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증발
- 감독
- 이마무라 쇼헤이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츠유구치 시게루, 하야가와 요시에, 이마무라 쇼헤이
그곳에는 어른들이 있었다. *** 이 글에는 영화의 플롯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 결말이 알려진 실화에 기반한 이 영화에 이렇다 할 반전은 없다. 오히려 폐쇄공포증이 있거나 2014년과 2022년의 참사의 트라우마로 아파하는 이들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올해 여름, 13 LIVES 를 나는 미국에서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웃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백인 남자 감독이 만든 제3세계의 실화 사건, 심지어 영국 어른들이 태국의 소년들을 구하는 이야기란 말이지… 백인 남성의 자뻑이 가지가지 형태로 부활하고 인종혐오 범죄가 만연하며 낙태가 불법화 되어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 미국의 현 시점에서 백인 구원자 서사를 사용한 재난영화라니. 심지어 감독은 론 하워드, 스콜세지도 제임스 그레이도 아닌 론 하워드란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알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웃을 수 없음을. 쏟아지는 폭우 속에 갇힌 아이들과, 칠흑같이 어두운 물 속을 헤엄치는 동굴 다이버들을 보는 순간 메이는 목에 몇 번이고 자리를 떴다가 화면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나의 삐딱한 시선은 자연 앞에 작아지고 재난 앞에 무력한 모습으로,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어른들의 초라하고 정직한 모습에 바뀌었음을. 2014년과 2022년을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성인이, 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함을. 2018년 태국의 탐루앙 동굴에서 때이른 장마로 13명의 축구팀 소년들과 코치가 동굴에 고립되었던 것은 뉴스의 ‘세계’ 면을 상습적으로 건너뛰는 사람들에게도 어렴풋이 기억날 큰 사건이었다. 축구 연습을 마치고 코치와 함께 동굴로 놀러간 아이들은 갑작스런 폭우에 침수된 동굴 안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태국 정부, 전 세계에서 날아든 자원활동가와 다이버들의 협력으로 코치와 아이들, 이 열세명의 생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어떻게? 아이들이 고립된 지점은 입구에서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구조대원들이 투입되기 시작하였을 때 동굴 내부의 터널은 이미 침수되어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이 미로 같은 터널은 성인의 몸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데다가 날카로운 종유석이 다이버의 신체와 장비를 위협한다. 때로는 몸을 돌릴 수도 없이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는 이 좁디 좁은 터널에는 빛도 공기도 없다. 마치 하루키의 소설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이 터널을 헤엄쳐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는 동굴 다이빙이라는 극도로 특화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자원하여 날아온 동굴 다이버, 존 볼라텐 John Volanthen (콜린 파렐 분) 과 릭 스탠튼 Rick Stanton (비고 모텐슨 분)은 죽었을 거라고 예상했던 아이들을 극적으로 찾아내지만 그들의 얼굴은 아이들을 발견하고 나서 오히려 더 어두워진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지점은 동굴 입구의 물을 뽑아내고 가까스로 설치된 구조 캠프에서도 6시간을 쉬지 않고 헤엄쳐야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산소탱크가 지탱하기 힘든 이 거리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터널을 통해 이동하는 것은 전문 다이버에게도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극한의 위업이다. (구조 작전을 수행하던 태국 다이버 한명은 목숨을 잃었으며 또 다른 구조대원은 상처의 감염으로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살려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목표는, 아이들을 살려서 + 데리고 나온다는 상호충돌적인 두가지 목표로 분리되어 버린다. 영화가 미국에서 출시되었을 때 소수의 평론가들은 실망을 표했다. 헐리우드식 재난 스펙타클을 기대한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드라마와 서스펜스가 부족하며 밋밋한 졸작이라고 평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콜린 파렐과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두 리드 다이버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따랐다. 그러나 이 비판들은 아주 정확하게 영화의 미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구원자" 캐릭터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 영화가 아니라, 구조라는 불가능한 미션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을 수행해 내는 다수의 수행자들을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영화이기에. 그래서일까, 백인남성의 영웅주의와 구원자 서사에 날 선 비판을 가하는 유색인 여성 (women of color) 비평가들과 외국인 평론가들이 영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영화의 미덕은 영웅주의의 증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펙터클과 해피엔딩의 통쾌한 카타르시스도 그와 함께 증발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마음에는 기껏해야 안도감과 함께 무거운 질문들이 남는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매우, 고통스럽다. “The old men found the boys!” 두 영국인 동굴 다이버들이 태국의 해양경찰과 다이버들이 들어가지 못한 junction 9을 지나 소년들을 찾아내어 동굴 밖으로 나오자 관계자들이 소리친다. (숨 쉬기가 어려워 세번이나 쉬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유일하게 빵 터진 장면이다.) “Old men”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직역은 물론 “노인들”이 되겠으나 원어 태국어의 뉘앙스를 살린 한국어는 무엇일까? 늙은이들? 어르신들? 아재들? 아무튼 중년을 지나 초로라고 표현해도 무색할 이 두 백인 남성들은 그냥 이렇게 후줄근하게 축소되어 불린다. 작전 회의를 할 때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커녕 노안 안경을 코끝에 걸쳐 써야 하는 두 중년 남자들은 아이들에게 그닥 애틋한 눈길을 보내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으로 보여지면 동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감독과의 오랜 협력자이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으로 셀룰로이드 필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화적 노스탤지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태국 촬영감독 사욤부 묵디프롬 (Sayombhu Mukdeeprom) 역시 그들을 영웅으로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의 묵묵하고 겸허한 시선은 이 두 ‘노인’을 연기한 쟁쟁한 배우들에게 그럴싸한 클로즈업 한 컷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른이다. 소강상태에 머물던 폭우가 다시 시작되어 동굴에 차오르는 급류를 보고도 담담히 “서두르자”- 한마디 하고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 수 있는. 그리고 그 현장에는 이 다이버들 외에도 너무나 많은 어른들이 있었다. 영화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실제 현장에는 백 여개의 정부기관에서 투입된 수 많은 공무원들, 9백명의 경찰, 2천명의 군인은 물론 구조팀에게 매일 2만끼니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모인 7천명의 자원 활동가가 있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할 수 있도록 지휘를 한 책임자들이 있었다. 첫날부터 밤을 새며 현장을 직접 지휘하는 시장은, 다이버 한명이 죽자 동굴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그 선언을 번복한다. 민간인 수자원 엔지니어는 빗물이 지하수로 변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길을 바꾸는 중책을 자진하여 지휘한다. 마을에도 어른들이 있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논을 침수시키며 물길을 열어 동굴 안에 물이 불어나지 않게 시간을 벌고, 물길을 내기 위한 파이프가 부족하자 대나무를 베어 수관을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을 살려서 + 동굴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어른들은 전혀 다른 무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릭과 존, 두 베테랑 다이버들은 아이들을 산채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동굴 다이버이자 해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취과 의사, 리차드 해리스Richard Harris (죠엘 에저튼 분) 를 호출한다. 해리의 의견도 두 사람과 같다. 6시간의 동굴 다이빙 동안 아이들은 반드시 익사할 것이다. 아이들을 살려서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리는 두 다이버가 입 밖에 내기조차 힘든 방법을 자신에게 제안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소스라친다. 6시간의 다이빙을 견뎌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마취시키고 팔다리를 묶어 한 명씩 데리고 나오는 방법이다. 6시간의 다이빙 동안 아이들이 중간에 깨어나 익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복하여 마취제를 주사해 가며, 공기도 빛도 없는 수중 터널을 통과하는 구출 작전. 동의를 얻지 않는 마취는 엄연히 불법이며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이 방법이 성공할 확률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때 이른 장마비는 시시각각 불어나는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대로 고립되어 반드시 죽는다. 어른들은 촌각을 다투는 이 상황에서, 어쩌면 비윤리적이며,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이 작전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극비리에 진행하기 위해 언론 보도를 중지하고 심지어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작전 중 아이들이 죽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크다는 것을 인지한 당국은 다이버들에게 사면을 보장하고, 다이버들은 자신들의 목숨 또한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 불어난 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그곳에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꿀 수 있는 무거운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어른들이 있었다. 이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구조해 낸 해피엔딩으로 이 결단은 “옳은 결정”이 되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어도 세상이 그들에게 같은 평가를 내려 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니, 분명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이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되, 이 선택이 윤리적으로 완벽한 결정이었을까. 법과 도덕과 의학의 어느 지점을 교차하는 이 무거운 질문에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뒤늦게 구조팀에 합류한 다이버 크리스 쥬월 Chris Jewell (톰 베이트먼 분) 이 동굴의 에어 포켓 안에 길을 잃고 바보처럼 떠 있는 모습이다. 실제 다이버들이 커피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 시각이 아니라 물 속에 매어 놓은 줄의 촉각에 의해 통로를 헤엄쳐 나가던 크리스는 동굴에서 줄을 잃고 길을 잃는다. 어두운 물 안에서 패닉하고, 급기야 자신의 심리 상태를 판단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로 한다. 에어포켓 안에서 아이를 물위로 떠올려 보듬어 안은 채로 동료가 나타날 때까지, 아니 나타나길 바라며 침착하게 기다린다. 침착하게? 아니, 화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떨림이 관객인 내게도 느껴진다. 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 이상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이 타인의 생명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운, 나약하고 정직한 인간의 모습. 어른은 무엇인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를 책임지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이미 망쳐버린 세상을 표류해야 하는 어린 생명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시대에 어른의 의미는 확장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책임의 무게가 자신을 평생 짓누르는 트라우마가 될지라도,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것. 완벽을 기대할 수 없겠지만, 피하지 않고, 오직 최선을 다해 애를 쓰는 것.
윤대원 감독의 < 매미 >는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느 여름밤 서울 남산 소월길에서 성매매를 하는 트랜스젠더 창현의 이야기를 변신의 모티브와 SF 영화의 관습을 활용해서 그린다. 매미가 유충에서 성충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탈피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창현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성을 완벽하게 바꿀 수 있기를 꿈꾼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와의 만남을 다룬 SF 영화처럼 이 작품은 창현의 몸으로 타자가 침입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충격적인 변화에 대해 다룬다. 창현의 몸은 창현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창현과 어떤 남성을 주요 등장인물로 활용하는 가운데 둘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남성은 유사-탐정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흡사 범죄 현장에서 증발해버린 사건의 당사자를 쫓는 탐정처럼 서울 남산의 순환도로를 배회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남성의 시선에 동기화된 카메라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를 위장막 삼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창현은 도시적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모험과 위험을 맞닥뜨리는 여느 멜로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닮았다. 그는 자신처럼 거리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트랜스젠더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거나 그들 중 누군가와 날이 선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창현은 남성을 만나 모종의 거래를 시도한다. 그들의 은밀한 거래는 대화, 언쟁, 성교,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남성은 창현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 창현은 남성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그가 자신의 눈앞에 사라지기를 바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적 담화를 구축하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에 대한 해독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관습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이원적 세계의 견고함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젠더적 이분법이 하나의 규범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성적 정체성은 주체의 자율적인 선택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어떤 인칭, 어떤 주체, 어떤 기관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하나의 몸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언뜻 보면, <매미> 또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명확한 이원적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을 다룬 도식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영화 또한 기존의 여러 내러티브 중심적인 영화들이 주인공과 그것에 대립하는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서서히 봉합해나가는 그런 관습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특이하기보다는 전형적이고, 갈등은 복잡하기보다는 단순하고, 결말은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영화적 관습에 기대어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작품은 그저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서 소외된 소수자의 정체성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지를 의미화하거나 그것을 서사에 종속시키는 방식 대신 이미지를 하나의 식별 불가능한 형상으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의미 체계를 무너뜨린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은 여러 시각적 이미지가 한 화면 속에서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장면을 통해서 의미의 사슬에 포획되지 않는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영화는 남산 순환도로와 그곳을 통과하고 있는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의 동선과 겹치는 남성의 시선을 수평축으로 설정한다. 이 가상의 수평선들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와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통해 형성된 수직축과 겹쳐서 가상의 격자를 만든다. 그것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남성의 욕망, 젠더적 구분을 초월하려는 트랜스젠더의 욕망, 그리고 음성적인 거래를 통해 법의 경계를 가로지르려는 소수자의 욕망이 교차한 결과이다.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는 그 단어를 구성하는 접두사 ‘트랜스(trans)’가 의미하는 초월 내지는 횡단을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의미 체계에 포착되지 않는 모호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은 외형적으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다. 어두운 밤에 가로수 뒤편에 몸을 은폐하고 있기에 그 형태 자체가 흐릿하거나 어둡게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외견상 여성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아직 신체적으로 여성의 생식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남성도 그렇다고 여성도 아닌 중간자에 가까우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사회적 체계 속에서 자리를 잃은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둠이라는 비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에 등장하는 하나의 몸으로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하나의 몸체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지배적인 힘이 아니라 그 몸체가 어떤 관계 속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이다. 모든 대상의 몸은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어느 배치물 가운데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마치 <매미>의 창현이 어느 여름밤 남산 소월길에서 만난 한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몸과 그것에 깃든 정체성을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창현의 몸은 저항의 장소, 파괴의 장소, 창조의 장소이다. 만약 창현을 신화적 영웅의 비범함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인간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규범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이전에 그런 규범을 무효화시키고 더 나아가 스스로 새로운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미>는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와 그것의 변형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이미지의 형상적 변화를 통해서 세속적인 대상들 가운데서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작품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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