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 감독
- 김성숙
- 제작년도
- 1995
2019년 8월 29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 벌새 >가 얼마 전 개봉 2주년을 맞았다.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인 ‘벌새단’은 2주년을 기념해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 기부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영화 관람과 유통의 주기가 지극히 짧아진 시대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특정 영화와 관련 활동을 지속하는 건 드문 일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세계 내 다른 존재들처럼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러한 ‘존재의 보편성’이야말로 <벌새>가 갖고 있는 고유의 정동이다. 영화 포스터에 각인된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라는 태그라인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잘 알려준다. ‘은희’라는 개별적인 이름과 ‘199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사이에 붙은 ‘가장 보편적인’이라는 수사는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왜 은희는 가장 보편적일까? 질문을 고쳐 이어보자. 왜 은희는 보편적이면 안 되나? 누가 보편성을 대표하는가? 보편성은 대표될 수 있는가? 영화에서 보편성이 왜 중요한 화두인가? 영화는 시청각적 재현을 경유해 제공된다.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다시 표현하거나 어떤 대상이나 집단을 대표한다. 무언가의 재현은 당연히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역량의 결핍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체라는 것 자체가 실재하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현이나 대표의 과정에서 주류(mainstream), 대중(mass), 평균(average), 중위(median)를 떠내는 작업을 하면서, 즉 생략, 환원, 모순·우연·예외의 제거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 이미지와 서사가 전체나 보편을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할 때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텍스트 내적으로 지나치게 인과적이고 그럴 듯해서 우리는 배제가 발생하거나 실재가 무시된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벌새>는 평균적이거나 주류적 인간상이야말로 보편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보편성이 세계의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공통성이라면, 그것은 존재이다. 즉 은희를 포함해 모든 존재는 누구든, 어느 시간에 있든 보편적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존재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벌새>는 즐거움이나 환희와 함께 실망, 절망, 단절, 고립, 상실 등 다양한 감정의 파고를 안겨주는 수많은 시간들이 독자적으로 표현될 때 존재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의 그리고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을 위한 원인이나 자원으로만 표현되면서 이전의 행위나 시간은 그 자체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끊임없이 지연된다면, 존재는 그저 최종적으로 의미가 결정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양상으로만 설명될 것이다. <벌새>는 이러한 진보적 서사를 거부한다. 그런 면에서 <벌새>는 성장영화이면서 성장영화의 정형성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한다. 은희의 유년은 성인이 된 은희를 설명하는 근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비교대상이 아니다. 1994년의 은희의 자기 존재와 사랑에 대한 탐색 그리고 재난과 상실의 경험은 물론 성인이 된 은희와 상관관계가 있지만 또한 독자적이다. 은희의 퀴어 섹슈얼리티 또한 이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과의례나 지표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은희(박지후)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양상을 탐색한다. 아직은 많은 것이 처음인 은희는 서툴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프닝 씬은 그러한 은희의 상태를 표현한다. 은희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엄마(이승연)를 소리쳐 부르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자 급격히 불안에 빠진다. 은희는 타자, 특히 신뢰하는 친밀한 타자의 반응이 없을 때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고 초조해진다. 불안을 더 부추기는 건 잔인한 폭력과 차가운 무관심이 일상인 환경이다. 강남 대치동은 친구, 연인, 가족, 학교, 사회에서 끊임없이 줄 세우기를 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사회의 중요한 기준인 자산, 직업, 성적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그대로 무시당하고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다. 이러한 폭력은 은희에게 일종의 재난이다. 은희가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지나치는 철거에 항의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벽들처럼 그렇게 일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 폭력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때때로 그것에 무감해지고, 무감은 다시 존재에 대한 감각을 옅게 만든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인한 상처나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복해 있다가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은희는 학교나 가족뿐 아니라 개인적 관계에서도 상실과 좌절을 경험한다. 은희를 좋아한다고 했던 지완(정윤서)과 유리(설혜인)로부터 일방적으로 단절되고, 유일하게 신뢰하던 친구 지숙(박서윤)은 위기의 순간에 배신을 한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님(김새벽)은 그런 은희의 마음을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은희에게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또한 지완의 엄마가 은희에게 ‘방앗간집 딸’이라며 계급적 낙인을 찍는 말을 듣고 자기혐오에 빠졌을 때 영지 선생님은 스스로의 마음과 존재를 먼저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수업시간에 알려줬던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라는 명심보감의 구절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돌보고 존재를 감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 장면에서 은희는 매일 지나가던 철거민들의 현수막을 보며 ‘불쌍하다’고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동정 역시 비교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이고 실제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지 선생님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손을 보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서, 신비롭게도 자기가 존재함을 감각해보라고 제안한다. 손과 손가락은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영지 선생님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은희와 지숙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래 <잘린 손가락>(김호철)을 불러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이하 생략)” 영지 선생님은 현재 있는 손가락뿐 아니라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감각라고 한다. 존재는 현재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실한 것을 포함한다. 은희가 침샘 수술을 하고 떼어낸 혹을 궁금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지 선생님과의 교류 이후 은희는 오프닝씬의 순간을 반복한다. 은희는 아파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엄마를 여러 차례 부르지만 충분히 가까운 거리가 돼도 엄마는 응답하지 않는다. 엄마는 은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에 쏟아지는 빛을 바라본다. 일상에 지쳐있던 엄마는 지금 ‘손가락’을 보고 신비를 느낀다. 그리고 결국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은희가 아파트 층수를 헷갈려 다른 집을 두드린 해프닝이었음이 드러나지만, 두 번째 장면에선 엄마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희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첫 번째 장면처럼 불안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은희는 다소 서운하지만 엄마의 세계가 자신과 독립되어 있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은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한다. 그것은 마음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과 다르다. 은희는 엄마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의 세계가 독자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는 분리불안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독립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끔찍한 재난이 일어난 후 은희는 언니 수희(박수연)를 잃을 뻔 하고 실제로 영지를 상실한다. 사고 이후 은희는 수희 그리고 수희의 남자친구와 함께 한강 둔치에서 사고현장을 목격한다. 이때 영화는 화면에서 주인공인 은희가 아니라 수희를 앞쪽에 배치하고 그의 감정에 몰입한다. 사고 당시 많은 피해자가 나왔던 학교에 다닌 수희의 마음을 돌보는 이 장면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라는 구절을 확장한다. 은희는 자기를 알아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영지 선생님은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얘기해줄게”라고 말하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은희는 재난을 응시하며 영지 선생님과 함께 잃어버린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하고 그 마음을 기억하고 감각하려 한다. 그래서 존재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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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 삼각의 함정 >(1974)은 이만희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제작 당시 개봉하지 못했던 < 휴일 >(1968)과 같은 모더니즘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만희 감독의 장기는 장르 영화였다. 그를 1960년대의 대표적 감독 중 하나로 만든 < 다이알 112를 돌려라 >(1962)는 최무룡 과 문정숙 을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스릴러물이었고, 이만희 감독을 한국 영화 산업 내에 각인 시키는 계기가 생긴다. 이 영화는 1969년에 < 여섯 개의 그림자 >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가 된다. 윤정희 , 신성일 , 남궁원 , 허장강 등 당대 최고의 스타시스템을 가동한 야심작이었고, 비평과 흥행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두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여섯 개의 그림자>인데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장르영화를 이끌어 가는 완숙미를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작품이 <삼각의 함정>(1974)이다. 김기영 감독이 < 하녀 >(1960) 이후 < 화녀 >(1971), < 충녀 >(1972), < 화녀82 >(1982)로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사실은 잘 알려진 편이다. 생전에 김기영 감독을 만났을 때 왜 이렇게 리메이크를 했는지 응당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에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제작자들이 원했고, 그게 돈이 되는 거였다는 식으로 답을 한 기억이 또렷하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유신시대의 등장과 함께 검열과 통제에 의한 자기 폐쇄성의 몰락을 걷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극장에서 상영할 해외영화 수입권을 얻기 위해 속성으로 한국영화를 제작하였고, 그 결과 속류와 아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열렸다. <삼각의 함정>도 이러한 시대성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이만희 감독의 연인이었던 문숙 을 포함하여 상국 역의 오지명 , 영일 역의 유장현 그리고 두 남자를 등쳐먹으려고 하는 건달 역의 춘호 역의 백일섭 은 당시에는 유명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넘어가는 부분이나 연기를 보여주는 부분에서도 공을 들이기보다는 대략적으로 넘어갔다는 인상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70년대 이만희 영화 중 <삼각의 함정>을 고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1970년대가 한 감독, 혹은 한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만희 감독은 같은 해에 < 들국화는 피었는데 >, < 태양을 닮은 소녀 >, < 청녀 >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의 말년이기도 했던 이 시기에 얼마나 빠르게 영화를 제작했는가를 숫자만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중 <청녀>는 <하녀>나 <화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하지만 제목에서는 의식한 흔적이 보인다.) 앙드레 지드의 원작 <전원교향곡>을 한국의 섬으로 옮겨와 만든 일종의 문예영화였다. 순수한 영혼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원작 소설을 근간으로 섬을 돌며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한 소녀의 사연을 지고지순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는 이러한 시대였다. 한쪽에서는 문예영화라는 이름으로 작품성을 과잉되게(때로는 신파조로)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영화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속성을 제작되는 영화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필자에게 제시된 <청녀>와 <삼각의 함정> 중 <삼각의 함정>을 고른 것은 이 작품에 이만희 감독의 특징이나 관심사가 더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완성이 된 이만희 감독의 자기 복제는 출발점이 되는 <다이알 112를 돌려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다이알 M을 돌려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식된 영화라고 할 수 있고, 이만희 감독 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장르적 탐구를 한 주요 감독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할리우드 혹은 일본 그리고 간헐적으로 유럽 영화를 어떻게 한국적인 이야기로 옮기는가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히치콕의 영화가 아내를 청부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남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듯이, 이만희가 만든 세 편의 영화는 한 여성을 둘러싸고 그녀의 돈을 갈취하려는 남성들의 욕망과 범죄가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다. 반복된 욕망과 범죄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지숙은 밤중에 집으로 오던 중 건달 춘호에게 추행당할 위기에 처한다. 지나가던 영일이 이를 구해준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전에 자신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임신을 시킨 상국이 출옥을 하면서 지숙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숙은 남편의 유산을 요구하는 상국을 기차에서 살해하고, 영일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지숙의 행동은 더 큰 위험을 가져온다. 모든 상황은 상국과 영일 그리고 춘호가 벌인 음모였고, 영일은 그 과정을 목격했다며 협박을 가한다. 이어지는 춘호의 협박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상국이 돌아오면서 세 남자와 한 여자를 둘러싼 욕망의 드라마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로가 물고 물리는 연쇄적인 파국과 그 안에 번뜩이는 인간의 욕망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68년에 제작되었지만 오랫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05년에 발굴 및 공개가 된 <휴일>은 표면적으로 보거나 스타일상으로는 <삼각의 함정>과 완전히 다른 영화 같지만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상통한다. 한 여성의 임신에 대한 이야기, 친구의 돈을 훔쳐 도망치는 주인공 허욱의 이야기에 다뤄지는 인간의 탐욕과 집착 그리고 일요일이라는 하룻 동안의 이야기이지만 교회의 종소리가 들릴 때에도 이 세계에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허무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모던한 영화에서든, 장르적 영화에서든, 걸작에서든, 장르의 답습에서든 반복적으로 곰씹는 세계였다. <휴일>의 주인공 허욱이 수술을 위해 훔친 돈으로 여자 친구에게 가지 않고 술집에서 놀아나는 기이한 장면은 비상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비이성이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성을 건드리는 기이한 인간의 행적이었다. <삼각의 함정>에서도 상국의 집착과 광기 그리고 이러한 범죄에 동참했다가 지숙을 보호하려고 변모하는 영일의 모습은 악당들의 세계라기보다는 일상의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에 가깝다. 그 가운데 폭력과 착취를 당하는 지숙이 기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상국을 살해하는 장면은 최동훈 감독의 < 타짜 >(2006)를 미리 선취하면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걸작과 범작을 오갔지만 이만희 감독이 항상 중심에 두었던 것은 욕망에 번뜩이는 인간의 변모였고, <삼각의 함정>에서도 서로가 뒤엉킨 욕망의 추격전을 살펴 볼 수가 있다. >> 삼각의 함정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 동경특파원 >( 김수용 , 1968)은 첩보 스릴러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첩보 영화 특유의 극 중 정보량 배분 및 지연 등을 통한 관객과의 밀당에 주력하지는 않는다. 스파이와 스파이의 표적 대상과 스파이의 적 등이 등장하여 서로 간의 정체를 의심하고, 관객들도 이들 간의 관계와 속셈을 계산하며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배반하면서 극적 재미를 만드는 것이 첩보영화의 관건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서스펜스, 즉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서, 등장인물에게 닥칠 상황에 대해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는 등장인물 A보다는 관객이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등장인물 B보다는 적게 알고 있기 때문에 A와 B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관객이 추측과 기대와 그 기대의 반전 등을 마주하게 되는 재미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동경특파원>은 등장인물 간 그리고 인물과 관객 간 정보 제공량의 편차 및 조합을 적절하게 운용하기보다는, 대체로 건너뛰거나 생략하기 때문에 의혹과 추리 사이에서 긴장을 태우며 집중해야할 지점이 흐려진다. 이 작품이 소재로 삼은‘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은 상업적으로 영화화하기에는 힘겨운 역사적 현실이었을 것이다. 1959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들(일본 배우자 포함) 약 9만 여명이 북한으로 향했다. 한국은 북송 반대 입장이었지만 일본과 한국의 수교는 1965년에야 이루어졌고, 실질적으로 일본에 있는 동포들의 한국행을 추진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가난과 차별에 힘들어하던 이들은 다른 삶을 꿈꾸며 북송선에 올랐으나 돌아올 수 있는 배편은 없었다. 그리하여 북송사업 이후 재일동포들에게는 북한과 일본 사이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재일조선인 소녀 안나( 여수진 역)는 일본 니가타 항에서 북송선에 오른 어머니와 헤어지고, 배를 탔는지 안탔는지 행방이 묘연한 오빠를 찾기 위해 한국 기자( 윤양하 역)와 동행한다. 기자는 북송 문제를 취재한 자료들을 도난당한 후, 정체불명의 차에 치여 사망한다. 한편 도쿄에 있는 기자의 아내 지숙( 윤정희 역)이 운전하던 차에 누군가 뛰어들어 교통사고가 나는데, 최완배( 김성옥 역)라는 자가 나타나서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겼다더니 이내 죽었다고 한다. 최는 사후 처리를 도맡는다며 지숙에게 계속 접근하고, 자수를 원하던 지숙은 점차 최와 함께 사건을 은닉한 처지가 되어 한 패가 된다. 여기에 안나와 지숙이 함께 살게 되는 한편, 지숙과 최를 협박하며 안나와의 데이트와 돈을 요구하는 남자( 신성일 역)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지숙, 최, 안나는 묘한 운명공동체가 되어, 남자의 협박에 대응하느라 돈을 주고 억지로 데이트에 응해주다가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간다. 이들은 지숙의 아버지인 남 교수( 김동원 역) 댁에서 가족처럼 지내지만 밤중에 최와 안나는 몰래 나가 아지트 건물로 향한다. 안나는 오빠의 소식을 안다는 최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고 있는 듯하다. 결혼 준비를 하게 된 지숙과 최에게 남자가 또다시 나타나 협박하고, 최의 뒤를 밟던 남자는 아지트에서 폭행·감금당한다. 마침 최로부터 오빠가 평양에 있다는 미덥잖은 말을 듣고 실의에 빠진 안나가 남자를 풀어주고, 남자는 남 교수에게 예비 사위인 최가 사실은 남 교수가 월남할 때 신의주에 두고 온 아들 남지완이라는 사실을 익명으로 알린다. 이 사실을 모르는 최가 남 교수에게 총을 겨누며 납치를 꾀하자 남 교수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고 자수를 권하지만 최는 듣지 않는다. 인천에서는 최의 간첩 일행이 남 교수와 안나를 배에 태워 납북하고자 하는데, 위기를 알리려던 안나가 간첩의 총에 맞고 남 교수 부인도 아들인 최를 붙잡고 오열하다가 총에 맞는다. 이에 최는 총부리를 돌려 간첩에 맞서고, 그때 국군들이 나타나 간첩 일행을 일망타진한다. 남자는 군 정보원으로서 동경특파원이었던 것이 밝혀지고, 병상 치료 중인 최를 비롯한 남 교수 가족은 가족 상봉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의 대사대로‘죄 없는 안나의 죽음’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남자(동경특파원)가 안나의 묘에 참배하며, 안나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나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지숙도 간첩도 국군도 모두 각자의 목적으로 안나를 이용했지만 끝내 누구도 안나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 또한 안나의 죽음을 계기로 주인공의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재결합했지만 안나의 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일조선인을 방출하고 싶었던 일본과 그들의 경제력과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한 그리고 그들의 귀환은 추진하지 못하면서도 체제 경쟁 하에 북송 저지를 펼쳤던 남한, 이들 사이에서 기만당하고 외면당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역사를 반공첩보영화로 소화할 수 있을까? <동경특파원>은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엔딩을 부감으로 멀어지면서 화면 정중앙에 무덤이 자리하는 원경으로 끝낸다. 즉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자라나 어머니를 북으로 떠나보내고 오빠는 찾지 못한 채, 남한 땅에 묻힌‘안나의 죽음’으로 큰 마침표를 찍는다. <동경특파원> VOD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