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 감독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듀발, 마틴 쉰, 프레데릭 포레스트, 알버트 홀, 샘 바텀스, 로렌스 피쉬번, 데니스 호퍼, G.D. 스프라들린, 해리슨 포드
사진: Marry Ellen Mark, “ Apocalypse Now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1979)은 당시 일본 개봉 제목 ‘地獄の黙示録’을 그대로 활용해 번역되었으나, 원제 ‘Apocalypse Now’는 사실 ‘바로 지금 이곳이 지옥’ 또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처연한 고발, 좌절, 참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봉한 지 무척 오랜 시간이 흘렀고(감독 확장판(Redux, 2001)을 기점으로 해도) 이후 직접적 영향을 받은 수작들이 여럿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탁월한 전쟁 영화 중 하나’ 정도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지옥의 묵시록>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넘어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 그리고 예술과 역사-현실의 경계를 짓이기는 정교하며 무자비한 실험이다. 이 영화는 내게 전쟁의 잔혹함을 넘어, 소리와 이미지가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고 내면의 심연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음악을 비롯한 창작 작업의 범위를 넘어 내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영화는 문명의 야만을 파헤쳤다고 평가받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1899)을 기반으로 하지만, 식민 시절 콩고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배경을 치환한 단순한 서술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다. 몽환적인 편집과 공간을 압도하는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음산하게 폭발하는 음악들이 혼재하며 관객을 전장의 무질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무 살 무렵 친구의 강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감각적으로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특히 록 밴드 더 도어스(The Doors)의 <The End>(1967)가 흐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불타는 정글 위를 비행하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와 주인공 윌라드 대위(마틴 쉰)가 머무는 숙소 천장팬의 움직임이 하나의 악보처럼 맞물릴 때, 나는 영화 속에서 음악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배경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불타는 정글과 헬리콥터, 천장팬, 그리고 윌라드 대위가 겹쳐지는 영화 초반부 영화 속 서사의 시작점인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적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전체를 기준으로 무척 적은 분량인 그의 대사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묵직한 무게를 공유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공포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공포와 친하게 지내야 해(Horror has a face... and you must make a friend of horror.)”라는 그의 읊조림은 전쟁터의 참혹한 현실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암시하며 질문한다. 영화에서 음악은 영상의 보조재가 아니라 핵심으로 자리하며 인물들의 심리, 이념, 광기를 대변한다. 헬리콥터 부대가 민가를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퍼붓는 유명한 장면에서 흐르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 Prelude to Act III)>은 단순한 감정 고양의 장치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하나의 장엄한 스펙터클로 완성하며 폭력에 대한 고발과 창작-예술의 경계, 동시에 오락 산업으로서의 영화라는 뒤엉킨 모순적 현실마저 깨진 거울마냥 선연하게 드러낸다. 커츠 대령,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전투 장면 (사진: "Apocalypse Now"( 1 , 2 , 3 ), IMDb) 모임 별은 지난 25년간 소속이 없는 독립적인 밴드이자 브랜딩/디자인 스튜디오로 활동해왔다. 우리 팀은 분명 통상적인 영화음악 감독은 아니지만,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에 참여한 이후 꾸준히 학생 영화, 실험 영화, 저자본 영화 작업들에 참여해 왔다. 가능한 상업적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 위해 애써온 우리에게,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출연진, 스태프가 함께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성의 미학과 실험 정신은 여전히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최근 담당한 영화 < 폭설 >(윤수익, 2023)에서는 서퍼들의 몸을 때리는 차디찬 겨울 파도소리와 낡은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들에서 뽑아낸 극한적 소음들을,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에서는 클래식 기타 연주와 랜덤 알고리즘 베이스의 VST 악기 패턴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작은 실험들을 수행 중이다. 귀를 사로잡는 음률 보다는 반복되는 패턴 속에 미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주어, 청자가 음악을 뚜렷이 인식하지 않는 상태로 영화 속 서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폭설>과 <힘을 낼 시간>의 음악 (이미지 클릭)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업계 표준’에서 벗어난 활동 방식과 작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다양한 예술가들, 기관, 기업들과 함께 예술, 상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새로운 시도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진 여러 실무 담당자의 고마운 배려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또한 새로이 작업을 시작하는 독립적인 젊은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에게 작게나마 실질적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고, 새삼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짐한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을 만들며 마주한 끊임없는 문제와 막대한 혼돈을 고스란히 작품 안에 담아내며 영화를 완성했다. 불확실성과 모순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작품은 단순한 작가의 종속물, 재현물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이 없었다면, 내가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1979년의 최초 개봉 버전, 2001년 공개된 리덕스(Redux), 2019년 파이널 컷(Final Cut) 중 단연 리덕스 를 추천드린다. 조태상(모임 별 작곡가, 디자이너) l 모임 별( Byul.org )은 우연히 만난 친구들의 술자리 시낭송회에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여전히 친한 친구들의 술모임이며,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녹음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 중이다. 김경렴, 서현정, 최원겸, 황소윤, 오태경, 김수빈, 조태상, 장용석, 이선주로 구성되어 있다. 조태상은 모임 별에서 작곡과 디자인을 담당한다. 2012년 정규음반 <아편굴 처녀가 들려준 이야기>, 2017년 <밤도깨비들을 위한 선곡집>, 2019년 <주인 없는 금>, 2024년 <우리 개> 등을 발매했고,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 등의 영화에 음악 작업으로 참여했다.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2021년, 예술문화 공간 연희동에 문을 열다 연희동은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재건축이 빈번하지 않고 오래된 도시의 정취를 가지고 있다. 부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동교동, 서교동, 연남동에서 이어지는 ‘홍대권’의 끝단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재건축에 관심이 없는 오래된 저택들이 많은 탓에 급격한 상권변화나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다. 연희동에는 소규모의 갤러리가 많다. 주로 2014년부터 궁동산과 안산 자락 일대에 들어온 소규모 갤러리들은 대부분 주택가의 1층 혹은 상가 건물을 개조해 만든 건물에 들어서며 연희동 고유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되 예술적 동네의 모습을 갖춰 갔다. 라이카시네마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문학창작공간 ‘연희문학창작촌’이 있다. 도심 속 같지 않게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이 공간에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작품을 창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공방과 퍼포먼스 예술 극장 등이 연희동에 자리 잡으며 마을의 문화적인 분위기가 더 확고해졌다. 때문에 라이카시네마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연희동에 당연히 있을 법했던 것이 이제야 생겼다’라는 반응도 있었다. 연희동 최초의 극장이자 예술영화관인 라이카시네마는 2021년 1월 13일 연희삼거리 골목길 안쪽에 좌석 40석의 단관으로 문을 열었다. 원래는 2019년부터 개관을 준비했으나 코로나19로 극장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개관 시기를 고민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정면돌파하는 마음으로 열었는데, 오히려 젊은 관객들과 연희동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라이카시네마 정문 출입구 최초의 우주개 라이카에서 명칭을 따다 ‘LIFE LIVE LIKE’라는 이름의 개관 기획전은 첫 비행을 컨셉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파이널컷>(2020),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 원더풀 라이프 >(1998),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왕가위 감독의 < 화양연화 >(2000),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 멜랑콜리아 >(2011) 등 16편이 상영되었다. ‘라이카시네마’라는 이름은 소련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한 최초의 우주개 ‘라이카Laika’에서 땄다. 극장이 들어서 있는 건물 이름이 먼저 지어졌고(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독Space Dog)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진 이름이다. ‘영화로 광활한 여정을 떠나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홈페이지에 실린 영화관에 대한 공식적인 소개 역시 ‘연희동에 불시착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라이카시네마 1층 로비 전경 스페이스독은 연희동 토박이로 오랫동안 동네에 주민들의 문화공간을 짓고 싶어 했던 이화유니폼 서기분 대표가 같은 연희동 주민인 SPDG(스페이스독) 이한재 대표와 의기투합해서 지었다. 본래 2층 주택인 부지를 허물어 4층 건물로 리모델링했는데, 1~2층은 카페, 3~4층은 공유오피스이다. 건축주는 서기분 대표이고 해당 건물의 설계부터 운영까지 스페이스독이 맡고 있다. 스페이스독 지하에 영화관이 들어온 이유는 서기분 대표와 이한재 대표 모두 오랫동안 연희동에 살면서, 연희동에 있을 법한데 없는 것 중 하나가 영화관이라고 생각했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가 이런 작은 영화관과 잘 맞을 것이라고 봤다. 영화편집숍 컨셉의 젊은 예술영화관 라이카시네마를 찾는 관객들은 주로 20대 여성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입문자들이다. 상영 영화들에 따라 연희동 주민이나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좌석을 꽉 채우기도 한다. 연희동의 유일한 예술영화관으로서 지역 사회는 물론 여러 주체와의 협업에도 열려 있는데, 개관한 해에 바로 ‘2021 서대문독립민주영화제’를 개최하거나 단편 영화들을 한 편씩 상영하는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로 라이카시네마는 20대 젊은 층에게는 테마가 있는 ‘영화편집숍’으로, 동네 주민들에게는 다양한 영화 체험의 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라이카시네마의 지향점은 앞서 언급했듯 관객들이 ‘영화 편집숍’을 방문하듯이 라이카시네마를 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좌석 수의 한계로 수익성 자체가 눈에 띄게 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공간을 잘 활용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게 라이카시네마의 운영 방향성이다. 애초에 공간 구성과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썼고, 시네필이 아닌 이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추고 싶어서 영화 선정 또한 너무 어렵거나 힘든 예술영화보다는 접근이 쉬우면서도 새로운 작품 중심으로 하고 있다. 라이카시네마 상영관 입구 복도 라이카시네마의 인테리어 역시 보통의 영화관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조형물들과 우주선에 탑승한 듯한 느낌을 주는 구성이다. 설계 때부터 영화관을 염두에 둔 것에서 알 수 있듯, 영화관의 설비나 공간 구성은 최고 수준이다. 서울의 예술영화관 중 유일하게 입체 음향 기술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을 도입해 영화를 상영하고 있고, 다른 영화관에 비해 넓은 좌석 배치로 관객들의 시야가 어느 자리에서도 가려지지 않고 앞좌석에 발이 닿기도 어렵다. 더불어 물과 무알콜 음료를 제외한 음식은 섭취가 불가능하다는 상영관 내 규칙까지, 영화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한다. 라이카시네마의 상영 시간표는 매주 수요일에 업데이트 된다. 라이카시네마가 위치한 연희동을 기점으로 가까운 거리에 아트하우스 모모와 필름포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안 인디스페이스 등의 독립예술영화관들이 위치하고 있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종로구와 중구에 밀집돼 있던 예술영화관이 서대문구, 마포구로 많이 이전되어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독립예술영화관들이 모여있는 일종의 지구가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라이카시네마 상영관 내부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 8길 18 스페이스독 B1 2. 설립일 : 2021년 1월 13일 3. 대표자 : 서기분 4. 규모 : 연면적 721.26㎡ 지하1층–지상4층 5. 공간 구성 : 1관 40석(장애인석 1석 포함), 1층 로비, 2층 카페(휴업), 루프탑(정원) 6. 운영시간 : 09:30-24:00 (영화 상영시간에 따라 조정) 7. 입장료 : 평일(월~목), 주말(금~일,공휴일) 1) 성인: 평일 1만원, 주말 1만 1천원, 조조 평일 6천원, 주말 7천원 2) 대학생: 평일 9천원, 주말 1만원 (서대문구/마포구 소재대학교 재학생 1천원 추가 할인, 현장 전용) 3) 청소년: 평일 8천원, 주말 9천원, 우대 7천원, 문화가있는날 6천원 ※ 연희동 주민 1천원 할인(조조, 문화가있는날 제외, 현장 전용, 신분증 확인) 8. 구성원 : 총괄운영/프로그래머 문유정, 매표 및 청소 직원 4인 글/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취재 일자 : 2023년 10월 12일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 특별한 사적 감흥을 느낀다. 하나는 화면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에 잠겨 있지 않아도 그레이의 화면은 멜랑콜리아의 습기라고 할만한 기묘한 물질감이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다른 하나는 친구 혹은 연인과의 투 숏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회합 장면에서도 그레이의 인물은 절대적 고립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에 스며들고 번져가며 전염되는 것 같다. 그레이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 투 러버스 >(2008)보다 이 점을 잘 느끼게 하는 영화는 없다. 주인공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그가 사랑하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기네스 펠트로)과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있을 때에도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며 외로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물로 감지된다. 가장 뛰어난 장면은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미셸이 떠난 뒤 레너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가족과 그를 아끼는 따뜻한 여인 산드라(비네사 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셸에게 주려던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준다. “우는 거예요?”(산드라), “행복해서 그래요.”(레너드). 가족들, 유태인 친척들이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는 따뜻한 집에서 두 남녀는 키스하고 포옹한다. 놀라운 점은 외관상 가장 포근하고 평온한, 그리고 남녀의 결합으로 마무리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레너드의 속수무책의 고립을 사무치게 체감한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우울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주제이기 이전에, 매 숏에 담긴 물질적 표정 혹은 운명적 공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느낌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적시할 수 있는 한 숏 내부의 특정 요소들의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및 앵글, 인물의 표정과 동작과 말, 음악과 사운드, 숏의 길이와 편집의 리듬 등이 이야기와 결합된 복합적 효과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애드 아스트라 >(2019)는 공간이 우주로 확대되어도 화면에는 농축된 감정의 밀도가 압도하는 매우 제임스 그레이적인 영화이다. 어쩌면 우주의 텅빈 그리고 무한대의 시공간이야말로 그레이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외로움의 물질적 거처로 가장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그레이가 SF로 눈길을 돌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는 모험의 사건과 미래의 변화에 열린 확장적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재확인하는 내성적이고 수축적인 공간이다. 우주비행사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뒤 16년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이며 우주탐험의 전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 떠난다. 스토리라인은 머나먼 정글에서 광기의 왕국을 건설한 미친 유사 아버지를 수색하는 병사의 이야기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다 그를 찾아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빌려왔다. 텔레마코스는 누구인가. 이타카의 왕이자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 원정으로 왕국을 20년간 비운 동안, 난봉꾼 왕자와 귀족들이 그의 재산과 왕위를 빼앗기 위해 어머니를 희롱하고 결혼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자신의 땅에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목숨을 건 여행에 나선 아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 인물의 어떤 점에 영감을 얻었을까. 결말을 떠올리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 의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살부와 근친상간은 법의 위반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사실상 법의 충실한 집행자다. 그의 목숨과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그의 해왕성 행은 아버지의 우주선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이가 상부의 명령이나 미션의 대의에 완전히 동일화하는 건 아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우주선 리마의 파괴 임무를 맡은 우주선 세피우스에 무단으로 탑승하고, 그를 제압하려는 세피우스 승무원들을 미필적 고의로 모두 죽인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우리는 로이의 욕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박수가 80을 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의 행동으로 추론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평생 복종해온 명령, 특히 이번엔 부당하기는 커녕 지구의 안녕이 걸려있는 중대한 명령을 거부한 것도 세피우스의 제거 작전이 성공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것을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고 독백한다. 마침내 조우한 아버지도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한다. 다시 물어보자. 로이는 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만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적어도 대사를 통해서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레이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그레이는 그 무지를 존중한다. 아버지 클리포드는 말한다. “나는 지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우리는 과학이 부인하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야 돼. 이건 신의 소리야. 난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어.” 그의 친구인 동료 우주비행사 프루이트 대령(도널드 서덜랜드)은 로이에게 말한다. “오랜 우주 비행으로 내가 깨달은 바는, 탐험 비행이 때론 탈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지적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 믿음, 지구에 대한 혐오, 탈출의 은밀한 욕망.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내 생각에 가장 신뢰할만한 말은 영화의 결말부에 있는 로이의 독백이다. “아버지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소중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러느라 동료를 죽이고 지구를 위험에 빠트린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로이 자신은 어떠한가. 그 역시 우주 비행에 미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아닌가. 로이와 클리포드는 아들과 아버지이기 이전에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며, 둘은 말하자면 쌍생아다. 로이의 혹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려는 가족애의 여정이 아니며 아버지의 율법을 살해해 자신의 욕망의 법을 세우려는 아들의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자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이다. 지구 혹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혐오하고 피안을 향해 탈출하려는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의 잔혹함과의 대면이다. 그 대면을 위해 로이 역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아버지와 대면하고서야 로이가 아버지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그 대면에 성공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생명체나 인류의 진보 같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정확한 동형의 여정이다. 이제 선택은 두가지다. 집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 멀리 떠나느냐. 아버지 클리포드는 후자를, 아들 로이는 전자를 택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는 주인 기표도 율법의 표상도 아니다. 요컨대, 로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이자 왕인 오디세우스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복원이나 주인의 귀환에의 기대가 아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마시모 레칼라티의 말을 빌리면,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절연과 달리 상속의 관계를 맺는다.(<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윤병언 옮김, 책세상) 하지만 상속은 과거의 권력이나 재화, 혹은 영광스런 기억의 선사가 아니다. 레칼라티의 논지를 요약하면 정당한 상속은 아버지의 증언을 참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말의 계율과 욕망의 재설정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완료가 불가능한, 반복되는 실패를 경유할 수밖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속자는 고아다.” 또한 그러므로 상속이란 “아버지의 구조적 부재라는 열린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상속의 약속 없는 상속자의 여정이라는 모티브를 본 것 같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난 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여정의 끝에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멸에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조정할 줄 모르는 눈먼 광인일 뿐이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상속의 과정을 본격화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가 이른 곳은 아버지의 삶, 그 복제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눈 먼 광인의 소동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공허이다. 그는 홀로 지구에 돌아온다.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이어지는 결말의 언어들은 계몽적이고 달콤하나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를 가득 채운 우울증의 공기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 평온한 결말의 언어와 비슷한 것을 그레이의 전작에서도 만났다. < 위 오운 더 나잇 >(2007)에서도 만났다. 경찰학교 졸업식장에 앉은 경찰 형제(마크 왈버그, 호아킨 피닉스)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사랑한다, 동생아.” “나도 사랑해, 형”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투 러버스>의 마지막 대화. “우는 거예요?“ ”행복해서 그래요.“ 이 장면들이 뼈저린 것은, 인물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남자에게 이 말이, 이 말의 실현불가성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때로 유태인 공동체)은 주인공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강박처럼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레이의 서사는 주인공이 이 강박을 정당한 상속으로 전환하려는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는 것은 결말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하지만 관객 누구라도 느끼는 있는 상속의 실패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역시 임무수행에는 성공했지만 상속에 실패한, 하지만 그 실패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텔레마코스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은 여전히 출구 없는 멜랑콜리아의 안개 속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