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엄의 상자
- 감독
- 김기영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강효실, 최무룡, 노능걸, 김명순, 최남현, 신동훈, 강명, 주인선, 김실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오늘날 이민 (李敏)을 모르는 사람도 미국문화가 우리나라에 밀물처럼 밀려 들러와 미제라면 사죽을 못쓰던 시대, 그러나 분단 전쟁의 흔적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에 만든 영화 < 자유부인 >(''56 한형모 감독)의 대학생 신춘호를 기억할 것이다. 약간은 덜렁대지만 뛰어난 춤솜씨를 미끼로 이웃의 대학교수 부인에게 춤을 가르치다가 자신의 입술이 상대의 볼에 닿자 '마담 익스큐즈 미'하며 사과할 줄도 아는 그런 배우이다. 비록 역할은 조연이지만 주연 몫까지 챙기는 인기로 1950년대 한국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사나이. 김진규 , 최무룡 시대가 오기 전 스크린을 사로잡은 배우가 이민이다. 이민 은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50년대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명판결을 낸 박인수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떠오른 은막의 귀공자였다.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으로 젊은 청년과 가까워진다는 내용이 폭발력을 지니면서 사람들을 극장에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 요인의 중심에 신춘호라는 인물을 성공적으로 소화한 이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역할에 특히 여성 팬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교적인 도덕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반적인 인물 패턴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폐쇄된 생활로 욕구 불만에 차 있던 여성들에게 그가 연기한 행동적인 청년상은 오히려 신선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때 심어준 서구적 성향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는 이에 앞서 히트한 < 춘향전 >의 이도령이나 그 뒤의 어떤 작품보다도 강렬했다. 그윽한 눈빛과 세련된 매너로 한 시기를 누볐던 이민 은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 서울대학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다닐 때 길에서 우연히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발탁된 것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었다. 1949년 강춘 (康椿) 감독의 <연화(蓮花)>( 민혜련 주연)가 바로 그 첫번째 영화계 신고작이다. <연화>에 이어 출연한 것이 같은 강춘 감독의 < 화랑도 >(1950. 염매리 공연)였다. 16밀리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그는 북한을 탈출하여 반공 전선에 앞장 서는 애국청년으로 등장하여 시선을 끌었다. 촬영중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활발하게 기획된 < 성벽을 뚫고 >, < 나라를 위하여 >(이상 1949)와 같은 반공물로 이 장르는 뒷날 정책적인 뒷받침 아래 성행하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는 서울로 환도했으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대구 등지에 남아 군관계 영화 일을 보고 있었다. 그해 초겨울 대구에 남아 있던 이민 이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 나갔을 때였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입구 쪽 한 구석에 앉아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때야 이민은 < 임자없는 나룻배 >의 유명한 감독 이규환 임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를 시켜 차 한 잔을 보냈다. 주문한 일도 없는 커피에 의아스런 표정을 갖는 그에게 아가씨는 다방 안쪽을 가리켰다. 이민은 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 일을 맡지 못해 어려웠던 이 감독은 그때서야 긴장을 풀고 반갑게 맞았다. 며칠 후 이 감독이 다시 다방에 들렀을 때 이민 은 곱살하게 생긴 한 젊은이를 인사시켰다. 얼마 뒤 이 감독이 조감독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감독이 되는 발판을 마련케 한 최훈 (崔薰)이었다. 그들은 선배 감독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가운데 이규환 감독이 < 춘향전 >의 메가폰을 잡게 되었다. 1954년 이른 봄,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서울로 올라간 이규환은 제작자를 잡게 되자 이민을 주인공인 이몽룡 역으로 확정하고 상대역인 춘향에 조미령 을 기용하였다. 이민은 이 영화의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을 적극적으로 도았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방소로는 안성마춤이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문제였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광산이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이 쉽게 풀리느라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동기동창생이 이 달성 광산의 소장으로 있어 전기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광산에서 촬영장까지 전주를 세우는 토목공사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촬영에 들어간 지 2주일 만에 장마를 만나 50여 명의 스태프들이 발이 묶이고 진행비가 바닥나는 어려움 속에서 10개월 만에 완성한 < 춘향전 >(1955)은 개봉되자 첫날부터 만원이었다. 상영시간 2기간 15분, 필름길이 1만 2천자, 이 분량은 그때까지 나온 한국영화 중 가장 긴 것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 2백여 만 명, 20일 상영에 10만 명의 관객 동원은 국도극장 개관 이래 최다 관객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이었다. 방자와 향단 역을 맡은 전택이 , 노경희 커플의 해학적인 연기에 밑받침된 이민 의 이몽룡 역은 이 영화를 장안의 화제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열광적인 팬들은 앳된 소녀에서부터 40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잇달아 그는 통속 사극 < 망나니 비사 >(1955. 김성민 감독)의 교리(郊理 : 조선조 때 홍문관의 정오품 벼슬)로 출연했다. 고을의 진사 딸( 이경희 )을 좋아하지만 부친의 반대에 부딪치자 그 진사를 역적으로 몰아 야심을 채우려는 직권 남용과 도망간 진사 딸의 억울한 죽음을 그린 것이다. 이민 이 처음 맡은 악역인 셈이었다. 같은 해 < 불사조의 언덕 >( 전창근 감독)에서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한 후 장렬한 최후를 맞은 용감한 군인 역을 맡아 < 화랑도 >에 이어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연이라고는 하지만 후반부 망나니 전택이 와 진사 딸 이경희 의 비련(망나니 비사)에 눌려 크게 빛을 모지 못한데다 공보처의 계몽물이라는 성격 때문에 대중 동원에 한계(불사조의 언덕)가 았어 소강 상태을 면치 못했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가 열린 것은 앞에서 언급한 < 자유부인 >(1956. 한형모 감독)이었다. ''익스큐즈 미'' ''아일 러브 유'' 따위의 영어와 외제 상품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의식을 풍자한 '최고급품입니다'라는 유행어를 낳은 이 영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예리하게 짚어낼 뿐 아니라 이민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 한편으로 1956년을 장식한 이민 은 작심한 듯 양적인 실적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57년 < 청실홍실 >( 정일택 감독), < 여성전선 >( 김기영 감독), < 찔레꽃 >( 신경균 감독), < 실낙원의 별 >( 홍성기 감독) 등 5편에서 58년엔 < 흐르는 별 >( 김묵 감독), < 별아 내가슴에 >( 홍성기 감독), < 그 밤이 다시 오면 >( 노필 감독), < 유혹의 강 >( 유두연 감독) 등 10편으로, 그리고 59년도에는 < 꿈이여 다시 한번 >( 백호빈 감독), < 비오는 날의 오후3시 >( 박종호 감독), < 애모 >( 신경균 감독), < 동백꽃 >( 정일택 감독) 등 무려 13편으로까지 솟아올랐다. 여기서 그의 주요 출연작을 살펴보면 한 가지 뚜렷한 현상이 나타났다. 55년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을 계기로 사극을 청산한 대신 완전히 멜로드라마의 주역으로 변신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라디오 연속극을 최초로 영화화하여 히트한 조남사 원작 < 청실홍실 >(1957)에서는 한창 뜨기 시작한 엄앵란 의 상대역인 운전기사 나씨 역으로 나와 발랄한 사장 딸의 구애을 받으면서도 전쟁 미망인( 주증녀 )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나이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김묵 감독의 데뷔작< 흐르는 별 >(1958)의 경우는 북에서 월남하다가 헤어진 아내( 문정숙 )을 찾아나선 사나이가 어렵게 상봉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장님이 된 이후였다는 비극을, < 별아 내 가슴에 >(1958)와 < 그 밤이 다시 오면 >(1958)은 독립운동가의 아내 손에서 자라나 양가의 규수( 김지미 )와 결혼하게 되는 청년과 부모없이 자란 고아 남매의 애환을 각기 보여 주었다. 최은희 와 공연한 < 꿈이여 디시 한번 >(1959)은 전선에서 눈에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된 병사가 간호장교의 헌신적인 치료 아래 완치되었을 때는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는 이야기며, <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는 약혼자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재출발하려던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약혼자가 나타나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민 은 두 영화에서 부상당한 병사 역과 김지미의 재출발 상대인 미국인 2세로 등장한다. 13편에 이르는 다작 출연이 말해 주듯이 이민은 이 시기에 영화계 진출 이후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어느새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미 < 주검의 상자 >(1955. 김기영 감독)로 주목을 끈 최무룡 과 < 피아골 >(1955. 이강천 감독)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 의 도전으로 그의 확고한 듯 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났다. 60년 한해 동안 < 추억은 영원히 >( 전택이 감독), < 애수에 젖은 토요일 >( 최훈 감독) 등 4편으로 감량되는 현상이 이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단 한 편의 출연조차 없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역시 당시 우리 영화가 즐겨 다루던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윤락가로 전략한 여자( 김지미 )가 6.25 때 헤어진 애인과 만나게 되자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으로, 애인을 잃는 군인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기는 분단의 역사를 표현했지만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장식했다. 이후 이민 은 62년 한해 동안 < 슬픔은 나에게만 >( 안현철 감독)을 비롯하여 < 여자의 일생 >( 신경균 감독) 등 4편에 출연하는 재기의 의욕을 보였으나 1963년 < 상처받은 두 여인 >( 이규환 감독)에 이어 배역을 맡은 김수길 감독의 < 백마고지 >를 끝으로 14년 동안 여러편의 작품을 남기고 영화계를 떠났다, 그후 대중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전성기의 화려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철저한 자기 관리의 의지를 보여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영화제작에 손댔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1998년엔 78세의 나이로 일본아시아문예협외의 지원 아래 제작, 각본, 주연으로 컴백을 시도했으나 뚯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필> 본 명 : 이시중 출 생 : 1921. 2. 27 / 강원도 춘천 데 뷔 : 1949년 강춘 감독 <연화> 주요작품 : < 춘향전 > 외 3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