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측의 죄인
- 감독
- 하라다 마사토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기무라 타쿠야, 니노미야 카즈나리, 요시타카 유리코, 히라 타케히로, 오오쿠라 코지, 야시마 노리토, 오토오 타쿠마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연약한 초보자이다. 모든 영토를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상을 이방의 땅으로 여기는 사람은 진정 완벽한 사람이다.” 중세의 신학자, 세인트 빅터 수도원의 휴. (Hugh of Saint Victor) *주1 올해도 어김없이 사사로운 리스트를 작성할 계절이 다가왔다. 작년과 올해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재앙들은 점점 더 가파른 속도로 이어지고, 인간이란 종은 결국 멸종하는가 하는 물음이 현실의 질문으로 다가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솜털이 돋기도 전 둥지에서 땅으로 떨어진 아기새처럼, 인큐베이터에서 바닥으로 내쳐진 가자지구의 신생아들을 뉴스에서 방영하는 2023년. 이런 시기에 내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영화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 영화가 나를 매혹시켰다. 이 영화의 매혹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없어 오랜 시간 고민했다. 평을 찾아보기도 했다. 영미권에서 나온 평들은 하나같이 인물의 생명력을 찬탄했고 새로움을 이야기했지만, 미사여구 뒤에는 분석이 없었다. 20세기적 비극의 산물인 입양 문제를 고리타분한 정체성 찾기에 대한 이야기로 반복했을 뿐.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프레디가 체화하는 것은 그런 후줄근한 것들이 아니었고, 진정 새로운 세계였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극중 인물들은 물론, 관객의 응원과 기대마저 매 순간 배반하며 분열하는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가 왜 나를 이렇게 매혹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강렬하게 느낀 첫 자각은, 이 영화가 빌둥스로만 Bildungsroman (성장 서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꼭 유소년기의 성장서사가 아니더라도, 상업영화의 주인공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역경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더 성숙한 존재로 재창조된다. 물론 예술영화의 세계에는 탈출구 없는 존재의 정체(停滯)를 에누리 없이 이야기하는 브레송의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프레디가 보여주는 것은 존재의 성장도 아니고, 정체도 아니다. 그녀가 성장하려는 순간, 번번이 그녀는 발전과 진보라는 낡은 프레임을 깨버리고 화산처럼 폭발한다. 흘러내리는 마그마는 주변의 인물들은 물론 그녀 자신까지 전소(extinguish)시킨다. 몇 년이 지나 조금 더 나이 든 프레디는, 조금 더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안정을 다시 한번 파괴한다. 80년대에 유행했던 뱀주사위 놀이처럼, 프레디가 인생의 다음 챕터로 나아갈수록, 그녀가 쌓아 올린 안정과 도루묵의 낙차는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삶을 정체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당치 않다. 프레디의 삶은 다이내믹한 에피소드와 격렬한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연옥을 건너뛰어 천국과 지옥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프레디는 성장하지 않으며, 주변 인물들은 같은 자리를 맴돌며 고답한다. 진보와 발전, 모더니즘의 꿈에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그녀를 들뢰즈적 유목민으로 한정 짓는 것은 너무 낭만적이고 나이브(naïve)한 발상이다. 프레디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엄마를 찾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엄마는 영원히 찾아질 수 없다. 자신을 낳아준 여성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생물학적 엄마라는 몸일 뿐이다. 자신을 버린,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생모는 엄마가 아니다. 집, 고향, 가족, 사랑과 밥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엄마라는 존재는 프레디에게 한때 있었으나 “잃어버렸”기에 노력하면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던, 그냥 처음부터 없었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고향도 마찬가지. 프랑스의 백인 가정에 입양된 프레디에게 한국은 또 다른 타향일 뿐이다. 제인 정 트렌카의 피맺힌 문장들에서 드러나듯, 인종 간 입양의 잔인함은 한 개인의 영혼을 갈기갈기 쥐어뜯는다. 집과 엄마에 관한 한, 프레디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유랑자 (nomad)가 아닌, 유배자 (exile)이다. Exile, 유배, 流配는 참으로 희한한 존재의 방식이다. 유배자는 자발적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나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you are born into it, or it happens to you) *주2 심지어 한국 역사를 뒤적여 유배의 뜻을 생각해 보면 더 오묘해진다. 이는 기본적으로 죄인을 고향/집/자신이 익숙한 곳에서 멀리 떠나보내는 형벌의 일종이다. 죄가 깊을수록 가야 하는 거리가 멀어진다.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유럽에 떨구어져 파란 눈의 부모를 갖게 된 한국의 아기들은 무슨 죄를 지었나? 물론 그것은 그들 부모의 죄다.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군과의 관계나 혼전성교 등으로 민족과 가부장의 가호를 받지 못한 부모의 (대개 엄마가 뒤집어쓰는) 죄다. 드물게 (프레디의 경우처럼) 궁핍을 견디지 못해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건 가난의 죄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부모의 죗값은 아이들이 치른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은 유배가 자신의 존재 조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프레디는 이를 정직하게 응시한다. 구석에 쭈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할짝거리는 대신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본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한국의 대중음악과 아드레날린을 펌핑하는 테크노 음악 사이를 횡단하며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두 세계가 들려주는 선율을 경청한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익숙한 곳이라고 믿었던 프랑스라는 세계는 유배의 땅이며,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기를 바랐던 한국은 오직 자신의 결핍, 할 수 없는 것, 가지지 못한 것 만을 깨닫게 하는 (그녀 자신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toxic”한 곳이다.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하나같이 프레디가 배우고 누려 온 모든 것을 부인하며 프레디가 집이라고 믿었던 프랑스를 타국으로 재정의 한다. 그 일에는 가족들이 누구보다 앞장선다. 아버지는 프레디가 엄마라고 믿었던 사진 속의 인물이 입양소개소의 보모에 불과했음을 일깨워 주고, 한국말을 배워 한국에서 살도록 종용하고, 심지어 한국 남자와 결혼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한다. “여기가 네 집이여”라는 말로 축약되는 프레디의 전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는 가부장 내 서열 1위 할머니에 의해 더 높은 차원으로 심화된다. 할머니는 그녀를 앞에 두고 한국어로 기도하여 신에게 용서를 빌며 프레디를 철저히 소외시킨다. 프레디를 자신들이 지은 죄악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피해자가 거부하는 합의금을 법원에 공탁금으로 맡긴 셈이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프레디의 영입으로 가족 완전체를 이루었다는 마음의 평화와, 심지어 신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에 가득 찬 혈연집단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스스로의 존재에 정직한 그녀는 자신에게 혈연을, 이성애를, 모국어를, 고향을, 신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온몸을 던져 저항한다. 소통할 언어마저 잃은 프레디의 저항은 발작적인 춤과 충동적인 섹스, 맥락을 초월하는 동물적인 분노로 표현된다. 하룻밤 상대라고 여겼던 한국남성의 고백에는 광기어린 춤으로 화답하며, 프랑스어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 테나가 자신의 행동을 나무라자 기습키스를 시도했다가 그녀를 잃는다. 한국에 따라온 백인 약혼자는 인삼주와 삼계탕을 맛있게 먹지만, 프레디와 친부가 놀랍게 닮았다는 말을 하자 능멸의 대상이 된다. “손가락 까딱 한번이면 너를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있어.” 헌신적인 연인을 내친 프레디는 거리에 쓰러져 아침을 맞는다. 저항의 댓가는 한층 깊어진 유배의 삶이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최소 단위들 - 가족, 친구, 연인, 국가, 민족, 성별 - 의 즉각적인 상실이다. 이렇게 프레디는 프랑스와 한국의 경계에서 해체됨으로써 자신을 지구 반대편에 입양 보낸 괴물 - 민족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 정신에 대한 숭상과 몸에 대한 경멸 - 을 “결과적으로” 전복하게 된다. 마치, 프레디가 한국에 오려고 뜻한 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듯이. 이것을 의지냐 우연이냐 구분하는 것은, 머리카락을 쪼개려는 시도처럼 무의미하다. 매번 그녀를 더 깊고 불안정한 유배의 삶으로 밀어 넣는 것은 분명 그녀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 인물을 향한 매혹의 이유를 에드워드 사이드의 에세이, “유배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Exile’에서 찾는다. *주3 에드워드 사이드. 1935년,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강제적 점령이 일어나기 전 태어나, 영어를 쓰는 ”에드워드”와 아랍권 “사이드” 사이에서 평생 갈등한 사람.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인류의 양심에 보내진 외교사절”이라고 추도한 지식인. 평생 경계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며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던 미국 시민권자. 아이비리그 대학의 영문과 교수. “오리엔탈리즘”의 저작으로 후대 인문학의 노선을 바꾼 에드워드 사이드 말이다. 그는 이 눈부신 글, “유배에 관한 성찰”에서 *주4 유배를 민족주의와 가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존재의 불연속성이며, 세상의 모든 곳을 낯선 곳으로 인식하는 것은 독창적인 비전을 가능케 한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한 가지의 문화, 한 가지의 세팅, 하나의 집을 인식하지만, 유배자들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을 인식하며, 이런 비전의 다층성은 동시적 차원 – 음악 용어를 빌리자면- 대위법적인 (contrapuntal)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유배를 현대 삶을 지배하는 대형 시스템과 질서에 반하는 대안적 존재방식으로 언급하는 그의 성찰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유배는 습관적인 질서 바깥에서 살아가는 삶(life)이다. 그것은 유목적이며 탈중심적이고 대위법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적응하자마자 그것의 불안정한 힘은 새롭게 폭발한다.” *주5 잠깐,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제 사이드의 글에서 단어 “유배”를 “프레디”로 바꾸어 넣어 다시 읽어보자. “프레디는 습관적인 질서 바깥에서 살아가는 생명(life)이다. 프레디는 유목적이며 탈중심적이고 대위법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에게 적응하자마자 그녀의 불안정한 힘은 새롭게 폭발한다.” 그렇다. 프레디는 유배를 문자 그대로 체화 (embody)한다. 그녀의 존재가 유배, 그 자체이다. 그런 그녀의 불안정한 폭발이 우리의 시선을 끌어 매혹시키기는 하지만,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폭발이 아닌 새로움이다. 발전의 이름으로 서로를 착취하고 지구 온난화를 기어이 실현시킨,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해온 고답적인 방식을 부정하는 새로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프레디는 고착되어 안정적인 삶에 다가갈 때마다 매번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충실을 지킨다. 그 충실함에 힘입어, 프레디(유배)가 대안의 존재(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고향을, 가족을, 연인을 낯설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안다. 고향은 공간이 아닌 과거의 시간일 뿐이고, 집이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며, 모성은 한 번도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프레디뿐 아니라, 사실은, 누구에게라도 그렇다는 것을. 20세기를 살아남아 21세기의 도살과 광기를 목격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으로 낯선 것은 이국과 외국어가 아닌, 목격한 적 없는 시간과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그리고 만난 적 없는 신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정녕 우리는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휴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연약한 초보자이다. 모든 영토를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상을 이방의 땅으로 여기는 사람은 진정 완벽한 사람이다. 연약한 영혼은 세상 한 곳에 그의 사랑을 고정시켰다. 강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모든 곳으로 확장시켰다. 완벽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전소(全燒)시켰다. ” *** 주1. Hugh of Saint Victor (1096 –1141) 중세의 신비가, 신학자, 수도승. 세인트 빅터 수도원에서 수학하여 “세인트 빅터의 휴” (Hugh of Saint Victor) 또는 “휴고” 라고 불리어 진다. (비슷한 이름으로 종종 프랑스의 문인 빅토르 위고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다) 아우구스티안 신비가로 활동하였으나 생의 후반기 많은 시간을 수도원을 떠나 객지를 여행하며 저작을 남겼다. 이후 에리히 아우어바흐, 에드워드 사이드 등, 경계적 존재에 대한 통찰을 하는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글의 서두와 말미에 인용된 라틴어 원문의 영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The man who finds his homeland sweet is still a tender beginner; he to whom every soil is as his native one is already strong; but he is perfect to whom the entire world is as a foreign land. The tender soul has fixed his love on one spot in the world; the strong man has extended his love to all places; the perfect man has extinguished his.” 주2.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 Granta, 2000. P. 189 주3. 추방 VS 망명 VS 유배 추방은 국가권력에 의해 진행되며 추방의 객체가 그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추방의 주체는 고향이라 불릴 수 있는 모국이 아닌 타국일 수도 있으며, 추방의 이유는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순 범죄행위 일수도 있다. 망명은 개인이나 집단이 이념적인 이유로 자신에게 압력을 가하는 국가권력을 피해 자신을 수용해 줄 수 있는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경우다. 망명과 추방은 둘 다 특정한 국가외교적, 법적 의미를 지니는 단어인 반면, 사이드가 말한 exile의 개념은 그보다 훨씬 더 인문학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Exlie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를 분석할 때 쓰는 용어이며 외압에 의해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거나, 그런 인물의 자손으로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반한 곳에서 태어나 살게 된 사람들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추방된 적도, 망명한 적도 없으나 아랍세계에도, 영미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라고 스스로를 여긴 사이드의 통찰을 따라, 필자는 사이드의 exile을 설명하는 단어로 “망명”과 “추방” 대신 “유배”를 사용했다. 주4.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 Granta, 2000. P. 191 영어원문은 다음과 같다. “Seeing “the entire world as a foreign land” makes possible originality of vision. Most people are principally aware of one culture, one setting, one home; exiles are aware of at least two, and this plurality of vision gives rise to an aware of simultaneous dimensions, an awareness that – to borrow a phrase from music – is contrapuntal. 주5.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 Granta, 2000. P. 192 영어원문은 다음과 같다. “Exile is life led outside habitual order. It is nomadic, decentered, contrapuntal; but no sooner does one get accustomed to it than its unsettling force erupts a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