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에서
- 감독
- 울리히 사히들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Alessa Duchek, Gerald Duchek
오스트리아의 외딴 마을, 거기서도 다른 이웃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고급 주택. 아홉 살짜리 쌍둥이 형제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성형수술을 받으러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집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빈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학교도 다니지 않고 타인과의 일체의 교류 없이 오로지 둘만의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왔다. 반갑게 이층으로 뛰어오르며 엄마를 부르던 소년들은 우뚝 멈춰 선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 돌아온 엄마는 아주 낯설다. 손님도 받지 말고 외출도 하지 말고 집안에서는 절대 정숙하라며 온갖 새로운 규칙들을 열거하는 엄마는, 병원에서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은 싸늘하고 신경질적이며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 같다.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조금씩, 이 사람이 엄마인 척하는 타인일 것이라는 의심을 시작한다. 베로니카 프란츠와 스베린 피알라가 공동으로 연출한 2014년 영화 <굿나잇 마미>의 첫 장면은 볼프강 리벤라이너의 1956년 작 <트랩 가족(Die Trapp-Familie)>의 클립이다. 1965년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들어진 <사운드 오브 뮤직>의 원안이 되는 이 영화에서, 오스트리아 민속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과 일곱 명의 아이들이 브람스의 <자장가>를 합창하고 있다. 일곱 아이들의 새엄마가 된 견습 수녀 출신 마리아와 아이들 간의 따스한 교감과 호흡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엄마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프란츠와 피알라는 왜 하필 이 영화의 이 장면을 선택했을까? 연구자 리에스 란크만이 지적한 대로, <트랩 가족>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대는 의미심장하다. 마리아가 이 가족에 합류한 것은 1927년이었고, 폰트랩 가족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무렵 미국으로 떠났다. 그 시기 오스트리아 여성들은 네 명 이상의 아이를 낳은 순수한 혈통의 어머니들에게 부여되는 ‘다산모 십자훈장’을 받는 ‘영광’을 얻도록 노력해야 했다. 본인도 소녀티를 갓 벗었으면서 기꺼이 외로운 일곱 아이의 새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마리아는 사실 ‘다산모 십자훈장’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받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1) 그러므로 <트랩 가족> 속 (그리고 현실 속) 마리아 폰트랩이 <굿나잇 마미>의 오프닝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영화 속 모성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위한 카운터파트로서다. 가족이 갑자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오는 이야기의 다수는, 요정이 요람 속 인간 아기를 훔쳐가고 대신 요정 아기를 남겨두는 ‘체인즐링’ 설화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굿나잇 마미>에서는 그 설정이 역으로 제시된다. 무엇 때문인지 불분명한 이유로 성형수술을 받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달라진 외양이 달라진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붕대를 감은 엄마는 예전 엄마처럼 다정하고 따뜻하지 않다. 동생 루카스에게 식사도 차려주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이며 형 엘리아스에게는 손찌검까지 가한다. 가족 앨범에서 아빠의 사진이 사라진 것처럼(‘우리의 결혼식’이라고 태그가 달린 페이지는 텅 비었다), 별거 이후 아빠의 존재가 ‘우리 가족’으로부터 빠르게 삭제당하고 부정당한 것처럼, 엄마도 혹시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건 아닐까? 어떤 ‘신체강탈자’가 엄마의 영혼을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아이들은 가족 앨범에서 발견한 낯선 여자의 사진을 주목한다. 엄마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 여자는 누굴까? 혹시 엄마에게 숨겨진 쌍둥이 형제가 있었던가? 엄마라면, 자신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를 리 없다. 엄마라면,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엄마라면, 냉동 피자로 냉장고를 가득 채우면 안 된다. 엄마라면, 아이의 눈물 어린 호소에 24시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트랩 가족>(더 쉽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처럼, 상처받은 아이들의 행위 이면에 발화되지 않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마음으로 앞질러 선험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과 화음을 맞춰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낯선 여자는 너무나 자주 신경질을 부리거나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아이들을 돌보는 대신 화상캠으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방송 진행자로서의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수술 전의 엄마(혹은 수술 전에 그랬다고 아이들이 믿는 엄마)를 돌려놓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마을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고 내부에 각종 모퉁이와 모서리가 많은 이 집은 그 자체로 미로처럼 작동한다. 마치 엄마처럼, 이 집도 불현듯 아이들에게 불친절하고 적대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가족 혹은 집은 모두 공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아이들은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고 지저분하게 물건을 늘어놓을 수 없으며 햇빛을 차단해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를 만나려면 단단히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정중하게 노크를 해야만 한다. 지하실 구석에는 그들이 몰래 키우던 고양이의 시체가 박혀 있다. 아이들이 엄마를 피해 집안 어딘가로 달아났을 때 엄마는 그들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집안에서의 숨바꼭질, 쫓고 쫓기는 추격전, ‘진짜’ 엄마를 찾는 모험, 그리고 결국엔 텅 빈 앨범 페이지의 거대한 공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행위. <굿나잇 마미>에서는 아주 유명한 호러 스릴러 영화(제목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차마 적을 수 없다)의 또다시 이걸 쓸 수 있을까 싶었던 전제가 영리하게 변주된다. 이를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다시 쓰기한 작품을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 그런 케이스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소설에서만 가능한 ‘생략’을 이용한 서술 트릭을 사용했던 것처럼, <굿나잇 마미>는 원제 ‘Ich seh, Ich she’처럼 ‘본다’라는 행위의 맹점을 활용한 트릭으로 관객을 속여넘긴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이 영화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 이 영화의 프로듀서는 울리히 사이들이다. <개 같은 나날><지하실에서><파라다이스 러브> 등을 통해 ‘뉴 오스트리아 필름’의 대표주자로 불리던 그 감독은, <굿나잇 마미>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베로니카 프란츠의 남편이기도 하다. *** 1)Lies Lanckman, 「‘I see, I see . . .’ Goodnight Mommy (2014) as Austrian Gothic」, 『Gothic Heroines on Screen : Representation, Interpretation, and Feminist Enquiry』, Edited by Tamar Jeffers McDonald & Frances A. Kamm, Routledge, 2019. (https://uhra.herts.ac.uk/bitstream/handle/2299/22115/Goodnight_Mommy_Lanckman_1.pdf?sequence=1&isAllowed=y)
1989년,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동급생 누군가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비디오테이프를 공수해왔다면서 방과 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 영화는 에밀 아돌리노의 1987년 작 <더티 댄싱>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보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하던 좁은 방 안에서 영화를 본 그 100분의 시간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바꿔놓았던 것 같다. 열네 살의 나는 <더티 댄싱> 속 열일곱 살 프랜시스(‘베이비’라고 더 자주 불리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TV ‘주말의 명화’에서, 혹은 부모님이 가끔 극장에서 보여주었던 ‘감동 대작’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격렬한 에너지와 성적 흥분을 처음으로, 지직거리는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너무 낯설고 격렬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댄스 영화에서 그때에 비견할 충격을 느낀 건 이후 고등학교 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봤던 바즈 루어만의 <댄싱 히어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1963년 여름, 베이비는 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산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나이 많은 어른들 위주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에 억지로 참여하다가, 우연히 밤중에 외딴 별채에서 펼쳐지는 댄스파티를 목격하고 그에 매료된다. 산장에서 일하는 청춘남녀가 모여든 이 파티장의 주인공은, 리조트의 춤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댄서 자니와 페니 듀오다. 베이비는 페니가 여름 방학 동안 산장에서 일하던 예일대 학생 로비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낙태 수술 비용 때문에 난감해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베이비는 의사인 아빠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려 페니에게 건네고, 그가 수술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자니의 댄스 파트너 역을 대신 하기로 한다. 춤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던 순진한 소녀 베이비가 자니와 함께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성인이 되어서, <더티 댄싱>을 몇 번 더 봤다(가장 최근의 시청 경험은 영화가 왓챠에 올라왔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순전히 ‘나쁜 소년’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처럼 받았들였지만, 좀더 성장하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쌓였을 때 다시 본 <더티 댄싱>은 또 달랐다. 일단 산장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을 두 종류로 나눠서 고용했다. 예일대 및 하버드대 학생들은 접객 웨이터로 일하고, 여름에 이곳을 찾는 부유한 가족들에게 ‘미래의 예비 사위’처럼 선보이면서 그 가족의 ‘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임무가 제시된다. 반대로 나머지 오락 담당 직원들(자니는 이쪽에 속했다)은 그 ‘딸들’에게 절대로 손가락 하나도 터치하면 안 된다고 금지당한다. 넘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이다. 섹스에도, 심지어 휴가 기분을 내기 위한 가벼운 수작질에도 계급의 공고한 벽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과연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라인딩이라든가 더티 댄싱은 하층 계급이 지하실에서 추고, 위층의 부유층은 가족들과 폭스트롯을 추지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얌전한 ‘아빠딸’ 베이비가 직원들 중 최고의 인기남인 자니에게 매혹되면서 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자니의 육체의 압도적 매력 때문에, 베이비는 지금껏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욕망의 세계로 곧장 이끌려 들어가버린 것이다. 책으로도, 그리고 가족들이 속한 안온한 세계 인근에서도 접한 적 없던 색정적인 에너지. 물론 그 에너지가 가슴 아픈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티 댄싱>이 1987년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낙태’라는 주요 설정 때문에 광고주였던 여드름 연고 회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던 것처럼, 원치 않는 임신을 수술로 중단하려 한다는 설정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1980년대에조차 ‘대중’ 영화에서 등장하긴 쉽지 않았다(하물며 <더티 댄싱>의 배경은 1963년 1) 이다). 하지만 각본가 엘리노어 버그스틴은 그 설정을 삭제하거나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중적인 영화일수록 도덕에 관련된 문제를 겁내지 않고 다뤄야 한다고 봐요. 그 영화가 관객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더티 댄싱>은 춤을 못 추던 소녀가 사랑의 힘으로 춤을 매우 잘 추게 되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던 소녀가 현실에서 어떤 한계선들을 맞닥뜨리고 자기 방식대로 그것에 맞서며 넘어서는 이야기기도 하다. 극 중에서 가장 슬픈 대사 중의 하나는 베이비가 “아빠를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도 저를 실망시켰어요”라고 울면서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는 페니의 임신과 낙태에 관여하게 된 베이비가 그로 인해 다정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편견과 맞닥뜨렸고, 가부장의 세계에 머물 것인지 자니의 세계를 변호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가부장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공개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한계선은 베이비 자신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베이비의 언니 리사는 외모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부모님이 정해주는 결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아빠가 산장 주인에게 베이비를 두고 “세상을 바꿀 아이”라고 소개하는 초반 장면에서, 베이비는 정치에 관심 많은 책벌레인 자신에 대해, 언니 같은 또래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해 살짝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못한다(아빠의 소개말을 들은 산장 주인이 리사를 향해 “아가씨는 뭘 할 거지?”라고 묻자 베이비는 “언니는 세상을 장식할 거예요”라고 대꾸하고 그 순간 리사의 얼굴은 살짝 굳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니의 세계에 들어서고, 지금까지 접한 적 없던 이들과 교류하고, 가끔은 거짓말과 불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몸에 대한,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베이비의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언니 리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은연중에 자신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하던 리사의 성정을 다정한 공감과 따뜻한 연민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언니가 건네는 위로를 거절하지 않고 그 어깨에 기대는 변화를 보인다. 넷플릭스에서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시즌 1이 공개됐을 때 주저없이 ‘더티댄싱’ 편부터 시청했다. 두 명의 여성, 각본가와 프로듀서가 의기투합하여 (멱살 잡고) 완성시킨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잔뼈 굵은 거물로부터 “돈 낭비 하지 말고 필름 태워버리쇼”라는 평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 1000명을 대상으로 연 시사회에서 “모두가 발을 구르며 환호를 질러대는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개봉 직후부터 무려 “19주 동안 박스오피스를 지배했고, 그때까지 나왔던 미국 독립영화 중 최대의 흥행 수익을 만든 영화”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백만불짜리 제목”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믿음만으로, 초저예산의 한계를 뚫고 완성해낸 제작진 모두 그 유명한 주제가처럼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I've Had) The Time Of My Life)을 만끽했음을 알려준다. <더티 댄싱>을 본 이들이라면, 이 50분가량의 다큐멘터리도 꼭 관람하시길 간곡하게 권한다. 대중영화가 성취하는 멋진 지점,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라도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간지러운 지점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 폭발하는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 1)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짧은 책 <사건>(윤석헌 옮김, 민음사 펴냄)이 떠오른다. 1963년 여름 미국에서 베이비가 산장에 도착하고 페니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괴로워할 때, 불과 몇 달 뒤인 10월 프랑스에선 대학생 아니 에르노가 불법인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울음을 참으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굴욕적인 기억이 세세하게 펼쳐진다.
이 리스트를 빌어 최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했던 현대 중국영화의 성취에 관해 언급하고 싶다. 기술과 물질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정신과 제도의 불모성에서 비롯된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의제화한 과거 중국영화의 흐름과 결별하려는 시도들이 최근 등장한 몇몇 젊은 작가들에게서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이 리스트에 올린 < 지구 최후의 밤 >(2018)의 필감, 중국 현대영화의 지배적인 조류로부터 벗어나 장르의 스타일로 세공된 < 백일염화 >(2016), <더 와일드 구스 레이크>(2019)의 디아오 이난,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위업을 보여주는 <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2018)의 후보 등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올해 등장한 저우타오의 < 오스모시스 >, 주셩저의 < 프레젠트.퍼펙트 >, 우 린펑, 이반 마르코비치의 < 내일부터 나는 >이 돋보인다. <오스모시스> 위에 거론한 세 편의 영화는 해석적이고 의미지향적인 중국영화의 과거 경향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 맥락을 형성한다. 현대 미술가로 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저우타오의 <오스모시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중국영화 중 한 편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 이후 예술 장르 간 융합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활동해 온 저우타오의 이 영화는 ‘무빙 어헤드 Moving Ahead' 라고 이름 붙여진, 올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신설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다.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이 결합된 저우타오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비엔날레나 각종 기획전을 통해 간간이 소개되었다. 중국 서부의 위구르를 배경으로 한 <오스모시스>는 원시적 삶의 조건이 온존하는 마을에서 공생하는 인간과 동물들을, 서사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제시한다. 이 영화의 설정은 문명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한낱 동물과 다름이 없고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고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 같다. 저우타오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침투하면서 그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경관을 묘사하면서 현실과 초현실이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티를 재구성한다. <오스모시스>는 먼지와 눈보라, 변화하는 계절 같은 자연 경관들과 그 속의 인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생존을 위해 싸우는 다른 종족(동물)들을 교차하며 풍부한 이미지의 레퍼토리를 쌓아간다. 이야기의 계율을 따르지 않는 이미지의 흐름 안에서 인간, 동물 및 자연과 같은 일상적인 대상들을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충격을 준다. 광대하고 숭고한 자연 환경조차도 인간의 흔적에 의해 새롭게 변형된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동물에 대한 일부 묘사는 가학적이고 따라서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미지의 외설성을 강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높은 해상도의 카메라로 촬영한 <오스모시스>의 이미지는 영화 기술을 생태화하려는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나타난 것으로, 지각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고(再考)하기 위해 기술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를 수정한다. 촬영, 구도 및 프레임은 엄격한 형식적 고려로 선택되었고 이미지의 서술은 서사에 종속되기보다 의식의 움직임을 따른다. 이미지를 만드는 모든 행위는 현실과 직접적인 접촉이고, 촬영 과정에 연루된 지각, 느낌, 기억은 이미지를 통해 개조될 수 있다는 신념을 이 영화는 품고 있다. 영화를 포함한 시청각 미디어의 진화로 인한 감각과 반응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영화 표현이 도달할 수 있는 극점에 가닿는 작품이다. <프레젠트.퍼펙트> 주셩저의 세 번째 장편영화 <프레젠트.퍼펙트>는 현대적인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 독창적인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의 전작 <또 다른 해>(2017)의 정적인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이미지가 픽셀화 되어 나타나고, 흑백 화면과 총천연색 텍스트의 대비가 선명하다. 800시간에 달하는 라이브 스트리밍 영상으로부터 추출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개인방송 진행자들이다. 노동의 공간을 엔터테인먼트의 장소로 전환시키는 공장 여공과 건설 노동자, 익명의 거리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어필하려는 댄서, 끔찍한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은 남자,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왜소증 사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녀 등 다면적 인물들의 사연을 배치한다. 현대 중국 사회에 관한 인상적인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채택된 삽화들은 오래 지속되는 쇼트와 관찰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일상적 세계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에 대한 이 감독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프레젠트.퍼펙트>는 미학과 양식, 윤리의 관점에서 강력한 논쟁을 야기하는 영화이다. 정형화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부터 멀리 나아간 이 영화는 중국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 지형을 가상공간의 변화로 지도 그린다. 라이브 스트리밍은 오늘날 중국 사회 안에서도 위력적인 엔터테인먼트의 보고(寶庫)일 뿐 아니라 이 새로운 관계의 네트워크에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거대한 기회이고, 수입원이다. 이 영화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돈이나 영향력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면서, 라이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수집한 다채로운 장면들을 편집하였다. 직접 접촉이 아닌 가상의 네트워크에 의해 운항되는 관계라는 사안을 다루는 관점과 태도, 탐구의 스타일, 형식의 긴장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주셩저는 10개월 동안 12명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관계하면서 그들이 온라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수집하였다. 다 보고 나면 시공간의 리얼리티, 실재성에 기초한 다큐멘터리의 기록적 특성이 이러한 대상을 다룰 때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본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내일부터 우리> 다네 콤렌의 <북쪽의 모든 도시들>(2016), 앙겔라 샤넬렉의 <나는 집에 있었지만>(2019)의 촬영감독이자 영화감독인 이반 마르코비치와 중국의 독립영화 감독 우 린펑이 공동 연출한 <내일부터 우리>의 주인공은 거대 도시 ‘베이징’이다. 놀랄만한 이미지의 조형과 세공으로 도시의 구성요소들을 탐구하는 이 영화는 베이징 교외에 거주하는 노동자의 일상을 추적한다. 내면을 읽기 힘든 주인공 리의 욕망과 기대는 삶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시대의 조류에 몸을 실은 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반복적인 일상의 루틴에 갇힌다. 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는 지하의 작은 방에 산다. 후미진 지하실에서 그는 친구로 짐작되는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 현실에 좌절하거나 또는 항복하여 리는 도시가 요구하는 반복 작업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빠르게 팽창하는 도시는 그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서 이 도시를 완전히 탐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모든 등장인물을 비전문 배우로 채운 <내일부터 나는>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혼합하여 도시화의 맥락 안에서 개인과 군중, 그들과 건축물 간의 관계를 기록한다.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영화의 테마는 도시와 건축, 그 앞에서 위축되어 가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이다. 도시는 현대화되었지만, 이 현대화에 기여한 사람들은 성장의 과실로부터 배제되어 그 이후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이반 마르코비치와 우 린펑 감독은 베이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리듬과 빠르게 현대화되어 가는 그곳의 경관을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일견, 도시의 역사를 탈각하고 외경에 밀착하여 다루는 이러한 태도는 이방인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장, 거리, 건물, 장막, 창문, 거울, 스마트폰 등의 장치를 활용하여 캐릭터를 격리하면서 억류된 존재의 조건을 형상화하는 영화는 도시 환경의 축소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밀려나는 소외감을 전달한다. 사회적인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기운이 전편을 장악한다. 이 세 편의 영화를 통일된 경향으로 묶기는 곤란하다. 정치적, 문화적 동류의식에 기초한 이전 세대를 거스르면서 개개인의 개성을 분방하게 표출하는 반(反) 세대 영화들이라고 해야 할까. 출신성분과 세계관, 주제, 미학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는 젊은 작가들이 과거 중국영화에서 무시되거나, 강조되지 않은 요소를 조명함으로써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