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에타
-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엠마 수아레즈, 애드리에나 우가테, 다니엘 그라오, 인마 케스타, 다리오 그란디네티, 미셸 제너, 로시 드 팔마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하이힐 >, < 귀향 >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 하이힐 >, < 귀향 >, < 줄리에타 >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 브로큰 임브레이스 >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 라이브 플레쉬 >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 나쁜 버릇 >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 그녀에게 >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 휴먼 보이스 >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 앨라니스 >는 제 19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전주에서만 상영되었을 뿐 국내 개봉 계획이 없다. 2005년에 <사랑없는 일년 A year without love>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통해 데뷔했고 <앨라니스>가 다섯 번째 장편영화인 여성감독 아나이 베르네리는 그간 베를린, 토론토, 산세바스찬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국제적 명망을 얻었다. 올해 전주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한국경쟁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을 막 마치고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고른 해외 출품작들을 점검하면서 보게 된 이 영화는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주로 젊은이들의 박탈감에 주목하며 출구 없는 삶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담는 대다수 한국독립영화와는 달리 <앨라니스>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 포위당해있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는 인간상을 담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는 ‘앨라니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매춘부이며 18개월 된 단테라는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마리아는 친구이자 동료인 매춘부 지젤라와 함께 사는데 거주지에서 매춘하는 것이 적발되자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옷가게를 하는 숙모 집에 잠시 머무르면서 매춘 일을 계속하지만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일단 마리아는 다른 매춘부들이 이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거리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몰래 고객을 유인해 자동차 등에서 일을 계속하지만 보는 사람도 끔찍한 상황만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를테면 발기하지 않는 늙은이를 상대로 차에서 영업하는 장면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마리아가 일하러 나갔을 때 단테를 봐주는 숙모는 마리아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마리아를 비난한다. 네가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는 게 아니냐, 어린 아들을 생각하라고 그녀는 다그친다. 숙부는 그런 숙모를 말리지만 내심 숙모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임시로 숙모 집에서 얹혀살 처지의 마리아는 당장 항변하지는 않는다. 대신 매춘 혐의로 경찰에 출두해 심문을 받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더 좋은 삶을 찾으라고 훈계하는 담당 경찰에게 거세게 쏘아붙인다. 함께 아이를 책임져야 할 남자친구는 마리아가 임신을 하자 도망친 상태에서 일자리가 없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이래 자신이 얼마나 살기 위해 처절히 일했는지, 매춘 외에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지를 말하면서 마리아는 어떤 동정도, 이해도 필요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앨라니스>는 점점 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 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하는 마리아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녀는 잠깐 숙모 집에서 쪽잠을 잔 후 거리로 나와 일을 하고 거주할 곳을 찾다가 애타게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돌아와 젖을 물리고 잠시 쉰 후 잔소리하는 숙모를 피해 다시 일하러 나가며 심지어 모두 잠이 든 심야에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가 다른 매춘부들의 구박을 받으며 몰래 일을 한다. 어디를 가던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공간을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쓰이는 거울, 유리창 등의 반사면을 이용한 복합적인 장면 설계로 인해 점층적으로 아이러니 효과를 만들어낸다. 영화 초중반까지 이런 반사면 활용에 기초한 미장센은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의 여신 같은 외형이 주는 위엄을 강조한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마리아가 비스듬히 누워 있을 때 반사면의 미장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중 삼중으로 화면에 배치하며 우리는 그 공간의 볼륨에 압도당한다. 반면 그녀가 거리를 헤매며 필사적으로 푼돈을 버는 중반부 이후의 화면들에서 유사한 장치의 프레임들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그녀의 연약한 삶의 환경을 냉정하게 증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마리아는 심야의 거리에서 호객을 하고 다른 매춘부들을 피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뭐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남자의 선택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매춘을 하는데 관객은 잘못하면 그녀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인상을 받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유사 변태적 행위를 강요당한 끝에 겨우 돈을 받아낸 마리아가 다시 거리에 나섰을 때 근처의 매춘부들은 그녀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며 그녀를 붙잡고 단체로 린치를 가한다. 설상가상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튿날 숙모는 더러운 일을 하는 마리아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아이를 빼앗으려 들고 마리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집을 나온다. 결말은 일시적인 해피엔딩이다. 마리아는 어느 매춘숙에 들어가고 동료들은 마리아와 마리아의 어린 아들 단테를 가족처럼 대해준다. 단테는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에 안겨 보살핌을 받는다. 마리아는 쫓겨날 걱정 없이, 먹을 게 떨어질 걱정 없이, 아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불안감 없이 당분간 살 수 있다. 모던 록 가수 앨라니스 모리셋에서 예명을 딴 마리아는 자기 앞에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저 홀로 자립하기 위해 분투하며 허튼 동정이나 이해도 거부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외부인이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그녀는 거부한다. 네 삶은 이러하니 저러 해야 해, 라고 누군가 말하는 순간 그녀는 그 상대방과 절교하는 것이다. 그녀의 존엄은 그녀가 하는 일로 측량될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존엄하다. 그녀는 항상 불행하지 않으며 적지 않은 순간에 행복하고 대체로 먹고살기 위해 초조하다. 어떤 때에도 그녀는 자기 자세를 잃지 않는다. 실제 아들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한 마리아 역의 소피아 갈라는 바위 같은 당당함을 화면에서 표상하는데 극단적인 삶의 남루함을 전시하는 사건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기운을 잃지 않는다. <앨라니스>의 여주인공 마리아가 드러내는 불굴의 기운과 비슷한 에너지를 한국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인 정형석 의 < 성혜의 나라 >가 그렇다. (후일담이지만, 이 영화는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출신 줄리에타 시첼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상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서울독립영화제의 초청도 받지 못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 스물아홉 여성 성혜의 고단한 일상을 좇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들어갔으나 성희롱을 당하고 항의가 묵살 당하자 인권위원회에 신고하고 회사를 나온 그는 다른 곳에 취업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파트타임 일들로 생계를 꾸린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는 곧잘 성혜에게 돈 융통을 부탁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성혜의 남자친구는 무능한 데다 눈치도 없다. 사방이 무심한 공기로 차 있는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 묵묵히 견디며 노동하는 성혜의 모습은 별다른 극적 주름이 없는데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성혜의 나라 성혜는 자기 삶에 벌써 지쳐있지만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관성처럼 그녀의 노동일과는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지만 기적 같은 사건이 후반에 발생한다. 아직 개봉하기 전 영화이므로 그 전말을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는 급격하게 화면의 공기를 바꾼다. 굳은 표정으로 일상의 노동에 전념하던 성혜는 삶의 반전을 맞아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선택을 한다. 그녀의 표정과 행동은 관성적이고 기계적이던 반복적 굴레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생기를 띠고 화면에서 튕겨 나올 듯 발랄해진다. 영화의 2/3까지 애인을 포함하여 찌질하고 저렴하고 대면하기 싫었던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성혜는 어떤 명시적인 희망도 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성추행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던 동료의 사과를 대신한 친절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의 의존적인 태도를 무시한다. 대책 없는 관성적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면서도 관계에 미련을 갖는 애인에게도 고기와 술을 사준 뒤 이별을 통보한다. 곧 그녀는 삶의 대단원의 반전을 맞이하기 전에도 이미 기존 관계의 관성, 그에 따른 행동 양식과는 선을 그은 채 홀로 감당할 삶에 대해 결전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성혜는 주변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거짓 희망을 품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자립과 존엄을 위해 산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육체적 한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불행과 행운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를 통해 삶의 전기를 마련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기성 삶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다.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에서 영민은 짝사랑하던 혜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인내하며 기다림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연말,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에서 (마찬가지로 배우 안성기가 연기한) 청년 병태는 경주의 첨성대를 보기 위한 여행길에 나선다. 전자가 오랜 시간의 흐름을 경유한다면, 후자의 서사는 장소와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개된다. 얼핏 보면 상반된 면을 보이는 이 두 영화는 사실 배창호 (裵昶浩: 1953~)라는 감독의 세계관 안에 하나로 수렴되는 동전의 양면들이다. 사뭇 달라 보이긴 하지만 이 두 영화는 시간을 통해서든, 아니면 공간을 통해서든 일종의 긴 탐색의 여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물들은 ‘사랑’이라는 가치에 눈뜨게 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풍 하루 전날 뇌성마비에 걸려 몸져누운 병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 몰래 집을 나선다. 그에게 있어 경주행은 유년기에 멈춰버린 인생의 시간을 되찾기 위한 꿈의 여정이다. 그러나 장애의 몸에 홀로 여행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단순히 서울역을 찾는데도 버스를 잘못 타고 길을 헤매는 그에게 조력자 역할로 시인 한민우, 무임승차한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춘자가 동행으로 붙는다. 인물의 설정은 다르지만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는 감독의 성공작 < 고래사냥 >(1984)의 또 다른 변주에 가깝다. 실연의 고통을 달래고자 무작정 길을 나서 방랑하던 병태는 구체적인 목적지를 얻으며, 거지 왕초 민우는 시인으로 바뀌었지만 병태를 돕는다는 점에서는 같으며, 사창굴에 빠져들어 삶의 험난함을 겪었던 춘자는 홀로 만삭의 몸을 끌고 다니는 미혼모로 바뀌어 있다. 여행은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v)이다. 배창호 영화에서의 인물들은 여행(또는 방랑)을 나서서 고난과 역경을 거친 뒤 성장 내지 각성을 얻고 돌아오는 신화-동화의 서사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여행은 <고래사냥>처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거나, < 황진이 >(1986), (일견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연상케 하는) <꿈>(1990)처럼 종교적 깨달음의 추구이기도 하며, 때로는 < 적도의 꽃 >(1983)의 미스터 M(한민우와 더불어 이명세 의 < M >(2007)에서 재활용되는 이름)이 선영의 죽음을 겪고, 한국과 멕시코, 미국으로 계속 이동하는 < 깊고 푸른 밤 >(1984)에서 백호민이 끝내 자신이 추구하던 성공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바와 같이 냉혹한 현실 인식 내지 자기 성찰에 직면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국에 맞는 상황이 다를 뿐이지, 배창호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은 가치관에 대한 탐색의 과정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배창호식 로드 무비 중 가장 낙관적이고 따스한 정감을 지닌 버전이며, 지금에 와서도 눈여겨볼 만 한 보편통시적인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주인공들은 사회의 정상성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주변부를 맴도는 방외인(房外人), 시대의 소수자(minor)들이다. 병태는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고, 춘자는 처음엔 시댁으로 간다고 했지만, 실은 남자에게 속아 이용당한 뒤 홀몸 아닌 몸으로 버려진 미혼모(그녀가 정표로 간직하던 보석은 전당포에서 보통의 유리 조각으로 판명된다.)였으며, 보헤미안 시인 민우는 원래는 교사 출신으로 합창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전복사고로 학생들의 죽음을 겪고는 자취를 감춘 불행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상흔(傷痕)을 안고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연대.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의 사연을 여정이 진행되는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서서히 드러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하고, 각 인물의 자아 찾기, 인간성 회복과 깨달음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여행 중 일행으로서 가족적 연대의식을 형성한 병태 일행은 각자의 소중한 것을 조금씩 희생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자 한다. 춘자는 만삭의 몸임에도 자신이 굶는 대신 병태와 민우에게 자장면을 먹이고, 병태는 경주에 가서 그림을 그릴 물감을 전당포에 맡겨 일행을 위한 돈을 마련한다. 이러한 자기희생과 배려의 행위는 일행을 배불리 먹이고자 호텔 레스토랑에서 속임수를 쓰는 민우의 행동에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무임승차로 역에 붙잡혔던 병태 일행이 서로를 부축하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의 롱테이크, 시골 학교 교실에서 민우의 풍금 연주에 맞춰 정상적인 몸으로 춘자와 춤을 추는 걸 몽상하는 병태의 환상은 불완전한 소수자들이 서로를 돕고 보듬으며 난관을 헤쳐나가는 영화의 인간미 넘치는 감성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민우의 풍금 연주에 맞춰 정상적인 몸으로 춤을 추는 병태와 춘자 이와 같은 인정(人情)의 베풂은 주인공 일행 사이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병태 일행이 여행 중에 만나고 스쳐 지나는 주변 인물들은 때때로 역무원처럼 박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버스를 잘못한 병태를 챙겨주는 우이동 버스 종점의 기사들과 샌드위치 노점 아저씨, 숙직 중 병태 일행을 맞아 잠자리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야식으로 감자를 대접해준 학교 선생님, 일행을 받아들이고 대접해준 환갑 잔칫집(<고래사냥>에처럼 스틸컷으로 전환되는 연출은 훗날 이명세의 <M> 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병태의 물감을 받고서 선선히 돈을 내준 전당포 주인, 비 내리는 날의 이삿짐 트럭, 병태와 춘자를 돕고자 일어선 시외버스 안의 승객들에 이르기까지, 이방인을 환대할 줄 알며, 그들의 여정을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선량함을 품고 등장한다. 소수자에 가해지는 정상적 사회 일반의 차별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인 통속적 피해자 서사와는 사뭇 궤적을 달리하는, 당대의 관객에게 대안적 사회상을 영화적 유토피아로써 제시하고자 하는 배창호식 휴머니즘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여행 중 길과 사람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배창호식 로드무비의 휴머니즘은 경주를 지척에 두고 춘자가 출산하는 헛간 시퀀스에서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비약한다. 이 지점에서 경주로 향하던 병태 일행의 여행은 예수 탄생 직전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기독교 신화의 순례와 치환된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처럼 헛간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춘자의 주위에서 병태와 아이들은 (마치 페데리코 펠리니의 < 카비리아의 밤 >(1957) 엔딩에서 줄리에타 마시나를 둘러싼 광대들처럼) 노래하고 행진한다. 화사한 촛불 조명과 필터 처리로 연출된 병태의 환상과 더불어 이 장면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섬세한 조명 처리를 통해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순간으로 그려진다. 실내의 노란 빛은 차츰 문과 나무 벽 틈 사이를 관통해 안으로 비치는 신비로운 푸르스름한 빛으로 대체되며 일순간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른다. 현실적인 상황으로는 차별받기 십상인 미혼모의 아기는 구세주의 탄생과 동일시되며 축복받는 것이다. 이 아기는 병태 일행과 그들을 도와준 사람들 모두의 인정이 한땀 한땀 모여 빚어낸 사회적 사랑의 결실이다. 아이가 구원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바로 구원의 산물이자 징표이며, 그것으로 세상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신화적 분위기의 춘자의 출산 장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여행은 서울과 경주라는 출발점과 종착점을 갖는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은 실상 실패한 여행이다. 목적지를 향한 여행은 진행되면서 여행자의 신체와 의식, 삶을 변화시키며, 종국에는 목적지가 아닌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토록 선망하던 첨성대에 도착했음에도 (배창호 영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벤치에 앉은 채) 침울해 보이는 병태의 표정은 이러한 여행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정작 중요했던 건 첨성대가 아니라 그에 도달하기까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춘자와 병태는 일행을 떠났던 민우와 다시금 경주에서 재회한다. 지저분한 머리와 수염을 깔끔히 정리하고 다시금 교사로서 풍금을 연주하는 민우의 모습은 “경주에는 왜? 거긴 폐허와 무덤뿐인데”하던 극 초반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그가 여행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본연의 자아와 인간미를 회복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유아기적 순수성을 은유하던 병태의 노란색 모자는 견학을 온 유치원생들 모자의 노란색과 포개지며 봄날의 개나리꽃과 같은 화사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춘자, 병태 그리고 유치원생들 동시대 한국영화계는 열린 영화’의 개념을 주창하며 < 성공시대 >(1988)로 풍자적 리얼리즘의 전위에 섰던 장선우 , < 칠수와 만수 >(1988)로 사회적 리얼리즘을 제시한 박광수 의 등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배창호 감독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에 입각해 특유의 낭만주의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정립했다. 때론 이러한 감독의 성향은 진보적 평자들의 시선에서는 몽상적이며 현실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지 않고 안전한 지점에 안착한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오늘날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정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며 인정이 넘친다. (또한 별개의 논의를 요구하는 바이지만, 여성 캐릭터를 남성에 의한 구원을 해야 하는 대상적 존재로서 그리는, 배창호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일관되는 감독의 여성관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다소 걸리는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돌이켜보면 영화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대상이 각박해졌다는 방증인 동시에, 한국영화의 사회적 상상력이 더 이상 유토피아적 사회상, 공동체와의 유기체적 관계성을 그려낼 수 없을 만큼 빈곤해지고 황폐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배창호 영화의 낭만주의는 암울한 시대상을 포장하고 뒤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상처 입은 당대 사람들의 내면적 치유를 갈망하고,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이 가능한 대안의 사회, 대안적 공동체의 잠재적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감독의 본의에 더욱 근접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장애인(병태), 피해자로 내몰린 여성(춘자),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은 지식인(민우)을 주인공으로 함과 아울러, 언제든지 소수자들을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유쾌한 동료들, ‘도래할 민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30년 넘는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관객에게 다시 발견되고 재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세월호 사건의 증후를 겪는 한편, 페미니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봉인 당한 채 피해자 서사와 디스토피아에 주박된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 있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낭만주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차츰 잊혀가고 죽어가던 어떤 가능성을 일깨울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2018년 9~10월 VOD 기획전 <길 위에서 답을 찾다: 로드무비> 상영작 ->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