영화로서의 <수업료>는 일본 영화인들을 시나리오, 음악, 배우 등으로 기용 내지 수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내선교환이 내지 상영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이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외지 조선의 풍속을 담은 지역성의 매핑과 재현이다. 내지를 위해 외지를 조망하고 지역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업 시간 마을의 빨래터, 거리의 금붕어 장사, 영달의 부자 친구 한옥의 실내 . 무엇보다도 수원의 풍광과 수원에서 평택으로 갈 때의 신작로, 골목길들. 내지를 위한 외지의 동형성과 이국성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고귀함’의 속내다. 영달이 처한 상황은 궁핍하나, 주변, 통과하는 장소, 목적지의 장소들은 아름답고 풍속은 온화하며 사람들은 온정적이다. 영달의 가난은 오히려 이 식민지의 예외적 사례로 제시되며, 일본인 담임선생과 조선인 이웃( 김신재 ) , 친척의 도움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다. 내지와 외지, 제국과 식민지의 문제는 영화 초반부 4학년 교실의 제국 일본과 조선의 지도, 조선 전도 등이 보여질 때 강조된다. 영달이 수원에서 평택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고, 아버지, 어머니( 문예봉 )가 장사 때문에 마을을 떠났다 귀환할 때, 그 이동성이 일본 제국 지도의 외지 조선의 동역학(kinetics)이라면, 이러한 운동이 동시 녹음 영화 <수업료>에서 마을 농악대의 몸짓, 소리에서 폭발하거나 수렴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내/외, 제국/식민지의 비대칭성이 사운드와 이미지의 벡터와 변곡점을 슬쩍 전환해내는 것이다. 아니면 외지, 마을 공동체의 에너지까지도 중일 전쟁, 대동아 전쟁으로 포섭물인가? 원작에 있던 전쟁 이야기가 영화에서 지워지면서, 해석은 전환으로 갈 수 있다. >> 수업료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