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등
- 감독
- 김이진
- 제작년도
- 2001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연재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고 완성은 커녕 시작도 제대로 못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쏜살 같은 건 우리 자신이며 한국영화고 시네마 그 자체다. 사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시간을 볼 방법이 없다. 움직이는 초침을 보거나 스마트폰의 숫자를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첫 연재 분에서 금정연과 나는 서교동의 콜마인이라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재를 위한 기획회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카페 콜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 직원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폐업했으며 그 자리엔 오버트라는 이름의 다른 카페가 들어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영화 < 미친 능력 >이 개봉했고(졸작) 최동훈의 야심작 < 외계+인 1부 >가 개봉했고(ㅠㅠ) 장 뤽 고다르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서울 아파트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루나코인의 권도형은 도망자가 됐으며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샀고 윤석열이 해외 순방을 다니고 문재인이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친구에 의하면 문재인과 윤석열은 오바마와 트럼프의 거울쌍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완전히 다르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가 픽션처럼,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예견하고 습격한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한국 영화는 < 압꾸정 >, < 데시벨 >, < 올빼미 >, < 인생은 아름다워 >, < 동감 >, < 우수 > 등이다. 내 주변에 이 영화들을 본 사람은 없고 보러갈 사람도 없다. 한국 영화는 괴멸한 것처럼 보이지만(내 주변에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청룡영화상에서 박찬욱의 < 헤어질 결심 >이 상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해보라. 1960년대 TV의 습격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화는 십년 후 블록버스터 군단으로 세계 문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OTT도 게임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전 세대의 거장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한 거인들도 일찍이 명을 다했지만 영화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화는 영웅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는……. 지그프린트 지린스키는 과거의 영화를 임대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의 본질은 돈을 받고 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의 좌석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TV는 사람들이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TV는 가구이며 인테리어 업종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문학적인 텍스트에만 해당했던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영화 그 자체가 소유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다. 시청각의 서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상 파괴의 도구로 미디어 이론만큼 유용한 게 없다. 이러한 관점은 경주마처럼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과도한 감정 이입을 막아준다. 극장이 중심인 영화가 임대업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OTT가 기승을 부려도 시네마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의 부동성을 강제하는 임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나윤이 아버지인 금정연씨와 정원이 아버지인 오한기씨가 극장에 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용 영화가 큰 의미없이 사라진 이유도 여기 있고 OTT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OTT는 개별 콘텐츠가 아닌 리스트의 문제다. 개별 작품은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로 감상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영원히 보지 않더라도 무엇을 볼 가능성이 있느냐다. 선택되지 않은 잠재성, 가능세계가 OTT의 우주를 이룬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소유한다. 반면 극장은 지금 당장 행동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용산 아이맥스는 매진되고 영화는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간성에서 중요한 건 러닝타임이 아니라 상영 기간이다. 영화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고 이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OTT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닌자처럼 통장에서 구독료를 가져가게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세계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워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 수리남 >을 볼 것이다. 언제 볼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종말은 없다. 시네마에는 새로운 시작 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정연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이전의 나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떠돌이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 이후에야 비로소 K정연이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존 포드가 말한 픽쳐의 의미라고 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정성일은 씨네21에 신설된 코너 《전영객잔》에 들어갈 글을 청탁받으면서 당시 편집장인 남동철에게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을 들었다. 남동철은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전영객잔의 소개에 덧붙인다. 정성일은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책으로 묶으면서 5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후퇴했는지 돌아본다고 쓴다. 아마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그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첫 꼭지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밌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분야에나 반복되는 후렴구이기 떄문이다. 이제 문학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전시를 진지하게... 이제 브릿팝을 진지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 후렴구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문학비평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에 대한 담론, 영화 글이 진지하게 소비되고 이야기된 시기는 언제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동철이 한탄한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아무도 안 읽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을 읽고 분노하고 절망할 때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에 글을 쓴 정성일은 왜 영화비평에 관한 해묵은 수사에 동의한 걸까. 그는 이렇게 쓴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 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화비평을 읽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이나 리뷰를 쓰긴 쓰고 읽긴 읽는데 거기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사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준과 권위가 사라지고 하찮음이 위대함으로 둔갑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어둠의 정성일이라고 칭하는 임재철 역시(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금정연과 내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영화도 아닌 걸 영화라고 한다고 말이다(인용은 정확하지 않음).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책은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1972)였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빅터 퍼킨스의 유일한 단행본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표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성일, 임재철 두 선생님의 훌륭함과 무관하게 나와 정연씨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처음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랬고 영자원 연재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단지 교란, 전복, 위반, 철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 권위, 규범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의 특수성들이 특수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취향, 상호존중 따위로 퉁 쳐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화경험. 쑨거에 따르면 1950년대 말 미국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독특한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모든 지역이 공유하는 지리적 특징을 수집해야하는지 여부였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왔다. “특수성의 상태로 재현된 대상이 일반적 규칙으로 다듬어지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여러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때 리처드 하트숀은 유사성에 대해 인습과 다른 정의를 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정의하는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지엽적인 부분을 쳐낸 후 남은 주요 차이”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성질”인데, 유사성이 바로 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떻게 특수성들 속의 차이가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고리가 될 수 있을까. 좋고 나쁨,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는 기준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얼마전에 만난 강보원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심심해서 Dbpia에서 금정연과 정지돈이 과거에 쓴 글을 보는데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더라구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러는 거죠. 아니, 자꾸 그러지마, 그걸 왜 열어, 이사람들아.” 글쎄, 그걸 왜 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을 하는 강보원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몇 안 되는 천재로 회자된다. 15년간 만든 51편이란 숫자도 놀랍지만, 작품 간 기복이 심하지 않고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했다. 유독 비범한 영화도 있고, 1970년대 영화처럼 범작처럼 보이는 영화도 있지만 이만희의 치밀한 미장센과 유려한 리듬, 자기파괴적인 운명과의 싸움 같은 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5년 제대한 후 조감독 생활을 했다. 이후 < 주마등 >(1961)으로 데뷔했고 (고작) 다섯 번째 영화인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을 통해 미학적 성취와 흥행 성적 모두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전쟁영화의 원형을 만들어냈으며, 그해 관객동원 1위의 기록을 갖게 되었고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뛰어난 대중영화, 사실적으로 전쟁에 접근한 전쟁영화의 장인, 사실성을 위해 실탄을 쏠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는 완벽주의자, 반공 이데올로기에 타협하지 않는 강한 품성의 소유자, 높은 개런티를 받는 A급 감독으로의 도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듬해 느와르의 관습을 과감하게 몰아붙인 < 검은 머리 >와 호러의 법칙을 보다 치밀하게 고안한 < 마의 계단 >을 만들었는데, 두 영화 모두 고유한 무드를 따라 넘실거리는 정념과 가혹하고 파괴적인 운명과 대결하는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만희가 연달아 발표한 걸작 < 물레방아 >(1966), < 귀로 >(1967), < 휴일 >(1968)도 전작들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감하게 넘어선다. 귀기 서린 여인의 얼굴과 새하얀 버선, 그 아름다움에 홀린 남성의 집착과 파멸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서울의 낮과 밤을 부유하며 자신이 정한 계율과 투쟁하다 죽음을 선택한 여인의 불안과 공허는 무심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와 공명한다. 또 담배 한 개비조차 편히 피울 수 없는 젊은 룸펜과 그의 연인의 육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의 운동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우연히 튀어나올 리 없는 창조적 역량과 그의 무드가 온전히 결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작 < 삼포 가는 길 >(1975)까지 이어지는 이만희의 영화들은 반공영화와 문예영화처럼 국가와 영화산업의 필요에 따른 규칙을 뛰어넘어 살아 생동하며, 원작과 다른 정취를 표현함으로써 고답적인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또 전쟁영화, 멜로드라마, 스릴러, 첩보물, 만주 웨스턴 같은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장르의 규범을 탈바꿈시켰으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나들며 인간과 삶, 가변적인 감정과 불변하는 운명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힌 인물의 도덕성을 가혹할 정도로 밀어붙였다. 이만희는 프레임에 인물의 감각과 감정을 새겨 넣고 그 시대의 무드를 기입했으며 빛과 어둠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만의 속도와 리듬을 창조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인간됨에 대한 믿음과 캐릭터의 생생함, 스펙터클과 정감을 조율하는 뛰어난 영화적 감각, 운동하는 존재와 갇힌 존재가 숏 안에 배치되고 격돌하는 미장센과 리드미컬한 편집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시작해 서울 수복을 거쳐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과 대치한 전선에서 끝을 맺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가장 강력한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만희는 마지막 참호전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찍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중공군과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는다. 이를테면 첫 번째 전쟁 시퀀스인 상륙작전은 오프닝에 등장해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전투 시퀀스인 텅 빈 건물에서 벌어진 매복과 총격전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의 주검으로 이어지는데, 시선의 방향에 따른 빈틈없는 편집과 시각적 스펙터클 뿐 아니라 심리적 긴장까지 녹여낸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압권은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전선에 합류한 분대원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진지를 방어하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 이 장면은 4번의 전투 시퀀스로 구성되어 휴지기/전투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주검으로 뒤덮인 참호로 향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분대원들과 호랑이 분대장(장동휘)이 전쟁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을 수시로 체험하며,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전우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후방에 맡겨둔 아이 영희(전영선)의 편지를 받고 눈물 흘리는 집단 초상화에 가까운 얼굴들이다. 분대원 각각의 클로즈업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반면, 군인이라는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사람 살아가는 곳 어디에나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총원 42명”이던 분대원들이 하나씩 프레임에서 사라져 2명만 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분대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얼굴에 압도된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면서도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라고 너스레를 떨던 봉구(구봉서)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분대원들은 진흙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개인의 얼굴로 포착된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분대원들에게 “14시 이후의 생존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죽지 말고 살아남길 당부한 분대장의 말은 마지막 전투 시퀀스에서 살아남은 대원에게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전쟁의 증인이 되어라.”는 명령과 연결된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채 가시기 전에 구일병(이대엽)마저 죽어 엎드러질 때 눈물 흘리는 최해병(최무룡)과 흐느끼는 분대장의 얼굴은 전쟁의 실체를 겪은 자의 무참함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주검과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분대원의 얼굴, 전쟁 후 복구되지 못한 당시의 황폐한 산천도 참담하고 고통스런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만희의 실제 경험과 영화적 역량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 장면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백과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도 놀랍지만,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백미는 전투를 치르지 않는 후방의 막사나 럭키 클럽에서 드러나는 분대원 개개인의 놀랍도록 선명한 기질처럼 세부적인 것들이다. 영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별명을 듣고 껄껄 웃거나 불만을 표하는 모습, 시가전에서 잡은 인민군 포로에게 그 흔한 매질 한 번 없는 모습, 눈이 녹은 땅을 보며 “전장에도 양지는 있구나.”라며 감탄하던 봉구의 구성진 말소리, 최해병이 건넨 총을 받아들고 그의 손에 이끌려가는 분대장의 휘청거리는 발걸음, 어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진, 민둥산에 가까운 산등성이의 나직하고 고운 모습 등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원이 몇 천 명 참여했고, 탱크와 총기를 지원받아 실탄을 쐈다는 기록보다 귀중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실제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당대 영화인들의 노력과 이만희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서정민의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처럼 다양한 힘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감동적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고화질 VOD 보러가기 <<
데뷔와 함께 세 편에 출연 황정순은 해방 전 불과 열다섯 나이에 <그대와 나>(허영, 1941)의 단역으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이향이나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불려나온 반짝 출연이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49년 봄 우리나라 최초의 16밀리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부터였다. 친구의 오빠(송재로)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속세를 떠나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의 반생기이다. 그의 뒷얘기는 1.4후퇴 때 미공군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아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실어 날은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전송가>(1957)로 이어지지만, 황정순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황온순(주증녀)이 아닌 그의 친구로 나왔다. 이런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준 것은 장황연 감독의 <청춘행로>(1949)였다. 시댁의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견뎌내 끝내 행복을 얻는 며느리의 이야기로, 주선태(시아버지 역)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여성일기>에 나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다음에는 최인규 감독의 흑산도 올 로케이션 영화 <파시(波市)>(1949)가 기다렸다. 어촌의 사내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 작부 김홍도 역이었다. 후배 작부(최지애)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도 돈에 팔려 다른 파시로 옮겨 가야 하는 조연급, <청춘행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사진] <청춘행로>의 한 장면 생필름을 구하기 어려워 제작비가 뛰어 오르고 여름부터 퍼진 뇌염 때문에 극장 문까지 닫히던 시기였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변사이자 배우, 해방 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원작자이기도 한 김조성(金肇聲, 예명 춘광)도 이해 6월에 뇌염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황정순은 나라의 재난 속에서도 세 편이나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다. 30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역의 멍에 하지만 불의에 닥친 6.25전란으로 그녀의 활동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다.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을 비롯한 <숙영낭자전>(신현호, 1956), <사랑>(이강천, 1957), <김삿갓>(이만흥, 1957), <봄은 다시 오려나>(이만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인생차압>(유현목, 1958), <청춘극장>(홍성기, 1959) <육체의 길>(조긍하, 1959), <대원군과 민비>(유진식, 1959) 등 20여편이 그 산물이다. 이 시기에 <사랑>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최우수여우상을 받았다. 영화계에 들어와 처음 받은 상이었다. 잇따라 <인생차압>의 이중생(김승호) 부인 우씨 역으로 제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황정순이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인생차압>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최남현, 우편이 유계선 <귀거래(歸去來)>(이용민)와 <박서방>(강대진)으로 시작된 1960년대는 그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평선>(정창화, 1960), <주마등>(이만희, 1961), <마부>(강대진,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2), <한 많은 미아리고개>(엄심호, 1962), <한석봉>(이만희, 1963), <굴비>(김수용, 1963), <외아들>(정진우, 1963), <혈맥>(김수용, 1963), <성난 능금>(김묵, 1963), <잉여인간>(유현목, 196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4), <삭발의 모정>(강대진, 1965), <이 땅에도 저 별빛을>(김기덕, 1965), <갯마을>(김수용, 1965), <친정어머니>(김기덕, 1966), <팔도강산>(배석인, 1967), <산불>(김수용, 1967), <대원군>(신상옥, 1968), <화산댁>(장일호, 1968), <저 언덕을 넘어서>(강찬우, 1968), <부인행차>(문여송, 1969) 등 120여편이라는 양이나 질적으로 그러하다. 황정순은 이미 서른세 살 때부터 머리에 흰 칠을 하고 얼굴에 주름살을 그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보다 한 살 위인 박암의 장모 역(<인생차압>)이 그 시작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그녀의 노역 행진은 특히 <마부>, <굴비>, <혈맥>, <갯마을>, <육체의 고백>, <산불> 등에서 빛을 내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진] <외아들>에 출연한 황정순, 왼편 아역 배우는 박종화(사진제공: 김종원) <마부>의 경우는 식모(수원댁)에서 마부(김승호)의 재취로, <굴비>에서는 분가한 자식들의 냉대에도 보듬어 안는 농사꾼의 아내로, <외아들>에서는 자식을 위해 온갖 역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어촌 어머니로, <혈맥>에서는 과년한 딸을 술집에 보내려 ‘신고산타령’을 가르치는 노점의 주모로, <갯마을>에서는 재가한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과부 시어머니로, <잉여인간>에서는 무직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마른 동태에 바람을 불어넣는 억척스런 아내로, <육체의 고백>에서는 환락가에 군림하는 나이트클럽의 마담으로, <산불>에서는 마을에 숨어든 공비(신영균)와 통정하는 바람난 과부(도금봉)의 어머니로, <삭발의 모정>에서는 휴가 온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머리를 잘라 파는 가난한 군인 어머니로, <화산댁>에서는 처가살이하는 아들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사업 빚을 갚아주는 농촌 어머니로 각기 나타난다. [사진] <굴비>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이빈화, 우편이 김승호(사진제공: 김종원) 초기에는 <촌색씨>, <자식복 돈복>(윤대룡, 1959), <모상>(박상호, 1960) 등의 경우처럼 연극 연기가 몸에 밴 오버액션의 경향이 있었지만, 60년대 초반 <혈맥>, <잉여인간> 등 일련의 문예영화에 출연하면서 한층 여과된 디테일 연기로 다듬어졌다. 일찍이 황정순을 <월급봉투>, <산불> 등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나게 한 김수용 감독의 말처럼 ‘연기인에게 젊은 역과 노역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젊은 날 무대의 여왕이 은막의 노파로 전향’ (『주부생활』, 1969년 9월호 부록, 「영화와 스타 스토리」) 한 것은 의도와는 다른 운명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