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전
- 감독
- 김지현
- 제작년도
- 2009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 김용훈 , 2020)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어떠한 인물을 담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그 제목에 따르면 그들은 ‘짐승들’이다. 영화는 그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과정보다는 짐승들이 얽히고설키며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잔혹한 광경을 보여주는 일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이 잔혹한 풍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이 짐승들로 가득한 세계의 이치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생존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린 세계를 반복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평적 개입’을 포기하는 일이자 스스로를 짐승의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인물들이 지배하는 지금의 한국영화(또는 한국사회)를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징후인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는 돈가방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우리는 누가 이 돈가방의 주인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가 원하는 것은 이 돈가방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이 가방 안에 돈이 담기는 과정에서 탐욕에 눈먼 자들이 보여주는 짐승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애인이 사라지며 짊어진 빚을 허덕이며 크게 한탕을 노리는 태영( 정우성 ), 그런 그를 이용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연희( 전도연 ),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채업자 두만( 정만식 ), 하루하루의 생활비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만(배성우)은 각자의 사연으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물론 돈가방을 사이에 둔 쟁탈전에서 인물들의 광기어린 탐욕을 보여주는 것은 장르 영화의 클리세다. <지푸라기라도…>가 여섯 개의 장으로 에피소드를 나누고, 과거의 사연을 현재의 사건인 전개하는 트릭을 쓰며, 신체를 요란하게 절단하는 잔인한 장면 등을 보여주는 하드고어적인 표현을 차용하는 등의 잔재주를 부린다 해도 이 전형성에서 탈피하지는 못한다. <지푸라기라도…>는 돈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독하고 잔악해질 수 있는지 그리려 한다. 애인을 배신하는 것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로 산 자를 깔아뭉개고 신체를 난도질하는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더 매정하게 구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치고, 그래서 돈 앞에서 절박해지는 것이 없는 자들의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인물이 절박한 것과 그런 그들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보여줄 뿐,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돈에 날아가 자신의 몸을 불태울 뿐이다. 그러니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한 피의 향연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설득력을 갖지 못한 절박함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고문 같은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의 제목에 삽입되어 있는 ‘짐승’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거세되어야 하고, 그래서 돈가방 앞에서 자동기계처럼 자신의 탐욕을 분출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지금 한국사회의 초상화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가 하나의 징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 곡성 >과 < 부산행 > 이후 유행하는 좀비 영화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일에 천착하는 인물들을 마주하곤 한다. 지금의 한국 영화가 관객에게 전시하는 것은 (유무형의) ‘괴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곡성>의 종구( 곽도원 )는 칼에 찔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이런 파국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산행>과 <서울역>, < #살아있다 >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세계에서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전부다. 한마디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전력 질주. <지푸라기라도…>와 일련의 좀비 영화 등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의 절실함이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질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영화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생존은 인간적 삶의 기본 전제다. 그렇기에 생존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니고, 선도 악도 아니다. 생존의 추구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과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은 그 엔딩에서 (원작과는 달리) 중만의 부인(진경)에게 돈가방을 선물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돈가방의 존재를 몰랐던 인물에게 돈가방이 흘러 들어간다는 점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결말은 영화적인 우연 그 이상이 아니다. 돈가방은 생존을 가능하게 할지라도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희망이 아니라 서사적 기만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한국영화를 휩쓸고 있는 생존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성스러운 환상이 벗겨진, 인간의 생물학적 나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회적인 불가능이 생산하는 마음의 형식”(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p.292)이다. <지푸라기라도…>가 절망스러운 것은 단지 생존주의에 빠진 인물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절박한 인물을 낭떠러지 앞으로 몰아가는 지금의 한국 영화가 앓고 있는 병일 것이다.
사회복지학과 졸업을 앞둔 성희는 장애인 활동지원 아르바이트 활동 중 허리를 다치게 되고, 어떠한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이용자로부터 해고당하게 된다. 학자금 대출, 생활비, 치료비 및 스페인 출국을 위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성희는 활동보조센터 담당자에게 산재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일이 많지 않은 새로운 이용자 배정을 강력히 요구한다. 이후 하루 종일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중증 장애인을 새 이용자로 배정받은 성희는 별 일 없이 업무시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지만, 성희의 형식적인 업무 수행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용자의 아들 현목과 갈등에 놓인다. 다른 일자리에서 비해서 비교적 높은 시급을 받고 있지만, 고용 불안정과 이용자의 부당한 업무지시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수급비와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지만 보통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장애인 가족의 빈곤과 결핍. 이들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 에듀케이션 >( 김덕중 , 2019)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복지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로만 정의하기에는 여러 함의들이 내포되어 있다. 걷기 어려울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음에도 일을 쉴 수 없는 성희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대학 졸업을 위한 실습 시간을 채워야하는 아르바이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성희가 직업의식이나 장애인 운동에 관한 사명감 없이 오로지 졸업을 위한 수단 겸 시급 높은 생계 수단으로만 활동지원 노동을 생각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성희에게 깊은 정서적 유대와 감정 노동을 원하는 현목과 이를 거부하는 성희 이 둘 중 누가 더 잘못했다고 명확히 판단하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을 내다가 기어코 파열로 끝나는 <에듀케이션> 인물들은 신체적·정신적 한계로 인해 자유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현목 엄마를 제외하곤 자신의 입장만 앞세우는 경향이 크다. 가령 활동지원사의 시급이 다른 직종보다 높다는 이유로 가사노동과 친밀감을 요구하는 현목에게 성희는 “(활동지원사가) 가사도우미, 파출부는 아니다.” 식으로 맞서는 설정이 몇 번 등장하는데 상시 업무 외 업무를 강요받는 활동지원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및 고용 불안정을 생각하면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아직 정서적 돌봄과 지지가 필요한 미성년자 현목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는 성희가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자(혹은 이용자 가족)와 활동지원사간의 과도한 친밀감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공고한 관계는 활동지원 노동 현장에서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고, 오히려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과 자립을 방해한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고 있다. 1) 그렇다고 성희와 같은 활동지원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려드는 중증 장애인과 그(녀)의 가족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무조건 근절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일상에 끼어들고 싶지 않는 활동지원사 성희와 그녀에게 정서적 유대와 친밀감을 간절히 원하는 장애인 이용자 가족 현목. 허나 <에듀케이션> 속 성희와 현목의 갈등은 두 개인의 갈등 혹은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이용자 (가족) 간의 문제를 넘어 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만으로는 장애인(가족)의 자립과 사회 활동 참여 증진이 어려운 현실과 맞물린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밤낮없이 일해서 겨우 최저생계비를 면할 정도의 수입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성희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청년 도시 노동자의 비애를 대변한다.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시험 준비를 포기한 이후 스페인 이주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성희의 일상은 답답함과 무기력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막연하게라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성희와 달리 중증 장애인의 보호자라는 이유로 많은 활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현목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현목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성희와 자칫 잘못하면 엄마는 물론 스스로에게까지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현목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실패한 성희와 현목은 우려했던 대로 파국을 맞는다. 영화 <에듀케이션>은 장애인 활동지원 사업의 문제점을 전면으로 제기하기보다 복지 정책에서 완전히 소외된 청년 간의 갈등에 더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바쁜 성희와 자신의 미숙한 언행을 돌아볼 여력조차 갖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 현목. 승패 없이 서로에게 자괴감과 모멸감만 남기는 이들의 다툼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각자의 불행을 이유로 자신의 입장만 내세울 뿐 정작 타인에 대해서는 몰이해로 일관했던 성희와 현목의 갈등을 극대화시키면서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과연 영화가 보여준 엔딩은 절망과 분노 밖에 남지 않은 혼돈의 끝인가 아니면 미약하게나마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될 까봐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지만, 단언컨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적 엔딩이다. 1) <‘활동보조 갈등’을 바라보는 3인 3색 시각들>, 에이블뉴스, 2013.12.16.
청진은 1930년대 후반부터 대도시로 급성장한 곳으로 1943년 인근의 함경북도 도청소재지인 나남읍을 포함하여 청진부가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8개관의 영화관이 있었다. 이는 경성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급격한 도시화의 결과물이다. ① 청진좌(淸津座), 청진극장(淸津劇場) 청진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연극과 영화 상영 외에도 다양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정확한 설립일은 알 수 없다. 1921년 무렵 이곳에서 부민대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청진부민대회(淸津府民大會)>, 《매일신보》, 1921.05.04) 1932년 1월 23일 오후 11시 경 영화를 상영하던 중 필름에 불이 붙어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淸津座全燒>,《朝鮮新聞》, 1932.01.26) 이후 재건되면서 이름을 청진극장으로 바꾼 듯 보인다. 청진극장은 청진부 서송향정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2층 벽돌건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모토(松本浩德), 지배인은 마쓰모토(松本時雄)였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으며 총 객석수는 76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대화극장(大和劇場), 동보대화극장(東寶大和劇場) 동보대화극장은 청진부 포항정에 1936년경 3층 콘크리트 건물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건립 당시 명칭은 대화극장이었으며 도호영화사가 극장을 운영하면서 동보대화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동보영화이며 지배인은 다카시마(高島次)이다. 총 객석 수는 678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화극장으로 바꾸었다. ③ 제국관(帝國館) 청진부 북성정에 있던 제국관은 1926년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35년 11월 27일 밤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영사기사 조수 1명이 질식사 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으며 1938년에는 영사 중 발생한 화재로 영화관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재건된 제국관은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조필원(창씨명 祥原弼顯), 지배인은 조재정(祥原載正)이었으며 객석은 489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공락관(共樂館), 일본극장(日本劇場) 청진부 신암동에 건립된 공락관은 공회당 겸 극장으로 1924년 11월 개관했다. (<공락관낙성식(落成式)>, 《시대일보》, 1924.11.06) 극장 설립은 주식발행을 통해 자금을 모아 이루어졌으며 청진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던 대표적인 극장으로 관객들 역시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1934년 1월 7일, 온돌의 과열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을 당시 공락관의 운영자는 조필현(趙弼顯)이었다. 공락관이 전소되자 청진 시민들은 기부금과 은행대출로 총 공비 1만 3천원을 들여 새로운 극장을 낙성했다. 공락관에서는 영화와 연극 외에 공회당으로 각종 단체의 행사장으로 활용되었다. 박노홍에 의하면 2층 벽돌 건물로 무대도 연극하기 알맞았다고 하며 1940년대에는 연극과 악극으로 프로를 채웠다고 한다. 1943년 당시에는 이름을 일본극장으로 바꾼 상태였으며 흥행주는 마쓰시타(松下和三郞)였다. 총 872석의 극장으로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⑤ 소화좌(昭和座), 소화극장(昭和劇場) 소화좌는 청진부 포항정 청진역 바로 앞에 있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35년 10월 청송유치원의 율동대회가 소화좌에서 개최된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간도 대성중학교 후원 순회연주회(1936년 3월), 청진천주교청년회 주최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성극 공연(1937년 8월), 협동예술좌 순회공연(1939년 10월)에 관한 기사가 발견된다. 1940년대 들어 소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키타 미노루(牧田稔), 총 좌석수는 61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초뢰좌(初賴座) 청진부 초뢰정에 자리 잡은 대극장으로 1927년 나남극장주식회사가 설립했다. 나남극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은 스기노(杉野政吉)였다. 영화상영관으로 큰 인기를 끌던 초뢰좌는 1932년 1월 22일 관객들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그러나 주주총회에서 재건축을 결정하여 관객 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근대식 극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노(杉野政吉), 지배인은 우치다(內田福次郞)이다. 총객석수는 948석의 극장으로 해방 후에도 존속했다. ⑦ 청진문화극장(淸津文化劇場) 건립일은 알 수 없다. 청진부 포항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토(齊藤武久), 총 객석수는 350석이었다. ⑧ 중앙관(中央館) 청진부 수남정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무라(竹村英作)이며 총 객석수는 8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나남극장(羅南劇場) 1943년 청진부에 흡수된 나남읍에 위치했던 극장으로 1920년 말 설립되었으나 1922년 2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손해액은 3만원에 달했다 .(<羅南劇場全燒>, 《京城日報》, 1922.02.16) 청진 외에 함북지역의 다른 극장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⑩ 유취좌(遊聚座) 성진의 유취좌는 1934년 주식발행을 통해 만들어진 주식회사유취좌에서 설립한 영화관으로 성진부 성진읍 본정 120번지에 있었다. 설립 당시 대표는 나츠메(夏目十郞兵衛)였다. 유취좌의 낙성은 1935년 2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총 건축비는 1만 8천원이 들었다. (<성진 유취좌 낙성(落成)>, 《조선중앙일보》, 1935.02.16) 한동안 성진부 유일의 흥행장이었기에 일본인과 조선인들 모두 이 극장을 활용하여 각종 행사와 오락들을 즐겼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야타(宮田資嘉吉), 지배인은 마츠모토(松本豊治)이며 총 객석수는 568석이었다. ⑪ 성진문화극장(城津文化劇場) 성진부 본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나 마사오(山名正雄)였으며 총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⑫ 나진극장 나진부 욱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3년 10월 폭풍으로 전괴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개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나진극장은 재건되었는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니하라(谷原信夫), 총 객석수는 9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⑬ 아오지극장 아오지읍 회암동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회암흥행사(灰岩興行社), 지배인은 마츠오카(松岡茂樹), 총 객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 까지 존속했다. ⑭ 회암극장(灰岩劇場) 아오지읍 회암동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토(佐藤惣五郞), 지배인은 가나이(金井順郞), 총 객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만년좌(萬年座), 회령극장(會寧劇場) 회령의 만년좌에서는 1922년 무렵부터 공연기록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당시 만년좌의 주인은 일본인 마에다(前田政)였다. 마에다는 만년좌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형태의 극장 설립을 추진하여 1932년 주식회사 회령극장이 설립된다. 같은 해 만년좌를 대신하여 회령극장이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회령극장주식회사, 지배인은 이와모토(岩本三峯)였다. 이와모토는 창씨한 조선인이라고 전한다. 총 객석수 745석의 극장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웅기좌(雄基座) 웅기읍에 있는 극장으로 1930년 남녀유학생웅변대회가 그곳에서 개최된 것으로 보아 그즈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타카 타카노리(位高隆則)이며 총 객석수는 506석이었다. 해방 후 웅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⑰ 주을극장(朱乙劇場) 주을읍에 있던 극장으로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 내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27년도에 공연한다는 소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미야(神谷賴正)이며 총 객석수 880석의 극장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⑱ 영안극장(永安劇場) 영안읍에 있던 극장이다. 설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사키(佐佐木太一郞)이며 총 객석 수는 28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⑲ 길주극장(吉州劇場) 길주읍에 있는 극장으로 1939년 협동예술좌의 순회공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동수(東秀)이며 5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⑳ 남양극장(南陽劇場) 1940년 무렵 온성군 남양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김강연(金康燕)이 건립했다. 극장 설립에 맞춰 남양읍에서는 남양극우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강연(창씨명 金城康燕)이며 총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㉑ 무산극장(茂山劇場) 1940년 무렵 무산읍에 설립된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요나가(豊永保)이며 총 객석수는 703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2.16. 성진 유취좌 낙성(落成) 【성진】 성진의 유일한 오락긔관인 유취좌(遊聚座)는 작년 十一월 중부터 공비 一만 八천여원을 드려서 건축 중 준공되여 지난 五일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엿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2.02.17. 나남극장 전소(全燒), 손해는 삼만원 지나간 십사일 오젼 열시에 라남(羅南)에 오직 하나 되는 연극쟝 오락쟝에셔 불이 나셔 건물 젼부를 태워바렷다는대 손해는 약 삼만원이오 원인은 알 슈가 업다는대 그 건물은 개인의 쇼유인바 대졍 구년 말에 낙셩된 극쟝으로 다시 지으려면 상당히 날짜가 걸니겟다더라(나남) [자료] 《동아일보》, 1928.01.17. 민중기관 『공락관(共樂舘)』, 유지회(維持會)를 조직하고 대활동 함북 청진항에 잇는 공락관은 청진에 거주하는 시민 전체의 힘으로 건축된 집인 만치 그 역할이 공회당과 여(如)하야 시민들의 집회와 각 흥행단체에 마다 편의를 준지 五개성상이나 되엇스되 건축 당시의 부채를 우금(于今)껏 변상(辨償)치 못하야 채권자들의 독촉이 심한 일방 또한 유지도 곤란케 되엇슴으로 차(此)를 애석히 여기는 유지 몃 사람은 공락관유지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하든 터에 금번 동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내(來) 음(陰) 정초(正初)를 기(期)하야 상(賞)타는 활동사진대회를 개최키로 결정한 후 대활동을 개시하얏다는데 동 유지회는 사회 각 방면 인사들의 동정이 잇기를 원한다더라. (청진) [자료] 《동아일보》, 1934.01.09. 청진 유일의 집회소 공락관이 전소(全燒), 원인은 온돌, 손해는 一만 五천, 물건 끄내다 감독 소사(燒死) 【청진】 지난 七일 오전 一시경에 시내 신암동(新岩洞) 좌청용 끝에 웅입하엿든 청진 시민의 소유인 동시에 역사적 집회 장소인 공락관(共樂館)은 의외에도 숙직실 온돌에서 발화되어 말숙하게 빈터만 남기고 전소가 되엇다. 그 공락관에 감독책임 잇는 임덕재(林德在)(四三)는 무슨 중요한 물품이나 잇섯든지 불붓는 집속으로 들어갓다가 무참하게도 나올 길을 찾지 못하야 공락관과 함께 타버리엇다. 이 급보를 접한 소방조와 청진경찰서에서는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엿으므로 마침 화근이 인가에는 범치 아니하엿다하며 그 손해는 대개 一만 五천원가량이라 한다. 이 공락관은 대정 十三년에 청진 유지가 모여 청진에 중심한 집회장소가 없으므로 크게 유감으로 녀겨 곧 발기하야 동년 十一월 경에 준공한 것이라 하며 현재 五천원의 보험에 들엇다는데 관리 대표인 김병윤(金秉倫)씨는 불원간 대책 협의회를 열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28.03.01. 지방논단, 공락관 문제, 일반시민에게 고함 / 청진 일기자 청진! 북선에서 가장 자랑하는 良港이오 북간도와 노령을 접경으로 물화 교통 상 관문일 것이다. 또한 여기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청진을 관찰할 때 기후로나 지역으로서 북선(北鮮)을 중심으로 하고 어느 방면으로든지 활동하랴고 하면 먼저 청진! 그곳에 간판을 부치는 것이 아닌가? 반면(反面)에서 이곳의 주인이오, 더욱 조선인의 현재나 장래를 생각한다면 열혈의 정성과 비상의 노력이며 공고한 단결을 요하는 것은 재론할 바 업슬 것이다. 그러타면 청진 일반 시민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일례를 들기 위하야 기자는 이제 공락관유지회 흥행부와 일반시민의 태도를 좀 적어 보려고 한다. 二 먼저 공락관은 누구의 집이며 그 집의 사명은 얼마나 중차대한 것이냐? 조선인만 일만오천의 인구를 산(算)하는 청진에서 시민의 유일한 집회장소인 공락관은 오직 청진시민의 품속을 떠나서야 어떠케 그것이 조선인의 공회당이라는 존재를 시인할 수가 잇슬 것이랴! 큰일! 작은일? 이제 당장에 죽는다고 하야도 모여서 단결의 성(聲) 한번이라도 외쳐볼 곳도 공락관이오, 의분에 뛰고 참패자의 하소연을 서로 할 곳도 공락관이 아니냐? 그리하야 이 공락관 때문에 몃 사람의 피와 땀을 모아서 청진 공락관유지회 흥행부를 조직하고 우리의 어린이들이 색동저고리를 닙고 뛰어다니는 구(舊) 정월 一일부터 활동사진흥행을 시작하야 『빡따드의 도적』 『황금광시대』 『따크라대왕』 『동도』, 이것을 차례로 개봉하야가지고 지금까지 북선 몃 개소를 순회하는 중이다. 일반 단원이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갖은 고통을 바드면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청진이란 제 곳으로 돌아올 때 누가 따뜻한 악수한번이라도 하여 주엇든지? 하는 기억조차 그들에게는 업다고 한다. 더욱이나 공락관에서 흥행을 하게 되면 어느 사람이든지 그들을 일종 풍류랑들의 작희(作戲)로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三 청진에 있는 유지라고 자처하는 제군! 사람은 언제든지 참 사람이 되기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공락관 그것이 제군들이 보기에는 풍류랑들의 작희장으로 보이는지? 혹은 어떤 이색이족(異色異族)의 향락장으로 보이는지? 나는 이곳저곳에서 날마다 듯는다. 술집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색녀의 웃음소리에 장단을 마추어 술잔을 쉴 새 업시 할트면서 뼈 업시 안저잇는 소위 유지 자칭 신사인 제군들의 추태망동의 그 소식을! 마작대회에서 밤은 새우고 매음녀의 밀실에서 낙원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제군아! 사회 그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기에 노력하기를 절실히 늣겨야 할 것이다. 四 반성하라! 사람이 되라. 유산자 유지 신사 제군이어! 매음녀의 누각이나 색주가의 발전을 축복하기에 급급하지 말고 공회당인 공락관의 발전은 고사하고 개인의 손에 방매되랴는 죽어가는 그 목숨만이라도 구하여라. 도박으로 천원이니! 칠백원이니 하지말고 진정한 선(線)에 서서 인간다운 일기를 작성하라 비록 자신은 대아를 망각하고 장래나 현재에 생의 의의를 모를지라도 두상(頭上)에 떠도는 대공리의 벼락을 면할 수 업슬 것을 각성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청진의 제군이어! 시각으로 비참한 패배의 설움을 늣긴바 있거든 분초를 다투어 반성 행진 성공 있기에 힘쓰기를 바라는 바이다.