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만세
- 감독
- 임오정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오우리, 방효린, 정이주, 박성훈, 이선희, 이주원, 이은솔, 이린하, 이나연, 이예빛, 이지유, 박준우, 김선경, 최묘견, 김경환, 서미영, 박창순, 임세운, 공도은, 이현성, 한기옥, 박동욱, 이지명, 전승재, 한상현, 유인순, 두리, 김영선, 허정도, 이주영, 양흥주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올해도 열 편을 뽑았는데, 한국 영화가 다섯 편, 외국 영화가 다섯 편이다. 아홉 편이 극영화이고 한 편은 다큐멘터리다. SF는 세 편,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작품이 세 편 또는 네 편이다. (< 수라 >의 주인공을 누구로 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단 다큐멘터리인 <수라>를 뽑았다. 좋은 영화이기도 했지만 의무감을 느낀다. 올해 나온 영화 중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는 걸 <수라>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있을까. < 당나귀 EO >와 < 다섯번째 흉추 >는 모두 비인간 주인공이 인간사회를 떠돌며 겪는 여정을 그린다. <당나귀 EO>가 < 당나귀 발타자르 >의 보다 발랄하고 화려한 버전이라면 (그렇다고 결말의 가차없음과 서글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다섯번째 흉추>는 매트리스에 붙어 살면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뽑아 먹으며 결국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변신해가는 곰팡이가 주인공이다. 두 작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좋은데, 나로서는 <다섯번째 흉추>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장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가장 많이 본 영화이기 때문일까. OTT에 들어온 뒤로 거의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은 영화이다. < 아니말리아 >도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 종족의 접촉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임산부 주인공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 중 인간이 당연시하는 모든 것들의 우선순위가 파괴되는데, 정말 내 취향의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 A.I. 소녀 >는 아슬아슬하지만 단단하기 짝이 없는 하드 SF다. 인터넷에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A.I.가 서서히 인격을 갖고 성장해간다. 이 장르 특유의 판타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의 압도적인 치밀함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 플라워 킬링 문 >은 스콜세지의 첫 서부극이다. 아마도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미국 영화사에 대해 빠삭한 이 노장이 이 장르에 대한 존경과 원죄의식이 빽빽하게 차 있는 이 네 시간에 가까운 영화를 보며 압도되지 않기는 힘들다. 단지 미국 선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거칠 수밖에 없는 당사자성에 대한 논의를 피해가기는 어렵다. < 지옥만세 >는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신나는 모험담이다. 그리고 이 모험담의 재료는 내가 질색하는 것들, 그러니까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그리고 종교와 같은 재료를 갖고 만들어졌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발랄한 결과물이 나왔다니, 볼 때마다 신기하기 그지 없다. < 너와 나 >는 올해 한국 영화 중 최고의 로맨스다. 화사한 청춘 코미디이기도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기만적일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한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처럼 교묘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작품도 많지 않다. 나머지 두 편은 창작자에 대한 영화다. < 어파이어 >와 < 비밀의 언덕 >. 두 편 모두 창작자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이기적이고 치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둘 다 재미있는데, 비교해 보면 <어파이어> 쪽이 훨씬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독일인 백인 남자 작가에게는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비밀의 언덕>을 볼 때는 그게 좀 어렵다. 이지은의 <비밀의 언덕>은 내가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두 번째로 힘들게 본 작품이다. 첫번째는 < 서울의 봄 >이고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괴로워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행히도 <서울의 봄>의 고통스러움과는 달리 <비밀의 언덕>의 고통스러움은 재감상 때는 많이 사라지는 종류다.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공 명은은 결코 안전한 아이가 아니다. 일단 이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한 관객들은 러닝타임이 10분을 넘기기도 전에 ’큰일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시작부터 경고음이 들린다. 명은은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에도 종류가 있고 등급이 있는데, 명은은 그 중 가장 까다로운 부류이다. 일단 이 아이는 영화 시작부터 부모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시장에서 일하는 부모가 부끄러워 가상의 중산층 부모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냥 거짓말만 하는 게 아니라 스파이처럼 가짜 가족 앨범까지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명은이 다니는 1996년 수도권 소도시 초등학교라는 시공간에서 부모의 계급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명은에겐 가족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이 아이에겐 현실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현실을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 대부분 관객들은 명은과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심각한 서스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작은 동네에서 거짓말은 쉽게 숨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명은은 여러 면에서 우등생이다. 그건 기준을 세워놓으면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성격과도 연결되어 있다. 아이는 여러 모로 좋은 반장이다.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추진력 있고 부지런하며 무엇보다 리더 자질이다. 아이는 좋은 작가이기도 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열심히 준비를 하고 열심히 글을 쓴다. 통일에 대한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명은은 혼자 판문점까지 가서 직접 견학을 한다. 후반에 가면 아이가 표절을 한 것이 아니냐고 몇 초 동안 의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짓말을 했다면 모를까, 표절은 명은이 절대로 하지 않을 일 중 하나다. 단지 아이에겐 상한선이 있다. 아주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불안불안 위태롭게 유지되던 명은의 우주는 학교에 혜진과 하얀이라는 학생들이 전학오면서 흔들린다. 교장선생님은 이 아이들에게 될 수 있는 한 평범한 배경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들은 그 주어진 허구를 가볍게 하나씩 깨트린다. 평범한 집안의 이란성쌍둥이로 소개되었지만, 아이들의 엄마는 유흥업소 사장이고 하얀은 업소 직원의 딸이다. 명은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숨겼을 사실인데, 혜진과 하얀은 이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네 삶을 소재로 글짓기를 하는데, 이들이 별 노력없이 쓴 글은 명은이 판문점까지 가서 취재한 글을 가볍게 넘어선다. 명은의 질투심은 하늘을 찌른다. 자연스럽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전설이라고 한 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룬 < 아마데우스 >는 옛 헛소문에 기반을 둔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천재와 범재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단순한 세계의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명은과 혜진 & 하얀의 관계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명은이 은근슬쩍 혜진을 사보타지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 아이는 곧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명은은 두 아이의 작가로서의 능력과 인간적 매력을 알아보는 소수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이야기가 아니냐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기서부터 영화는 명은의 작가로서의 성장을 보여준다. 아이가 엄청나게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게 아니다. 단지 아이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추구해왔던 전략과 목표 상당수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좋은 글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대범함과 솔직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영화가 배경인 1990년대 중반은 정말로 이런 글이 먹힐 수 있는 시기이다.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명은은 혜진 & 하얀 콤비와 같은 수준의 글을 쓸 수 있다. 이미 작가로서 꾸준한 훈련을 해왔던 것이다. 단지 전략만 수정하면 된다. <비밀의 언덕>에는 천재와 범재를 구분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없으며, 평범한 작가의 노력도 인정을 받는다. 아니, 명은도 평범한 작가는 아니다. 학교 글짓기를 위해 판문점까지 가는 부지런함,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글을 쓰는 집요함도 재능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하면서도 특별한 지점은 명은의 정신적 성숙이 좋은 작가가 된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통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는 반대의 순서를 따르기 마련이지만 영화는 그런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기술이며 아무리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만든 창작자라도 여전히 그냥 개*#₩일 수 있다. 아니, 그 개*#₩는 사람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개*#₩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개*#₩다. 하지만 명은은 성장한다.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경멸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다면 좋은 작가도 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쓴 글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의 기술적/예술적 성취가 늘 우선순위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주변의 결점있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명은은 작가가 되었을까. 명은을 연기한 주연배우 문승아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려고 한 것부터가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혜진을 따라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에. 이 단계를 거쳐 성장했으니 더 이상 글을 쓸 이유가 있을까? 멋진 캐릭터 해석인데, 나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글쟁이인 혜진과 하얀은 자신의 삶에서 밑천이 떨어지면 그냥 글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명은과 같은 작가는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이다.
서지환의 < 저 ㄴ(X)을 어떻게 죽이지 >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궁금한 것은 ‘저 제목을 어떻게 읽느냐’다. 그냥 ‘저 엑스’라고 읽어야 할까. 아니면 X가 검열한 단어를 찾아서 읽어야 할까. 후자를 따른다면 아마도 X가 검열한 단어는 ‘년’일 것 같다. ‘놈’은 아무래도 덜 검열되는 단어이고 다른 비속어 욕들은 두 글자 이상이니까. 영화의 무대는 시골 전원주택. 중년 부부가 애 없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노동으로 돈을 버는 거 같지 않다. 영화 속에서 이들과 함께 사람들은 젊은 고용인 세 명. 여자 둘과 남자 한 명이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에서 격리된 공간에서 옛날 서양 유한계급 사람들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이들이 ‘지나간 시대의 먼 나라’의 특정 계급 사람들이 다른 계급 사람들에게 가졌던 권력을 갈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이 이 역할극 안에서 선을 넘었고 다른 선도 넘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 집에 있는 총기다. 대부분은 서바이벌 게임에서 사용되는 페인트건이다. 하지만 아닌 것도 있다. 그리고 지겨워진 남편은 고용인들에 사냥 게임을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영화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2021년작이다. 그라고 봉준호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왔다. 이 영화가 <기생충>의 자장 밑에서 나왔다고 짐작하는 건 타당하다. 하지만 그만큼 게으른 생각이기도 하다. <기생충>을 염두에 둔 영화라도 장 르누아르의 < 게임의 규칙 >의 영향을 더 받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엔 계급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이 세계 속 갈등은 익숙해보인다. 여자 고용인 1번인 하윤은 새로 들어온 여자고용인 2번인 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윤은 저택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영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렇다면 제목의 ’저 X’는 저 년’이 맞나? 그런데 요새 세상에 이런 제목 트릭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일단 이 영화는 프라이드 영화제 상영작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역학 관계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반영한 것 같은 그림을 그리다가 중반 이후에 뒤집는다. 그 뒤집음은 비교적 상식적인 생각에 기반을 둔다. 젊은 고용인에 대한 중년남자 상사의 치근거림은 불쾌한 성희롱이다. 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옆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바라 보는 사람이 성희롱 당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불쾌함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걸 지켜보는 사람, 그러니까 하윤이 성희롱을 당하는 사람, 그러니까 지영을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친다. 이렇게 하면 진부해보였던 하윤의 행동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다. 여기에는 다른 기능이 있는데, 지금까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남편의 위치를 사정없이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성애자 남자의 권력은 하윤이 지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겠다고 생각한 뒤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보니 남자의 권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앞에서 나는 이 남자가 어떤 노동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남자의 사회적 기능이나 가치가 시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에서 격리된 이 세계에서 남자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여기에 대해 깊이 고민할 사람이 별로, 또는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발랄한 코미디지만 누군가에겐 정말로 무섭게 보일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단편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출연한 신인이나 무명배우들이 발표 이후 주목받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윤역의 하윤경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봄날의 햇살이고 곧 부산에서 공개될 < 딸에 대하여 >(편집자 주: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공개되었다) 영화판의 레인이다. 지영역의 방효린은 < 지옥만세 >의 선우이고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에 캐스팅되었다. 두 배우의 경력이 이후에도 여성간의 관계 또는 퀴어의 주제를 품고 있다는 건 흥미롭다. 심지어 방효린은 <지옥만세> 개봉 이전인 ‘썸머 프라이드 시네마 2022‘에 이미 방효린 특별전이 가능할 정도로 꾸준히 퀴어 주제 단편들을 찍어왔다는 정보를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