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
- 감독
- 김두용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정다혜, 추민, 신은숙, 김준호, 김종근, 기운팔, 최치동, 김미정, 윤종철, 한상윤, 김광석, 김용길, 신신범, 박종근, 조영선, 김호진
멀티플렉스 극장이 들어선 1990년대 말에도 개봉작을 볼라치면 으레 종로와 충무로에 소재한 극장들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명보극장으로 5개의 상영관을 갖춘 쾌적한 시설과 주변의 오래된 맛집들 때문에 자주 찾는 극장이었다. 명보극장은 2008년 폐관돼 현재는 명보아트홀이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운영 중인데 그중 한 관이 실버영화관으로 간신히 극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명보극장이 배우 신영균 의 소유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보다 앞서 명보극장을 세운 영화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세아영화사의 이지룡 대표다. 명보극장은 6?25전쟁 후 충무로에 처음 세워진 현대식 극장으로 개관일엔 당대 정치 실세이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여사를 비롯해 많은 귀빈이 족적을 남겼다. 사실 명보극장은 그 이름부터 이지룡의 역사가 묻어 있다. 극장 설립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극장 이름도 공모해 명성이라는 이름이 당선될 뻔했지만, 영화광이었던 자신의 청년기를 회상하며 함흥 출신인 그가 자주 드나들던 함흥 명보극장을 떠올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당선시키며 붙인 이름이었다. 함흥 출신 서울시민에겐 가슴 뭉클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물론 29세의 나이에 거대 자본이나 의지할 만한 건 설사 없이 일단 극장을 세우고 보자는 아찔한 자신감은 그간 사업에서 승승장구해왔던 그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는 함흥에서 대흥상업을 나와 함산금융조합에서 일했고 장사를 시작해 재미를 보려던 차에 6.25전쟁이 나 월남했다. 그의 청년기는 빠른 셈과 화술 등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하고 토대를 닦아가던 시기였다. 피난 시절 부산에서 창고업과 함흥냉면 장사로 대박을 터뜨리며 사업에 눈을 떠갔다. 휴전 즈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로 올라와 건설업에 몸담았지만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무렵 외화 수입을 하며 친척이던 수도극장 부사장 이회극의 사무실을 드나들다보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몰려드는 극장 사업에 매력을 느껴 서서히 빠져들었다. 때는 마침 1950년대 중반으로 한국 영화제작의 르네상스기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극장을 짓기로 결정한 이지룡 은 인맥이 있던 삼양물산을 투자사로 유치하고 고향 친구인 양봉식 (연방영화사 부사장)과 합심해 수도극장 맞은편 332평의 소유주 17명을 설득해 부동산을 매입하고 고향 선배였던 서울시 도시계획 위원장 주원에게 추천받은, 프랑스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맡겼다(사실 극장이 완공된 뒤 설계를 무시하고 건축해 설계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김중업이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공사를 맡길 건설사를 찾던 때 국회 부의장인 조경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의 추천을 받은 일신산업이 시공을 맡게됐다. 하지만 자본도 장비도 기술도 없던 일신산업은 공사비만 받고 삽질만 해놓은 채 철수한다. 공사는 중단된 채 자금은 떨어지고 건설사도 없는 위기 속에서, 파헤쳐진 땅 가장자리에 위험하게 위치한 박산부인과 원장은 이지룡 에게 대림산업을 소개한다. 대림산업 이석구 대표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극장업의 밝은전망에 대해 피력하고 투자와 공사재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6대 4의 조건으로 대림산업이 더 많은 주식을 갖게 된다. 대기업의 횡포, 갑의 월권 등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비극은 극장이 개관된 후 운영 체계가 잡혀갈 무렵 시작된다. 한동안은 영화계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명보극장이 개관할 때 지역구인 명동 주먹 이화룡(화성영화사 대표)이 직접 수표주임을 정해주는 업계의 전통(?)은 문외한이라면 이해하기 힘들지 않았겠는가. 이 수표주임이 동대문 주먹 유지광과 싸움이 붙어 신문지상을 시끄럽게 한 소소한 일화도 있었으니 극장 경영은 꽤나 다채로웠을 것이다. 대주주인 대림산업은 상무 양봉식을 해고하고 부사장이던 이지룡 과 삼양물산을 몰아낸다. 결국 그는 투자금마저 회수하지 못한 채 명보극장을 떠난다. 이지룡 이 그만두고 난 뒤 대림산업은 극장 공사비 허위신고와 입장세 포탈 혐의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는 이미 떠난 뒤였기에 기억하지 못했다. 자유당 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명보극장의 설립 이야기다. “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억울하게 퇴출당한 이지룡 은 주식을 찾을 수 있다는 변호사의 말에 대림산업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하지만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헌법 적용이 일시 중지된 후 변호사로부터 사건을 덮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알고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이지룡의 명보극장 이야기는 “…그래가 재수가 없었지”라고 담담하게 끝이 난다. 그러나 이지룡 은 영화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대명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어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설립한다. 영화사 이름답게 홍콩과의 합작영화도 7편이나 제작했고,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도 했다. “정창화 감독한텐 내가 이긴 적이 없지, 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라고 말하는 이지룡은 정창화 감독의 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한 국내 제작자이기도 하다. 정창화 감독과의 첫 작품은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인데 일제 말기 일본군의 버마전선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다. 광릉수목원에 버마전선을 만들어 촬영한 작품으로 제작자와 감독이 미공보부에 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버마전선의 영상을 찾아 고증하고 일부를 복사해 영화에 사용하는 등 사실적이고 충실한 재현을 위해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정창화 감독이 쇼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는 계기가 된 영화 < 순간은 영원히 >(정창화, 1966)도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첩보영화인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제목을 바꾸라는 공보부의 요구로 <순간은 영원히>라는 다소 멜로스러운 제목이 붙게 됐다. 홍콩 유린영화사와의 합작품으로, 홍콩에서 로케이션을 하고 개봉한 이 작품을 본 쇼브라더스의 런런쇼는 이지룡에게 감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이지룡은 정창화 감독에게 당분간 액션영화를 제작할 계획이 없으니 홍콩으로 가 기량을 펼치라고 홍콩행을 적극 권유했다. 이지룡 은 1971년 < 20인의 여도적 >이라는 작품을 직접 연출했고, 1973년에는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 이성구 )를 일본의 고즈시마 섬에서 올로케로 제작했다. 1989년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를 제작하며 노장의 면모를 보여준 뒤 1992년 은퇴한다. 이지룡 은 흥남철수작전 때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 자칭 ‘삼팔따라지’로 극장, 수입, 제작 등을 아우르며 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짧은 지면에서 밝히지 못한 그의 다양한 활동은 채록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술자는 아세아영화사 이후 유림흥업, 다남흥업 등의 제작사를 만들며 1990년대까지 제작을 이어간 영화계의 산증인임에도 불구하고 면담자의 부족한 지식과 기술로 제작의 묘수, 합작의 묘수, 제작자와 언론 및 관료들과의 관계 등 제작 이면의 이야기는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들 혹은 말하지 않는 순간들이 주는 뉘앙스를 통해 추측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와 재미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흔히 배우를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배우도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재능과 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순재 는 무슨 역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맡든 믿을 수 있는 배우로 통한다. 대학시절인 1956년 <지평선 넘어>라는 연극작품에 출연하면서 무대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연기자를 겸했고 1966년 < 초연 >이란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영화배우의 길도 함께 걸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그는 성실한 배우, 믿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았다. 그와 함께 일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한결같다. ''약속시간보다 1분이라도 빨리 나오는 배우'' ''항상 대본을 읽는 배우'' ''누구보다도 성실한 배우''---. 실제로 그의 일상도 그같은 평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을 별로 하지 않는데다 남들 눈에 두드러져 보일만한 호사를 즐기는 경우도 드물다. 배우에게라면 의례 따라 다닐 것 같은 스캔들도 없다. 겸손하고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이미지인 셈이다. 이순재 는 1935년 10월 10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주위 어른들을 통해 전해들은 정도에 그친다. 그가 네 살되던 해에 조부모가 살고 있던 서울로 와 줄곧 생활했기 때문이다. 조부는 서울에서 소규모 부동산업을 하며 생활했고 부친 이용남(작고)은 고향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계로 삼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피난민들 속에 섞여 서울로 왔다. 그가 기억하는 집안 사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현동에서 성장한 이순재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이때까지도 역시 그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은 쓰라린 상처와 가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현실의 생존은 무엇보다도 다급한 과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화는 크게 다가왔다. 이념의 대립이 어떤 형태로 폭발할 수 있는 가를 절감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군(UN)의 파견과 함께 들어온 미국식 문화와 가치관,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꿈을 키우는 창구였다. 특히 미국영화는 법과 정의,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파라다이스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하는 ''시네마 천국''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위안과 꿈, 희망을 찾았다. 현실이 거칠었던만큼 영화는 더욱 간절하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잡았다. 스무살 전후 청년 시절의 이순재 역시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중요한 일과였다.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와 종로 통의 단성사, 우미관, 을지로의 국도극장, 충무로의 수도극장(현재는 스카라극장)은 당시 사정으로는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문화센터나 다름없었다. 시간 나는 대로, 극장 표를 살만한 형편이 되는대로 그는 극장을 들락거렸다. 주로 외국영화들을 섭렵했다. 영화를 보면서 생기는 궁금증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던 ''포토플레이''(Photoplay) ''모던 스크린''(Modern Screen), 일본에서 발행되던 ''키네마 준포''(키네마旬報)나 ''에이가노도모''(映畵의友)) 같은 영화잡지들을 구해 보면서 풀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 내역, 아카데미 영화상의 수상기록 등 잡다한 상식이 늘어갔고 그 덕분에 이순재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화박사''로 통할 정도였다. 영화매니아 청년이 호기심을 넘어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영화덕분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흑백영화 < 햄릿 >(1948)은 영화 이상으로 다가왔다. 철학과 지도교수의 권유로 본 것이지만 가동의 충격은 강렬했다. 삼선교 건너 돈암동 동도극장에서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될 때는 첫 회에 들어가 4번을 연속해서 보고 나온 적도 있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어두워 져서야 극장 밖으로 나왔고 점심도 거른 채 였지만 <햄릿>의 감동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결국 이순재 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배우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인배우들 조차 변변하게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젊은 배우 지망생의 처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로지 젊은 열정과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만이 보상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순수한 예술을 지킨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었다. 1958년 입대한 그는 3년동안 대북방송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받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군인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연극계와 가깝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61년, 그가 군대를 제대하던 해에 KBS 방송국이 개국했다. 새로 생긴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를 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연기자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었다. 1967년에는 동양방송(TBC)이 개국했다. 방송 드라마에 필요한 연기자는 대부분 연극무대 출신들이 맡았다. 지금은 무대와 방송, 영화 분야의 연기가 서로 넘나드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이나 차별적 인식이 없지만 1960년대 무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영화배우들은 텔레비전 연기를 비정통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텔레비전 연기자들이 대부분 무대 배우 출신들이라 연기 패턴에도 연극적 과장이 섞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극배우들은 과장이 심하다며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텔레비전 연기자들은 정통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화계에서는 선뜻 문을 열지 않았다. 60년대를 넘기면서는 한국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연간 150여편을 넘나들 정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작품 편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새로운 연기자의 발굴이 절실한 문제였지만 방송 연기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순재 는 1966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 초연 >이란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는 한수 접는 시선으로 연극이나 텔레비전 연기자들을 대하려 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새로운 연기자를 구해야 하는 영화계로서는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많은 없는 일이었다. 이낙훈 , 김성원 , 전운 , 김성옥 , 오현경 , 김동훈 같은 연기자들이 연극과 방송 쪽에서 경력을 쌓으며 당시 영화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화계에서도 이순재 의 성실함은 여전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성격을 꼼꼼하게 따졌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영화계 스타는 신성일 , 엄앵란 을 비롯하여 김지미 ,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최무룡 , 남궁원 ,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 신영균 등 모두가 내로라 하는 거물급들이었다. 잘 나가는 스타들은 몇 편의 영화에 동시 출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케줄이 엉킬 때는 여러 곳의 촬영 일정이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주연급 배우가 시간에 맞추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머지 배우나 스탭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도 이순재는 시나리오를 읽고 대사를 다듬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습관처럼 삼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어도 표시가 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그의 성실함과 연기 감각은 영화계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 막차로 온 손님들 >(1967), <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8), < 일식 >(1968) , < 피도 눈물도 없다 >(1969), < 분례기 >(1971), < 토지 >(1974) < 집념 >(1976) < 광염 소나타 >(1979) 등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력 있는 이른바 ''성격파 배우''로 주목받았다. 1999년의 <허준>에 이르기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200여편이다. 그 중에서 한의로 명성을 날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집념>에서 그는 주인공 허준 역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조연 캐릭터였다. 많은 경우 조연급 연기자들은 영화의 간판 역할을 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의 흐름을 받쳐주며 특색있는 포인트 역할을 한다. 이순재 역시 이지적이며 논리적인 인물, 따뜻한 심성을 지닌 캐릭터를 독특하게 소화 해냈다. 지금 이순재 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 역할을 자주 맡으며 현역 배우로서의 위엄을 지켜나가고 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연기한 ''대발이 아버지'' 역이나 <허준>에서 한의의 도를 지켜나가는 유의태, 조선시대 상인들의 사업 철학을 들여다본 <상도>의 거상 박주명 등의 역할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경우들이다. 한때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연기자의 길로 다시 돌아왔고, 노년의 열정을 연기에 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변함없는 무대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성실한 일관성으로 평생을 배우로 살고 있는 사람, 무대나 영화 텔레비전을 오가며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순재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5년 10월 10일 함북 회령 출생 1958년 3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연극활동 시작 1966년 정진우 감독의 < 초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 역임 14대 국회의원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사단법인 중랑문화원원장, 대한적십자사 친선대사 <수상 경력> 1976 < 집념 >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최우수남우상 < 어머니 > 대종상 남우특별상 1982 <풍운> 한국방송대상 2002 문화훈장 보관장, MBC '명예의 전당' <주요 작품> 초연 , 막차로 온 손님들 , 탈출 , 서북청년단 , 어머니 , 집념 등 2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