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지니어스
- 감독
- 닉 브루노, 트로이 콴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윌 스미스, 톰 홀랜드, 라시다 존스, 카렌 길리안, 벤 멘델슨, DJ 칼리드
현재의 거울 대학교 졸업을 앞둔, 통상적인 교육의 끝자락에서 돌이켜 본다.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다르게 살 수 있을까. < 디어 마이 지니어스 >( 구윤주 , 2020)는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감독이 교육의 시간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후회되는 부분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곰곰이 들여다보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통과해버렸다는 것이다. 감독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없지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어린 동생 윤영이 있다. 감독은 어머니의 관리하에 촘촘하게 짜인 윤영의 일상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위한 답을 찾고자 한다. 영재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고 홍보되었지만, 정작 영재 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머니의 교육열은 남다르다. 어머니는 한 달에 두 번 도서관에 출근해 딸이 읽을 만한 책을 선별하고 한 번에 대출할 수 있는 최대 권수인 26권을 꽉꽉 채워 대출한다. 책을 운반하기 위해 장 볼 때 쓰는 카트는 필수다. 미리 비워둔 책장 속에 26권의 책을 꽂아두고 딸이 하나씩 빼 읽을 것을 상상하는 기쁨은 욱신거리는 팔목 통증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꼼꼼하고 성실한 매니저인 어머니는 매번 딸이 돌파한 책의 권수와 제목을 노트에 기록해왔고 지금 막 기록된 숫자가 7,000을 넘었다. 영어 학원에서 주최하는 1만 원의 상금이 걸린 100단어 영어 콘테스트를 위해 우는 딸을 달래가며 늦은 시간까지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유난스럽기는 해도 어딘가 소박하게 느껴져 정감이 갈 정도다. 영재가 되고 싶다는 윤영의 소망도 대책 없이 솔직하다. 과거 영재 시험을 통과한 감독은 동생에게 ‘영재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진실을 누설한다. 그렇다고 해도 영재 시험에 통과하고 싶은 윤영의 소망은 꺾이지 않는다. 윤영이 영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언가 높아진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재는 허상이지만, 그 허상이 주는 열매는 실재한다. 높은 교육열을 비판하기 이전에 성적이 곧 정체성이 되는 학생의 시간에서 학업 성취의 기쁨은 쉬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디어 마이 지니어스>는 교육의 당사자로서 가족을 비판적으로 보진 않는다. 교육 현실은 오직 가족을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결과적으로 교육을 비판한다고도 보기 힘들다. 남은 건 어머니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고 어린 동생을 구하고 싶은 감독의 욕망 그 자체다. 이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 사이에 놓인 감독의 위치 때문이고, 실패한 원인 역시 그 때문이다. 감독은 종종 어머니에 대한 냉정을 잃는다. 특히 어머니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깔끔하게 청소된 집을 보는 것과 윤영의 하루가 계획대로 실행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요즘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아 속상함을 토로할 때 감독은 어머니보다 먼저 눈물을 보인다.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감독의 눈물은 그런 딸을 보는 어머니의 표정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교육의 당사자로서의 어머니와 윤영이 아닌, 이들의 눈에 비친 감독의 모습이다. 감독은 질문으로 무장한 채 호기롭게 동생을 대하지만, ‘도대체 이걸 왜 찍고 있냐’와 같은 동생의 뼈 때리는 역질문에 종종 맞닥뜨린다. 애초에 윤영은 감독에게 ‘아주아주 재미있게 찍어 달라’고 주문하며 아무렇지 않게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바 있다. 감독은 윤영의 일기장 속에 어느 날 ‘굶주린 독수리’였다가 다른 날 ‘월트 디즈니’도 된 자신을 발견하며 감정의 널을 뛴다. 이쯤 되면 조련당하는 쪽은 윤영이 아닌 감독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카메라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찍는 딸과 언니의 모습을 비춰낸다. 인생의 세 시기를 상징하는 모녀는 서로 과거를 투사하는 선형적인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가 향해가는 곳은 각자의 현재를 찾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두고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은 이들은 서로의 현재를 비추며 각자 저마다의 출발선에 선 사람으로 존재한다. 감독은 마치 하나의 쌍처럼 종종 자신을 어린 동생의 옆에 나란히 세운다. 함께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하거나 카메라 앞에서 양팔을 물결치는 장난스러운 춤도 추며 둘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그리고자 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동생은 ‘나는 구윤영이 될 거야’라고 답했고, 그 의미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라 똑 부러지게 정의한다. 그 대답은 영화가 다다른 장소가 어디인가를 보여준다. 그곳은 내가 나를 비추며, 내가 다시 내가 되는 자기 증식의 세계다. 가족을 통해 교육 현실을 찍고자 했으나 돌고 돌아 나를 성찰하게 되는 무한의 미로. 영화는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답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단면을 마주할 넉넉한 표면을 제시한다. 마침내 우리는 교육을 통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원점과 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
2017년은 영화를 보는 게 그렇게까지 즐거운 해는 아니었다. 좋은 영화는 계속 나왔고 내가 놓친 영화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슈퍼히어로와 (김혜리 기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암청색 양복을 입은 조폭들로 구성된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주류 영화들이 만드는 풍경은 지겨웠고 종종 숨이 막혔다. 사실 올해는 좋아하는 영화보다 싫어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내 리스트는 언제나처럼 조금 랜덤이다. 아마 평론가들은 드니 빌뇌브가 만든 두 편의 SF 영화 중 < 컨택트 Arrival >보다 < 블레이드 러너 > 속편을 더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영화가 SF로서 매우 게을렀다고 생각하고, 다소 할리우드적으로 통속화되었을지 몰라도 <컨택트>의 성취가 더 크다고 본다. 무엇보다 <컨택트>가 더 훌륭한 주인공을 갖고 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에 질렸다고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싫어하는 건 대단치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부풀어진 슈퍼히어로 유니버스들이다. 마블과 DC 팬들은 제발 전쟁에서 나를 빼 달라. < 로건 >을 뽑은 것은 이 영화가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해있으면서 그 우주의 일관성이나 논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마구 질주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 옥자 >를 SF보다는 <내셔널 벨벳>과 같은 ‘소녀와 동물’을 다룬 전통적인 가족영화의 연장선에서 보았고 그 절절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 로우 >는 지금까지 호러 영화가 여성 감독을 외면해왔던 게 얼마나 역사적으로 끔찍한 낭비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사례 중 하나이다. 다큐멘터리를 두 개 뽑았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준다. < 옵티그래프 >가 사적 다큐멘터리의 작은 틀을 통해 그려 보이는 한국 현대사와 < 택시운전사 >와 같은 대작 영화들이 그려내는 지루한 풍경을 비교해보라. < 땐뽀걸즈 >의 생생한 주인공들에 비하면 비슷한 상황을 다룬 한국 학원물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식상한가. 올해 뽑은 두 편의 퀴어 영화인 < 꿈의 제인 >과 < 판타스틱 우먼 >은 모두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주인공이거나 타이틀롤이다.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彼らが本気で編むときは >와 < 분장 >도 주목할만한 영화였다. 20여 년 전이라면 식상한 방식으로 다루어졌을 주인공들이 조잡한 퀴어베이팅과 위장한 BL 사이에서 빛나고 있다. (< 메소드 >의 욕을 길게 하고 싶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리스트에서 남은 건 < 배드 지니어스 >와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대중적 장르물이고 놀랄 만큼 정통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대중영화가 도전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보다 드물어지고 있는 이 시기에 두 작품은 보다 많이 감상되고 깊이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 영화의 팬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는 이 국내 제목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잠재적인 한국 관객들에게 < 칠월과 안생 七月與安生 >이라는 제목이 와 닿지 않을 거라는 걱정 또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칠월과 안생이라는 두 여자의 14년에 걸친 우정의 이야기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자 둘은 모두 가명이라는 남자를 좋아한다. 갈등이 생긴다. 이 상황은 익숙하기 짝이 없다. 일단 4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스럽고, 비슷한 내용을 다룬 국내 연속극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다른 삼각관계 영화와 비교했을 때 가장 튀는 것은 이 관계의 꼭짓점을 이루는 남자 가명의 투명함이다. 달리기가 취미인 멀끔하게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이 인물에 대해 끝까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두 주인공이 가명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감정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다. 칠월과 안생은 끊임없이 가명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가명보다는 가명으로 인해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 자기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는 두 주인공의 삶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등장하는 도구적 존재이다. 이렇게 되면 우린 단짝 친구의 남자친구에 대한 안생의 집착이 과연 어떤 종류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둘은 그렇게 오래 알지도 않았고 만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멀끔하게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건 좋은 가치지만 그만큼 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안생에게 가명의 가장 큰 가치는 단 하나, 단짝 친구 칠월의 남자친구라는 것이다. 안생은 칠월의 모든 욕망을 공유하기를 원한다. 가명은 칠월과 자신을 연결하는 또 다른 다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를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수줍었던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둘의 우정을 연애처럼 그린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온갖 일들을 겪어도 서로에 대한 둘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상수이며 그들은 아무리 험악한 단계에 접어들어도 이를 당연히 여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지독한 욕은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어!”이다. 요새, 특히 모 시상식장에서 아이유가 자신의 소울메이트 유인나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뒤로 SNS에 자주 등장하는 “A와 B가 친구라면 나는 친구가 없어!”라는 문장은 칠월과 안생의 이야기에도 그럴싸하게 잘 맞는다. 이들의 격정적인 우정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편안한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의 친구들이 모두 이렇다면 삶은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정이 모두 같은 종류여야 하는가. 우정 역시 사랑이지 않은가? 아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정은 처음 겪는 사랑의 형태이고 이후 겪을 모든 사랑의 원형이 아닌가? 여러분의 연애 감정이 언제나 우정보다 위였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언제나 연애 대상이었나? 칠월과 안생의 이야기를 우정으로 위장한 로맨스 영화로 보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분명 이들에겐 서로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들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로맨스 이야기, 특히 이성애 로맨스와는 다른 길을 간다.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는 삶의 선택, 조금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동아시아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과 그 조건의 돌파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칠월과 안생은 언제나 상대방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데, 늘 친구가 하나의 선택을 하느라 놓친 삶의 가능성을 커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교환이 가능하다. 칠월과 안생이라는 이름을 보라. 영화는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소녀에게 安生이라는 이름을, 모범생이며 어른이 된 뒤에도 태어난 도시를 거의 떠난 적 없는 소녀에게 七月이라는 이름을 준다. 이는 초반부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의 성격이 생각만큼 당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캐릭터 설정은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가, 우리가 이성애 로맨스를 통해 익숙해진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틀에서 전개되는 러브 스토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안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되기 위해 그 누군가가 포기한 길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러브 스토리의 틀은 이성애 로맨스와는 맞지 않는다. 이는 같은 욕망을 갖고 같은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만약 안생이 남자였다면 이 이야기는 아귀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 얄미웠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성애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제한했고 이 단어가 포함되는 이야기를 편협하게 장르화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랑의 행위와 이야기가 그 장르의 울타리 밖에 버려지거나 울타리 안의 익숙한 몇몇 공식에 맞추어 재해석되게 된다.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의 가장 큰 가치는 이 울타리를 대놓고 무시하면서도 관객들을 거의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는 러브 스토리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칠월과 안생이 그렇듯 우리에게 들려줄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럼 아이유인나는? 남의 사생활이니 우리가 뭐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도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