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박종민 - 배급
1925년 진도군 출생인 박종민은 식민지시기 세무 공무원 부친을 따라 전남 지역 일대를 옮겨 다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시 목포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 세계를 접하게 된다. 식민지 말기 당대 명필(名筆)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이 박종민의 외가(外家) 인척(姻戚)이었기 때문에 목포극장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목포극장 직원들과의 인연은 1950년대 후반 시작된 박종민의 순업(巡業)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박종민은 식민지시기 전남 화포(靴布) 배급조합 서기, 한국전쟁 와중 진도읍에 전력을 제공하는 전업(電業)회사 운영 그리고 휴전 이후 진도군 벽파진에서 염전(鹽田)을 운영하는 등 지역 내 사업가로 경험을 쌓았다. 지역 사정에 훤한 박종민은 1950년대 중반 목포극장 영사기사가 진도군에서 순업을 시작하자 그들의 편의를 봐주다가 직접 흥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전라도 지역 연예계 흥행사들이 모이는 광주시 호남동 태평극장 옆 ‘일등여관’에 들리면서 인맥도 쌓았다. 박종민은 영화 상영 이외에 창(唱)을 선호하는 지역민의 특성에 맞춰 진도에 ‘소리꾼’을 불러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영화 흥행으로 본격적인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은 국산영화 작품수가 늘어나고 필름 간접 배급 체계 정착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 초반 진도군을 떠난 박종민은 한양영화사라는 상호를 걸고 전남 곡성군 곡성읍을 시작으로 전국 순업의 길에 올랐다. 그가 곡성에서 영화를 상영한 곳은 논밭이나 마을 공터가 아닌 흥미롭게도 곡성문화원 건물이었다. 곡성문화원을 임대하여 당시 군(郡) 지역 상설극장과 마찬가지로 이틀에 한 번꼴로 35mm 새로운 영화를 선보였으니 자연스레 손님을 많이 끌 수 있었다. 곡성읍은 1965년에 들어서야 단층짜리 중앙극장이 상설극장으로 개관했기 때문에 박종민의 한양영화사 활동을 대적할 경쟁자도 없었다. 곡성읍 다음으로 박종민이 찾은 곳은 충남 천안시 성환면(현 성환읍) 성환문화원이었다. 1958년 이미 천안시 천안극장이 개관하여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천안극장은 천안시 동남쪽에 위치한 까닭에 천안시 서북쪽 지역인 성환면 주민들은 극장을 쉬이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양영화사의 주야 2회 정기 상영과 화질과 크기에서 앞섰던 35mm 영화는 이전까지 성환면에 간헐적으로 들렀던 16mm 노후한 영사기 소지 순업과 비할 바 아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박종민은 곡성과 성환 지역에서 각각 1년 동안만 흥행을 올리고 해당 지역을 떠나야 했다. 상설극장의 등장과 관객 숫자의 감소라기보다 지역 청년과 상이군인 단체의 ‘텃세’ 때문이었다. 한양영화사의 흥행을 지켜보던 지역 청년들이 문화원 건물에서 직접 흥행하겠다고 나서면서 연고(緣故)가 없는 ‘타지(他地) 사람’ 박종민은 계속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박종민은 문자 그대로 며칠만 머무는 방랑의 순업 길에 오른다. 그는 충남과 충북 그리고 경기도 일대를 떠돌며 흥행을 계속해갔는데, 그의 이동 경로(route)를 보면 순업이 1960년대 영화 상영의 전국화를 달성하는데 톡톡히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박종민은 성환면을 떠난 이래, 천안시 입장면과 예산군 삽교읍과 덕산면 그리고 충남 당진군과 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일대를 거쳤다. 또한 경기도 남쪽의 평택군(현 평택시)과 화성군(현 화성시), 동쪽의 양평군 용문면과 이천시 장호원, 그리고 북쪽의 남양주시 덕소리를 지나 연천군 군부대 마을까지 두루 거쳤다. 영화가 상영되면 가설극장이 열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8km 이내 부락민이 밤길을 걸어 몰려들었다. 박종민은 건강상의 이유와 진도군에 남아있던 가족의 요청으로 1970년대 후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진도군 일대를 돌며 순업을 일삼았다. 박종민에게 순회 흥행은 때로 낭만이었고, 때로 남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동영사 일은 ‘건달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건달은 해방 전후 등장하여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한 ‘놀고먹는 사나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도 없는 말이었다. 박종민의 표현대로, 건달은 “다방면으로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다방면으로 주먹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연애도 잘하고. 말하자믄 다방면으로 능숙한 사람들”이 건달이었고, 건달이 되어야만 영화 흥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내린 건달이라는 말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순업을 하며 평생을 보낸 흥행사의 애환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것은 반공과 지연(地緣)의 질서가 작동하는 한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흥행 보장을 위해 다양한 술수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 글: 위경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