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낚시]지렁이 꿰기
- 제작년도
- 2010
* 사진: 필자 제공 연출배경 < 주희에게 >(2025)는 세 명의 연출( 장주희 , 부성필 , 김성환 ) 중 두 명이 출연자로 등장하며,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복잡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 여성(장주희 감독)이 자신이 20대에 ‘혈액암’을 겪었음을 고백하며 시작된다. 사회로 복귀를 하게 된 무렵 만나게 된 동년배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부성필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카메라의 시선은 그가 기록하는 장애인(선철규)의 번지점프 도전기에서부터, 2014년에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전인숙)의 삶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영화는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지표에 흐르고 있는 ‘고통’과 ‘연결’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에 의해 기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전하는 목소리는 혈액암과 가정폭력을 겪은 출연자이자, 연출인 여성, 주희(나)의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여성의 삶, 세월호 유가족의 진상규명, 와상장애인의 번지점프 도전기, 제주 4·3 유가족 3세대의 삶이 연결된 복잡한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코 복잡한 이야기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것은 30대 여성이 자신의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목격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고통 속으로 녹아들기 내가 목격한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본다’라는 수동적 태도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연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관찰자에서 화자로 거듭난다는 것은 ‘목격’이라는 경험이 나를 변화시킨 근본적인 이유이며, 이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로, 적극적으로 기록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나는 영화 속에서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혈액암 환자’라는, 한 공간에 결박된 존재로서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목격자이며, 이 고정된 시선은 앞으로 진행될 영화 안에서 변화가 예상될 수밖에 없는 ‘화자’의 자리로 안착한다. 이 영화가 담아낸 화자의 출발점은,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독한 무력감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나는 오랫동안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 일이 없는 듯 살아왔다. 사회는 가정폭력을 일상의 예외로서 묵인하고,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워버린다. 우리는 304명의 승객이 탄 배가 가라앉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보다’라는 수동적인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보기 전과 본 이후의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주희’가 장애인자립센터에서 만난 장애여성 ‘은미’는 시설에서 선철규의 탈시설 다큐멘터리 < 지렁이 꿈틀 >(2010)을 보았고, 그 이후로 은미의 세계는 장애인 수용 시설에서 시설 밖으로 확장되었다. 나 역시 다큐멘터리를 통해 거리에서 투쟁하는 어떤 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이가 거리에서 흘린 눈물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집안에서 흘리는 눈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목격은 적극적으로 ‘나’를 그 프레임 속의 대상과 겹치며, 그 속에 나를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어진다. 나에게 ‘본다’는 행위는 사건을 목격한 일시적 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내가 목격한 사건이 나의 몸을 경유하여, 이전과 다른 몸을 만들어나간 과정이다. ‘본다’는 능동적 행위의 결과는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고, 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결과는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주희(나)’에게 ‘선철규(탈시설 장애인)’와 ‘전인숙(세월호 유가족 활동가)’의 존재는 자신의 문제에 온전히 투신하는 사람들, 즉 보이는 대상으로서 스스로 살아있는 이야기의 주체가 된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주체로서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희에게>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로 인해 영화 속 ‘나(가정폭력 피해자, 암 환자)’의 이야기는 세 인물(다큐멘터리 감독, 장애인, 세월호 유가족)과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맺으며 단단하게 얽혀 들어간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보이는 대상을 거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for us and In-itself) 가시적인 것들의 여정으로써, 우리는 봄을 통해 우리 내부로부터 발현하는 타인의 살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경험한다.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몰려오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 속으로 ‘녹아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재난의 세계는 우리의 눈앞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다.” - 최종철, 『재난의 예술』, 그린비, 2024, 24쪽. 타인의 고통과 내 안의 슬픔이 하나의 ‘살’로 섞여 드는 이 감각은, 프레임 너머의 비극을 지켜보는 것에 머물던 나를 기어이 말하는 주체로 밀어 올리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이 내 안으로 밀려와 나를 바꾸어놓았다는 이 복잡한 연결고리를 과연 온전히 설득시킬수 있을까. 만약 관객들에게 이 예민한 호흡을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목격한 것을 말하는 ‘화자’로서의 내 존재 자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목격자가 화자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라면, 목격자가 화자가 된다는 이 단순한 전개는 결국 ‘주희’의 ‘성장 서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본 것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관객에게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장과 변화는 필연적으로 ‘미성숙’을 전제한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환자’라는 정체성에 ‘미성숙’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성립되는 이 서사 구조 안에서는, 어떤 결핍이 과거의 나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내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친절한 전달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목격의 대가로서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하는 벽에 맞닥뜨린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기묘한 불쾌감과 함께 스스로에 대해 또다시 질문하게 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성장은 과연 필수적인 것인가? 고통은 늘 어떠한 성찰을 수반해야만 하는가? 나의 고백이 도리어 가정폭력 피해에 대한 인상을 수동적이고 고정된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여성의 성장 서사를 ‘피해의 극복’이나 ‘수동성에서의 탈피’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로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위치에 자리매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은 내 존재가 그저 고통의 ‘친절한 전달자’로 머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의 바깥에서 그 안의 ‘결핍된 존재’인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고통을 전시하는 방식에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태도로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분리해 바라보는 이 낯선 응시는, 곧 목격하기 전의 나, 그리고 목격한 후의 나, 그리고 그걸 되새기며 말하는 현재의 나라는 여러 층위로 인해 영화 안에서 인물 간의 여러 시간을 교차시킨다. 기록의 시간, 투쟁의 시간, 깨달음과 과거로의 회귀… 영화 안의 이 여러 시간 속에서 나의 위치는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깨닫는, 자책하는, 스스로 질문하는, 통찰하는 여러 시점에 놓인다. 이로 인해 ‘주희’의 내면과 인식의 변화는 영화의 타임라인을 따라 유동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본다는 것’의 윤리와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수많은 질문과 의심들은, 영화가 상영되고 다양한 관객들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온전한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왜 지금 괜찮은지 묻는 이들에게 상영을 통해 관객분들을 만나다 보면 장애인의 번지점프에 대해, 세월호 진상규명의 방향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10년에 가까운 긴 기록이 ‘삶’이라는 흐름의 속도와 동일하게 압축되어 있을 뿐, 어떤 의도적인 결말을 관객에게 제시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답변을 들은 관객들로부터 나는 그들이 안도하기도 하고, 더더욱 연대하겠다고 다짐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중 어떤 관객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가정폭력은 트라우마가 심하기 때문에 영영 치유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질문은 마치 영화 밖, 현재의 나에게 “왜 지금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있는지”에 대해 묻는 날카로운 의문 같았다. 그 의문 앞에서 나는 영화 안에서 피해자로서 관객에게 제대로 된 공감과 연결 지점을 설명해내지 못한 것인지 자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런 우려와 불안의 지점을 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관객분이 내비친 날카로움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불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관객분이 제시한 솔직한 의문 속에서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오직 폭력에 대한 응징과 가해자 처벌이라는 명확하고 클리셰적인 결말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 서사의 완결이 지닌 본질은, 사회와 국가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제도를 통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언제나 미완으로 남을 뿐이다. 국가폭력을 비롯한 ‘피해자’라는 정체성과 그 삶의 맥락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제도적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 한,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시선과 인상은 언제까지나 머릿속에 가득 찬 답답함과 같은 브레인 포그 현상처럼 뿌옇고 불명확한 인상만을 남겨둔 채 방치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개 속을 우연히 뚫고 나왔을 뿐임에도, 나는 그것이 과연 ‘성장’이 될 수 있는지에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아직도 내가 ‘성장’했다는 표현에 대해, 그리고 이 영화 속 나를 ‘성장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성장한 주희’이자, 30대 여성으로서, 이 불평등한 세계 속에 굴하지 않는 동등한 스피커(화자)가 되어 주어 고맙다는 말로 들리는 착각과 환청 속에서, 나는 ‘여성’ 화자로서의 나의 위치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고 인정하는 분열적 상태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분열이야말로 ‘존재의 바로 보기’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를 만들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시 내릴 수 있었다. 나를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했던 것, 변화와 성장을 증명해야 했던 것으로 비롯된 나의 불편감에 대한 답을 말이다. 나는 비로소 내 존재 자체의 당혹스러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치의 반복을 넘어, 당신의 존재가 구원이 될 때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나 자신을 비롯해 나의 고통을 목격한 모든 이들의 당혹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가정폭력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몰랐다’라는 반응으로부터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감각을 맞닥뜨려야 했던 그 순간 속에서 알 수 있었다. 결핍된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수치심을 동반하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지독한 부정의 시선과 언어들 속에서, 드러내기와 수치의 반복 속에서 나와 당신의 존재가 결국 우리 모두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선언할 수 있는 강력한 힘, 나는 그 힘이 바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다큐-코멘터리: 프레임 밖의 문장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장주희(여성인권활동가, 영화감독) l 장애인 대상 미디어 교육과 여성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며 < 장애인, 미디어, 교육 >(2022), <주희에게>(2025)를 만들었다.
156분의 러닝 타임 동안 어둠의 한가운데로 인간을 몰아넣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 곡성 >(2016)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라스트 신의 페이드아웃으로 종결된다. < 추격자 >(2008)와 < 황해 >(2010)로 이어지는 전작에서와 같이 나홍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괴적이 되어가는 서사를 통해 능숙하게 통제된 폭력 장면들을 단계적으로 제공한다. 기이하게 뒤틀린 내러티브와 감정의 격동을 야기하는 대담한 묘사를 내장한 이 영화는 물과 나무, 약초, 동물, 산으로 둘러싸인 전라남도의 작은 마을 곡성을 미스터리에 휩싸이게 한다. <곡성>의 줄거리는 뇌우, 번개, 안개, 악몽, 좀비, 퇴마사,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내 심지어 죽은 사슴의 시체를 먹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조형되는 공포의 확장에 의존한다. 주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고요한 마을에서 끔찍한 죽음이 발생하고 그 뒤를 좇아 기이한 사건들이 공동체를 압박한다. 동네 경찰이자 아버지인 종구(곽도원)가 미스터리를 조사하는 탐정 역할을 맡는데, 이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시골 경찰이 광기와 착란의 상태로 변질되는 과정이 서사의 주조를 이룬다. 이 병증을 퍼뜨리고 있는 용의자는 깊은 산중에 사는 과묵한 일본인(쿠니무라 준)이다. 외지인으로 불리는 그가 불길한 기운을 몰고 오면서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에게도 발진이 돋고 험악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종구는 아버지의 본능이 발동하면서 공격적이고 위협적으로 변한다. 어린 소녀의 천진함에 반해 선과 악의 공존은 인간의 본성이며 감정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비극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소재이다. < 엑소시스트 >(1973)와 < 캐리 >(1976), < 유전 >(2018) 같은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악령의 공세는 어린 소녀를 향할 때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 속담, 신념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불편함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무기력한 느낌을 전하는, 반복되는 롱 쇼트가 암시하듯이 악령은 공동체 곳곳에 그윽하게 도사리고 있다. 나홍진의 전작들이 도시 환경의 조건을 활용한 착란적인 편집을 구사한 것에 비해, 원시적인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곡성>은 쇼트의 지속시간을 늘림(퇴마의식을 묘사하는 신들)으로써 공포의 시간을 부채질한다. 공포가 퍼지고, 스며들면서 도입부에 존재했던 어두운 유머를 빠르게 쓸어버리면서 나홍진은 관객을 마지막 동굴의 공포로 인도하기 위해 그럴듯한 개연성을 만든다. 믿음에 대한 성찰로 장식된 이 무자비한 어둠의 움직임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영화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나홍진은 그가 다루는 영화의 언어 규범을 숙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원하는 곳으로 안내하거나 이야기를 조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돌리는 데 있어 능숙함을 보여준다. 마을을 휩쓴 테러의 원인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봉인되기 때문에 종구의 탐색과 구조 노력이 무너지고 마을 사람들은 광기와 영적 위기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관객은 종구와 마찬가지로 길을 잃고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딜레마를 감수해야만 한다. 당황한 인물들 역시 세상이 점진적으로 사악해져가는 이유에 대해 해명할 길이 없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나홍진의 영화는 냉정하게 답한다. 이유는 없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잇감이고, 악은 상황의 문제일 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내리는 폭우도 공포와 유혈 사태를 씻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함을 동반한 채 악마가 숨어 있는 지하 통로를 배경으로 하는 피날레는 타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곡성>이 던지는 질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영적인 차원에 놓여 있다. 악마의 확연한 존재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있는가? 신성에 대한 의문과 확신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 영화는 따라서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구축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 스토리 안에서 나홍진은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사실과 증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애쓴다. 외지인의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은 이와 관련된다. 일본인으로 설정된 외지인의 정신은 너무 괴물적이어서 그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국가 혹은 민족적 경계를 흐리는 이 인물은, 순박한 무지렁이들의 세계를 교란한다. 일본인이 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뿌리 깊은 위기의식을 소환한다. 컨텍스트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만연한 악의 본성은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제불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보안관인 종구는 가족, 공동체, 민족의 수호자로서 정당한 이유가 없이 횡행하는 악마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심리 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외지인이 기거하는 어둡고 허름한 집을 묘사하는 두 개의 신이다. 종구와 그의 동료 경찰 성복(손강국)이 처음 외지인의 집을 탐문할 때 카메라는 안에서 방으로 향하는 종구를 찍고 있다. 조류도감과 음화 등이 발견되는 이 날의 탐사에서 종구는 찢어진 창호지에 난 구멍 사이로 불이 켜진 신당을 훔쳐보다 돌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진입한다. 종구의 액션이 진행되는 동안 성복의 수색이 교차편집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방 안의 가려진 장소를 들춰내기 위해 문을 여는 성복의 액션과 신당으로 들어서는 종구의 액션이 평행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두 인물은 각자의 시점으로 밀실의 풍경을 본다. 기괴한 형상의 조형물과 무당 의식용 밧줄, 향로, 흑백 사진이 붙은 신당과 죽음의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은 사진들의 몽타주를 카메라가 훑는 동안 카톨릭 부제 양이삼(김도윤)의 발을 물고 짖어대는 맹견의 흉포함이 또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며 나란히 놓인다. 개에 물려 바지가 뜯겨나가는 소동은 마을에서 벌어진 죽음의 이미지를 촬영한 사진들의 몽타주와 편집된다. 삼분할 액션을 나열한 이미지들의 조합은 연쇄적인 죽음의 모티프를 환기하면서 신성(神聖)의 침탈과 그 대가를 형상화한다. 외지인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방문은 동일한 궤적으로 진행되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조망된다. 종구와 양이삼, 두 사람만 등장하는 이 신에서 카메라는 종구의 위치에서 방을 찍는다. 그가 처음 방으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낡은 상 위에 삶은 닭발이다. 극단적으로 낮아진 위치에서 찍은 로우 앵글의 측면 쇼트는 벗겨진 벽지와 서까래를 배경으로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종구의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방 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찢어진 신문지가 너덜너덜 붙은 벽을 배경으로 시효를 다한 향로와 초들이 놓인 신당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마침내 종구가 보는 것을 드러내는데 완전히 꺼진 제단은 그 위에 소용돌이치는 증오와 처벌의 앞날을 예고한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삼의 바지를 문 맹견이 종구를 공격하기 위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응징이 시작된다. 촬영감독 홍경표는 이때 혼돈의 우주 속 인물의 고립을 강조하고 사건의 임의성을 강조하는 수평적인 와이드 쇼트를 별안간 보여준다. 이성을 상실한 종구가 귀신들린 집 안에서 맹견과 사투를 벌일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모습은 바스트 쇼트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후퇴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거리로 퇴각한 카메라는 익명의 눈을 암시하듯 느리게 앞으로 이동한다. 이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장소 간의 교차편집은 신체의 정신적 혼란과 그 병이 즉각적인 공간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외지인의 방은 심리 지리학의 시각적 구현이다. 벗겨진 벽지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흉가가 숨겨진 정신병의 공간화라면 곡성은 그 증상이 발현되는 곳이다. 건축학적으로 이 집은 바깥에서는 그리 눈에 띄는 공간이 아니다. 친숙하고 무해해 보이는 집은 표면은 깊고 불길한 내부 방을 숨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곡성>의 미장센은 경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여러 겹의 레이어와 비밀을 숨긴 공간을 설정한다. 나홍진에게 이런 설정은 익숙한 것이다. 데뷔작 <추격자>에서 그는 연쇄살인마의 음울한 내면을 시각화한 집을 <곡성>의 그것과 동일한 형상으로 구조화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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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연출한 선왕 시해의 비밀이 담긴 극중극 《곤자고의 살인》이 나온다. 햄릿은 공연을 위해 극단원들에게 연기를 지도한다. 햄릿: 부탁하건대 그 대사를 읊을 때 내가 보여줬던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고함에 과장에 야단법석을 떨 바에는 차라리 장사꾼에게 배역을 맡기겠어. 손놀림도 허공을 휘젓지 말고 점잖게 움직여야 해. 폭풍처럼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평정을 잃어서는 안되네. (…)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서도 곤란해. 각자 맡은 역할에 신중을 기하고 행동에 어울리는 말을 하고,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하게.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알겠나? 햄릿이 연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들은 16세기 영국의 연기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당시 연기술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그리고 추구하는 연기술을 집약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에 작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것을 작가의 자기반영적 기법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자.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는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관찰자이므로 화폭에서 모델이 될 수 없는 작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한 것은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의사 출신인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작품마다 의사 역을 넣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주인공 에두아르를 「위폐범들」을 집필하는 소설가로 설정한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위폐범들」의 창작에 관한 구상을 기록하는데, 여기서 수첩의 내용은 지드의 실제 작품일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 작가의 견해를 대변하거나, 작품 속에 작품 제작에 관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 모두 자기반영적 기법이다. 이는 작품 밖 작가 차원의 영역을 작품 안에 개입시키면서 작품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은 작품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모호한 상태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즉, 작품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작품을 견인해 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잘 드러난다. 초창기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영화 안에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욕망의 법칙>에서 계산원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에서는 주인공들이 보는 TV속의 배우로 나타나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다가 작품에 등장한 감독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각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작품에 영화감독 역을 등장시킨다. <욕망의 법칙>, < 욕망의 낮과 밤 >(원제: 나를 묶어줘!)에서는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정을 가진 감독으로, < 나쁜 교육 >에서는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그렸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 >는 감독 역할에 알모도바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기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 扮)가 시각장애인이 된 다음에 온전히 음성으로만 듣고 편집한 장면을 돌려보는 앤딩의 대사는 마음을 울린다.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거야. 비록 앞이 안 보여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해.” 2020년 작 < 페인 앤 글로리 >는 알모도바르가 자기반영적 기법을 집약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두고 “나의 70년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扮)의 그림자를 알모도바르의 그림자로 배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자전적 영화임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는 배우 반데라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트를 재현했다. 심지어 미장센으로 사용된 살바도르의 부모님의 사진을 자신의 부모님 사진으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감독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나 어머니와의 관계, 건강상태 역시 알려진 사실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1) 2) 1)<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살바도르의 그림자는 알모도바르이다. 2)<페인 앤 글로리> 살바도르의 어머니 방에 있는 가족사진은 알바도르의 실제 부모님(안토니오 알모도바르와 프란체스카 카바예로)의 사진이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현재,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꿈, 그리고 첫사랑에 관해 고백하는 연극이라는 세 가지 구조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척추 융합 수술 후유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지를 상실한 휴직상태의 영화감독이다. 32년 전 개봉한 자신의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 한 기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상영과 GV를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이후 인연을 끊은 <맛>의 주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扮)와 3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알베르토로 인해 접하게 된 헤로인은 살바도르를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살바도르에게 영화적 감수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카톨릭 학교는 무신론자가 되게 하는, 미장이 형 에두아르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하는 계기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꿈에서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살바도르의 모든 원천이자 심연의 일부인 것이다. 살바도르의 자전적 이야기인 극중극 《중독》은 살바도르의 청년 시절, 동성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모노로그 형식으로 전하는 연극이다. 살바로드의 집에 방문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집필한 《중독》을 읽게 되고 매료되어 연극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고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하나, 결국 알베르토의 뜻대로 대본을 넘겨주며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살바도르는 연극 무대와 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살바도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게 좋겠어. 스크린 하나, 의자 하나.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의자에 앉아. 알베르토: 팔다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거든! 살바도르: 수정하고 나서 좀 멜로드라마틱 해졌어. 알베르토: 걱정마, 내 전공이 멜로드라마니까. 멕시코에 있었던 게 도움이 되겠네. 살바도르: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감정을 좀 죽여야돼. 감정을 조절해. 울지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 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알베르토: 뽀뽀해줘야겠다. (…)이번엔 셰익스피어도, 체호프도, 로르카도 아냐. 너를 연기하는 거야. 살바도르: 이상하게 하면 내 기분이 엉망이 될 거야. 잘 하면 훨씬 더 엉망이겠지. 《중독》에서 자신의 역을 맡은 알베르토에게 원작자로서 지시사항을 전하는 부분이다. 살바도르의 연극에 관한 견해는 곧 알모도바르의 견해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 것처럼, 알모바르도는 자전적 영화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내비치고 있다. 《중독》 무대에는 살바도르의 조언대로 스크린을 하나 놓았는데 그것을 통해 어린 시절 살바도르가 살던 동네, 보던 영화, 연인과 갔던 추억의 장소 등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비춘다. 이는 실제 알모도바르의 장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현재의 살바로드, 꿈속 어린 살바도르, 연극의 알베르토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게 한다. 관객은 세 가지 버전의 알모도바르를 중첩시키면서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를 상기하게 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독립적이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정수는 앤딩 장면을 통해 구축된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한 살바도르는 다시 꿈을 꾸고, 영화 초반 등장한 기차역 꿈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줌 아웃 되면 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스텝과 바닥의 조명판이 드러나고, 살바로드가 컷을 한다. 스텝이 등장해 마지막 슬레이트를 치는데, 슬레이트에 적힌 영화 제목이 <첫 번째 열망>이다. 이 장면은 살바도르가 영화감독으로 제기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준 모든 내러티브가 촬영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게 한다. 즉,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수미상관의 구조를 갖춤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층위가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실제를 바탕으로, 영화제작 과정, 영화적 현실, 꿈 그리고 연극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영화의 무한 순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총 망라되어있는 영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을 순환시키며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유니버스에 관객을 가둔다. 팩트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상태, 그의 영화는 팩션이다. 어머니: 그 이야기꾼 표정하지 마라. 이런 얘기 네 영화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웃들 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어. 난 팩션이 싫단다. 살바도르: 팩션에 대해 뭘 아신다고! 어머니: 네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웃들도 영화에 나오는 건 싫을 거야. 시골 무지렁이처럼 표현한다고 생각할거다. 살바도르: 말이 왜그래요 엄마. 존경과 정성을 담아서 표현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엄마 얘길 한다고요. 엄마와 이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요. 전부 그분들 덕택이라고 하는데.. <페인 앤 글로리> 중.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를,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며 형성하는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1편 「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편 「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3편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을 통해 알아보았다.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싶어졌다면 알모도바르 팬으로서 절반은 성공했다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 엉켜있던 날실과 씨실이 조금은 풀렸기를...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나눠주시길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