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쿠스틱
- 감독
- 유상헌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신세경, 임준일, 이동현, 김해원, 이종훈, 이진우, 이지아, 이종현, 강민혁, 최덕문, 윤지영, 김정권, 고유미, 임슬옹, 백진희, 김정석, 이정헌, 원웅재, 윤종혁, 손상현, 이태연, 오형진, 김선아, 이은주, 조은서
2019년 8월 29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 벌새 >가 얼마 전 개봉 2주년을 맞았다.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인 ‘벌새단’은 2주년을 기념해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 기부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영화 관람과 유통의 주기가 지극히 짧아진 시대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특정 영화와 관련 활동을 지속하는 건 드문 일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세계 내 다른 존재들처럼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러한 ‘존재의 보편성’이야말로 <벌새>가 갖고 있는 고유의 정동이다. 영화 포스터에 각인된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라는 태그라인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잘 알려준다. ‘은희’라는 개별적인 이름과 ‘199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사이에 붙은 ‘가장 보편적인’이라는 수사는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왜 은희는 가장 보편적일까? 질문을 고쳐 이어보자. 왜 은희는 보편적이면 안 되나? 누가 보편성을 대표하는가? 보편성은 대표될 수 있는가? 영화에서 보편성이 왜 중요한 화두인가? 영화는 시청각적 재현을 경유해 제공된다.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다시 표현하거나 어떤 대상이나 집단을 대표한다. 무언가의 재현은 당연히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역량의 결핍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체라는 것 자체가 실재하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현이나 대표의 과정에서 주류(mainstream), 대중(mass), 평균(average), 중위(median)를 떠내는 작업을 하면서, 즉 생략, 환원, 모순·우연·예외의 제거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 이미지와 서사가 전체나 보편을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할 때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텍스트 내적으로 지나치게 인과적이고 그럴 듯해서 우리는 배제가 발생하거나 실재가 무시된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벌새>는 평균적이거나 주류적 인간상이야말로 보편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보편성이 세계의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공통성이라면, 그것은 존재이다. 즉 은희를 포함해 모든 존재는 누구든, 어느 시간에 있든 보편적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존재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벌새>는 즐거움이나 환희와 함께 실망, 절망, 단절, 고립, 상실 등 다양한 감정의 파고를 안겨주는 수많은 시간들이 독자적으로 표현될 때 존재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의 그리고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을 위한 원인이나 자원으로만 표현되면서 이전의 행위나 시간은 그 자체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끊임없이 지연된다면, 존재는 그저 최종적으로 의미가 결정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양상으로만 설명될 것이다. <벌새>는 이러한 진보적 서사를 거부한다. 그런 면에서 <벌새>는 성장영화이면서 성장영화의 정형성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한다. 은희의 유년은 성인이 된 은희를 설명하는 근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비교대상이 아니다. 1994년의 은희의 자기 존재와 사랑에 대한 탐색 그리고 재난과 상실의 경험은 물론 성인이 된 은희와 상관관계가 있지만 또한 독자적이다. 은희의 퀴어 섹슈얼리티 또한 이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과의례나 지표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은희(박지후)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양상을 탐색한다. 아직은 많은 것이 처음인 은희는 서툴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프닝 씬은 그러한 은희의 상태를 표현한다. 은희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엄마(이승연)를 소리쳐 부르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자 급격히 불안에 빠진다. 은희는 타자, 특히 신뢰하는 친밀한 타자의 반응이 없을 때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고 초조해진다. 불안을 더 부추기는 건 잔인한 폭력과 차가운 무관심이 일상인 환경이다. 강남 대치동은 친구, 연인, 가족, 학교, 사회에서 끊임없이 줄 세우기를 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사회의 중요한 기준인 자산, 직업, 성적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그대로 무시당하고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다. 이러한 폭력은 은희에게 일종의 재난이다. 은희가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지나치는 철거에 항의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벽들처럼 그렇게 일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 폭력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때때로 그것에 무감해지고, 무감은 다시 존재에 대한 감각을 옅게 만든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인한 상처나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복해 있다가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은희는 학교나 가족뿐 아니라 개인적 관계에서도 상실과 좌절을 경험한다. 은희를 좋아한다고 했던 지완(정윤서)과 유리(설혜인)로부터 일방적으로 단절되고, 유일하게 신뢰하던 친구 지숙(박서윤)은 위기의 순간에 배신을 한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님(김새벽)은 그런 은희의 마음을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은희에게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또한 지완의 엄마가 은희에게 ‘방앗간집 딸’이라며 계급적 낙인을 찍는 말을 듣고 자기혐오에 빠졌을 때 영지 선생님은 스스로의 마음과 존재를 먼저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수업시간에 알려줬던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라는 명심보감의 구절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돌보고 존재를 감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 장면에서 은희는 매일 지나가던 철거민들의 현수막을 보며 ‘불쌍하다’고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동정 역시 비교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이고 실제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지 선생님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손을 보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서, 신비롭게도 자기가 존재함을 감각해보라고 제안한다. 손과 손가락은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영지 선생님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은희와 지숙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래 <잘린 손가락>(김호철)을 불러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이하 생략)” 영지 선생님은 현재 있는 손가락뿐 아니라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감각라고 한다. 존재는 현재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실한 것을 포함한다. 은희가 침샘 수술을 하고 떼어낸 혹을 궁금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지 선생님과의 교류 이후 은희는 오프닝씬의 순간을 반복한다. 은희는 아파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엄마를 여러 차례 부르지만 충분히 가까운 거리가 돼도 엄마는 응답하지 않는다. 엄마는 은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에 쏟아지는 빛을 바라본다. 일상에 지쳐있던 엄마는 지금 ‘손가락’을 보고 신비를 느낀다. 그리고 결국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은희가 아파트 층수를 헷갈려 다른 집을 두드린 해프닝이었음이 드러나지만, 두 번째 장면에선 엄마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희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첫 번째 장면처럼 불안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은희는 다소 서운하지만 엄마의 세계가 자신과 독립되어 있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은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한다. 그것은 마음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과 다르다. 은희는 엄마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의 세계가 독자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는 분리불안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독립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끔찍한 재난이 일어난 후 은희는 언니 수희(박수연)를 잃을 뻔 하고 실제로 영지를 상실한다. 사고 이후 은희는 수희 그리고 수희의 남자친구와 함께 한강 둔치에서 사고현장을 목격한다. 이때 영화는 화면에서 주인공인 은희가 아니라 수희를 앞쪽에 배치하고 그의 감정에 몰입한다. 사고 당시 많은 피해자가 나왔던 학교에 다닌 수희의 마음을 돌보는 이 장면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라는 구절을 확장한다. 은희는 자기를 알아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영지 선생님은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얘기해줄게”라고 말하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은희는 재난을 응시하며 영지 선생님과 함께 잃어버린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하고 그 마음을 기억하고 감각하려 한다. 그래서 존재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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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이상한 시작이다. 은희( 박지후 )가 아파트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누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엄마를 부르며 문을 열어달라고, 내가 왔다고 성을 내며 소리쳐보지만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그제야 은희는 문의 호수를 확인한다. 902호. 다음 장면. 은희가 한 층을 올라간다. 다른 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이번엔 과연 문이 열릴까. 잠깐의 긴장. 이내 엄마( 이승연 )가 문을 연다. 심부름 다녀온 은희를 덤덤히 맞는 엄마와 얼얼한 표정의 은희. 1002호의 문이 열렸다. 그렇다. 은희의 착오였다. 그런데 이 착오는 어딘지 이상하다.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 은희가 보인 반응과 말 때문이다. 마치 이런 일이 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은희는 화를 내고 악을 쓴다. ‘나, 여기, 있다’는 강렬한 외침처럼. 안타깝지만 은희의 외침을 듣는 이는 당연히 없다. 애초부터 잘못된 문을 두드렸으니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은희의 성과 화가 지난 유사한 경험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수신인을 바로 써도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면? 그렇다면 은희의 성은 은희의 잘못이나 착오가 아니라 오랫동안 대답 없는 무응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김보라의 < 벌새 >(2018)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무덤덤함에 질식할 것 같은 열다섯 은희의 어느 한 해의 이야기라고. 1994년 서울. 방앗간 집 삼 남매 중 막내인 은희. 부모는 사는 게 바쁘고 아들 대훈(손상연)에게 거는 기대 같은 걸 두 딸 수희( 박수연 )와 은희에겐 두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균형을 잃은 관심을 보이거나 때때로 폭력을 쓴다. 툭하면 은희를 때리는 대훈, 자신의 세계조차 감당이 되지 않아 은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수희. 은희에게는 부모와 남매가 있다지만 그들 모두 은희를 알지는 못한다. <벌새>는 1994년 서울의 대치동에 사는 5인 가족의 미시사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곳곳에 위태로움이 웅숭그리고 있다. 가족과 더불어 중학교 2학년 은희의 또래 세계는 <벌새>의 또 하나의 작은 세계다. 단짝 친구 지숙(박서윤)의 당혹스러운 배신, 은희가 좋아했던 지완(정윤서)과 은희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유리(설혜인)와의 이해할 수 없는 단절. 허탈과 실망, 당혹과 화, 슬픔과 먹먹함이 은희를 덮친다. <벌새>는 은희가 부모와 남매, 사랑과 우정 저마다의 관계에서 품었던 기대와 그 기대가 자꾸만 미끄러지고 좌절돼가는 걸 섬세하게 그린다. 시대의 묘사는 기본이고 감정의 세공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 세밀함은 때론 잔인할 정도로 예리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은희의 부모는 수희를 혼내다 부부 싸움을 하게 된다. 엄마는 유리 전등으로 아빠를 치고 마는데 그 바람에 아빠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이내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후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모두가 이 에피소드를 까마득히 잊었을 때쯤 불쑥 그날의 흔적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우연히도 은희는 거실 소파 밑에서 그때 깨진 유리 파편을 발견한다. 이때의 은희는 더없이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가족의 삶에 매복해 있던 균열의 흔적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 은희의 슬픔을 배가시켜 버린다. 섬세하고 또 치밀하게도 <벌새>는 폭력과 상실의 슬픔을 단박에 꿰어낸다. 그리고 <벌새>는 강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반복적이고 끈질기게 은희에게 상실감을 안긴다. 앞서 말한 관계에서뿐 아니라 은희는 외삼촌의 부고를 접하게 되고, 느닷없이 침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세상에는 살던 집을 잃어야 하는 철거민도 있다는 걸 은희는 처음 알게 된다. 그런데 은희가 겪는 상실, 상실과 관련된 상황은 이상하리만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아픈 얼굴을 하고 온다. 죽기 전 은희의 엄마를 찾아왔던 외삼촌은 어딘가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얼이 빠져 보였고 은희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한 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가던 은희 엄마도 그렇다. 말을 잃은 듯한 수희의 얼굴도 기억난다. 그리고 영지( 김새벽 )에게서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은희의 한문 학원 선생인 영지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은희의 외침에 응답한 사람이다. 무책임하고 무덤덤하며 무반응의 세계였던 곳에서 숨이 막혀오던 은희에게 영지는 숨 쉴 틈이 돼준다. 마음을 아는 게 진짜 아는 사이라면 은희가 정말 아는 사람은 영지뿐이다. 하지만 <벌새>는 은희에게 찾아온 이 귀한 응답의 시간을 오래 두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벌새>는 또 한 번의 상실, 1994년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 앞으로 은희를 데려간다. 그런데 <벌새>를 생각할 때면 자꾸만 이 영화적 선택이 고민스러워지는 것이다. 은희가 내내 감당한 지속된 상실이 거대한 비극과 만나고 이 비극은 은희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와의 작별을 고하게 한다. 이때 은희와 은희를 바라보는 관객의 감정적 고조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은희의 계속돼온 상실과 사회적 비극을 마주치게끔 한 선택은 석연치 않다. 더욱이 은희는 사고 현장을 찾아가고 눈앞에 드러난 참혹한 사고의 실체를 바라본다. 상실을 온전히 떠안게 된 은희에게 그것은 가능한 응시의 방식이었을까. 그런 질문을 자꾸 곱씹게 된다. ‘어떻게 사는 게 맞을까.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가 은희에게 쓴 편지의 말처럼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을 긍정할 수 있다면. 하지만 이제 또다시 혼자가 된 은희를 보면서 아직 그 바람의 응답은 도착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 나만 없는 집 >의 첫 시놉시스가 나온 것은 영화가 완성되기 3년 전인 2014년이었다. 당시 나는 어떤 이야기가 단편 영화로 적합하고 매력적일 것인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나만 없는 집>은 그렇게 쌓인 여러 글 중에서 내 어린 시절을 반영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 때 늘 구조를 먼저 세워놓고 시작을 하는데, < 나만 없는 집 >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시놉시스를 구상하던 2014년에는 작법 입문서로 유명한 사이드 필드의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를 참고했고,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은 어린 소녀가 가족에 의해서 반대를 겪는다’라는 중심 아이디어를 세 개의 장, 두 개의 구성점(plot point)에 맞춰 구체적인 사건으로 풀었다. 몇 차례 수정 끝에 완성한 시놉시스는 한동안 컴퓨터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2016년, ‘대구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의 공고가 떴고, 고민 끝에 <나만 없는 집>의 시놉시스를 다시 꺼냈다. 제작지원 사업에 내자고 결심은 한 것은 마감일이 고작 5일밖에 남지 않던 때였다.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했는데, 그 당시 나는 크리스토퍼 보글로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라는 책으로 좀 더 심화된 이야기 구조법을 공부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에 구조적인 고민을 충분히 했던 터라 초고는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었다.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후에도 시나리오의 수정 작업은 제1순위였다. 전작인 < 은하 비디오 >와 < 나만 없는 집 >의 프로듀서 및 조연출 역할을 해준 오성호 PD는 나의 첫 영화 현장인 < 소나기 >의 감독이자 영화 스승이기도 했는데, 그는 늘 강박적으로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오성호 PD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며(?) 한 씬, 한 씬 꼼꼼히 점검해나갔다. 각 씬의 목표를 정확하게 정의하면서, 목표에 맞지 않는 대사나 지문 등은 삭제하고 좀 더 강조가 필요한 부분은 반복하거나 변주했다. ‘걸스카우트에 가입하고 싶은 소녀의 이야기’에 부합하기 위해서, 되도록 봄에 가까운 계절에 찍고 싶었지만, 개인 사정상 바로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결국 8월 중순에 크랭크인을 하기로 하고,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약 7주로 계획했다. 하지만 프로듀서, 촬영감독 외에 스태핑을 완료하지 못한 채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다가오면서 불안감은 커져갔다. 게다가 이전에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든 건 고작 1편에 불과했고, 내 경험과 실력에 비해 < 나만 없는 집 >은 시대극, 아역 배우, 단체 장면 등 촬영 난이도가 무척 높은 편이었다. 로케이션, 미술, 캐스팅, 연기연출, 콘티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촬영 전까지 할 일은 절망적으로 많았고, 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촬영 예정일에 맞추기 위해, 각 업무의 최소한의 마감일만을 정해둔 채, 매일매일 TO-DO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와 오성호 PD는 스태핑 전까지 서로의 손발이 되어 업무를 분담했고, 정말 전투적으로 영화를 준비했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쉴 틈이 거의 없었다. 세영의 집 < 나만 없는 집 > 프리 프로덕션의 시작은 주요 무대가 될 세영의 집을 찾는 것이었다. 하루는 예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갔었다.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어릴 때 살던 연립주택이 그대로 있었고, 특유의 분위기에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던 내 마음과 달리, 집주인은 수차례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그곳은 추억으로만 남겨둔 채, 대구 전역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다시 조사하러 다녔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매우 가까운, 재개발 예정인 빈 아파트를 섭외하게 되었다. 완전히 비어있던 만큼 미술이 용이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할 일이 많았다. 손걸레와 스팀 청소기 등을 동원해 온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대구 외곽에 있던 이삿짐센터에서 버리는 가구들을 실어 날랐다. 전작인 < 은하 비디오 > 때도 그랬지만, < 나만 없는 집 > 또한 로케이션과 미술이 거의 막노동 수준이었다. 199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만큼, 그냥 둘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학교의 책걸상을 교체하고, 중고나라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렸고, 옛날 문방구에서 각종 보물들을 찾으러 다녔다. 길을 다니다 버려진 고가구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갔고, 결국 주워오곤 했다. 걸스카우트 입단식 의상도 문제였다. 현재 걸스카우트 유니폼은 초록색이지만, 1998년도 당시에는 갈색이 주요 색상이었다. 전국에 있는 걸스카우트 연맹에 메일을 보내고 전화도 걸어봤지만, 갈색 유니폼은 단 한 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직접 찾아간 대구 연맹에만 두 벌의 옷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대구 연맹 쪽은 꽤 호의적이었고, 옷을 대여해줌과 동시에 음악, 율동 등을 알려주시기도 하셨다. 이후 대여받은 옷과 최대한 유사한 천을 구해, 30벌가량의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의뢰, 제작했다. 한편, 프리 프로덕션 이전부터 가장 고민해왔던 아역 배우의 캐스팅은, 대구-부산-서울 3개의 도시에서 아역 전문 엔터테인먼트 및 학원에 찾아가, 오디션으로 진행했다. 주로 시나리오 속 인물의 대한 이해와 유사 경험을 묻는 질문을 했고, 즉흥 연기 또한 부탁했다. 단시간에 한 명의 배우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오디션의 기억이 조금이나마 상처로 남지 않도록, 나를 포함한 스태프 모두가 참여한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치열했던 캐스팅 과정 끝에, 매우 운이 좋게도 < 나만 없는 집 >을 이끌어 줄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영’ 역의 김민서 ‘세영’ 역의 김민서 양을 캐스팅하면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역시 사투리였다. 서울 토박이인 민서에게 캐스팅 결정을 통보하기 전까지, 시나리오를 표준어로 수정해서 진행할지, 아니면 민서에게 대구 사투리를 가르칠 것인지를 끝까지 고민했었다. 결국 답이 나오지 않아 민서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했고, 어머니께서는 민서가 이전에 전라도 사투리를 암기해서 연기를 해봤다고 말씀해주셨다. 대사를 통으로 암기하면, 현장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내면의 갈등이 있었지만, 사실 대구 사투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훨씬 더 컸다. 그 날 나는, 민서에게 캐스팅 결정 통보와 함께, 남은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의 연기연습과 사투리의 중요성을 말하고, 또 말했다. 연기 연습은 약 5주에 걸쳐 진행되었다. 민서와는 사투리 때문에 거의 매일 통화를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민서가 어머니와 함께 대구에 내려와 이틀 동안 언니, 엄마, 아빠, 친구 역의 배우들과 번갈아가며 연습을 했다. 연습 방식은 대사 리딩을 시작으로, 실제 촬영 타이밍을 고려한 동선과 동작을 연습하고, 대사를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배우들과 함께 상의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아역 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 반드시 그들의 부모와 엮일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운이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주실 때와 뒤에서 기다려주실 때를 정확히 눈치채주셨다. 아이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잘 견디다가도, 눈앞에 자신의 부모가 보이면, 갑자기 그들에게 기대려 하고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약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번 현장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들을 강하게 책려하다가 홀연히 사라지셨고, 되레 나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시며 응원과 위로를 보내주셨다.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스태핑과 함께 여러 프리 프로덕션 업무도 완료되어갔고, 마지막으로 숏 구성과 콘티 작업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직 숏 구성에 자신이 없던 내가 믿을만한 것이라곤 레퍼런스뿐이었다. < 나만 없는 집 >의 콘셉트와 유사한 레퍼런스 영화들을 반복해서 보면서, 그를 기반으로 기초적인 숏 구성을 했다. 이후 카메라 렌즈 앱을 이용해서, 실제 로케이션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으며 숏을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토대로 미술 스태프와 함께 그림으로 콘티를 정리했고, 완성된 콘티는 촬영 직전에 촬영 팀과 마지막 점검 작업에서 유용하게 활용됐다. 원래 프로덕션은 7회 차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35분의 러닝타임을 예상한, 20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로는 7회 차는 꽤 적절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분 이상의 롱테이크 숏들이 꽤 포진되어 있는 데다, 평상시 테이크를 많이 간다고 악명 높은(?) 연출 스타일에서 이번엔 얼마나 내 자신과 합의할 수 있을지 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촬영은 시작되었고, 난 이번에도 악마가 되어, 양보 없이 배우와 스태프들을 수없이 괴롭히며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최종 회차는 1회 차가 늘어난 총 8회 차로 마무리했다. 자매 유난히 뜨거웠던 8월, 찜통 같은 더위에 배우와 스태프를 몰아놓고, 지치는 몸과 마음을 제대로 달래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촬영을 강행했다. 평소 가장 심한 말이라고 해봤자 ‘바보’ 정도였던 민서와 지후는, 악에 받친 자매를 연기하느라, 마지막엔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말았다. 어머니 역을 해주신 이미정 선배님은 유당불내증이 있었음에도, 촬영에 차질이 생길까봐 끝까지 그 사실을 숨기기까지 하셨다. 김용현 촬영 감독님을 비롯한 촬영 팀은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묵묵히, 가장 먼저 다음 촬영을 준비하며, 부족한 나를 항상 배려해주셨고, 부처 다음으로 인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전상진 동시녹음기사는 무거운 붐대를 들고서 믿음직하게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많은 괴롭힘을 당한 오성호 PD는, 나의 부족함으로 늘 동분서주했고, 건널목 장면을 찍은 날엔 종아리에 햇볕 화상을 입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북적거렸던 촬영 현장이 끝나고 나니, 남은 건 그동안 주워 모았던 가구들과 두 장의 외장하드, 밀려드는 공포심이었다. 일단 촬영 현장을 정리하고서, 급하게 서울로 향했다. < 은하 비디오 > 때부터 함께 작업해 온, ‘이음편집실’의 원창재 편집기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선 나는 기사님과 촬영 소스에 대해 염려되는 부분, 편집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기사님이 콘티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만들어 주신 1차 가편을 토대로, 약 3개월에 걸쳐 세밀하게 수정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예상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찍어야 했던 걸스카우트 율동 장면과 특별히 정해진 콘티 없이 촬영한 선영과 세영의 싸움 장면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는데, 다행히 기사님이 잘 봉합해주셨다. 그렇게 시나리오에 충실하게 편집을 끝내고 나니, 이야기는 매끄럽게 잘 이어졌지만, 씬과 씬의 리듬감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눈에 볼 수 있게 시나리오를 펼쳐 구성점을 다시 파악했고, 리듬감이 조금 더 빠르거나 느리면 좋을 부분을 확인해 최종적으로 수정, 편집을 마무리했다. ‘대구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의 마지막 단계는, 그해 지원을 받은 작품을 모아 관객을 초청해 상영하는 것이었다. 상영 시기는 12월로 정해졌고, 나는 그 전까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후반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완성된 편집본을 들고 색보정, 믹싱, 음악 작업을 거의 동시에 진행했다. 형준석 색보정기사님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변덕만 부리는 나를 끝까지 받아주셨다. 믹싱의 경우, 개화만발의 양정우 실장님과 홍랑기 믹싱기사님과 함께 작업했는데, 여름에 어울리는 앰비언스와 드라마가 강조되는 효과음을 적절히 삽입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셨다. 또한, 류재학 음악감독님은 아이들의 정서를 잘 살려주며 울림이 있는 멋진 엔딩곡을 완성해주셨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작업을, 동시녹음기사이기도 했던 전상진 군이 훌륭하게 엮어주었다. 길고 치열했던, 영화 제작의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분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게다가 여기에 언급된 분보다 언급되지 않은 분들이 더 많다. 비록 이 영화는 ‘자기 치유’라는, 오롯이 사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시작하게 됐지만, 그런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는 < 나만 없는 집 >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는 영화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