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
- 감독
- 이병직
- 제작년도
- 2007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사진: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국내 극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화들을 곱씹어 본다. 어떤 영화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침탈이 꼬박 한 세기가 넘은 문제임을, 과거의 가자 지구를 (재)발견함으로 이야기한다(< 그 꽂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 >, < 하산과 가자에서 >). 어떤 영화들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에 분노하고 자신이 감각하는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담아내길 시도한다(<공존이라니, 웃기시네!>, < 힌드의 목소리 >, < 해피니스 >). 어떤 영화들은 학살이 벌어지며 폐허가 된 가자의 현재를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끝나지 않는 밤>, < 노 어더 랜드 >, < 그라운드 제로로부터 >). 어떤 영화들은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어떻게든 가자 지구로 카메라를 향하게, 그럼으로써 관객과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의 시선을 움직이고자 한다(<언허드: 마사페르 야타를 지켜라>, < 팔레스타인을 위한 두 대의 카메라 >). 또 어떤 영화는 그럼에도 존재하는 가자에서의 삶과 생 자체를 기록하고 이곳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임을 천명한다(<가자에서 파쿠르>). < 슈퍼맨 >이나 < 주토피아 2 >와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묘사된 지정학적 분쟁이나 침략이 이스라엘의 제국주의나 나크바(النَّكْبَة)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등장했던 것도 이러한 영화관람의 연장선이랄까. 영화제나 소규모 상영회를 통해 올해 국내 상영된 영화가 더 있겠지만, 개인이 챙겨볼 수 있는 영화는 이 정도였다. 아참, 한 영화를 빼먹었다. 알렉스 바크리의 다큐멘터리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2025)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다르게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사기사 ‘후세인 다르비’, 서안지구 예닌(Jenin) 지역의 영화관 ‘시네마 예닌’에서 일했던 베테랑이다. 하지만 그는 실직자다. 1987년 1차 인티파다 이후 극장은 문을 닫았고, 장기간 방치된 공간은 폐허에 가까워졌다. 2008년, 독일의 영화감독 마르쿠스 베터(Marcus Vetter)는 이스라엘과 EU의 지원을 받은 일종의 문화적 회유정책인 ‘예닌 극장 재개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독일의 극장 기술자를 데려와 예닌 극장을 재건하고자 하고,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해 <시네마 예닌>(2011) [1]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감독 알렉스 바크리는 <시네마 예닌>에 촬영으로 참여했었으며,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2008~2010년 사이 후세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시네마 예닌> 중 예닌 극장의 모습 (사진: “ CINEMA JENIN ”, MUBI) 여러 맥락에서 시네마 예닌을 필름 극장으로 재개관한다는 프로젝트는 시대착오적이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폐관하기 이전의 시네마 예닌에서 일을 배웠으며 43년의 영사기사 경력을 갖고 있는 후세인에게 주목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극장이 아니라 후세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터의 <시네마 예닌>이 자신의 평화주의적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기록이라면,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그것이 얼마나 탈정치적이며 시대착오적이고 평화적이지 않았는지를 드러낸다. 베터의 프로젝트에서 예닌이나 서안지구에서 일하고 있는 영화관 산업 관계자는 배제되어 있었다. 영사기사 후세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이 극장의 영사기사임을 주장한다. 극장의 재건은 서구와 이스라엘의 펀딩을 통해서만 가능한 프로젝트이지만, 그것의 존속은 결국 (역사, 정치, 문화 등이 뒤섞인) 해당 지역의 문제다. 베터의 프로젝트가 간과했지만 후세인은 알고 있던 사실, 그렇기에 후세인은 시네마 예닌에서 다시 일하기 위해 영화 내내 동분서주한다. 오래된 영사기의 컨디션을 테스트하고, 근처의 극장을 찾아 탄소봉과 렌즈를 빌려 오고, 영사기 설치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검문소를 넘어 텔아비브로 향하길 시도한다. 알렉스 바크리의 카메라는 ‘백인 구원자’ 서사에 자신을 투사하는 마르쿠스 베터와 그의 팀의 이면에서 구원받지 못한 한 인물을 담아낸다. 영화는 시네마 예닌의 재개관 행사에서, 마땅한 초대석은 물론 프로젝트 구성원으로 호명조차 되지 못한 채 구석에 서 있는 후세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위험천만한 이동을 감행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던 후세인의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목격하던 관객들은 망연자실한 채 재개관 행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다시 목격한다. 이때 우리는 후세인의 얼굴에서 다른 팔레스타인 민중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꽃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에서 영국인 선교사들이 촬영한 필름에 담긴 100년 전의 팔레스타인 인민들, <하산과 가자에서>에 담긴 밤새 벌어진 이스라엘군의 총격 흔적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20년 전의 가자 지구 주민, 이스라엘 정착민의 공격에 시달리는 <노 어더 랜드> 속 사람들. 자신의 땅을, 생활을, 직업을, 삶을 강탈당한 사람들의 일관된 표정은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에도 담겨 있다. (상) 사진: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좌 , 우 )”, 부산국제영화제 (하) 사진: “ 하산과 가자에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좌) / “ 노 어더 랜드 ”, 부산국제영화제(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기간이다. 2008~2010년은 극장 시스템에 있어 일종의 전환기다. 국내의 상황만 살펴보더라도, 와이드릴리즈로 디지털 배급을 시도한 2006년의 천만 영화 < 괴물 >과 3D 광풍을 불러온 2009년의 < 아바타 >를 거치며 디지털 상영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디지털 시네마 이니셔티브(Digital Cinema Initiatives)가 디지털 영사의 표준 포맷인 DCP의 1.1 버전을 내놓은 것도 디지털로 촬영부터 배급 및 영사까지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 [2] 로부터 대략 10년이 지난 시점인 2007년이었다. 그 이후의 변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영사기사라는 직종의 점진적인 소멸이다. 마르쿠스 베터의 재개관 프로젝트에는 이러한 고려가 결여되어있다. 그는 시네마 예닌을 35mm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는 극장으로 재건하고자 했으며, 디지털 영사로의 이행기에서 이는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실제로 시네마 예닌은 2010년 8월 재개관했지만 7년 뒤 다시금 폐관했다. 물론 여기에는 재개관과 운영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탈정치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 그것이 프로그래밍은 물론 영화관 자체에 대한 평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포함되지만 말이다. 독일에서 영사기를 공수해 시네마 예닌에 설치하고자 하는 마르쿠스 베터의 아이디어, 더불어 독일에서 넘어온 기술자가 영사기를 설치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영사기의 구조를 파악하고 필요한 부품을 구하러 다니는 후세인의 모습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시기의 혼란을 그대로 가져온다. 마르쿠스와 그의 팀이 프로젝트에서 후세인의 노고와 그가 지켜온 영사의 유산에 알맞은 보수와 명예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사기사 후세인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마르쿠스의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무지와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적 평탄화가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면, 이러한 지점들은 영화의 기초적인 지지체로서 필름과 필름영사기, 그것들을 다루는 영사기사의 쇠락은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다른 한 축이 된다. 영사기사 후세인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두 축이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일종의 문화 제국주의와 필연적인 미디어 변화로 정당화되는 자본주의적 이행 사이에 껴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2017년 시네마 예닌이 재개관한 지 7년 만에 재폐관하고 건물이 철거된 현장에서의 인터뷰다. 후세인은 다시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철거된 극장을 바라본다. 시네마 예닌의 철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후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자막이 등장하고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죽음”이라는 해묵은 테제를 다시금 떠올린다. 시네마 예닌은 이스라엘의 펀딩을 받은 독일 감독의 바람과 달리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위한 무언가로 작동하지 못했으며, 후세인은 끝없이 프로젝트의 외곽으로 밀려나 영사기사라는 직업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한 사람을 통해 애초에 달성될 수 없던 프로젝트의 죽음과 영화의 죽음, 나아가 그것이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환상, 역사와 유산에 대한 무지, 문화(culture)의 경작(cultivate)이라는 관점의 부재,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을 위한 NGO의 프로젝트는 물론 영화의 향유와 그것을 통한 문화의 형성 또한 서구적 관점에서 짜여 있음을 지적한다. 이 영화는 2017년에 마무리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2025년에야 공개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알렉스 바크리 감독은 이 영화가 지금에서야 공개된 것이 순전히 ‘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25년의 시점에서 시네마 예닌과 영사기사 후세인의 이야기를 목격하는 것은, 우리를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인도한다.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영화를 보러 다니고, 그 영화들에 관해 짧은 평이라도 남기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영 소식을 공유한 것은 영화평론가이자 (이제 막 석사를 마쳤을 뿐이지만) 상영 활동에 관한 논문을 쓴 연구자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자그마한 다짐에서 출발한 일이다. 이러한 다짐은 물론 영화사의 여러 작품을 종으로 횡으로 엮어내는 비평적 프로그래밍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관해 발언하고자 하는 필름 콜렉티브 로트링겐의 스크리닝 [3] 이나, 다양한 스크리닝과 이벤트를 통해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확장하고자 하는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 [4] 의 활동에 비하면 작은 것일 테다. 정치철학자 배세진은 가자에 관해 쓴 짧은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연결된 세계의 연결된 위기 속에서, 다르게 말해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 즉 현행성 속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동료 시민을 위해 투쟁하고 사랑하며 연대한다면, 이는 오롯이 가자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5] 그 또한 같은 글에서 쓰고 있듯, 지난 1년 사이 벌어진 내란 국면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 가자 지구와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위기는 그것과 연결된 우리의 위기이며 (일정 부분) 의무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배세진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볼 것인가? 사진: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 부산국제영화제 *** [1] 국내에선 2012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다. [2] 1998년 북미 개봉한 <더 라스트 브로드캐스트>가 촬영, 편집, 배급, 영사 등이 모두 디지털로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3] 해당 스크리닝은 원고를 쓰고 있는 시점에선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새벽에서 황혼까지, 강에서 바다까지: 페터 네슬러, 아니크 르루아, 뤼디거 노이만, 장-마리 스트로브 & 다니엘 위예(2025. 12. 20.~12. 21. 진행)'이다. 자세한 정보는 로트링겐의 홈페이지 소개글( 링크 )을 참고. [4]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 인스타그램( 링크 )을 참고. [5] 배세진,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금붕어, 레닌, 그리고 가자』, 출판공동체편않, 2025, 17~18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